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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네르바의 ‘유인촌, 전여옥식 재테크’ 언급 ‘화제’

 

 

미네르바의 ‘유인촌, 전여옥식 재테크’ 언급 ‘화제’
 
잠정적 절필 선언하면서 올린 글...양면성의 사례로 들어
 
입력 :2008-11-01 11:01:00   박성원 기자
 
 
[데일리서프 박성원 기자] 인터넷포털 다음의 토론광장 아고라에서 날카로운 경제분석으로 인기를 얻었던 아이디 '미네르바'가 31일 밤 잠정적인 '절필'을 선언하면서 올린 글에서 거론한 전여옥 한나라당 의원과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의 '재테크'가 화제가 되고 있다.

미네르바는 우선 "이 나라는 극도의 양면성을 가진 나라로 겉과 속이 다르다. 우리가 흔히 일본인들 보고 겉과 속이 다르다고 하는데 그건 틀린 말이다. 그런 가식적인 면을 보자면 우리도 그 이상이면 이상이지 절대 다르지가 않다는걸 곰곰히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아니라고 한다면 그건 100% 거짓말이지"라고 전제를 달았다.

이어 그는 "그건 국가적인 차원에서도 마찬가지"라면서 "이 나라 정책 입안자들이나 정치인들은 말로는 부동산 경기 부양에 집을 사라고 하지만, 실제로 개인들은 개인 포트 폴리오라는 이름 하에 자산 포지션을 바꾼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그 대표적인 예로 전여옥 의원을 들었다. 미네르바의 표현에 따르면 "이 아줌마의 경우는 올 클리어...주식→예금으로 갈아 탄 건 이제 새롭지도 않다"는 것이다.

미네르바는 "눈치 깐 애들은 거의 다 조정 했다"면서 "심지어는 대통령 본인이 주식 사라고 펀드를 들 것이라고 하면서 주식 한 주 안 산 나라가 한국이라는 나라의 양면성을 극단적으로 보여 주는 사례들"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개인적인 차원에서라면 추세 분석상 자기 재산을 지키기 위해 포트폴리오를 주식에서 현금으로 갈아 타는건 전혀 이상할 것 없는, 오히려 칭찬을 해 줘야 할 일"이라면서도 "문제는 그 사람들의 신분이 지금 무엇이느냐가 문제다. 바로 정책 조정자와 정치인, 이 나라를 실질적으로 핸들링 하는 장본인들"이라고 꼬집었다.

미네르바는 "직간접적인 고급 정보 소스들을 이용해서,혹은 활용해서 빠져 나가는 애들이 한 둘이 아면서도 일반 국민들에게는 정반대의 것을 강요한다"면서 "이건 뭔가 웃기는 것 아니냐. 비난을 하자는 것이 아니라 이 정도로 양면적인, 두 얼굴의 나라라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따라서 중립적이고 극사실주의에 입각한 개인적 시각이란 걸 가지는 게 살면서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하면서 선동에 휩싸이지 말아달라고 당부했다.

이어 그는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을 거론했다. 미네르바는 "더 위험한 건 경제적인 양떼몰이"라고 전제한 뒤 "알면서도 애국한다고 손해볼 미친 X은 없다. 심지어는 유인촌 장관님도 '엔화 투기'로 단 1주일만에 30억 이상 버는 나라가 이 나라다"고 지적했다.

유 장관이 재산신고시 일본국채에 투자했던 것으로 신고했던 32억여원을 겨냥한 발언인 것으로 보인다. 유 전 장관이 일본국채에 투자했던 것은 2005년4월27일부터 2007년 7월19일까지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국채를 매각한 뒤 엔화를 계속 보유했다면 원화 대비 엔화 폭등으로 막대한 환차익을 봤을 수도 있다.

미네르바는 "이런 상황에서 경제 논리와 애국주의를 믹싱시켜서 정부 정책 기조에 반대 되는 행동은 곧 매국노라는 걸로 확대 재생산이라는 걸 하게 된다"면서 "이게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이라고 보느냐"고 반문했다.

미네르바의 결론은 따라서 "깨닫고 배워야 산다"는 것이었다. 각성과 학습이 동반돼야만 이 치열한 경쟁의 장에서 생존할 수 있다는 충고다.

박성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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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산 부양’ 10년전 잘못 되풀이

 

 

 

부동산 부양’ 10년전 잘못 되풀이

경향신문 | 기사입력 2008.11.01 00:13

50대 남성, 경기지역 인기기사 자세히보기


ㆍ환란때 잇단 활성화 대책… 집값 폭등 부작용

ㆍ이명박정부도 규제풀기 주력 '거품'조장 우려

이명박 정부가 경기진작을 위해 잇달아 내놓고 있는 부동산 규제완화 정책이 10년 전 외환위기 이후 국민의 정부가 시행했던 부동산 활성화 대책을 답습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외환위기 이후 국민의 정부는 내수경기 부양을 위해 부동산 규제의 빗장을 모두 풀었지만 3년 만에 부동산 가격이 폭등하면서 사상 최악의 부동산 버블(거품)로 이어졌다.

31일 국토해양부와 기획재정부에 따르면 국민의 정부는 외환위기가 한창이던 1998년 5월 분양가 자율화, 양도소득세 한시 면제, 토지거래 허가신고제 폐지, 분양권 전매 한시 허용 등을 내용으로 하는 '주택경기활성화대책'을 발표한 이후 부동산 경기 부양책을 잇달아 내놨다. 이듬해인 99년에는 아파트 분양권 전매허용, 아파트 재당첨 제한폐지 조치를 내놨고, 2001년에는 전용면적 85㎡ 이하 신규 주택 구입시 취·등록세 25% 감면, 부동산 투자회사의 부동산 취득시 취·등록세 감면 등의 대책을 발표했다.

국민의 정부가 98년부터 2001년 5월까지 3년6개월간 내놓은 부동산 경기 부양대책은 모두 10차례로 평균 4개월에 한 번꼴이었다.

당시 건설업계는 "주택투기의 우려가 없는 만큼 규제를 과감하게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국민의 정부는 이를 받아들였다. 국민의 정부는 또 경기부양을 위해 2001년 한해 동안 콜 금리(현재 기준금리)를 4차례나 내려 사상최저치인 연 4%로 떨어뜨렸다.

그러나 2002년 집값이 16%나 폭등하자 정부는 서울지역 아파트 분양권 전매 제한 조치를 시작으로 부동산 시장 안정대책을 잇달아 내놨다. 규제 완화의 후유증으로 부동산 시장 불안이 지속되자 정권이 참여정부로 바뀐 2003년에도 정부는 분양권 전매제 부활, 수도권 투기과열지역 지정, 1가구 3주택자 양도세 중과, 종합부동산세 도입 등 집값 폭등을 막기 위한 대책을 쏟아냈다. 2005년에도 1가구 2주택자에 대한 양도세 중과, 주택 종부세 과세기준을 6억원 초과로 강화하는 등의 부동산 시장 안정대책을 발표했지만 천정부지로 치솟는 집값을 잡지 못했다.

경기대 엄길청 교수는 "10년 전 국민의 정부는 외환위기로 실물경기가 침체되고, 내수가 부진하자 부동산 경기 부양에 나서 집값 폭등을 불러왔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이명박 정부는 출범이후부터 부동산 규제를 푸는 데 주력했다. 지난 6월 지방 아파트 미분양대책을 내놓은 데 이어 8월에는 주택공급 기반 강화 및 건설경기 보완방안을 발표했고, 9월에는 종부세를 대폭 완화키로 했다. 특히 최근에는 미국발 금융위기로 부동산 시장이 얼어붙자 1가구 다주택자에 대한 양도세 중과 한시 폐지, 주택담보대출 규제 완화, 건축 규제 완화, 투기지역·투기과열지구 해제 등을 검토하고 있다. 이에 따라 이명박 정부의 부동산 규제 완화 속도는 국민의 정부 때보다 빠르다는 지적도 나온다.

고려대 이필상 교수는 "10년 전 국민의 정부가 추진했던 부동산 경기 부양책은 엄청난 부작용을 일으켰다"면서 "이명박 정부가 부동산 거품을 조장했다가 집값 폭등만을 부른 과거 정권의 실패사례를 답습하려 하고 있어 우려된다"고 말했다.

< 박병률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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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산 부양’ 10년전 잘못 되풀이

 

 

 

부동산 부양’ 10년전 잘못 되풀이

경향신문 | 기사입력 2008.11.01 00:13

50대 남성, 경기지역 인기기사 자세히보기


ㆍ환란때 잇단 활성화 대책… 집값 폭등 부작용

ㆍ이명박정부도 규제풀기 주력 '거품'조장 우려

이명박 정부가 경기진작을 위해 잇달아 내놓고 있는 부동산 규제완화 정책이 10년 전 외환위기 이후 국민의 정부가 시행했던 부동산 활성화 대책을 답습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외환위기 이후 국민의 정부는 내수경기 부양을 위해 부동산 규제의 빗장을 모두 풀었지만 3년 만에 부동산 가격이 폭등하면서 사상 최악의 부동산 버블(거품)로 이어졌다.

31일 국토해양부와 기획재정부에 따르면 국민의 정부는 외환위기가 한창이던 1998년 5월 분양가 자율화, 양도소득세 한시 면제, 토지거래 허가신고제 폐지, 분양권 전매 한시 허용 등을 내용으로 하는 '주택경기활성화대책'을 발표한 이후 부동산 경기 부양책을 잇달아 내놨다. 이듬해인 99년에는 아파트 분양권 전매허용, 아파트 재당첨 제한폐지 조치를 내놨고, 2001년에는 전용면적 85㎡ 이하 신규 주택 구입시 취·등록세 25% 감면, 부동산 투자회사의 부동산 취득시 취·등록세 감면 등의 대책을 발표했다.

국민의 정부가 98년부터 2001년 5월까지 3년6개월간 내놓은 부동산 경기 부양대책은 모두 10차례로 평균 4개월에 한 번꼴이었다.

당시 건설업계는 "주택투기의 우려가 없는 만큼 규제를 과감하게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국민의 정부는 이를 받아들였다. 국민의 정부는 또 경기부양을 위해 2001년 한해 동안 콜 금리(현재 기준금리)를 4차례나 내려 사상최저치인 연 4%로 떨어뜨렸다.

그러나 2002년 집값이 16%나 폭등하자 정부는 서울지역 아파트 분양권 전매 제한 조치를 시작으로 부동산 시장 안정대책을 잇달아 내놨다. 규제 완화의 후유증으로 부동산 시장 불안이 지속되자 정권이 참여정부로 바뀐 2003년에도 정부는 분양권 전매제 부활, 수도권 투기과열지역 지정, 1가구 3주택자 양도세 중과, 종합부동산세 도입 등 집값 폭등을 막기 위한 대책을 쏟아냈다. 2005년에도 1가구 2주택자에 대한 양도세 중과, 주택 종부세 과세기준을 6억원 초과로 강화하는 등의 부동산 시장 안정대책을 발표했지만 천정부지로 치솟는 집값을 잡지 못했다.

경기대 엄길청 교수는 "10년 전 국민의 정부는 외환위기로 실물경기가 침체되고, 내수가 부진하자 부동산 경기 부양에 나서 집값 폭등을 불러왔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이명박 정부는 출범이후부터 부동산 규제를 푸는 데 주력했다. 지난 6월 지방 아파트 미분양대책을 내놓은 데 이어 8월에는 주택공급 기반 강화 및 건설경기 보완방안을 발표했고, 9월에는 종부세를 대폭 완화키로 했다. 특히 최근에는 미국발 금융위기로 부동산 시장이 얼어붙자 1가구 다주택자에 대한 양도세 중과 한시 폐지, 주택담보대출 규제 완화, 건축 규제 완화, 투기지역·투기과열지구 해제 등을 검토하고 있다. 이에 따라 이명박 정부의 부동산 규제 완화 속도는 국민의 정부 때보다 빠르다는 지적도 나온다.

고려대 이필상 교수는 "10년 전 국민의 정부가 추진했던 부동산 경기 부양책은 엄청난 부작용을 일으켰다"면서 "이명박 정부가 부동산 거품을 조장했다가 집값 폭등만을 부른 과거 정권의 실패사례를 답습하려 하고 있어 우려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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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헌법판례열람] 명백·현존하는 위험 원칙의 탄생

 

 

미국헌법판례열람] 명백·현존하는 위험 원칙의 탄생법과 사회/헌법 2008/08/28 02:08

[미국헌법판례열람] 명백·현존하는 위험 원칙의 탄생


1787년에 제정된 미국 연방헌법은 고작 7개 조항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나마 이 조항들도 모두 입법·사법·행정부의 통치구조에 관한 조항들이었고 제대로 된 기본권 규정이 없었다. 4년 후인 1791년의 제1차 미국 헌법개정에서는 기본권 규정이 없는 헌법이 어디 있느냐는 비아냥을 일거에 불식시키기라도 하려는 듯 한꺼번에 10개의 기본권조항들이 들어가게 된다. ‘권리장전(Bill of Rights)’이라 불리는 조항들이다. 국민 기본권 보장과 관련해 세계사적으로도 큰 중요성을 가지는 규정들이다. 이 권리장전의 첫 조항인 수정헌법 제1조는 “연방의회는 국교(國敎)를 설립하거나 종교의 자유로운 행사를 금지하는 법률을 제정하지 못한다. 또한 언론, 출판의 자유나 국민이 평화로이 집회할 수 있는 권리 및 불만사항의 구제를 위하여 정부에게 청원할 수 있는 권리를 제한하는 법률을 제정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표현의 자유, 종교의 자유를 위시한 여러 중요한 기본권들이 규정되어 있는 것이다. 실제로 미국 로스쿨들에서는 ‘수정헌법 제1조(First Amendment)’라는 과목이 헌법과목으로서 한 학기동안 강의되는 독립과목을 이룬다. 그만큼 미국 헌법학에서는 수정헌법 제1조의 표현의 자유 등을 중시한다는 방증이다. 이 표현의 자유와 함께 곧잘 이야기되는 것으로 ‘명백·현존하는 위험의 원칙’이 있다. 표현의 자유의 한계 내지는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는 법률의 합헌성 판단기준으로 미국 연방대법원에 의해 사용되는 중요한 원칙이다.

1919년의 Schenck v. United States판결(249 US 47)은 이 명백·현존하는 위험의 원칙을 탄생시킨 판결로 유명하다. 1919년의 방첩법(Espionage Act)은 고의로 미 육해군에서 불복종, 불충성, 의무이행 거부를 선동하거나 선동하려 하는 행위와 고의로 징병을 방해하는 행위를 처벌토록 규정하고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 Schenck는 우편으로 징집대상자 2명에게 전단을 보냈다. 그 전단에는 징병법이 위헌이라 쓰여 있었다. 전단은 징병법이 월스트리트의 선택받은 소수의 이익 때문에 인간성에 대항하는 거악이며, 징병 반대에 대한 비판은 교활한 정치인들과 돈이라면 무슨 짓이라도 하는 탐욕적인 자본주의 언론사들이 만들어낸 합작품이라고 주장했다. 전단지는 “협박에 굴복치 말라”고 주장했지만, 징병법 폐지 청원과 같은 평화적인 방법만을 충고했다. Schenck는 방첩법 위반으로 기소 당했다. 그는 전단지가 피징병자들의 징병을 방해하는데 영향을 끼치려는 목적 이외의 다른 목적을 가지지는 않는다는 배심원들의 주장에 대해 이를 부인하지 않았다.

Holmes대법관에 의해 집필된 유명한 만장일치의 판결문은 표현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느냐 여부는 그 표현이 행해진 상황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고 판시했다. 다음은 그 추론의 요지이다. 모든 행위의 성격은 그것이 행해진 상황이 무엇이냐에 크게 의존한다. 극장 안에서 갑자기 “불이야”라고 잘못 소리쳐 극장 안을 온통 혼란의 도가니로 만드는 것까지 표현의 자유가 보호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 표현이 어떤 상황하에서 행해졌으며 연방의회가 방지할 권한을 가지는 실질적 해악을 초래할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을 발생시키느냐 이다. 그것은 ‘근접성과 정도(proximity and degree)’의 문제이다. 평화시에는 괜찮을 표현도 전쟁 중에 행해지면 전쟁 노력에 큰 방해가 되어 허용되지 않을 수 있다. Schenck가 보낸 전단지는 전시에 행해진 표현으로서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을 발생시킨다. 하급심의 유죄결정을 인용한다.

수정헌법 제1조에 의해 보호받는 표현의 범위에 대해 미국 연방대법원이 내린 최초의 판결들은 이 Schenck판결처럼 제1차 세계대전 중의 징병이나 전쟁 자체에 대한 반대 선동에 관한 것이었다. 비록 표현규제 입법에 합헌의 면죄부를 주고 Schenck에 대해 유죄를 선언하기는 했지만, 이 판결은 표현을 규제하는 입법의 합헌성 심사기준인 ‘명백·현존하는 위험의 원칙’을 최초로 선언하고 적용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가치를 지닌다. 이 판결에서 Holmes대법관은 표현행위에 대한 완벽한 면책에는 반대했지만, ‘악행을 낳을 표현의 경향성만 있다면 아무리 해악 발생과의 근접성이 없다 하더라고 그 표현행위를 규제하는 입법은 정당하다는 기준’, 즉 훨씬 더 제약적이고 훨씬 더 광범위한 표현행위의 규제를 담는 대안적 심사기준에도 역시 반대했다. 명백·현존하는 위험의 원칙이란 특정한 표현이 제한될 수 있는 경우란 그 표현이 정부가 방지해야 할 ‘실질적 해악(substantial evil)’을 가져올 것이 ‘명백’하고 그 위험이 ‘현존’하는 것이어야 함을 의미했다. ‘실질적 해악’ ‘명백성’ ‘현존성’이 명백·현존하는 위험의 원칙의 중요한 세 가지 요소인 것이다. 이 때, ‘실질적 해악’이란 국가가 방지할 필요가 있는 이익에 대한 침해나 위협을 뜻한다. ‘명백성’은 표현과 해악 발생간의 명확한 인과관계의 존재를 의미한다. 여기서 인과관계의 명확성은 어느 정도이어야 하는가? 이 명확성의 요구는 단순한 합리적 근거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고 이야기되어 진다. ‘현존성’이란 자유토론에 맡겨서는 그 해악의 발생을 방지할 수 없을 정도로 위험의 발생이 시간적으로 근접한 것임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처럼 탄생 당시 명백·현존하는 위험의 원칙의 초점은 표현이 행해질 당시의 상황 하에서 불법적 행위의 ‘근접성’과 위험의 ‘정도’에 맞추어져 있었다.

미국 연방대법원은 정부가 표현의 ‘내용’을 규제하려드는 경우에는 정부 규제의 정당화에 무거운 입증책임을 지우는 엄격심사의 기준을 적용해오고 있다. 그리고 이런 ‘내용 규제’의 경우 명백·현존하는 위험의 원칙이 표현규제 입법의 합헌성 심사기준으로 등장하고 사용되게 된 것이다. 그런 표현규제 입법에는 통상적인 합헌성 추정의 원칙이 적용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법률은 거꾸로 위헌의 추정을 받는다. 표현의 자유의 적용문제는 어떻게 보면, 표현의 자유를 보장할 때 얻어지는 개인의 이익과 표현의 자유 제한으로 얻어지는 정부의 이익간의 비교형량으로 정해지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이 때 명백·현존하는 위험의 원칙이나 엄격심사는 정부 측에 가혹한, 이익형량의 가장 엄중한(stringent) 형태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명백·현존하는 위험의 원칙’은 ‘표현의 자유의 수호신’이라고 까지 불리워질 정도로 표현의 자유 조항에 내실을 부여하고, 특히 표현 중에서도 정치적 메시지가 담긴 정치적 표현의 자유 보호에 큰 공헌을 해왔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만약 정부가 쉽게 정치적 표현을 제한하거나 처벌할 수 있다고 한다면, 정부는 합법적으로 정부에 대해 비판을 가하는 언론도 금지시킬 우려가 있게 된다. 다시 말해서, 표현과 그것이 야기하는 해악 간에 엄격한 인과관계를 요구한다는 식의 표현의 자유 보장기준을 갖고 있지 않으면 정부는 언론이 단순히 혼란을 야기한다는 이유만으로도 이를 규제하거나 집요하게 처벌하려 들 것이다. 우리 군사정권시절에 군사정권의 언론관이 바로 이러했다고 평가한다면 지나친 혹평일까. 표현의 자유가 제대로 보장되지 않는 사회는 생명력을 잃은 죽은 사회다. 이런 의미에서, ‘명백·현존하는 위험의 원칙’이 실제 재판에서 얼마나 엄격히 적용되는가 하는 것은 그 사회의 생명력과 활기를 나타내주는 바로미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미국헌법판례열람] 명백·현존하는 위험 원칙의 후퇴
 
Schenck판결과 같은 해인 1919년에 나온 연방대법원의 Abrams v. United States (250 US 616)판결에서는 명백·현존하는 위험의 원칙이 약간 후퇴한 듯한 분위기가 감지된다. Abrams 등은 당시의 러시아를 휩쓸던 러시아혁명에 우호적인 사회주의자들이었다. 이들은 미국 정부가 해병대를 시베리아에 보낸 것을 러시아 혁명을 진압하기 위한 시도라고 보았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이들은 미국의 독일과의 전쟁 수행을 방해할 의도로 전쟁 물자를 감축 생산하도록 주장하는 수 천 장의 전단지를 뉴욕 시에서 인쇄하고 배포했다. 그 전단지는 근로자에게 독일뿐만 아니라 러시아에 대해서도 사용될 수 있는 총탄을 생산하지 말도록 종용했다. 명백·현존하는 위험의 원칙을 계속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한 Holmes판사의 반대의견도 있었지만, 연방대법원의 다수의견은 명백·현존하는 위험의 원칙 보다는 표현자의 ‘의도’나 ‘위험 경향(bad tendency)’에 더 주목했다. 그래서 피고인에게 미국의 독일에 대한 전쟁 노력을 방해할 ‘의도’가 있었느냐를 먼저 보았다. 피고인의 주된 목적은 러시아를 돕자는 것이지만 러시아를 보호하기 위한 전쟁 물자 생산의 감축은 독일에 대한 전쟁 노력을 해치지 않고서는 달성될 수 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Abrams 등의 전단지에는 ‘사회적 혼란’이라는 해악을 발생시킬 ‘위험 경향(bad tendency)’이 존재하고 방첩법 규정이 금지하는 ‘의도’도 담고 있다고 판단했다. 이러한 ‘위험 경향’의 기준이 6년 후 후속판결을 통해 부활하면서 명백·현존하는 위험의 원칙을 또 다시 후퇴시킨 것으로 Gitlow v. New York(268 US 652)판결이 유명하다.

이 사건의 사실관계는 다음과 같았다. Gitlow는 노동자들에게 파업을 선동하고 정부를 전복해 혁명적 무정부상태를 만들어야 한다는 내용의 ‘사회주의자 선언서’(socialist manifesto)를 출판했다. 이 때문에 그는 뉴욕 주의 ‘무정부주의자 처벌법(criminal anarchy statute)’ 위반으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동법이 뉴욕주 주 의회가 보기에 실질적 해악의 위험을 초래할 개연성이 있는 특정한 성격의 표현들을 금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된 법조항은 위력, 폭력 및 불법한 수단으로 정부를 전복하는 것을 옹호하는 말도 금지하고 있었다. ‘사회주의자 선언서’를 읽고 정부 전복 등의 실질적 해악으로 나아간 사람이 있다는 증거는 없었다. 이에 Gitlow가 하급심의 유죄결정에 대해 연방대법원에 상고했다.

Sanford 대법관이 집필한 다수의견은, 주 의회가 실질적 해악의 위험을 발생시킬 개연성이 있는 표현을 주법(州法)으로 직접 금지할 수 있다고 판시했다. 다음은 그 추론의 요지이다. 미국 연방대법원은 앞서 수정헌법 제1조 관련 사건들에 있어서 주된 쟁점은 문제된 표현이 실질적 해악을 초래할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을 가지고 있느냐에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뉴욕주 주법에 의해 구체적으로 성격 규정이 된 어떤 표현 속에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이 존재하는지는 뉴욕주의회가 결정해야 한다. Gitlow의 표현은 이러한 금지되는 표현의 범주 내에 든다. 주 의회에 의한 결정이 이미 내려져 어떤 표현을 금지하고 처벌하는 것으로 주법이 정했다면, 주법에 의해 금지된 표현이 법원의 관점에서는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을 띠고 있지 않다고 해봤자 별 의미가 없다. 즉 의회가 이미 일정한 유형의 표현은 실질적 해악을 발생시킨다고 결정했으므로 법원은 그 판단을 존중해야 하고 의회가 법규정을 통해 이렇듯 표현의 위험성을 판단해버린 경우에는 ‘명백·현존하는 위험의 원칙’이 적용되지 않는다. 정말 중요한 것은 그 법조항 자체가 위헌이냐 하는 것이다. 문제된 뉴욕주 주법 조항은 위헌이 아니다. 주는 실질적 해악 발생의 위험을 초래할 개연성이 있는 표현을 금지할 수 있다.

Holmes 대법관은 명백·현존 위험원칙의 창시자답게, 이 사건에도 이 원칙을 적용했고 그 결과 문제된 뉴욕주법 조항을 위헌이라고 본 반대의견을 개진했다. 다음은 그 추론의 요지이다. 표현의 자유는 수정헌법 제14조의 적법절차조항에 의해 보호받는 “자유(liberty)”의 하나이다. 따라서 표현에 대한 유죄결정에 적용될 심사기준은 이미 Schenck판결에서 개진된 대로 실질적 해악 발생의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이 있느냐가 되어야 한다. 본 사건에서처럼 ‘사회주의자 선언서’의 출판이 해악을 발생시킬 수 있는지에 대해 큰 의구심이 든다면, 그 출판은 아마도 금지된 결과를 발생시키는 것과는 너무 동떨어진 것이며 그에 대한 규제는 쓸데없는 것이 된다. 즉, 명백·현존하는 위험의 원칙을 적용해야 한다는 전제 하에서 정부 전복의 현존하는 위험은 없다.

이 판결이 가지는 의미는 역시 Holmes 대법관이 1919년의 Schenck판결에서 개진한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의 심사기준을 버리고, 어떤 표현이 공공의 안녕을 해칠 해악 발생의 위험스런 경향만 있으면 이 표현을 규제할 수 있어야 한다는 ‘위험경향 심사(Bad Tendency Test)’원칙을 적용한 점에 있다. 그러나 이 Gitlow판결은 그 후 미국 연방대법원에 의해 포기되었다. 현재 연방대법원 결정들은 위법한 행위를 선동할 개연성에 다시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주 의회가 주법으로 어떤 표현이 그러한 개연성을 만들 수 있는지를 결정하지 못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Schenck판결 등은 어떤 표현행위가 특정 표현행위를 금지하는 법률을 위반했는지 여부를 다룬 것들이지만, 이 Gitlow판결은 법률 자체가 일정한 표현을 위험하다고 판단해 직접 금지한 경우에도 명백·현존하는 위험의 원칙이 적용될 수 있는지를 다루었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기도 하다.

적어도 명백·현존하는 위험의 원칙이 적용된 초기 판결인 Schenck판결이나 Abrams판결 등에서는 표현의 내용이 사실상 실질적인 해악을 초래했다는 점에 대한 명확한 입증없이 모두 유죄가 선언되었다는 점에서, 명백·현존하는 위험의 원칙이 표현의 자유 보장 확대에 기여한 바가 크지 않다는 지적들도 당시에는 많았었다. 또한 동 원칙이 모든 표현행위 관련 사건들에 적용되는 포괄적인 원칙은 아니라는 한계도 곧잘 지적되었다. 미국 연방대법원이 명백·현존하는 위험의 원칙을 적용한 예는 Gitlow판결에서처럼 주로 정치적 선동이 문제된 사건이나 법정모욕사건에 국한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더불어, 동 원칙은 처음 정치적 선동에 대해 형사적 제재에 의한 직접적 제한을 금지하는 법리로 탄생된 것이었기 때문에, 취업상의 제한 등 간접적 규제나 해외여행의 규제 등 기타 행정적 규제의 위헌성 심사에는 적용되지 않았다는 점에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우리 법원의 표현 규제입법에 대한 위헌심사에 ‘명백·현존하는 위험의 원칙’을 본격적으로 도입하고 운용할 때에 주의해야 할 점들이다. 표현 규제입법의 위헌심사와 관련한 미국 연방대법원 판결들을 분석해보면, 주로 전쟁 수행 등의 비상시에는 명백·현존하는 위험원칙이 후퇴되고 평화 시에는 다시 부활하는 사이클을 보여준다는 점이 이채롭다. 다음에는 동 원칙이 부활하는 사이클 상의 미국 연방대법원 판결을 살펴본다.

 

[미국헌법판례열람] 명백·현존하는 위험 원칙의 화려한 부활

Gitlow판결 등에 의해 ‘위험경향의 원칙’(Bad Tendency Rule)에 자리를 내줬던 명백·현존하는 위험의 원칙이 다시 연방대법원의 1927년 Whitney v. California(274 U.S. 357)판결을 통해 화려하게 부활한다. 명백·현존하는 위험원칙의 단순한 재적용을 넘어 동원칙에 ‘급박성’의 요건을 추가한 것이었기 때문에 ‘화려한’ 부활일 수 있었던 것이다.

1919년에 Whitney양은 사회당 전당대회에 참석했다. 그 전당대회가 다시 각 계파별 모임으로 나누어졌을 때, Whitney는 급진파쪽으로 가서 공산노동당(Communist Labor Party)을 만드는 일을 도왔다. 그 해 말에, Whitney는 공산노동당의 캘리포니아주 지부를 조직하기 위한 또 다른 전당대회에 참석했다. 거기서 Whitney는 정치적 행동을 감행할 것을 승인하는 결의안을 지지했고 노동자들에게 앞으로 모든 선거에서 공산노동당 공천 후보에게 투표할 것을 촉구했다. 이 결의안은 부결되었으며 더 극단적인 정치강령이 채택되었고 Whitney는 그 결의안에는 반대했다. 캘리포니아주 주법(州法)인 ‘캘리포니아 과격단체운동 처벌법’(California Criminal Syndicalism Act)은 산업 소유권 변화나 정치적 변화에 영향을 주려는 의도로 위법한 폭력행위를 옹호하는 단체를 결성하는 것을 법으로 금하고 있었다. Whitney는 이 법 위반으로 기소되어 재판을 받던 중, 공산노동당이 과격 테러조직이 되도록 할 의도는 전혀 없었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녀는 폭력적인 정치변혁정책에서 공산노동당을 도울 의도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그녀가 단지 공산노동당 전당대회에 참석했다는 사실만으로 그것이 범죄가 될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캘리포니아 과격단체운동 처벌법’은 적법절차에 의하지 않고 그녀의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를 침해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Sanford 대법관에 의해 집필된 다수의견은, 목적 달성에 영향을 주기 위해 불법한 수단의 사용을 옹호하는 조직에 고의적으로 그 구성원이 되는 것을 처벌하는 주법(州法)은 헌법에 의해 보장된 적법절차의 원칙과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다고 판시했다. 다음은 그 추론의 요지이다.

헌법에 의해 보장된 표현의 자유도 아무런 책임 없이 말할 절대적 권리를 부여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표현이 범죄를 선동하거나 평화를 교란하거나 폭력을 통한 정부 전복을 꾀하는 경향을 보일 때처럼 공공복리에 적대적인 표현인 경우에, 주(州)는 이를 주에게 부여된 경찰권 행사를 통해 표현의 자유 남용으로 처벌할 수 있다. 본 사건에서 ‘캘리포니아 과격단체운동 처벌법’은 주의 공적 평화와 안정을 위협하는 범죄들을 옹호하는 조직을 돕거나 고의적으로 그 조직의 구성원이 되는 것이 주의 경찰권 행사에 의해 처벌될 수 있는 것이라 선언하고 있다. 그 처벌행위의 핵심은 불법적 수단의 옹호와 사용을 통해 원하는 목적들을 달성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과 결합함에 있다. 이것은 그 성질에 있어 형법상 예비·음모의 단계에 해당하는 것이며 개인의 개별적 행위들보다 공적 안정에 훨씬 더 큰 위험을 수반한다. Whitney양은 이 사건에서 그녀에게 적용된 ‘캘리포니아 과격단체운동 처벌법’이 위헌이라 주장하지만, 그러한 주장은 대법원이 일심법원에서 끝난 사실판단에 관한 평결을 다시 하라는 것이 되므로 본 법원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

Brandeis대법관에 의해 집필된 동조의견은 문제된 법조항이 합헌이라는 점에서는 다수의견과 결론을 같이 했지만, 그렇게 본 근거는 다수의견과 달랐다. 명백·현존하는 위험원칙에 ‘급박성’의 요건을 추가한 이 andeis대법관의 동조의견은 그 후의 연방대법원 판결들에 다수의견보다 더 큰 영향을 준 것으로 유명하다. 다음은 그 추론의 요지이다.

Whitney는 여기서 공공의 안전을 멀리서 위협하기만 하는 행위를 준비하던 단계에서 처벌을 받고 있다. ‘캘리포니아 과격단체운동 처벌법’은 과격한 단체운동을 실행에 옮기는 것이 아니라 단지 설유(說諭)하는 사람들을 처벌함을 목적으로 한다. 수정헌법 제14조의 적법절차조항에 의해 중앙정부 뿐만 아니라 주에 대해서도 구속력을 가지게 되는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는 주에 대해 정치적, 도덕적, 경제적 위해를 가할 위험이 있는 표현행위들에서는 제한될 수 있다. 그러나 표현이 주에 실질적 해악의 ‘명백하고 급박한 위험’을 초래하지 않는다면 그러한 제한은 존재하지 않는다. 연방대법원은 아직 언제 위험이 ‘명백한’ 것이 되는지 결정 기준을 세우지 않았다. 그러나 예견되는 해악이 아주 급박해서 그 해악에 관한 논의의 기회를 가지기 전에 해악이 발생할 정도가 아니라면 그러한 표현행위로부터 초래될 위험이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일 수는 없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이 주에 중대한 위해를 끼칠 가능성이 있음은 틀림없다. ‘캘리포니아 과격단체운동 처벌법’의 위헌 주장을 본 법원이 심리함에 있어, 언론·출판·집회·결사의 기본적 권리들이 침해당했다고 주장될 때마다 피고는 명백·현존하는 위험이 그의 행위에 의해 ‘급박한’ 것이 되었느냐 하는 점에 대해 의견을 개진할 수 있어야 한다. 여기서,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 야기될 집단행동에 의한 혁명을 지금 이 시점에서 단순히 옹호하는 것은 수정헌법 제14조의 보호범위 내에 있다. 그러나, 형법이 금지하고 있는 예비·음모행위에 대한 증거가 있고 그것이 헌법상의 권리를 박탈한다는 입증이 없는 한, 형사 일심재판에서 확정된 사실관계를 본 법원이 다시 심리할 수는 없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이 사건 사실관계를 다시 심사할 권한이 없다.

이 판결은 Schenck판결의 ‘명백·현존하는 위험’의 심사기준에 그 위험이 ‘급박한(imminent)’ 것이어야 한다는 요건을 추가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Brandeis 대법관의 동조의견은 일종의 반대의견으로 평가되어질 수도 있다. 주정부에 대항하는 위협적 행위를 ‘단순히 옹호’하는 표현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이들을 처벌할 수 있다는 다수의견에 Brandeis대법관이 추가한 ‘급박성’의 요건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래서, ‘단순 옹호 심사’(mere advocacy test)는 그 후 살아남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 과격단체운동을 계속 처벌하는 미국의 스미스법(Smith Act)에서도 ‘단순 옹호’에 그친 표현을 처벌하지는 않는다. 처벌이 가해지려면 강력한 정부 전복 행위를 촉구하는 것이 필요하다. 따라서, ‘행위 촉구’(urging action)의 기준은 이 판결에서 Brandeis대법관이 개진한 ‘명백하고 현존하는 급박한 위험’(clear and present imminent danger) 심사의 한 현대적 형태이다. 이 판결은 표현행위로 인한 해악 발생의 위험이 너무 급박하고 중대해 이를 통상적인 자유토론에 맡길 수 없다는 입법부의 결정은, 그 결정이 비록 합리적이라 하더라도 확정적이고 최종적인 것일 수는 없음을 천명했다는 점에서도 주목을 끈다. 입법부가 아니라 법원이 특정의 표현 규제가 그 해악 발생의 위험 때문에 정당화 된다고 확정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후 미국 연방대법원이 1930년대 중반부터 1950년대까지, 표현의 자유 등 정신적 자유권이 재산권 등의 경제적 기본권보다 더 제한하기 힘든 우월적 기본권이라는 ‘정신적 자유권의 우월적 지위론’을 채택함으로써 명백·현존하는 위험의 원칙은 미국 연방대법원에서 다수의견의 지위를 상당기간 동안 유지해 나갈 수 있었다. Whitney판결은 명백·현존하는 위험원칙의 화려한 부활을 통해 표현의 자유 우월적 보장의 태평성대를 연 하나의 찬란한 신호탄이었던 것이다.


[미국헌법판례열람] 전쟁과 명백·현존하는 위험 원칙의 왜곡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이후에는 공산주의의 발호가 세계적으로 큰 위협이 되었다. 이에 미국 연방의회는 1940년에 New York주의 ‘무정부주의자 처벌법’(criminal anarchy statute)과 비슷한 내용의 Smith법을 연방법률로 제정 했다. 이 법 적용과 관련한 최초의 연방대법원 사건이 ‘명백하고 있을 수 있는 위험의 원칙’을 탄생시킨 1951년의 Dennis v. United States(341 US 494)사건이다.

Smith법은 위력이나 폭력으로 정부를 전복하도록 가르치거나 이를 옹호하는 행위, 혹은 그것을 위해 사람들을 조직하는 것을 불법으로 규정했다. 또한 이러한 행위의 모의도 금지했다. Dennis와 공산당 간부들이 정부를 무력으로 전복하고자 모의했다는 이유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공산당은 규율이 잘 되고 전략적 위치로 침투를 잘하며 별명과 중의법(重意法)을 잘 쓴다는 점이 여러 증거들에 의해 입증되었다. 공산당은 당 내부의 통제가 엄격했으며 당원간의 불화를 일체 용인하지 않았다. 공산당의 당헌, 강령, 성명서 등은 무력과 폭력에 의한 성공적인 정부 전복을 옹호했다.

Vinson 대법원장에 의해 집필된 4인의 다수의견은, 무력이나 폭력에 의한 정부 전복 옹호와 그 모의를 처벌하는 Smith법이 공산당 간부들에게 적용되는 것이 수정헌법 제1조에 위배되지 않는다고 판시했다. 다음은 그 추론의 요지이다. 수정헌법 제1조상의 권리를 제한하는 법률의 합헌성 심사에 있어서 그 심사기준은 다음과 같다. 즉, 표현행위가 비인쇄매체상에서 비언어적으로 이루어졌다면 법 위반 증거로서의 언론이나 출판에 근거한 유죄결정은 그 언론이나 출판이 금지된 범죄행위를 모의하거나 완수함에 있어 명백·현존하는 위험을 발생시킬 때에만 내려질 수 있다. 이 사건에서, Smith법은 무력이나 폭력에 의한 전복으로부터 정부를 보호하려 하고 있다. 확실히 이것은 정부가 언론을 제한하는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있다. 이제는 명백·현존하는 위험이 존재하느냐가 결정되어야만 한다. 정부 전복 기도의 성공이나 성공가능성은 그 정부 전복 기도가 명백·현존하는 위험을 구성하는지를 판단하는 기준이 될 수 없다. 문제는 표현행위로 발생될 해악의 중대성이 해악 발생의 위험 회피를 위해 필요한 언론의 자유 제한을 정당화하느냐 이다. 다른 나라들에서 유사한 폭동이 있었다는 점, 지금 세계정세가 격해지기 쉬운 불안한 상태라는 점, 공산주의국가와 우리의 관계 등 여러 가지를 고려해 봤을 때, 본 사건에서 간부가 시간이 되었다고 판단해 소집만 하면 언제라도 달려올 정도로 일사불란한 규율체계를 갖고 있는 고도로 조직화된 Dennis 주도 단체의 문제된 표현행위들은 우리로 하여금 명백·현존하는 위험이 존재한다고 믿게 만든다. 위험이 있는지의 여부는 헌법문제이지 사실인정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이것은 배심원이 아니라 판사가 판단해야 한다. 하급심의 유죄결정을 인용한다.

이러한 다수의견에 대해 두 건의 동조의견과 두 건의 반대의견이 주장되는 등, 연방대법원 대법관들의 입장이 여러 갈래로 첨예하게 갈라졌다. 먼저 Frankfurter대법관과 Jackson대법관이 동조의견을 냈다. Frankfurter대법관은 법률의 합헌성은 국가의 안전에 대한 이익과 민주사회에서의 언론의 자유에 대한 이익간의 형량에 의해 결정되며 이러한 이익형량은 법원이 아니라 입법부에 의해서 행해져야만 하고 법원은 수정헌법 제1조상의 권리인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는 법률을 포함해 모든 기본권을 제한하는 법률에 합리적 근거가 없을 때 이 법률을 위헌이라 선언할 수 있을 뿐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견지에서 보았을 때 Smith법은 의회가 합리적인 입법을 한 것이라 결론지었다. Jackson대법관은 무력이나 폭력에 의한 정부 전복을 가르치거나 옹호할 목적으로 이를 모의하는 것을 범죄로 규정한 법률은 심지어 명백·현존하는 위험이 없더라도 적용될 수 있으며 이것은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반대의견들도 있었다. Black대법관과 Douglas대법관이 각각 별개의 반대의견을 냈다. 우선 Black대법관 반대의견의 추론요지는 다음과 같다. 수정헌법 제1조상의 권리는 자유민주주의사회에서 우선적 위치를 가져야만 한다. 그러한 권리를 제한하는 법률들은 단순한 합리성의 근거에서 법원에 의해 지지를 받아서는 안 된다. 다수의견은 수정헌법 제1조에 의해 보장되는 표현의 자유를 자유민주주의사회에서 보장해야 하는 정도로 높게 보장하지 않고 그 중요성을 희석시켰으며, 급기야 수정헌법 제1조 규정이 의회에 대해 단순한 경고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하도록 했다. 반대의견을 곧잘 내어 ‘위대한 반대자’(The Great Dissenter)라는 별명을 갖고 있던 Douglas대법관은 이번에도 별도의 반대의견을 냈다. 표현의 자유를 어떤 경우에도 제한할 수 없는 절대적 기본권의 하나로 보는 그의 평소 소신대로 그는 Whitney판결에서 ‘급박성’의 요건까지 추가하면서 화려하게 부활한 명백·현존하는 위험의 원칙을 엄격히 적용하였고 그 결과 Dennis와 공산당 간부들이 무죄결정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추론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옹호된 해악이 급박하다는 위험을 분명하고 객관적으로 입증할 때에만 수정헌법 제1조상의 권리인 표현의 자유의 제한이 가능하다. 정부의 폭력적 전복을 옹호하는 Dennis와 다른 공산당원들이 성공할 가능성이 있다고는 도저히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본 사건에서, 이에 대한 입증이 전혀 없다. 상황이 심각하여 언론이 해악을 회피할 시간적 여유가 없을 때에만 언론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다. 또한 명백·현존하는 위험이 있는지 여부는 판사가 아니라 배심원이 판단해야 한다.

이 Dennis판결은 명백·현존하는 위험 원칙의 ‘왜곡기’가 시작되고 있음을 알리는 서막이었다. 연방대법원은 Smith법에 대해 합헌결정을 내리면서 명백·현존하는 위험 원칙의 중요한 일부분이었던 ‘시간’ 기준의 중요성을 고려하지 않는 듯한 태도를 취하면서 언론의 자유의 광범위한 보호를 위해 삽입했던 심사기준의 한 중요한 요소를 제거해 버린다. 명백·현존하는 위험의 원칙은 폭동이 일어나기 직전까지 정부가 그 표현을 규제할 수 없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이다. 연방대법원은 정부 전복의 목적에 대한 성공이나 성공가능성이 기준이라는 주장도 거부했다. 대신, ‘발생 불가능성 때문에 감소되기도 하는 해악의 중대성이 해악 발생의 위험 회피를 위해 필요한 언론의 자유 제한을 정당화하느냐’가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것은 ‘명백·현존하는 위험’(clear and present danger)의 원칙이 ‘명백하고 있을 수 있는 위험’(clear and probable danger)의 원칙으로 왜곡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때, 1927년의 Whitney v. California판결을 통해 추가된 ‘급박성’(immediacy)의 요건은 해악 발생의 ‘가능성’(probability)을 거쳐 해악의 ‘중대성’(seriousness)의 요건으로 바뀌게 된다. 즉 해악이 중대한 것이면 해악의 발생가능성이 아무리 적더라도 표현행위에 대한 제한이 허용되는 것으로 다루어졌던 것이다. 이러한 기준 하에서 급진적인 정치적 표현의 자유는 거의 보장되지 않게 되었다. 그러한 표현은 항상 정부의 눈에는 정부에게 위협이 되고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중대한 해악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비춰졌기 때문이다. 이 판결의 심판대상이 되었던 Smith법이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0년에 만들어졌고, 이 판결이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에 내려졌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전쟁시에는 미국 연방의회나 연방대법원이 표현의 자유 ‘보장’보다는 ‘제한’ 쪽에 무게를 두게 됨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 표현의 자유는 위축되고 명백·현존하는 위험의 원칙은 왜곡을 거쳐 또 다시 암흑의 터널 속으로 빨려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미국헌법판례열람] 명백·현존하는 위험 원칙의 현대화 

1969년에 미국 연방대법원이 내린 Brandenburg v. Ohio(395 U.S. 444)판결은 명백·현존하는 위험 원칙의 현대적 기준을 마련한 판결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백인우월주의자 집단인 KKK(Klu Klux Klan)단의 리더 Brandenburg는 텔레비젼 방송사에 전화를 해서 Hamilton카운티에서 열리는 KKK단 집회에 기자를 초청했다. 기자에 의해 이 집회는 녹화되고 TV에 방영되었다. 한 녹화필름은 두건으로 얼굴을 덮고 무기를 든 12명의 사람들이 나무 십자가 주위에 모여 그 나무 십자가를 불태우는 장면을 담고 있었다. 유태인과 흑인들을 경멸하는 말들이 녹화필름에서 산발적으로 들렸다. Brandenburg가 연설을 했고 그는 연설 중에 “우리는 보복을 목적으로 하는 단체는 아니다. 그러나 우리의 대통령이, 연방의회가, 연방대법원이 계속해서 백인들을 탄압한다면 어떤 보복조치가 취해져야만 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독립기념일인 7월4일에는 40만명이 의회 앞에서 시위를 하고 이어서 두 그룹으로 나뉘어 일부는 Florida주로 일부는 Mississippi주로 행군할 것이라고 연설했다.

이들 몇몇 녹화필름들에 근거해 Brandenburg를 피고로 한 소송이 제기되었다. 그는 Ohio주의 ‘과격단체운동 처벌법’(Criminal Syndicalism Statute)에 의해 유죄판결을 받았다. 이 법은 사회변혁 달성의 수단으로 범죄의 의무, 필요성, 정당성을 옹호하거나 태업, 폭력, 불법적 방법의 테러를 옹호하는 것을 금했고 과격단체운동의 원칙을 가르치거나 옹호하기 위해 형성된 단체와 회합하는 것도 금하고 있었다.

사건의 민감성때문에 집필자를 밝히지 않은 판결(per curiam)이 내려졌고 이 판결에서 연방대법원은 폭력 사용이나 법 위반의 옹호가 급박한 불법적 행위를 선동하거나 야기하기 위한 것이고 또 그러한 선동 및 야기의 개연성이 있는 것이면 그러한 폭력 사용이나 불법의 옹호는 수정헌법 제1조의 표현의 자유조항과 수정헌법 제14조의 적법절차조항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판시했다. 다음은 그 추론의 요지이다.

헌법상의 언론·출판의 자유는 폭력의 사용이나 법 위반의 옹호가 급박한 불법적 행동의 선동 혹은 야기를 위한 것이거나 그럴 개연성이 있는 것인 경우 이외에는 주(州)가 그러한 폭력의 사용이나 불법의 옹호를 금지하거나 처벌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위력이나 폭력에 호소하는 것의 도덕적 정당성이나 심지어 도덕적 필요성을 단지 추상적으로 가르쳐 주는 것이, 어떤 단체가 그러한 폭력적 행위로 나아가게 돕거나 조장하는 것과 같을 수는 없다. 두 행위를 명확하게 구분하지 못하고 함께 처벌하는 법률은 수정헌법 제1조와 제14조에 보장된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다. KKK단의 집회 당시에 그 집회에는 KKK단 단원 이외에는 아무도 없었고 집회에서 그들이 행한 인종 적대적 발언이 누구에게도 즉각적으로 신체적 위협을 준 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Brandenburg가 단지 인종 적대적 폭력이 ‘도덕적으로 적절함’(moral propriety)을 ‘추상적으로 가르쳤기’(abstract teaching) 때문에 Ohio주법(州法)에 따라 처벌된 것이다. Brandenburg의 발언은 직접적 행동을 선동한 것이 아니고 단순히 어떤 결과를 옹호한 것에 불과하므로 수정헌법 제1조와 제14조에 의해 보장되는 표현의 자유의 보호범위 내에 속한다. 즉, 그의 표현행위는 연방헌법이 정부의 통제로부터 면죄부를 준 ‘비난 발언’(condemnation speech)의 범주 내에 드는 것이다. 문제된 Ohio 주법의 취지는 단순한 옹호 발언을 처벌하려는 데 있고, 법에서 서술된 유형의 행위들을 단순히 옹호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과 회합하는 것을 금하려는 데 있다. 그러므로 하급심 판결은 유지될 수 없다. Brandenburg에 대한 유죄판결을 파기한다.

이 판결은 언론의 자유를 제한하는 법률이 합헌성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위험의 급박성’(imminence of danger)이 존재해야 함을 잘 보여준다. 즉, 단순한 선동(incitement)과 위험(danger)을 구분하는 명백·현존하는 위험 원칙의 현대적 심사기준을 제시한 판결인 것이다. 1960년대 이후에 연방대법원이 명백·현존하는 위험의 원칙을 적용한 사례는 법정모욕사건 등 극소수의 사건을 제외하고는 별로 없었다. 그러던 중 1969년에 나온 이 판결은 표현 규제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폭력 선동을 처벌하기 위해 불법적 행동이 의도되고 그 발생이 급박한 것이어야 한다’(intent to incite imminent lawless action)고 판시함으로써 명백·현존하는 위험 원칙의 요건을 더욱 구체화하고 위험기준을 더욱 엄격하게 적용케 하여 합헌성 심사의 기준을 한 단계 더 높여 놓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즉, 선동을 금지할 수 있는 요건으로, 첫째, 급박한 해악, 둘째, 불법적 행동이 야기될 가능성, 셋째, 불법적 행동을 야기할 의도라는 세 가지 요건이 충족되어야 함을 확실히 함으로써, 표현행위자의 의도의 입증을 추가요건으로 삼아 표현의 자유 보호에 더더욱 만전을 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명백·현존하는 위험의 원칙에 대한 현대적 해석은 그 ‘표현행위의 성격’(the nature of the speech)과 그 표현행위가 보여주는 ‘위험’(danger)에 초점을 맞춘다. 따라서 첫째, 추상적 원칙에 대한 옹호가 아니라 불법적 행위에 대한 선동만이 처벌받을 수 있고 둘째, 그러한 불법적 행위를 선동하거나 그것을 낳을 개연성이 있는 ‘급박한 불법적 행위에 대한 선동‘(incitement to imminent lawless action)만이 정부의 규제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최근에 와서는 2003년의 Virginia v. Black(538 U.S. 323)판결에서 보듯이 미국의 이라크 전쟁 등 각종 전쟁 수행과 관련해 전쟁 관련 발언 규제의 합헌성 척도로서 ‘명백·현존하는 위험의 원칙’이 곧잘 이야기되어지곤 한다.

명백·현존하는 위험의 원칙이 1919년의 Schenck판결을 통해 탄생할 때부터 이 원칙에 대한 반대론이 미국 내에서 만만치 않게 제기되었다. 적어도 명백·현존하는 위험의 원칙 초기 관련 판결인 Schenck판결이나 Abrams판결 등에서는 표현의 내용이 사실상 실질적인 해악을 초래했다는 점에 대한 명확한 입증도 없이 모두 유죄로 선언되었다는 점에서, 명백·현존하는 위험의 원칙은 표현의 자유 보장 확대에 기여하는 바가 크지 않다는 지적들이 많았었다. 그러나 그 후 명백·현존하는 위험의 원칙이 몇 차례에 걸친 후퇴와 전진의 사이클을 넘으면서 이 Brandenburg v. Ohio판결에서와 같이 정교하게 다듬어진 현대적 기준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이다. 적어도 현대화된 이 기준에 의하면 분명 명백·현존하는 위험의 원칙은 표현의 자유의 ‘한계’로서 보다는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는 법률의 ‘엄격한 합헌성 심사기준’이자 표현의 자유 ‘보장’의 기준으로서 이해될 수 있다고 믿는다. 명백·현존하는 위험의 원칙과 같은 표현의 자유 ‘보장’ 기준이 정부의 표현 규제를 꺼리는 본질적인 이유는, 정부가 표현이 야기할 수 있는 여러 해악을 핑계 삼아 실제로는 정부가 우려하는 표현의 설득력을 억누르려 한다는 데에 있다. 표현의 자유의 진정한 존재이유는 정부가 그러한 표현이 각종 해악을 야기할 것이라는 근거없는 기우에 호소해 정치적 반대의견 개진을 억누르는 것을 금하는 데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점에서 표현의 자유를 진정 자유답게 만드는 원칙이 명백·현존하는 위험의 원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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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지봉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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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이터 &quot;이명박-강만수 '리만 브러더스'로 불려&quot;

 

 

'경질론' 강만수, 비판받는 행적들

2008년 10월 28일 (화) 12:12   머니투데이

[머니투데이]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사진)이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았다. 시장 뿐 아니라 정치권에서도 '경질론'이 이미 대세로 굳어졌다. '경질론'은 이미 봄부터 나온 것이지만, 지금은 훨씬 묵직하다.

시장에서 '강 장관 교체'는 이미 '당위'가 돼 버렸다. 머니투데이 인터넷 설문조사(머투 Poll) 결과에 따르면 "강 장관이 사퇴해야 한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28일 11시5분 현재 참여자 1795명 중 89%가 "사퇴해야 한다"고 답했다.

몇 안 되는 바람막이 중 하나였던 여당마저 강 장관으로부터 등을 돌렸다. 이명박 대통령의 '무한신뢰'와 "전쟁 중 장수를 바꾸면 안 된다"는 논리만이 강 장관에게 남은 버팀목이다.

전·현직 관료 가운데 "실력 하나는 최고"라고 불리는 강 장관이 어쩌다 이런 상황에 몰렸을까?

강 장관의 트레이드 마크인 '강한 소신'이 화를 불렀다. '강고집'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강 장관은 취임 초부터 꿋꿋하게 원/달러 환율의 상승을 용인하는 발언을 쏟아냈다.

강 장관은 3월23일 모 언론사 초청 강연에서 "경상수지는 악화되고 있는데 원화 가치는 가장 낮을 때와 비교하면 45% 가량 절상됐다"며 원화 가치의 절하(환율 상승)가 필요함을 시사했다.

이어 4월16일에는 "환율에 대한 내 소신에는 변함이 없다"며 "환율이 1000원 전후로 올라가면서 계속 악화되던 여행수지의 추세를 바꿔놨다"고 했다. 환헤지상품 키코(KIKO)를 판매한 은행들을 두고 'S기 세력'이라고 몰아세우기도 했다.

문제는 올초부터 환율 급등 위험이 잠재돼 있었다는 점이다. 경상수지 적자와 외국인의 주식매도로 환율이 폭등할 수 있다는 경고가 곳곳에서 나오던 터에 강 장관은 오히려 환율 상승을 부추기는 발언들을 내놓은 것이다.

"경상수지가 경제정책에서 최우선이 돼야 한다"는 소신이 워낙 강한 탓에 환율 급등에 대한 경고를 무시한 셈이다. 이는 결국 환율 폭등에 따른 '키코 피해 책임론'이라는 부메랑이 돼 강 장관에게 돌아왔다.

종합부동산세에 대해서도 "조세원칙에 맞지않아 폐지해야 한다"는 소신에 따라 여당마저 부담스러워 할 정도의 대폭적인 완화 방안을 내놨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강 장관은 참 뛰어나고 성실한 분"이라면서도 "워낙 소신이 강해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말하고 싶은 것만 말하는 면이 없지 않다"고 말했다.

'일관성 부재' 문제도 거론된다. 경상수지 개선을 위해 고환율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던 강 장관은 5월 들어 고유가에 따른 물가부담을 이유로 '달러화 매도 개입' 등 환율 하락을 유도하는 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여건 변화에 따른 정책 수정으로 볼 수도 있지만, 시장은 '일관성 없음'으로 이해했다. 이어 최근 국정감사 등에서 "고환율 정책을 편 적이 없다"고 주장한 것도 일관성 훼손에 요인이 됐다.

세련되지 못한 정책 스타일도 강 장관이 비판받는 대목이다. 지난 6일 명동 은행회관에 시중은행장들을 공개적으로 소집, 외화유동성 확보를 위한 외화자산 매각을 촉구한 것이 대표적이다.

은행의 자구노력을 강조하려는 취지였지만, 시장에서 되레 "정부에 지원 여력이 없다"는 의미로 해석되면서 주가급락, 환율급등으로 이어졌다. 비공개적으로 세련되게 처리할 수 있는 사안을 거칠게 다뤘다는 평가가 나온다.

"예리한 '메스'를 써야 하는 시대에 아직도 70·80년대에 쓰던 '무딘 칼'을 쓴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그러나 '1930년대 대공항' 이후 초유의 위기라는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누가 경제수장이 되든 마찬가지라는 주장도 있다. 또 강 장관 경질시 인사청문회 등으로 약 1개월의 공백기간이 발생한다는 점도 부담이다.

한 경제부처 관료는 "요즘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가 다시 와야 한다는 등의 얘기들이 있는데,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와 봐야 소용없다"며 "누가 와서 하든 '시켜보니 별 것 없네'라는 말이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관련기사]
위기의 강만수, 경질론 기정사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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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뷰]국제적 조롱거리된 리만브러더스

로이터 "이명박-강만수 '리만 브러더스'로 불려"
  머니투데이 (moneytoday)
 
 

[김유림 기자] 한국 금융시장에서 '리만 브러더스(LeeMan Brothers)'라는 신랄하고 뼈 있는 농담이 떠돌고 있다고 로이터통신이 26일 보도했다.

 

로이터 통신은 '리만 브러더스'는 이명박 대통령의 성인 '이'(Lee)'와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의 이름 앞글자인 만'(Man)'을 합성한 단어로 지난달 파산한 투자은행 '리먼브러더스(Lehman Brothers)'를 패러디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로이터는 "경제는 신뢰와 정서의 문제인데 강 장관은 이미 신뢰를 잃었다. 한국 경제가 위기로 치닫고 있는데도 그는 자리를 지키는 데 더욱 노력하고 있다"는 송두영 민주당 대변인의 발언을 인용, 경제 수장의 신뢰 상실이 이런 농담까지 만들어 냈다고 소개했다.

 

특히 로이터는 강 장관이 유가가 급등한 상황에서 원화 약세를 유도해 한국의 인플레이션을 자극하더니 원/달러 1000원 환율을 방어하는 쪽으로 입장을 다시 바꾸는 등 외환 정책에서도 오락가락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지적했다.

 

이런 일관성 없는 정책이 재정부 장관으로서의 신뢰를 잃게 만드는 중요한 요인이 됐다는 국내 전문가들의 분석을 인용하기도 했다.

 

로이터는 또 강 장관이 지난 97년 한국을 외환위기로 몰고 간 정부의 재경부 차관이었으며 오랫동안 공직에서 물러나 있어 글로벌 금융시장의 변화와도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다고 전했다.

 

한마디로 이번 위기가 강 장관에게는 첫 번째가 아니며 이 대통령과는 같은 교회를 다니며 오랫동안 친분을 유지해왔다고 덧붙였다.

 

<저작권자 © ‘돈이 보이는 리얼타임 뉴스’ 머니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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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빠진 미국'의 빈자리... 유럽-중국 '호시탐탐'

 

 

'이 빠진 미국'의 빈자리... 유럽-중국 '호시탐탐'
[해외리포트] 내달 15일 'G-20 회담', 세계 자본주의 역사 다시 쓰나
  전용호 (chamgil)
 
 

"21세기판 브레턴우즈 시스템을 구축한다."

 

이번 미국발 금융위기는 단순한 금융시스템의 위기를 의미하지 않고, 세계 자본주의 역사의 일대 전환점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지난 1944년 영국의 경제학자 케인즈의 이론적인 토대로 설립된 미국 중심의 '브레턴우즈(Bretton Woods)' 체제가 폐기되고, 새로운 세계 경제 질서를 구축하기 위한 물밑 작업이 한창이다.

 

내달 15일 미국에서 열릴 G-2O 정상회담은 세계 자본주의의 역사를 새로 짜는 중요한 토론의 장이 될 전망이다. 이에 따라,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World Bank) 등 기존 핵심 시스템의 개혁을 통해서 자국에게 유리한 시스템을 만들기 위한 세계 주요 국가들의 각축전도 치열하게 진행되고 있다.

 

브레턴우즈의 역사와 그 변화

 

  
케인즈.
ⓒ 위키피디아 공공자료실
케인즈

 

사회 교과서에나 들어본 브레턴우즈 체제가 탄생한 것은 지난 1944년이다. 미국 뉴햄프셔의 조그만 마을인 '브레턴우즈'에서 44개 세계 주요 정상들이 금본위 대신에 금에 달러 가치를 고정시키고, IMF와 IBRD(국제부흥개발은행, 세계은행의 전신) 등을 설립하는 데 합의했다.

 

IMF는 환율을 감시하는 동시에 무역적자로 어려움을 겪는 국가를 위해서 차관을 해주는 기능을 맡도록 했고, IBRD는 저개발국가들에게 차관을 해주는 등의 역할을 맡아왔다. 당시 브레턴우즈 체제 설립에 크게 기여한 케인즈는 국가간 자유로운 무역을 인정하면서도 국가의 '개입'에 의한 일정한 시장 규제를 주창했다. 그는 금융자본의 자유화를 인정할 경우 각국의 복지정책이 제한을 받을 것을 우려,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그는 시장 자유주의자와는 다른 개입주의자였다.

 

브레턴우즈 시스템은 1970대 초까지 맹위를 떨쳤다. 하지만 1973년 오일쇼크 등으로 인해서 그 기구들은 남아있지만 정부 개입의 필요성 등의 가치가 자리를 점차 잃어갔고, 결국 시장의 자유를 추구하는 '신자유주의'의 거대한 흐름에 밀려난다.

 

영국 대처 총리와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은 바로 이 앵글로 색슨식 신자유주의의 핵심 주자였다. 특히 이들은 '금융시장의 자유화'를 통해서 새로운 성장동력과 침체된 경제의 돌파구를 찾았고, 이 강력한 신자유주의는 복지국가의 선두에 있는 스웨덴 같은 북부유럽국가들에도 신자유주의적인 요소를 도입하게 하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추산할 수 없을 정도로 커가는 파생상품을 중심으로 한 금융자본은 금융기관의 모럴 해저드와 스스로의 탐욕 등으로 인해서 부실이 심화됐고 이번 금융위기를 통해서 그 한계가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시장의 작동으로 인한 자율적인 규제와 효과적인 자원 배분을 맹신했던 신자유주의자들은 이번 금융위기로 그 한계성을 스스로 보이게 된 셈이다.

 

  
1930년대 대공항이후 최고의 경제침체가 예상된다는 일간 <텔레그라프> 보도.
ⓒ 텔레그라프
브레튼우즈

 

"1930년대 이후 최대 불황될 것"

 

불과 얼마 전만 해도 "시장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이라고 믿었던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을 비롯한 자유시장주의자들마저 새로운 경제 질서 재편의 필요성을 촉구하는 것은, 그만큼 이번 위기가 심각하기 때문이다. 특히, 이번 금융위기를 바라보는 유럽언론들은 '공포' 그 자체다. "1930년대 대공황 이후 최대 불황이 다가올 것"이라는 불안감이 여기저기서 제기되고 있다.

 

지난 10여년간 노동당의 집권으로 유례없는 호황을 구가했던 영국 정부도 최근에 브라운 총리가 "경기가 침체에 진입했다"고 인정하면서 금융시장은 물론이고 실물경기도 더욱 얼어붙고 있다. 빵, 계란, 야채류 등 서민의 생활과 밀접한 물가가 폭등하는 가운데 실업자가 급증하고 있다는 보도가 줄을 이으면서 소비가 주는 등 내수가 벌써 위축되고 있다. 

 

'부동산 침체→ 금융기관 부실→ 실물경제 악화'의 악순환 고리가 이미 시작된 것이다. 유럽중앙은행은 올해 유럽의 경제성장률이 0.8%에 그칠 것이라고 하향 수정했지만 이마저도 불투명해 보인다.

 

세계 경제도 마찬가지다. 일간 <텔레그래프>는 독일 도이치방크의 이코노미스트 발언을 인용해 "우리는 앞으로 주요 국가들(Industrial countries)의 성장률이 1.2%로 떨어져 심각한 위축을 경험한 1980년대 초반 수준으로 경제가 침체될 것"이라고 진단했다. 세계 경제의 동력인 중국과 인도의 성장률마저 둔화되면서 세계적인 침체가 지속될 것이라는 분석이다.

 

파키스탄, 아이슬란드, 헝가리 등 10개국이 IMF에 이미 구제금융을 신청한 것으로 알려지는 등 이번 금융위기가 세계 국가들의 경제를 파탄시키고 있다. 

 

미국-유럽-중국 등 세계 국가들의 각축전

 

아이러니컬하게도 영미 신자유주의의 선봉에 있던 영국에서부터 기존 브레턴우즈 체제를 고쳐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전통적으로 영국은 유럽보다는 미국에 가깝게 붙어서 외교정책을 펼쳐왔지만, IMF와 IBRD가 그간 사실상 미국과 달러의 이익을 위한 기구로서 존재해왔다는 데 불만을 갖고 있었다. 

 

고든 브라운 총리는 이같은 미국 중심의 '달러 패권주의'에 대한 저항하는 카드로서 '신브레턴우즈 체제'를 주장하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투명한 금융 감독시스템의 구축"이 명분이지만 미국의 이익에 종속된 IMF와 IBRD 등의 근본적인 개혁을 통해 미국이 세계경제를 좌지우지하는 현실을 바꿔보자 는 정치적인 목표도 깔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현 유럽연합 의장인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과 독일의 메르켈 총리도 "새로운 금융 질서를 만들 때"라며 그 필요성에 동의하고 있지만, 서로 견제하는 분위기도 일부 감지된다.

 

그러나, 현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키는 역시 미국이 쥐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1944년에 브레턴우즈 체제가 탄생할 때만큼 미국이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하기 어려운 상황이지만, 그럼에도 미국이 얼마나 유럽국가들의 요구를 수용할지, 또 어떤 입장을 취할 것인지는 여전히 중요한 변수가 될 것이다. 하지만 부시 대통령의 임기가 얼마 남지 않아서 오바마든 매케인이든 차기 대통령이 취할 입장이 결국 핵심 변수가 될 것이다.

 

더불어, 외환보유고 강국인 중국이 이번 정상들간의 모임에서 어떤 자세를 취할 것인지도 관심거리다. 베이징 올림픽을 계기로 세계적인 국가로 발돋움하려는 중국이 어떤 형식으로든 기존의 미국과 유럽 중심의 세계경제 질서에 자신들의 영향력을 '새롭게' 행사하려고 시도할 가능성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달러 패권주의 선봉 IMF 개혁해야" 제프리 삭스 VS 장하준

 

  
장하준 캠브리지대학 교수
ⓒ 오마이뉴스 권우성

 

현재 상황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날 것을 예상하는 것은 쉽지 않을 일이다. 내달 15일 정상회의 직전까지 각국들은 주판알을 튕기면서 자국의 이익에 부합하는 질서를 준비하는 데 열을 올릴 것이다.

 

현재까지 제기된 개혁 내용은 주로 영국과 프랑스 등에서 나온 것으로 (1) IMF와 IBRD의 개혁 (2) 초국가적인 금융 감독시스템 구축 (3) 금융기관의 지나친 이익 추구행위에 대한 제동 등이 핵심 골자다. 

 

특히, 이중에서 자주 거론되는 것은 달러 패권주의의 첨병 역할을 하고 있는 IMF의 기능과 그 역할이다. 최근 영국 일간지 <가디언>에서 이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제프리 삭스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는 지난 21일 기고한 글에서 IMF의 기능을 지금보다 더 확대시켜서 헤지 펀드 등 투기세력을 감시하고 진정한 세계의 마지막 자금대출자로서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위해서 투기성 자금의 거래에 세금을 부과하는 '토빈세'를 도입, 거둬진 자금으로 IMF가 위기시에 활용하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장하준 케임브리지대 교수는 바로 그 다음날 <가디언>에 "IMF의 임무와 지배구조(governance)가 충분히 개혁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 영향력이 더욱 강해지면 상태는 더욱 악화될 것"이라며 "IMF는 통화긴축적인 거시경제 정책과 미숙한 금융 규제완화와 개방 정책을 밀어붙이면서 개발도상국과 (과거 사회주의국가들)의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고 지적했다.

 

그는 특히 IMF 내부의 의사결정 구조가 개도국에게 불리하게 되어있음을 지적하고, 개도국들이 더 많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투표시스템' 등 거버넌스를 개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고든 브라운 영국  총리는 "IMF는 구시대적인 기구이므로 개혁해야 한다"는 말을 서슴지 않고 있다.

 

한국의 갈 길은?

 

최근 들어 이명박 대통령이 뒤늦게나마 국제 금융시스템의 개선을 주장하고 나선 것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얼마나 한국 정부가 얼마나 뼈저리게 그 필요성을 느끼고 있는지는 실로 의문이 든다. 이번 일을 계기로 한국에게 필요하고 적합한 금융시스템은 무엇인지, 근본적으로 탐색하고 고민해야 할 것이다.

 

이번 정상회담을 하나의 외교적인 행사로 치부해서, 과거 우리 외교나 경제정책이 그랬듯이 미국 정부의 눈치를 보고 거기에 따라서 대충 맞추고 따라가려는 사대주의적인 태도는 지양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 정부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검증과 대안을 만들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번 금융위기는 시장 만능주의적 신자유주의적 경제철학이 한계를 갖고 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그런 맥락에서 그간 금과옥조로 믿었던 시장중심적인 정책들, 예를 들어 최근 뜨거운 논의가 되고 있는 금산분리 완화 등의 정책도 진지하게 재고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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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다시읽기] 마르크스는 이데올로그가 아니다/이진경

 

 

고전다시읽기] 마르크스는 이데올로그가 아니다/이진경

한겨레 | 기사입력 2006.05.19 16:56



[한겨레] 고전 다시읽기/알튀세르 < 맑스를 위하여 >

이 책은 원래 1965년에 출판되었지만, 우리가 이 책을, 그나마 영역본으로나마 처음 접할 수 있었던 것은 1980년대 초반이었다. 알다시피 그 시절은 마르크스의 저작을 읽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했던 시기였다. 아니 책을 구하기도 힘든 시절이었다. 그런 시절에 < 맑스를 위하여 > 라는 제목에 놀라거나 충격을 받지 않는 게 가능했을까? 아니, '마르크스를 위하여'라니! 일단 숨겨서 몰래 봐야할 것 같은 긴장을 주는 책이었다. 마르크스를 위하여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 그리고 이듬해(1966년)에 알튀세르가 제자들과 함께 또 하나의 책을 출판한다. ' < 자본 > 을 읽자!'는 말로도 번역될 수도 있는 < 자본 읽기 > 였다. "마르크스를 위하여, 자본을 읽자!" 허, 책 제목을 이렇게 지을 수가 있다니!

그러나 < 자본 > 이란 책이야 그 전에도 읽었던 것이고, 그 책이 출판된 당시에도 다들 읽던 책이 아니었던가? 그랬을 것이다. 안 읽는 책을 "이젠 좀 읽자"고 말하려는 건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것은 이제까지 읽던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읽자는 말이었을 게다. '정통 마르크스주의'라는 이름의 고식적인 독서, 그 상투적 독해에서 벗어나 새로운 방식으로 읽는 것, 그것이 바로 '마르크스를 위하여' 그가 하고자 했던 것일 게다.

'이론적 반-휴머니즘' 견지

그래서 이 책의 서문은 자신들이 마르크스를 읽던 시기에 대해서, 그 독서의 방식을 제한하던 조건들에 대해 쓰고 있다. 그 글의 제목에 '오늘'이라고 붙인 것도 이런 점에서 아주 탁월한 작명이었다. 당에 의해 독서와 해독의 방식이 결정되고 제한되던 시절, 그것은 '프롤레타리아적 진리' 내지 '프롤레타리아 과학'이란 이름으로 "오류를 그 모든 서식지에서 쫓아내던 무장한 지식인들의 시대"였고, "세계를 단 하나의 칼로 갈랐던, 예술·문학·철학 및 과학들을 계급이라는 가차 없는 절단으로 갈랐던 철학자들의 시대"였다. 스탈린은 죽었어도, 스탈린식의 진리가 사유를 지배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이 책이 정작 겨누고 있는 일차적 대상은 뜻밖에도 스탈린식의 실증주의적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라, 그것을 비판하면서 등장했던 '휴머니즘적 마르크스주의'고, 마르크스를 휴머니스트로 해석하는 입장이다. 물론 그는 휴머니즘이 실증주의의 짝이고 보충물이라고 보기도 하지만, 그가 휴머니즘을 겨냥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마르크스주의를 과학이 아니라 이데올로기로 만든다는 점 때문이었다. "마르크스주의는 인간을 위한 것"이라는, 무엇보다 마르크스주의자 자신을 위한 이데올로기. < 경제학·철학 초고 > 라고도 불리는 마르크스의 < 1844년 초고 > 의 출판 이후 크게 유행한 이른바 '소외론'의 마르크스주의, 그리고 스탈린의 '비인간적' 비극을 비판하며 등장한 '휴머니즘적 사회주의'가 그것이었다. 그가 자신의 입장을 '이론적 반-휴머니즘'이라고 명명했던 것은 이러한 태도를 좀더 극명하게 만들어주었다.

이러한 독해의 강력한 지지자는 헤겔이었다. 그래서 알튀세르는 마르크스를 헤겔과 절연시키기 위해 집요하게 노력한다. 이를 위해 마르크스는 마르크스의 소외론이 헤겔보다는 포이어바흐에 기대고 있다고 주장하면서도, 동시에 그러한 소외론자로서의 마르크스를 '청년 시절'의 미숙함으로 돌리고 성숙한 마르크스와 다시 떼어놓는다. 바슐라르의 '인식론적 단절'이라는 개념을 이용해서, 역사과학이라는 대륙을 발견한 과학자로서 성숙기의 마르크스와, 그러한 과학을 알기 이전의, 당연히 이데올로기적 관념에 사로잡혀 있던 청년 마르크스를 분리한다.

이러한 비판 속에서 그는 '인간'이라는 이데올로기적 관념을 '사회적 관계'라는 과학적 개념으로 대체하고자 한다. 즉 인간이란 그가 어떤 관계 속에 들어가는가에 따라 다른 본성을 갖는 존재고, 따라서 그런 구체적인 관계와 무관한 인간의 본성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이다. 이를 마르크스는 이렇게 표현한 바 있다. "흑인은 흑인이다. 특정한 관계 속에서만 그는 노예가 된다." 그 특정한 관계가 달라지면 그는 노동자가 될 수도 있고, 자유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이란 무엇인지'가 아니라 '어떤 인간인가'를 구체적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역사란 목적지 모르는 기차

그는 또 모순의 개념을 헤겔적 관념에서 끄집어내고자 한다. '과잉결정(중층결정)'이라는 개념이 그것이다. 헤겔에 따르면, 모든 관계의 본질에는 모순이 자리잡고 있으며, 그 전개 양상이 아무리 복잡해도 본질적으로 다양한 현상들은 모순으로 환원될 수 있다. 그러나 알튀세르에 따르면 사회란 '기본모순'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되는 동심원적 구조를 갖지 않는다. 오히려 다양한 수준의 외부적 조건들이 기본모순 자체에 영향을 미친다. 예컨대 자본주의 사회의 기본모순은 자본과 노동의 모순이지만, 어떤 때는 농민들과 지주의 모순이, 또 어떤 때에는 제국주의와 식민지인민의 모순이 사회 전체의 중심으로 부상하면서, 다른 모순들이 그 모순에 응축되고 그것의 작동을 통해서 작용하게 된다.

또한 알튀세르는 마르크스주의에 깊이 침윤되어 있는 '목적론적 사고방식'과 평생 동안 집요하게 대결한다. 가령 '공산주의'나 '절대정신의 실현' 혹은 '인간성의 실현' 같은 역사의 목적/종말을 설정하고, 그것을 향해 진행되는 것으로 역사를 이해하는 목적론적 역사관념이 그것이다. 그가 보기에 역사란 "기원도, 목적도 없는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출발지도, 목적지도 모르는 채 역사라는 기차에 올라타고 내리는 것이다.

이 책에서 제시된 또 하나 중요한 명제는 "이데올로기 없는 사회란 없다"는 것이다. 이데올로기란 원래 사람들이 흔히 갖고 있는 통상적 관념들을 지칭하는 것이다. '상식'이 바로 그런 것에 속한다. 그런데 마르크스는 1845년에 한 사회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는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라고 말한 바 있다. 그것은 피지배계급의 입장에선 당연히 거짓된 의식, 허위의식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지배/피지배가 사라진다면 그런 허위의식도 사라질 것이고, 허위의식으로서 이데올로기도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란 사람들이 자신이 누구이고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를 포함하여, 이런저런 생각(표상)들을 방향짓고 미리 규정하는 무의식적 '표상체계'라고 본다. 그런 한에서 그것은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사회가 되어도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이 없다면, 개인은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등을 결정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개인을 사회가 요구하는 주체로 만드는 것, 그게 바로 이데올로기인 것이고, 따라서 어떤 주체도 이데올로기 없이는 불가능하며, 어떤 사회도 이데올로기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데올로기 개념은 프로이트와 라캉의 이론과 결합하여, '호명'이라는 흥미론운 이론으로 이어진다. 가령 "모세야" 하는 신의 호명에 "예"하고 답함으로써 모세는 히브리 인민을 이끄는 '주체(subject)'가 된다. 신이 알려준 주체의 자리가 자신의 자리라고 인정하고 동일시함으로써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를 알게 된다. 그렇지만 그것은 신이나 부모, 혹은 사회라는 큰 주체(Subject)가 지정한 자리를 나의 자리로 오인하는 것이며, 그를 통해 그 큰 주체의 신민(subject)이 되는 것이기도 하다.

이데올로기 없는 사회란 없다

이처럼 알튀세르는 마르크스의 이론에 바슐라르나 프로이트, 라캉, 혹은 그가 피하면서 받아들였던 '구조주의' 등의 이질적인 요소들을 섞어서 새로운 얼굴의 마르크스를 만들어낸다. 고답적인 형태의 마르크스주의에서 벗어난 모습으로. 그리고 그것을 마르크스에게 돌려준다. 그것이 그가 '마르크스를 위하여' 하고자 했던 것이었을 게다. 마르크스가 그의 선물을 반가워했을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지배적인 마르크스주의의 고답적인 사고에 지쳤던 많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이 선물을 열광적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것은 무엇보다 먼저 마르크스주의 안에서 상이한 사유들이, 새로운 사유가 숨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적 사유 자체를 마르크스적 사유의 대상으로 삼을 것을 가르쳤고, 마르크스의 사유가 다시 살아 있는 사유와 소통하고 대화할 수 있게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다시금 새로운 형태로 마르크스적 이론을 창안하여 마르크스에게 돌려주려는 또 다른 사유를 촉발하게 될 것이다. 물론 그것이 지키고 유지해야 할 또 하나의 마르크스주의가 되는 순간, 다른 종류의 차이를 배제하는 절단의 칼날이 된다는 점을 잊지 않는 한에서지만 말이다.

서평자 추천 도서

맑스를 위하여
알튀세르 지음, 이종영 옮김, 백의 펴냄(1997)
아미엥에서의 주장
알튀세르 지음, 김동수 옮김, 솔 펴냄(1998)
(알튀세르의 사상 전반에 접근하기에 좋은 책. 쉽다)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알튀세르 지음, 권은미 옮김, 돌베개 펴냄(1994)
(부인을 죽인 뒤 금치산자로서 유폐된 상태에서 씌어진 알튀세르의 자서전)
◇ Mjspinaza(인터넷서점 예스24 회원리뷰)="비록 마르크스주의의 실추로 인해 이제는 널리 읽히지 않고 논의되는 빈도도 훨씬 줄어 들었지만, 알튀세르의 문제제기는 여전히 유효하다. 일종의 논문모음집임에도, 놀라운 이론적 통일성을 보여 주고 있다."

◇ 익명="프랑스 공산당에 속해 있었던 알튀세르는 이러한 복잡한 정치적 사태에 정치적으로, 이론적으로, 실천적으로 개입하기 위해 맑스에 대한 인간주의적 해석 전체를 비판의 도마 위해 올려놓게 된 것입니다."

◇논장="이 책에 내포된 세적, 정치적 담화들은 시대의 한계를 지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현 시기 새롭게 번역되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이 책이 갖는 탁월한 인식론적 가치 때문이다."

▽ 다음주 이후 고전 < 죽음의 수용소에서 > < 한국사신론 > 의 50자 서평에 참여해주세요. 전자우편 bonbon@hani.co.kr

[책속으로] 쁘띠 부르주아 출신의 지식인들이 인간주의적 청년 맑스로 변장시켜

"당에 들어왔던 쁘띠 부르주아 출신의 지식인들이 정치적 행동주의나 적어도 순수한 행동을 통해, 프롤레타리아로 태어나지 않았기에 지게 된 상상적 채무를 변제할 수 있다고 느꼈던 것 또한 우리 사회 역사의 한 특징이었다. …우리는 우리의 동류들 속에 우리의 말을 들어주는 자를 갖지 못하였다. …자신의 가장 뛰어난 대화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말을 듣게 하기 위해 몇몇 맑스주의 철학자들은 …언젠가는 가면이 진짜 얼굴이 될지도 모를 위험을 무릅쓰고 스스로를 변장할 수밖에 없었다. 맑스를 훗설로, 맑스를 헤겔로, 맑스를 윤리적 내지 인간주의적 청년 맑스로 변장시킬 수밖에 없었다."( < 맑스를 위하여 > , 이종영 옮김, 22~23쪽)

"모순은 자신이 그 속에서 작동하는 사회적 신체 전체의 구조로부터 분리될 수 없고, 자신의 존재의 형식적 조건들로부터 분리될 수 없으며, 자신이 지배하고 있는 층위들로부터도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모순은 그 자체가 그 핵심에 있어서 이 층위들에 의해 영향받고 있으며, 하나의 동일한 운동 속에서 규정적인 동시에 규정받고 있고, 자신이 추동하는 사회구성체의 다양한 수준들과 다양한 층위들에 의해 규정받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모순은 원리상 중층결정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같은 책, 116~17쪽)

"인간사회들은 이데올로기를 마치 호흡하는데 필수적인, 역사적 삶에 필수적인 요소나 공기인 것처럼 분비한다. 오직 이데올로기적인 세계관만이 이데올로기 없는 사회들을 상상할 수 있고 …이데올로기가 과학에 의해 대체되어 흔적 없이 사라져버린 세계에 대한 유토피아적 관념을 받아들일 수 있다. …도덕이건 예술이건 '세계의 표상'이건 간에 역사유물론에서는 이데올로기 없이 존재할 수 있는 공산주의 사회를 상상할 수 없다."(2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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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위기 주범' 그린스펀, 때늦은 반성

 

 

'금융위기 주범' 그린스펀, 때늦은 반성
  "내 경제이론에 허점, 파생상품 규제완화는 잘못"
 
  2008-10-24 오전 9:32:50
 
   
 
 
  현재 세계를 강타하고 있는 글로벌 금융위기는 월스트리트 금융업체들의 탐욕스러운 영업행태와 규제완화의 복합적 산물로 지적되고 있다.
  
  특히 금융업체들이 주택담보대출과 연계해 판매한 파생상품을 제대로 규제하지 않은 정책적 실패는 '세계의 경제대통령'이라고 불리는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을 무려 20년 가까이 역임(1987~2006)한 앨런 그린스펀의 책임이라는 비판이 적지 않았다.
  
  그동안 이런 비판에 대해 당사자인 그린스펀은 결코 수긍하지 않았다. 지난 9일 <뉴욕타임스>가 장문의 기사를 통해 그린스펀에 대해 칼날을 들이대었을 때도 그는 "파생상품 자체가 문제가 있었던 게 아니라 그것을 활용하는 사람들의 탐욕이 문제였다"고 주장하며 자신의 잘못은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 (☞관련 기사:그린스펀은 '물신(物神)의 사제'인가)
  
▲ 그린스펀 전 의장이 23일(현지시간) 미 하원 청문회에서 금융위기에 대한 추궁을 받자 곤혹스러워 하고 있다. ⓒ로이터=뉴시스

  그린스펀 "부분적으로 잘못했다"
  
  하지만 23일(현지시간) 그린스펀은 하원 청문회에서 자신의 시장경제 이론에 허점이 있었다고 시인했다. 그는 "허점을 발견했다"면서 "40년 이상 경제이론이 아주 매우 잘 들어맞고 있다는 많은 증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충격을 받았다"고 밝혔다. 그는 또 파생상품 규제에 반대했던 것에 대해서도 "금융기관들이 내가 기대했던 바와 같이 주주들과 투자자들을 보호하지 못했다"면서 "부분적으로 잘못됐다"고 인정했다.
  
  이런 답변은 헨리 왁스먼 정부개혁위원회 위원장이 "서브프라임 모기지 위기를 초래한 무책임한 대출관행을 제지할 권한을 가지고 있었고, 많은 사람으로부터 그렇게 해야 한다는 조언을 받았을 것"이라면서 "지금 우리 전체 경제는 그 대가를 치르는 것"이라고 그린스펀을 비판하면서 나왔다.
  
  물론 그는 최근의 글로벌 금융위기는 "백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신용 쓰나미(credit tsunami)'"라며 정책결정자가 예상하기 어려운 극히 예외적 사태였다는 점을 강변했다.
  
  이와 함께 그린스펀 전 의장은 이날 미리 배포한 청문회 자료에서 "현재까지 금융시장의 손실을 고려할 때 일시적 해고와 실업률의 현저한 상승을 어떻게 피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면서 실업률 상승에 대해 우려를 표명했다.
  
  그는 이번 금융위기를 끝낼 수 있는 필요조건은 주택가격 안정이지만 앞으로 여러 달 동안 주택가격이 안정될 것 같지 않다고 지적했다.
  
  그린스펀 전 의장은 주택가격이 안정되면 그때부터 시장 경색이 상당히 풀리고 겁에 질린 투자자들도 다시 위험을 감수하고 투자에 나서게 될 것으로 전망했다.
  
  또한 그는 주택가격이 안정될 때까지 정부가 공세적으로 금융시장을 지원하는 조치는 올바른 일이라면서 7000억 달러 규모의 구제금융 계획은 이같은 필요에 상응하는 적절한 조치이며 이번 조치의 효과가 벌써 시장에서 느껴지고 있다고 평가했다.
  
  그린스펀은 "(이번 금융위기는) 내가 상상했던 어떤 것보다 더 광범위하게 나타났다"면서 "신용평가 기관이 비현실적으로 높게 평가한 서브프라임 증권에 대한 국제적인 수요가 은행과 헤지펀드, 연기금에 의해 급증한 것이 이번 문제의 핵심"이라고 덧붙였다.
  
  전지전능하지 못했던 탓일 뿐?
  
  그린스펀이 이번 청문회에서 예전보다는 한 발 물러선 모습을 보였지만 "규제감독 당국이 미래를 예측할 수 없으며 완벽한 결정을 내리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면서 "최선을 다해야 하겠지만 절대적인 확신이나 전지전능함을 기대할 수는 없다"고 끝까지 자신을 옹호했다.
  
  한마디로 마지못해 자신이 잘못을 인정한다고 했지만, 전대미문의 사태가 벌어지는 것까지 막을 정도까지 자신의 경제이론이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시인했을 뿐이다. 그나마 파생상품 규제를 제대로 못했다는 점에 대해 '조금' 잘못을 인정한 것이 이번 청문회가 얻어낸 성과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가 재임 기간 중 보여준 언행을 되짚어오면 그가 어떤 신념에 충실한 나머지 의도적으로 규제 완화를 회피했다는 정황이 역력하다. 만일 그가 '경제이론'에 대한 확신으로 그랬다면, 금융업체들에게 봉사하기 위한 이데올로기를 '이론'으로 포장했을 뿐이라는 의혹이다.
  
  는 "그린스펀은 금융시장에 참여하는 개인들도 책임있게 행동할 것이라는 굳은 신념을 보여주었다"면서 "그린스펀이 금융규제와 파생상품에 대해 지난 20여년에 걸쳐 어떠한 언행을 해왔는지 조사한 결과, 그가 그런 신념을 위해 조국의 경제를 볼모로 잡았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비판했다.
  
  이 신문은 "오랜 기간에 걸쳐 그린스펀은 시장을 움직이는 힘이 자유롭게 활동하도록 내버려두는 야심찬 미국적 실험이 가능하도록 지원했으며, 이제 미국은 그 결과에 직면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 위원장을 지낸 아서 레빈 주니어도 "그린스펀은 정부를 근본적으로 경멸하기 때문에 파생상품 규제를 반대한다"면서 그린스펀의 '위험한 사상'을 증언했다.
  
  <뉴욕타임스>는 "그린스펀이 재임 중 다른 식으로 대처했다면, 현재의 위기는 피하거나 제한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많은 경제학자들이 지적하고 있다"고 전했다.
  
  실제로 그린스펀은 지난 10여년에 걸쳐 파생상품에 대한 규제를 철저하게 반대해 왔다. 그는 지난 2003년 상원 금융위원회 청문회에서 "파생상품은 위험을 피하려는 사람들이 그 위험을 기꺼이 부담하려는 자에게 넘길 수 있는 놀라운 수단"이라면서 "파생상품 규제를 강화하려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역설했다.
  
  그린스펀 재임 중 FRB 부의장을 역임하고 현재 프린스턴대 교수로 있는 앨런 블라인더는 "조금이라도 규제하려는 제안이 있으면, 그린스펀과 재무부의 많은 관료들이 싹을 잘랐다"면서 "그린스펀은 꿋꿋하게 파생상품의 치어리더 역할을 해왔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1994년 미국 회계감사원(GAO)이 2년의 조사 끝에 내놓은 "파생상품의 규제감독에 상당한 허점이 있다"는 보고서도 묵살했다.
  
  당시 GAO 원장 찰스 보셔는 하원 청문회에서 "파생상품을 취급하는 미국의 대형 금융기관이 갑자기 파산하는 사태가 일어나면 시장에 유동성 위기가 닥칠 수 있으며, 연방정부가 보증하는 은행을 포함해 금융시스템 전체가 위험에 빠질 수 있다"면서 "사태의 심각할 경우 정부가 개입해 납세자가 부담하는 구제금융이 불가피해질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했다.
  
  이미 14년전에 파생상품 규제를 적절히 하지 못할 경우 현재 전세계가 목도하는 미국의 금융위기 사태가 일어날 것을 정확하게 경고한 것이다. 하지만 당시 그린스펀은 "파생상품 시장을 포함해 금융시장의 리스크라는 것은 민간 영역에서 자율 통제되고 있다"면서 "시장 자율규제보다 연방 정부의 규제가 우월하다는 증거는 없다"고 장담했다.
  
  더욱 심각한 사례가 있다. 그린스펀은 옵션과 선물거래를 규제하는 연방기관 선물계약거래위원회(CFTC)가 파생상품 규제를 하려들자 아예 그 권한을 박탈하는 일에 앞장섰다.
  
  당시 CFTC 위원장 브룩슬리 본은 "통제받지 않고, 불투명한 거래는 연방기관도 모르는 사이에 시장뿐 아니라 경제 전체를 위협할 수 있다"면서 "거래에 대한 보다 투명한 절차와 손실에 대비한 더 많은 충당금이 필요하다"고 촉구했다.
  
  '월가의 현인'이라는 워렌 버핏이 이미 2003년에 파생상품을 '금융 대량살상무기'라면서 경고했어도, 그린스펀은 파생상품이 대량살상무기로 변할 가능성이 극히 적다는 이유로 어떠한 규제도 막았다는 것은 '경제이론의 허점'으로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승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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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고라펌] 폴 크루그먼에게서 배우는 MB정부에 속지 않는 법

 

 

 

아고라펌] 폴 크루그먼에게서 배우는 MB정부에 속지 않는 법
2008.10.15 14:35 | 임시반장 | 조회 2532 | 추천 29 | 반대0 |


우선,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폴 크루그먼 교수에게 진심으로 축하의 뜻을 전하고 싶습니다. 그는 내가 아는 좁은 세계에서 정말 훌륭한 경제학자이자 양심적인 언론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노벨경제학상 수상을 계기로 그가 썼던 ‘The Great Unraveling'라는 책을 꺼내보았습니다. 국내에 ‘대폭로’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책인데요. 제가 갑자기 이 책을 다시 꺼내든 이유는 ‘부시 저격수’라고 불리는 그의 부시 행정부 비판이 최근 국내 상황에도 적실성이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습니다. 


이명박 정부가 출범한 지 약 8개월이 지났습니다. 저는 지난해 대선 결과를 보며 느낀 소감을 한 카페에 띄운 적이 있는데, 그 글의 일부는 이렇습니다.


  “자산과 소득 양극화에 부동산값 폭등, 비정규직 비율 55%, 청년 실업 200만, 출산율 바닥, 자살율과 근로시간, 산재사고 OECD 최고라는 대한민국의 엽기적인 현실과 이를 나몰라라 하는 정치권을 생각하면 정말 가슴이 아파 눈물이 납니다. 하지만 아무리 배가 고프다고 쓰레기통을 뒤져서는 안 되잖아요? 현 집권세력이 이 문제를 해결 못한 데 대한 민심의 분노는 이해하지만, 땅바기가 집권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닌데 말입니다. 그의 철학과 정책을 보면 오히려 현재 한국사회의 구조적 문제들이 더욱 악화될 것 같군요. 좀 심한 비유인지 모르겠으나, 독일이 1차대전의 전쟁부채에 시달리다 결국 히틀러를 택한 장면이 왜 자꾸 오버랩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시점에서 그때 썼던 글을 다시 읽어보면 제가 썼던 글이 그대로 현실이 되고 있느 듯 해 소름이 끼칩니다. 오히려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악화된 형태로 말입니다. 많은 이들이 이 정부의 경제 및 교육정책 등 정책 실패와 아마추어적인 정부 운용 등에 대해 비판합니다. 저도 그런 면에서 가장 강력한 비판자 가운데 한 사람일 것입니다. 사실 아마추어도 이만저만한 아마추어가 아니며, 국민들에게 내뱉은 공언을 쉽게 뒤집는다는 점에서 사기꾼 기질도 강한 정부라고 봅니다. 정말 저질 불량정부이지요.


        하지만 저는 어느 순간 이 사람들의 정치 행태 및 국민이나 여론에 대한 대응, 그리고 방송 장악이나 간첩단 조작, 군대의 금서 목록 발표, 건국 60주년 표현, 부유층 위주의 감세정책 등 자신들의 어젠다를 철저히 추구하고 쟁취하는 과정에 더 우려를 느끼게 됐습니다. 많은 이들이 ‘실용정부’라는 현 정부의 구호에 속아 그냥 친기업적이고 경제성장을 우선시하는 중도 우파 정도의 정부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그 정도에 그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들은 과격한 ‘우파 혁명세력’입니다. 물론 지금같은 경제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할지 몰라 우왕좌왕하는 엉터리 저질 집단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또 하나 분명한 것은 그런 가운데에서도 자신들과 자신들의 지지세력에게 필요한 것은 어떤 경우에도 관철시키는 ‘불굴의 의지’를 가진 집단이라는 겁니다. 저도 처음에는 이렇게까지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촛불시위 이후 자신들 세력을 결집하며 전 국민을 대상으로 선전포고하듯 하는 이들의 태도를 보면서 점점 이들은 합리적 판단력을 가진 정부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찾아 본 책이 "The Great Unraveling"입니다. 

  폴 크루그먼은 대폭로에서 조지 부시 행정부를 ‘혁명 세력(A Revolutionary Power)’이라고 규정합니다. 그는 뉴욕타임스에 칼럼을 연재하면서 처음에 경제 문제에 대해 글을 쓰다가 점점 정치 문제에 대해 글을 쓰지 않을 수 없게 됐다고 했습니다. 바로 ‘급진적인 정치 운동이 부상하고 점증하는 지배력을 갖게 되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미국의 급진 우익이 백악관과 의회를 사실상 지배하고, 사법부와 미디어의 상당 부분을 통제하게 된 현실에 대해 그는 매우 깊은 우려를 나타냅니다.


  그는 이 같은 생각을 바로 이 책의 도입부에서 구체적으로 정리했습니다. 닉슨 행정부 시절 냉혈적인 국무장관이었던 헨리 키신저는 박사학위 논문 ‘되찾은 세계(A World Restored)’에서 1930년대의 전체주의 정권들에 대한 유화적 대응책의 실패를 비판합니다. 이때 그는 프랑스의 로베스피에르와 나폴레옹 치하의 정치 세력들을 ‘혁명 세력’이라고 규정하고, 1930년대의 전체주의 세력에도 같은 규정을 합니다.


  폴 크루그먼은 헨리 키신저의 이 박사학위 논문을 읽다가 부시 행정부 또한 기존 체제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세력이라는 점에서 ‘혁명 세력’이라고 규정합니다. 이들 혁명 세력들은 오랫동안 확립된 미국의 정치 및 사회적 제도들이 존재해서는 안 되며, 우리들 모두가 당연시하는 규칙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정부의 역할과 사회복지 프로그램의 확충 등을 단순히 줄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기본적인 (시장경제) 원칙에 위배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무력 사용을 전혀 주저하지 않습니다. 미국에 테러를 가한 적이 없는 이라크에 대해 선제공격을 감행한 것이 대표적이며, 시리아, 이란, 북한 등도 ‘악의 축’으로 묶어 같은 방식으로 다루려 했습니다. 미국 헌법의 근본 원칙 가운데 하나였던 정교 분리를 내팽개치고 ‘성경적 세계관’을 확산하는 것을 사명으로 삼았습니다. 정통성은 민주적 절차에서 나온다는 사상을 받아들이는지도 의심스럽습니다. 조지 부시 대통령은 이 나라를 이끌도록 신의 부름을 받았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런 여러 가지 사실들을 종합하면, 이들 혁명세력이 원하는 나라는 이렇습니다. ‘기본적인 사회 안전망이 없으며, 국가의 뜻을 해외에 관철하기 위해 무력을 사용하며, 학교에서 진화를 가르치지 말고 종교를 가르쳐야 하고, 선거는 형식적 치장물에 불고한 나라’ 말입니다.

        

  폴 크루그먼은 감세와 이라크 전쟁을 예로 들어, 이들 혁명세력이 어떻게 자신들의 뜻을 관철하는지 설명합니다. 우선, 감세는 90년대부터 공화당의 핵심 의제였습니다. 이들 혁명 세력들은 단순히 감세를 원한 것이 아니라 기존의 미국 조세체계의 분쇄를 목표로 했습니다. 이들은 제한된 승리에 절대 만족할 수 없는 세력입니다. 그들은 처음에는 세수 초과 환급을 명목으로 세금을 깎고, 세수 부족으로 전환됐을 때는 경기 부양책으로 세금을 깎고, 경기 부양 효과가 없음이 드러나자 장기적인 경제 성장을 촉진한다는 명목으로 세금을 깎습니다. 이라크 선제 공격론도 90년대초부터 폴 울포위츠, 딕 체니 등을 중심으로 제기되고 강화돼 왔습니다. 따라서 그것은 9.11테러라는 현 상황에 대한 대응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처음에는 사담 후세인과 알 카에다의 연계 혐의로 이라크를 침공했다가 그것이 거짓임이 드러나자 이번에는 핵개발 프로그램(대량 살상 무기라는 표현으로 확장합니다만)을 이유로 갖다 붙입니다. 나중에 이것조차도 설득력이 없음이 드러나자 이번에는 ‘민주주의의 확산’을 명분으로 갖다 붙입니다. 감세나 이라크전뿐만 아니라 에너지 정책과 환경 정책, 보건정책, 교육정책 등에 대해서도 같은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모든 경우에 부시 행정부는 그다지 급진적인 것처럼 보이지 않는 정책 논리를 제시함으로써 온건주의자들을 안심하게 합니다. 그리고 매번 온건주의자들은 (2차 대전 직전 나치 히틀러에 대해 영국 수상 리처드 챔벌린이 구사했던) 유화주의 전략을 따릅니다. 폴 크루그먼은 헨리 키신저의 통찰이 옳았다며 그의 말을 인용합니다. “안정에 익숙했던 사람들은 혁명세력을 맞닥뜨렸을 때 당시 발생하는 것을 어지간해서는 믿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혁명세력을 저지하는데 효과적이지 못했다.”


 이제 이명박 정부 집권 이후 한국 상황으로 돌아와 봅시다. 말로는 중저소득층용이라고 떠벌리지만 실제로는 철저히 부유층을 위한 감세안, 시장친화적인 부유세의 하나인 종부세의 시행 2년만의 유명무실화, 반공 기독교이념에 사로잡힌 철저한 대북 대결 구도 전개(그러면서도 자신들이 주인처럼 떠받드는 미국에조차 테러지원국 해제 조치에서 왕따당하는 얼간이들이죠), ‘서울시를 하나님께 봉헌하겠다’는 대통령과 소망교회 출신의 종교적 신념에 사로잡힌 ‘강부자/고소용 내각’, 녹색성장을 외치면서 태양광 발전 보조금을 깎고 원전 대규모 건설 계획을 밝히며 대규모 개발사업을 벌이는 반환경정부, 공교육을 사교육화하고, 사교육시장을 극대화해서 어린 학생들을 더욱 치열한 적자생존의 경쟁에 내모는 교육정책, 미분양 물량 매입과 건설 물량 만들기를 통한 ‘건설업자 복지’에는 열을 올리면서도 기존의 복지 예산은 삭감하는 거꾸로 정책, 종부세, 양도세 경감 등 부동산 부자들을 위한 집값 떠받치기로 일관하는 정책,  민주화 이후 진전돼온 천부인권적, 민주적 권리 및 제도 뒤집기 정책-군의문사위 해체, 국가인권위 압박, 집단 소송제 통한 집회결사의 자유 제한 강화, 인터넷 명예훼손죄 도입 시도, 권위주의정권식 방송 통제 시도, ‘건국 60년’ 표현 통한 헌법에 규정된 임시정부 정통성 부인과 뉴라이트 등 친일우파 집단의 등용, 친일우파적 시각에서 역사 교과서 수정 시도 등등 이루 다 열거하기 힘들 정도입니다. 이게 불과 이들이 집권한지 8개월도 안 돼 벌어진 일입니다. 이를 보면 이들이 한심한 저질 아마추어집단인 한편 자신들의 아젠다는 얼마나 노골적으로, 그러면서도 철저히 추구해왔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장기적으로는 이런 형편 없는 저질 정치세력을 정치적으로 심판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어쨌든 이들이 집권하고 있는 ‘암흑기’입니다. 이러한 시대를 어떻게 해석하고, 견디고, 대처해야 할까요? 폴 크루그먼 교수는 친절하게도 이에 대한 대응법까지 책에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뉴욕타임스 칼럼리스트로서 ‘부업(part-time) 저널리스트’인 자신이 생각하는 다섯 가지 ‘보도 준칙(rules for reporting)’을 책에서 소개합니다. 그는 “이 같은 규칙은 뉴스를 제대로 이해하려는 어떤 진지한 시민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고 말합니다. 저는 이 같은 규칙은 현재 한국 상황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 다섯 가지를 간략하게 소개해보겠습니다. 각각의 준칙에 해당하는 국내 사례를 제가 몇 가지 정리해봤습니다. 댓글을 통해 다른 분들이 의견을 달아주시는 것도 좋겠군요.

 

준칙 1. (이들이 내세우는) 정책안이 그들이 겉으로 내세운 목표에 부합한다고 가정하지 말라.

이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분명히 알고 있으며, 그 목표를 추진하기 위한 어떤 주장도 서슴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월스트리트 저널의 한 기자가 백악관 보좌관이 공개적인 자리와 사적인 자리에서 한 사안에 대해 정반대로 말한 것에 대해 해명하라고 하자, 그 보좌관의 답변은 이랬다. “왜 거짓말하느냐고? 그건 내가 해야 하는 일이야. 언론에 거짓말하는 것때문에 양심의 가책을 전혀 받지 않아.”


한국 사례: 철저한 부유층을 위한 감세안에 대해 중저소득층의 경제활력을 돕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 처음에 영어몰입교육 내세웠다가 이명박 대통령이 “영어몰입교육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된다”고 했으나, 서울시교육청을 통해 단계적으로 추진중.


준칙 2. 이들의 진정한 목표를 발견하기 위해 공부 좀 하라.

부시행정부는 감세안을 일자리 창출 방안으로 포장했지만, 단기적으로 감세안이 일자리 창출 수단으로 널리 인정하는 어떤 경제학 이론도 없다. 경제 성장은 사실 그들의 목표가 아니다. 급진 보수파들은 자본에 대한 모든 과세를 없애야 한다고 오랫동안 주장해왔다. 그것이 이 정부의 감세안이 실제로 이루려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 정책을 이해하는 방법은 그들이 대중들에게 그들의 계획을 선전하기 전에 이들 정책의 기획자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보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 정부에서 전직 목재 산업 로비스트 출신이 산림정책을 총괄할 때, 그 관리가 ‘건강한 산림’이라고 하는 말은 벌목 회사들이 더 많은 나무를 베는 것을 허용하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그런데 저널리스트들이 이런 문제를 다루는 것은 어렵다. 그들은 (급진 보수파의 진정한 의도를 드러내 강력히 비판함으로써) 편향적인 엉뚱한 음모이론가처럼 비치길 원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의 목적이 충분히 공개돼 있는 상황에서 어떤 음모가 개입돼 있지 않은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 더 비현실적이다.


한국 사례: 이명박 정부는 여론 조작을 위해 노골적으로 방송장악을 시도하고 있으나, 이를 언론의 편향성을 바로잡는 것이라고 주장. 최근의 역사 교과서 수정 논란이나 임시정부의 법통을 무시한 건국 60주년 표현 사용도 마찬가지. 


준칙 3. 일반적인 정치 규칙이 적용될 것으로 가정하지 마라.

워싱턴정가에서는 스캔들이 일어나면 언론이 떠들어대고 관리들은 사퇴한 뒤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부시 행정부 때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내무성 차관으로 일했던 석탄산업 로비스트인 스테펀 그릴은 예전 고객을 위해 개입한 사실이 밝혀졌지만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육군참모총장인 토마스 화이트는 엔론 경영진 시절 가공 이익을 만들어낸 사실이 밝혀졌지만 유임됐고, ‘이해충돌’ 사실이 드러난 국방정책자문위 의장인 리처드 펄도 마찬가지다. 왜 이런 일반적인 규칙이 적용되지 않는가? 기존 시스템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이들 혁명세력들은 규칙에 따라 경기를 펼쳐야 한다고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국내 사례: 언론장악대책회의를 열었던 최시중이나 이동관 유임, 땅투기와 표절 논란된 청와대 수석들과 장차관 대부분 그 자리에 있음. 자신들이 야당이었던 시절 같은 기준으로 사퇴 총공세를 펼쳤던 기준을 자신들에게는 적용 안 함. 하긴 법을 밥 먹듯이 어긴 범법자 대통령 밑에 있는 충복들이 조그만 스캔들에 움찔이나 하겠습니까?



준칙 4. 혁명세력은 비판에 대해 공격으로 반응한다.

혁명세력은 자신들의 행동에 대한 다른 이들이 비판할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다. 대신 의문을 제기하는 누구든 무자비한 역공을 받을 것을 기대해야 한다. 예를 들어, 2003년 당시 민주당 대선후보 선두주자였던 존케리가 “이라크뿐만 아니라 미국에서도 정권 교체를 해야 한다”고 한 말을 두고 공화당측은 “전시에 군통수권자의 교체를 요구했다”며 그의 애국심을 문제삼았다.


국내 사례: 촛불집회 유모차 부대까지 처벌, 조중동 광고 불매 운동 주도자 처벌, PD수첩 보도 제작자 징계 요구 및 검찰 수사 의뢰. 자신들이 더욱 이념적이면서 최근 경제위기까지 좌파 이념세력의 공세로 치부, 간첩단 사건 조작.


준칙 5. 혁명세력의 목표에 한계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지 마라.

끊임없이 이유를 바꿔가며 철저히 감세정책을 밀고 나갔던 부시 행정부에 대해 생각해보라. 온건주의자들의 유화적 대처가 그들의 목적을 끝까지 추구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라크 전쟁은 ‘부시 독트린’의 출발선일 뿐이었다. 결코 제한된 양보로 그들을 달랠 수 없다.


국내 사례: 방송장악 과정에서 YTN 낙하산 정도에서 그치지 않고 KBS로, 이제 신문방송 겸영 통한 조중동 특혜 주기와 MBC민영화 시도까지 나아가고 있는 행태.


물론 미국의 상황이 우리나라에 그대로 들어맞지는 않을 것입니다. 아니 어찌 보면 미국에 비해 한국의 여건은 훨씬 비관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국의 엘리트들은 거의 대다수가 민주당이나 무당파 성향으로 서민 복지 강화에 상대적으로 관대한 반면, 한국의 엘리트들은 대부분 우익 성향에 한나라당 지지자들입니다. 미국 사회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신문은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등 제대로 된 신문들이고 찌라시 언론들인 폭스뉴스 등은 주류라기 힘든 반면 한국에서는 찌라시 신문들이 가장 영향력 있으며, 이런 찌라시 관점을 방송에까지 도입하려 하고 있습니다. 부시행정부에서 미국에는 민주당이라는 매우 강력한 야당이 있었으나, 지금 한국에는 존재감과 정체성마저 희미한 민주당과 소수 정당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한국의 상황은 더욱 암울하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희망도 있다고 봅니다. 지금의 한국 정부는 훨씬 더 엉터리 정부여서 대중들이 그들의 진정한 목적을 깨닫기 시작했다는 것, 더구나 현재의 경제위기 상황을 제대로 대처할 능력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는 것이고요. 또한 조중동 등 주류 신문들의 거짓말이 들통나 신뢰가 바닥으로 추락한 반면 20, 30대 젊은 세대들을 주축으로 인터넷상의 집단지성을 통해 진실을 깨달아가고 있다는 것일 겁니다.


저는 소위 친노도 아니고, 지금의 민주당이나 민주노동당 같은 정치세력들에서 희망을 보지도 않습니다. 지금의 시대착오적 이념에 빠져 있는 엉터리 급진 보수세력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해 서민들을 착취하고 있는 상황에 대해 분노할 뿐입니다. 그리고 기득권 중심의 불공정한 게임의 룰이 적용되는 한국사회를 근본적으로 개혁할 수 있는 새로운 정치세력이 나와야 한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폴 크루그먼이 책에서 인용한 구절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CBS의 60분 진행자인 앤디 루니의 말인데요. “단 하나의 진정으로 좋은 뉴스는 미국역사에서 이 끔찍한 시간이 끝나는 것”이라고요. 저는 이 말에 조금 살을 덧붙이고자 합니다. “단 하나 진정으로 좋은 뉴스는 한국 역사에서 이 끔찍한 시간이 끝나는 것, 그리고 정말 제대로 된 민주주의 시장경제를 건설할 역량이 있는 정치세력이 성장해 집권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 토대를 지금부터라도 조금씩 준비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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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올린지 하루만에 덧붙입니다. 우선, 많은 분들의 격려와 호평에 감사드립니다. 이번 글보다 더 많은 조회수를 기록한 글도 있지만, 이번 글처럼 열렬한 댓글 반응을 받아보기는 처음인 것 같습니다. 그만큼 지금의 상황에 대해 암울하고 답답한 심정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글에도 썼지만 정말 함께 이런 시대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을 모색했으면 합니다. 어떤 분께서 '김광수경제연구소와 관계도 없으면서 왜 태그도 달고, 연구소를 이용하느냐'고 하셨는데요. 저 연구소와 관계 없지 않습니다. 저는 연구소에서 부소장직을 맡고 있는 선대인이라고 합니다. 다만 이 글은 제 개인 자격으로 쓴 글인데다 정치적 논평 성격이 짙어서 혹여라도 연구소의 공식 입장으로 읽힐까봐 우려돼 주의사항을 달아놓은 것입니다. 오해마시길 바랍니다.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저희 연구소는 시간이 갈수록 각계에서 많은 분들로부터 그 실력을 인정을 받고 있습니다. 특히 저희 연구소는 관료들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정부 산하 연구소나 재벌들 눈치보는 재벌계 연구소와 다릅니다. 일반 서민과 국민 경제 전체의 관점에서 독립적이고 객관적인 연구를 통해 제대로 된 민주주의 시장경제를 일구는데 기여하고 사회의 정책 품질을 높이려 하는 민간 싱크탱크입니다. 또한 기회가 된다면 저희 연구소의 컨텐츠를 중심으로 치우침이 없으면서도 많은 국민들이 필요로 하는 수준높은 미디어를 구현할 계획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작업은 저희 혼자서 할 수 없습니다. 저희 취지에 공감하는 많은 분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많은 분들이 도와주실수록 저희가 계획을 실행에 옮기는 시간도 빨라질 것으로 믿습니다. 우선은 저희 포럼에 오셔서 좋은 정보들 공유하시고 한국 사회의 올바른 진로에 대해 함께 고민해주시는 것도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이 글에 보내주신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꾸벅^^ 

 

 

제가 최근 출간한 책<부동산 대폭락 시대가 온다>입니다. 부동산 문제는 한국 언론의 왜곡보도가 가장 심한 영역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책이 현재 한국의 부동산 시장을 올바로 이해하고, 엉터리 정부 정책과 언론의 잘못된 보도를 꿰뚫어보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믿습니다. 관심 있는 분들의 일독을 권합니다.

 

같은 글을 김광수경제연구소포럼( http://cafe.daum.net/kseriforum)의 '정치개혁'방에도 띄웠습니다. 더 많은 토론과 정보 공유를 원하시는 분들은 포럼을 방문해 주십시오. 이 글은 김광수소장님이 쓰신 글이 아니며, 연구소의 공식적인 입장도 아님을 주지하시기 바랍니다.  

펌 주소
http://bbs1.agora.media.daum.net/gaia/do/debate/read?bbsId=D101&articleId=2083162&RIGHT_DEBATE=R6&t__nil_agora=uptxt&nil_id=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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盧 “보수의 7대 거짓말은 조중동의 논리이자 강자의 논리”

 

 

盧 “보수의 7대 거짓말은 조중동의 논리이자 강자의 논리”
 
한국정치학회와 인터뷰 “자유의 지향점은 평등, 그것이 진보”
 
입력 :2008-10-16 23:14:00  
 
 
   
 
  ▲ 인터뷰중인 노 전 대통령.ⓒ한국정치학회   
 

[데일리서프 하승주 기자] 노무현 전 대통령은 "세금을 감면하면 경제가 성장한다, 성장만 하면 일자리가 생긴다, 성장을 하면 모두가 잘 산다, 정부가 작아져야 국민들이 잘 산다, 규제를 풀어야 국민이 잘 산다, 민영화하면 공공요금이 내려간다, 시험 잘 치는 사람이 똑똑하다는 등 7가지는 보수주의의 7대 거짓말"이라면서 "그것은 조중동의 논리이자 강자의 논리로 근거 없는 거짓말"이라고 지적했다.

노 전 대통령은 한국정치학회가 지난 14일 공개한 소식지 32권 3호에 실린 인터뷰에서 이같이 지적하고 "그렇다고 그 비판을 현정권에 하고싶지는 않다"고 밝힌 뒤 "다만 현 정권 또한 제도를 바꾸지 않고 규범을 지키지 않은 상태에서 권력기관을 동원해서 정책을 결정하고 추진하려는 마인드로 국정을 운영하는 것은 민주주의 측면에서 위험한 태도"라고 지적했다. 이 인터뷰는 지난달 21일 봉하마을의 노 전 대통령 사저로 이정희 한국정치학회 회장 등이 방문해 3시간에 걸쳐 이뤄졌다.

노 전 대통령은 "우리 사회의 진보진영은 숫자로나 사회적 세력을 형성하는 토대의 측면에서, 즉 자본권력 정치권력 미디어 조직의 측면에서 너무 취약한 것이 사실이고 사회적 균형이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면서 "진보와 보수의 세력적 토대가 너무 불균형하기 때문에 사회적 균형을 이루는 것이 시급히 요청이 되고 현정권도 이런 점을 인식하고 노력해야한다"고 강조했다.

노 전 대통령은 "정치가 국민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것이다고 말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며 "장기적인 관점에서 그런 목적을 추구해가야만 비로소 정치를 하는 목적에 이른다"고 강조햇다.

그러면서 노 전 대통령은 "경제나 정치 모두 짧게 볼수록 망한다. 장기적이고 거시적인 안목을 가지고 현실을 평가했으면 좋겠다. 정치에 있어서도 물론 역대 대통령들이 많은 공로들이 있지만 과오가 뒷사람들이 감당하기에 너무 어려운 짐을 남겨주어서 아무리 노력해도 과오를 치유하기 이려운 경우도 있었다고 본다. 그래서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회복하지 못할 오류를 범하지 않은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이명박 대통령에 대해 우회적으로 충고하기도 했다.

노 전 대통령은 특히 그동안 강조해왔던 지역주의 극복과 관련한 열린우리당의 실패과정, 자유와 평등과 진보의 개념 등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털어놓아 관심을 끌었다.

노 전 대통령은 지역주의 문제와 관련, "(재임 당시) 지역주의 극복을 위한 제도화 방안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으나 결과적으로 실패했다"며 "지역주의는 언론과 함께 국민의 정치적 판단을 왜곡시키는 메커니즘의 하나로, 지역주의 구도를 갖고 계속 정치하겠다는 것은 정권을 잡는 것을 포기하겠다는 것"이라고 지적햇다.

그러면서 "김영삼 전 대통령의 3당 통합으로 민주당은 호남당이 됐다"며 "호남이 단결하면 이기느냐. (국민은) 투표 순간에 정책보다 지역 감정을 먼저 선택한다는 것"이라며 "열린우리당은 의미 있는 정당이었으며 정치 지도자들의 상식 밖의 행동이 없었더라면 붕괴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밝혔다.

다음은 주제별 노 전 대통령의 인터뷰 내용 요지.

▲ 지역주의와 열린우리당의 창당시도와 실패 = 미국에 인종주의가 작용하듯이 한국에 있는 것은 지역주의를 꼽을 수 있다. 지역주의 극복할 수 있는 제도적 방안을 고민했지만 결과적으로 실패했다. 탈지역주의를 목표로 한 정당이 붕괴했고, 저는 개인적으로 아쉬운 점이 있다. 그래서 나는 "국정운영에서는 할만큼 했다. 그렇지만 정치적으로는 좌절했다" 는 식으로 정치적 좌절이란 표현을 사용하기도 한다.

정치에서 권력을 잡는다는 것은 두가지 의미가 있다. 우리 정파가 승리해서 권력을 잡는다는 정치적 목적이 하나라면 다른 하나는 우리 정파가 이기되 어떤 방법으로 이기느냐에 따라, 즉 어떤 게임판에서 어떤 법칙 위에서 어떤 방법으로 이기느냐에 따라서 우리가 이기는 것이 퇴보가 될 수도 있고 진보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고려하는 것이다.

나는 정치에서 이기는 것이 매우 현실적인 목표인 것을 부인하지 않지만 이기는 방법이 민주주의 발전을 지향하고 있어야 이기는데 의미가 있다고 본다. 그러나 그 당시 민주당으로서는 이기지도 못하고 구조적으로 정치발전을 가로막는 구도에 안주하는 정치를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그 이유가 뭐냐. 지역주의 정치 때문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3당 통합을 통해서 남은 민주당을 호남당으로 만들어버렸다. 그 역사적 질곡을 결국 벗어나지 못한 데다 한나라당이 영남에서 그런 것처럼 민주당도 호남에서 경쟁없이 계속 선거에서 이기게 되니까 이미 지역에서 기득권을 누리는 정당의 체질로 변해버렸다.

처음에는 호남당을 강요당했는데, 그 강요된 구조 속에서 정치인들이 독점적 이익을 누리고 호남을 독식하는 기득권을 갖게 된 것이다.

그러면 호남이 단결하면 이기느냐.1997년 대선에서 이회창 이인제 두 후보가 얻은 표가 김대중 후보보다 500만표가 더 많았다. 신한국당이 국가를 부도내고도 그 당 출신의 후보들이 500만표를 더 받은 그 이유가 뭐냐. 투표할 때 그 중요한 순간에 정책보다 지역감정을 먼저 선택하는 것이다. 영남과 비교해서 호남은 인구수에 있어서 상대가 안되고 소선거구제에서 소수에다 표의 효율성마저 떨어지는 구조를 갖고 있다.

호남의 민심과 호남 정치인들의 정책이 보다 진보적인 것은 사실이나, 지역주의 구도를 가지고 계속 정치하겠다는 것은 전국정당이 된다는 것, 정권을 잡는다는 것을 포기한 것이다.

그와 같은 정당을 가지고 민주주의로, 진보로 갈 수 있느냐, 이는 불가능하다. 그러면 새로 정당을 만들면 될만한 여건이었느냐. 확실하게 안되는 것보다는 될 수도 있는 정당을 선택한 것이니까 현실적으론 당연한 선택이었다. 어떻든 우리 시대의 이상에 준거해서 정치적 목표를 내걸었던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열린우리당은 의미있는 정당이었고 결과적으로 깨지기는 했지만 정치 지도자들의 상식 밖의 행동이 없었더라면 붕괴되지 않았을 것이다.

▲ 민주주의 발전과 진보주의와의 관계, 진보 내에서의 자유와 평등에 대해 = 장기적 관점에서 우리에게 국가적 과제란 민주주의를 좀더 다져나가는 것, 민주주의를 좀더 발전시킨다는 것에 모든 것이 들어있다고 생각한다. 민주주의에 내재하는 가치 하나나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의 수준도 좀더 높여야하고 다음으로는 한국의 진보주의가 확대, 강화되어야 한다.

진보주의는 민주주의의 보다 심화된 목표를 포함한다. 민주주의가 자유와 평등인데, 물론 평등에도 여러 가지 해석이 많다. 다만 진보라는 것이 평등이라는 가치를 추구해야 하는 것이다. 진보의 핵심은 연대라고 볼 수 있지만, 그것은 전략적인 것이고 진보가 추구하는 목표가 뭐냐고 했을 때 그것은 평등한 사회라고 본다.진보주의란 것은 별게 아니라 민주주의에 내재하는 가치다.

가끔 한국사회에서는 평등주의에 대해 별로 호의적이지 않는 반응을 보이기도 하기 때문에 평등이란 가치를 좀더 풀어 설명하고 싶다. 자유를 강조하면 평등이 희생되고 평등을 강조하면 자유가 희생된다는 주장을 볼 수가 있는데 나는 그 해석에 반대되는 입장을 갖고 있다.

자유라는 것은 지배로부터의 자유를 말하는 것이다. 자유라는 개념은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개념이고 사람과의 관계가 수직적인 지배관계가 될 때 자유라는 개념이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 지배관계가 존재함으로써 그에 대한 저항적 개념으로 자유가 등장하는 것이고, 지배구조라는 것은 이미 불평등한 구조를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자유의 전제조건은 평등이다. 평등은 자유의 뿌리이기 때문에 진보는 평등을 추구하는 것이 된다. 자유와 평등을 갈등적인 개념으로 말하는 사람들은 이미 시장에서 강자이고, 평등을 강조했을 때 제한받는 자유는 지배자의 자유, 기득권의 자유를 말하는 것이다. 속박으로부터의 해방, 즉 자유를 추구하는 사람들의 지향점은 평등이어야 하고, 그 가치야말로 진보라는 것이다.

지금 사람들의 관심이 경제에만 집중되어 있는데 당장의 문제에 너무 집착하고 있다. 장기적으로 진보라는 관점에서 가치의 실현, 실천을 추구해 나가면 그것이 국가적 차원에서 안정된 목표가 될 수 있다.

▲ 교육문제 = 외고제도와 관련한 개혁을 임기초기에 밀어부쳤어야 하는데 타이밍을 놓쳤다.

국가시험에 의한 점수로 선발하는 제도를 해체해보려 했는데, 개혁을 본격적으로 추진하려 했던 시점이 늦었고, 아울러 특목고가 글자 그대로 특목고로 되돌아가게 즉, 특목고가 입시학원으로 전환되는 것을 강력하게 막았어야 했는데 시기를 놓쳤다는 것이 제일 후회되는 부분이다.

이후에 그 교육정책을 가지고 논쟁할 때 이미 국민들에게 저의 설득력이 떨어졌고, 게다가 조중동이 대학자율이라는 입시제도를 부각시켜 대대적으로 홍보할 때 그것에 대처해서 대응논리를 마련하는 것이 어려웠다.

▲ 선거제도와 행정구역 개편 = 선거구제도의 전환을 위한 노력을 정치학자들이 적극적으로 해주었으면 한다. 현재의 소선거구제는 대표성과 국민의 의사를 크게 왜곡하는 제도이고, 종국에는 정치적 양극화를 가져오는 요인이다. 특히 지역주의와 결합되어 더욱 안좋은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한다.

이번에 행정구역 개편 이야기가 나오고 있지만, 과연 현실적으로 가능할까 국회의원들의 지역구 이해관계에 맞물린 내용이라 과연 가능할까 걱정이 되기도 한다. 선거구제도가 바뀌면 국민들의 정치적 의사가 정책에 반영될 수 있는 통로가 좀더 가까워지고 국민들의 정치적 선택이 정책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다는 생각을 재임 중에도 많이 했다.

선거구 제도를 바꾸는 것은 국민들의 정치적 선택이 정책적 이해관계를 기반으로 이뤄질 수 있도록 장애물 하나를 없애는 것일 수 있다. 더 나아가 국민들의 정치적 의사가 제대로 반영되기 위해서는 정책에 대한 이해관계를 명료하게 판단할 수 있게끔하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이는 결국 정치권력, 언론, 국민들의 삼각구도에서 누가 주도권을 잡느냐 하는 문제라고 볼 수 있다.

▲ 민주주의 2.0 개설 = 독재에서 민주주의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언론의 긍정적인 역할이 컸지만 현재는 언론권력이 민주주의 발전에 오히려 장애가 되는 상황이다.

시장권력과 언론권력이 결탁하거나 일체화됐기 때문에 언론권력이 민주주의의 중대한 위협으로 등장했다. 강한 자, 기득권자를 중심으로 이들이 규칙을 만들고 경쟁을 주장하는 현재의 시장경제의 논리를 언론이 옹호하는 것도 문제가 심각하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국민의 노력으로 언론권력의 횡포를 극복하고 자율적이고 다양한 매체를 만들어 나간다면 시민주권의 시대가 좀 더 빨리 오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한다.

최근 민주주의 2.0이란 사이트의 내용을 구상하게 된 것도 그러한 맥락에서 나온 것이고 민주주의가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하승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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