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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틀즈와 히피 문화
들어가면서
존 레논이 죽었을 때 당시 보수주의자 리차드 E. 쉬머혼(Richard E. Schermerhorn) 상원의원은 다음과 같이 레논에 대한 추모 열기를 비판했다.
"젊은이들에게 마약을 조장하는 노래따위를 작곡한 사람에게 신문마다 대서특필하는 것이 당황스럽다. 존은 히피 운동의 리더(a leader of hippie movemnet)였고 젊은이들을 타락시킨 장본인이라고 생각한다."
미국을 대표한다는 한 상원의원과 대중들의 인식은 존 레논이 히피의 지도자라고 생각하는 점에서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보수주의자 상원의원에게는 히피의 지도자란 곧 젊은이들을 그릇된 길로 인도했다는 비난의 대상으로 사용했을 뿐이다. "히피"란 과연 무엇이고 역사적으로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가에 대해 위의 예에서 알 수 있듯 관점에 따라 크게 달라질 수 있다. 이는 히피에 대한 인식이 다양하며 히피를 바라보는 시각차가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1. 히피의 기원
모든 사회 현상이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듯 히피 역시 60년대에 갑자기 일어난 사회 현상은 아니었다. 멀리는 19세기 말의 보헤미안에서부터 가깝게는 50년대 말 비트 세대(Beat Generation, Beatinik)로 이어지는 반문화주의(countculture)의 연장 선상에 있는 것이다.
히피라는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비트 세대에 대해 살펴보아야한다.
비트 세대란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뉴욕의 콜롬비아 대학생들의 문학 운동으로 시작하여 50년대 미국 문학의 한 축을 차지했던 사조로 앨런 긴스버그와 잭 케루악 등이 대표적인 작가였다. 이들은 현대 사회에 대한 저항했으며 무정부주의에 가까웠다. 또한 취직과 가정같은 중산층 이데올로기에서 탈피하여 개인주의적이었으며, 술과 마약, 파티 등 보헤미안 예술가적인 기질이 짙었다. 이들에 대해 뉴욕시는 체포와 정신병원 감금 등 박해를 가했고, 몇몇 비트 세대들은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하게 되었다.
시인 로렌스 페링게티는 이러한 비트 세대들을 돕기 위하여 샌프란시스코에 시티 라이츠라는 이름의 책방을 차렸는데, 이 책방은 단지 책을 팔기 위함이 아니라 출판 업무도 겸하는 등 물심양면으로 비트 세대들의 안식처가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비트 세대들의 모습은 근처 젊은이들에게는 하나의 동경의 대상이었다. 곧 그들처럼 옷입고 행동하고 말하는 일련의 젊은이들이 나타나게 되었으며 비트 세대들은 이들을 '히피'라고 부르기 시작했던 것이다.
2. 재즈 VS 록큰롤
비록 비트 세대로부터 히피가 시작되었지만 히피는 비트 세대와는 엄연한 차이가 있었다. 가장 큰 차이 중 하나는 바로 음악이었다. 비트 세대는 기본적으로 재즈를 즐기는 세대였다. 재즈는 탄생 초기에는 하위 문화였으나 5~60년대에 들어서면서는 상위 문화나 마찬가지였다. 비트 세대 역시 찰리 파커, 디지 길레스피, 마일즈 데이비스같은 재즈 뮤지션의 음악을 즐겨 들었으며 당시 젊은이들의 새로운 음악이었던 록큰롤에는 빠져들지 않았다. 지식인들이 중심이었던 비트 세대로서는 사랑 타령이나 하는 록큰롤의 가사가 유치하게 여겨졌고 애들이나 듣는 음악이라는 생각이 강했던 것이다. 이러한 비트 세대의 음악에 히피들은 찬동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 상대적으로 나이 어린- 히피들에게 재즈란 부모님들의 음악이었기 때문이다. 무언가 '쿨'하고 새로운 것을 찾는 히피들에게 기성 세대의 음악을 즐긴다는 것은 전혀 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은 재즈보다는 새로운 음악을 찾게 되었지만 이미 엘비스로 대표되는 미국의 초기 록큰롤은 가사 상태나 마찬가지였다. 마땅한 대안이 없었던 것이다.
이때 등장한 것이 바로 비틀즈였다.
3. 비틀즈의 등장
미국 역사에 있어 1964년은 대단히 중요한 해로 기록될 것이다. 63년 케네디의 죽음으로 국가 전체가 활력을 잃고 침울한 미국인들에게 64년 2월 7일 팬암 항공기를 타고 뉴욕 공항에 내린 네 명의 젊은이들은 그야말로 새로운 활력소였다.
그들은 젊고, 생기발랄하고, 재치있고, 거침없었으며 스스로 연주하며 노래도 불렀다. 그리고 무엇보다 미국인들의 주목을 끈 것은 그들의 헤어스타일이었다. 엄격한 청교도 문화가 지배하는 미국 사회에서 장발은 일종의 반항이었다. 록큰롤이 반항의 음악이라고 한 것은 가사와 춤, 옷이었을 뿐 헤어스타일은 귀가 훤히 드러나게 보이는 이른바 '귀두컷'이었다. 반항의 상징으로 여겨지던 엘비스 프레슬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군대까지 입대한 엘비스는 더 이상 반항의 상징은 아니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등장한 비틀즈의 헤어스타일은 문자 그대로 문화적 충격을 안겨주었다. 지금의 기준으로 본다면 오히려 짧기까지 하지만, 64년 당시 그들의 머리는 충격적으로 길었던 것이다. 말론 브란도, 제임스 딘같은 마초적 이미지의 반항아들이 인기를 모았던 미국 사회에 마초적 이미지보다는 오히려 중성적인 이미지에 가까운 비틀즈는 새로운 반항의 상징이 되었고 그 장발은 반항아들의 상징이 되었던 것이다.
미국의 젊은이들은 너도나도 머리를 기르기 시작했고, 비틀즈가 가져온 새로운 록큰롤이야말로 자신들의 음악이라고 여겼다.
(아마도 부모님들은 아래 사진의 비틀즈를 원했을 것이다.)
4. 히피의 성장
1965년에 이르면서 히피들이 서서히 미국 전역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비트 세대들이 뉴욕과 샌프란시스코라는 지역 사회의 유행이었다면 히피는 보다 광범위하게 전파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히피들은 - 물론 통일된 강령이나 지도자는 없었지만 - 장발, 록큰롤 그리고 공민권 운동을 모토로 삼았다.
히피뿐 아니라 1960년대 미국 사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공민권 운동(Civil Rights Movement)를 빼놓을 수 없다. 55년 미국 앨라배마 주의 몽고메리에서 백인 승객 자리에 앉았다고 체포된 로자 파크스가 법원 출두 명령을 거부하고, 이러한 '분리 평등 원칙'에 항의하는 흑인들의 모임을 주도한 27살의 젊은 목사 마틴 루터 킹 목사가 몽고메리 시 버스 보이콧 운동을 시작하면서 미국 남부 전역으로 흑인 민권 운동은 퍼져나갔다.
히피가 미국 사회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66년이었다. 그전에도 히피라고 불리운 젊은이들이 있었지만 - TV에서 처음으로 히피라는 말이 등장한 것은 1964년이었다. - 일회성에 가까웠고 언론에서 히피라는 말이 빈번하게 쓰이기 시작한 것이 바로 샌프란시스코의 헤이트 애쉬 버리에 모여 함께 살던 젊은이들 덕분이었다. 이들은 디거(Digger)의 도움으로 뚜렷한 직업없이도 공동체 생활을 함께 하면서 그들의 이상을 펼쳐나갈 수 있었다.
(여러가지 히피들의 복장)
5. 히피의 이념
히피는 그 추종자만큼이나 다양한 사상을 내세우고 있어 통일된 이념이라고 총칭하기가 어렵다. 또한 어느 한 명의 지도자가 이끈 것도 아닌 동시다발적으로 생겨난 흐름으로 섣불리 일반화하는 오류로 빠지기가 쉽다. 그렇지만 그래도 히피라고 부를 수 있는 그 공통분모를 찾는다면 다음과 같지 않을까 생각한다. (하나 하나마다 따로 써야할만큼 복잡다단하지만 편의상 개념들만 정리해본다.)
정통 기독교에서 벗어난 신비주의, 동양 철학과 종교에 대한 관심, 개인주의, 공동체의식, 장발, 긴 수염, 누드, 파격적인 의상, 꽃, 소극적 저항, 마약, 성해방, 자연으로의 복귀, 산업사회로부터의 일탈, 탈권위주의... 그리고 '사랑'
6. 비틀즈와 히피
비틀즈는 분명 히피의 지도자는 아니었다. 폴 매카트니도 인정하듯이 비틀즈 역시 60년대의 거대한 흐름에 동참하고 영향을 받은 그룹이었지 결코 60년대의 사상을 주도적으로 이끌어가는 지도자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많은 히피들은 당시 수많은 젊은이들과 마찬가지로 비틀즈에게 많은 기대를 걸었고, 비틀즈를 자신들의 대변자라고 여겼다. 비틀즈를 영원히 히피와 떼놓을 수 없게 만든 앨범이 바로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였다.
7.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앨범(이하 페퍼상사)은 책 한 권을 써야할만큼 할 이야기가 많다. (실제로 전체가 페퍼 상사 앨범에 대한 글로 채워진 책도 캠브리지 대학 출판부에서 발간된 적이 있다.)
이른바 'Summer Of Love'라고 불리운 1967년 히피 운동은 미국 전역에 퍼져나갔다. 새해 벽두인 1월 14일 골든 게이트 파크에서 열린 휴먼 비 인(Human Be In) 행사가 열렸다. 비트 세대의 시인 앨런 긴스버그, LSD를 통한 자아로부터의 해방을 주장한 티모시 리어리, 사회 운동가 제리 루빈, 반전 운동을 한 코메디언 딕 그레고리, 진정한 히피 그룹 그레이풀 데드, 퀵 실버 메신저 서비스 등 저항 문화를 이끌었던 거두들이 함께 모여 노래와 춤, 그리고 평화를 주창했던 것이다. 전 미국의 언론들이 대서특필하면서 샌프란시스코로 미국인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Human Be-In 행사에서 춤을 추는 앨런 긴스버그)
마마스 앤 파파스의 존 필립스는 이러한 열기에 휩싸여 20분만에 샌프란시스코라는 노래를 작곡하였고 스콧 매켄지가 5월에 발표한 이 노래는 그야말로 히피들의 송가가 되었다. "샌프란시스코에 올때는 머리에 꽃을 꽂으세요."로 시작되는 이 유명한 가사는 전 세계적인 인기를 모았고 샌프란시스코 역시 히피의 성지가 되었다. 그리고 그 해 여름 수천 명의 히피들은 샌프란시스코로 모여들었고 이러한 놀라운 현상은 'Summer Of Love'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러한 'Summer Of Love'의 분위기를 완벽히 이끌어 준 앨범이 바로 페퍼상사였던 것이다. 비록 비틀즈 자신들은 히피들과 동참하지도 않았고 스스로 히피라고 자칭하지도 않았다. 물론 앨범 역시 히피들을 염두에 작곡한 것도 아니었으며 히피들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노래도 없었다. 사실 페퍼 상사는 사회성이 지극히 결여된 앨범이었다. 베트남전과 흑인 폭동, 여성 해방 운동, 히피 등 60년대 중반 폭풍처럼 불어닥친 이 열기속에 비틀즈는 동참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지만 페퍼 상사 앨범의 사이키델릭한 곡들은 수많은 젊은이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이야기를 한다고 생각케 했다. 게다가 앨범 자켓에서 보여지는 수많은 꽃들(flower movement라는 말이 있듯이 히피와 - 평화를 상징하는 - 꽃은 매우 깊은 연관이 있다.)은 당시 히피 문화를 보여주고 있었다.
With A Little Help From My Friends는 마약의 도움을 칭송하는 곡으로 (특히 I get high는 마약으로 인한 흥분 상태를 가리킨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Lucy In The Sky with Diamonds는 LSD를 의미하는 제목과 뜻모를 가사를 통한 신비주의(여기에는 루이스 캐롤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히피와 공통분모가 된다.) Getting Better에서 보여지는 낙관주의는 히피의 긍정적 사고방식을, She's Leaving Home은 히피 소녀의 이야기로, Within You Without You는 동양 철학과 동양 음악으로의 관심을, 그리고 A Day In The Life는 이 혼란스러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네 일상의 모습을 심판의 날처럼 묘사함으로써 격동의 60년대를 그대로 보여주는 작품이라는 평을 받았다.
물론 히피들만이 이 앨범을 칭송한 것은 아니었다. 거의 절대다수의 사람들이 이 앨범을 찬양했으며 이는 기성세대도 마찬가지였다. 드디어 하위문화로서의 록큰롤이 상위문화를 점령한 것이다.
(페퍼 상사의 영광은 하위 문화의 위대한 승리였다.)
8. All You Need Is Love
페퍼 상사 앨범이 간적접인 방식으로 히피와 관련을 맺었다면 보다 직접적이고 결정적으로 히피와 비틀즈가 묶이게 된 계기가 바로 'All You Need Is Love'라는 곡이다. 1967년 전 세계 최초의 위성방송 프로그램인 'Our World'에 출연한 비틀즈는 히피에 가까운 복장으로 꽃으로 장식된 스튜디오에서 여러 사람이 참여하는 가운데 이 노래를 불렀고, 이 모습은 전세계로 방송되었다.
'오직 필요한 건 사랑뿐'이라는 단순한 가사가 주는 효과는 실로 막대했다. 이 폭풍노도의 시대에 비틀즈가 세상에 주는 메시지라는 평가를 받으면서 전 세계 젊은이들은 비틀즈에게 다시 한 번 열광하게 되었다. 그리고 히피들의 송가가 되었다. 물론 모든 히피들이 이 노래를 좋아한 것은 물론 아니었다. 그렇지만 히피 사상의 핵심인 '사랑'을 해결책으로 제시하고 있는 비틀즈를 심정적으로나마 자신들의 편이라고 생각하기에 이 곡은 충분했다.
(All You Need Is Love는 히피의 송가가 되었다.)
9. 조지 해리슨의 헤이트-애쉬버리 방문
1967년 8월 8일 Summer Of Love가 한창인 때, 조지 해리슨은 아내 패티 보이드와 함께 샌프란시스코의 헤이트-애쉬버리를 방문했다. 수천 명의 젊은이들이 모여 히피의 이상을 노래하고 있는 곳을 방문한 것이다. 그곳에 모여있는 히피들은 조지 해리슨에게 커다란 동질감을 느꼈다. 너도나도 다투어 조지의 곁으로 몰려왔고, 조지 해리슨의 표현을 빌리자면 '마치 메시아가 온 것같은 환영'을 받았다.
(히피의 성지 헤이트-애쉬버리를 방문한 조지 해리슨 부부)
조지 해리슨은 일찍이 인도 철학에 매료되었고 특히 인도 음악에 깊은 관심을 보여온 멤버였다. 비틀즈의 멤버들을 데리고 마하리쉬 요기의 강의를 듣게 한 것도 조지이고 보면, 그곳의 히피 역시 조지 해리슨을 자신들의 지도자로 여겼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조지는 그곳에 모인 히피들이 '진정한' 히피가 아니라 히피 흉내를 내려는 철부지들도 상당수 있다는 것을 목격하고 실망했으며, 너도나도 건네주는 마약에 당혹하기도 했다. 안전에 두려움마저 느껴 서둘러 그 곳을 빠져나왔지만 히피의 성지에 방문한 유일한 비틀즈 멤버로서 조지는 히피들이 가장 친근함을 느끼는 비틀이었을 것이다.
10. Magical Mystery Tour
한 곡 한 곡과 히피와 연결짓기에는 좀 무리가 따르지만 영화 'Magical Mystery Tour'는 분명 히피에 영향을 받은 부분이 있었다. 물론 비틀즈 스스로는 히피의 영향을 관련지은 적은 없었지만, 일련의 무리들이 버스를 타고 여행한다는 설정은 분명히 '이동성'이라는 면에서 히피와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앞서 샌프란시스코를 히피들의 성지라고 이야기했듯이 히피는 샌프란시스코뿐만 아니라 미국 전역을 이동하면서 자유를 만끽했으며 이러한 '이동성'은 히피의 특성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영화 Easy Rider를 떠올리면 더욱 이해가 빠를 듯 싶다.)
Blue Jay Way는 동양적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음악이라는 점에서 역시 히피와 연관지을 수 있으며, 사이키델릭의 위대한 곡인 I Am The Warlus 역시 기존 음악 문법을 벗어나고 있다는 점에서 히피들의 반권위적이고 탈기성문화적인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좀 무리하게 이야기한다면 The Fool On The Hill은 히피들을 바라보는 기성 세대에 대한 일종의 답가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11. Come Together
69년 발표된 존 레논의 빛나는 걸작 Come Togther는 당시 베드 인 해프닝으로 (Bed-In에서 In은 위에서 언급한 Human Be-In의 In을 따온 것이다. Human Be-In이후 어떤 행사에 In을 붙이는 것이 유행처럼 되었기 때문이다.) 반전 운동의 기치를 높이 들었던 레논이 히피의 대부인 티모시 리어리의 주지사 선거를 위하여 만든 노래이다.
가사 곳곳에서 보여지는 모습은 히피의 복장 그대로라고 할 수 있을 정도며, Come Togher를 외치는 부분은 사상으로 맺어진 사해동포주의를 여실히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I Want to Hold Your Hand를 부르던 레논이 이토록 성장한 것이다.
끝마치며
지금까지 수박겉핥기식이지만 비틀즈와 히피의 관계를 나름대로 정리해보았다. 이제껏 비틀즈를 히피의 지도자 혹은 대변인이라고 부르지만 실제 어떠한 관계였는지에 대해서 접근할 만한 자료가 없었기 때문에 부족하나마 장님 코끼리 다리 만지는 식으로 더듬어 보았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비틀즈와 히피라는 주제로 접근했기 때문에 우드스탁이라든가, 밥 딜런, 제퍼슨 에어플레인, 제니스 조플린, 도어즈, 지미 헨드릭스 등 히피 문화의 거장들을 함께 조명하지 못한 점이다. 또한 히피에서 파생되었다고 할 수 있지만 히피와는 분명 구별되어야 하는 급진주의자들과의 관계도 짚어가지 못했다. 'Revolution' 발표 후 진행되는 비틀즈(특히 존 레논)과 신좌익주의자들의 논쟁과 갈등은 60년대에 비틀즈가 어떤 의미였는가를 이해하기 위해서 꼭 건드려야할 부분이기 때문이다.
폴 매카트니의 말대로 '대변인'은 될 수 있을지언정 비틀즈와 히피의 관계는 결코 지도자와 추종자의 관계는 아니었다. 비틀즈가 히피에게 준 영향이 있다면 히피 역시 비틀즈에게 영향을 주었다. 모든 사회 현상과 마찬가지로 이 둘은 거대한 역사의 흐름에 동참하게 된 조각들이기 때문이다.
written by 비틀매니아 (lennon71@freechal.com)
sickduck |
열우당이 보수입니다. 딴나라당과 조중동은 극우 파시스트들일뿐입니다. 만약 레넌이 만약 한국에서 살고 있었다면 얼마나 빨갱이로 매도당하고 집단 백색 테러 당하고 있었을까요... 05/06 19:05 |
sickduck |
중고딩때 Back in the USSR, Revolution같은 금지곡들에 얼마나 목말라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타인의 생각은 생각대로 예술은 예술대로 존중되어야 합니다. 물론 현대에 그 시대로 다시 되돌려 금지곡을 양산하려는 또라이들은 없겠지만... 정말 없을까요? 그들이 집권해서 우리 머리 속의 상상력imagine을 탄압하고 우리 마음 속에 금지곡을 만들려고 시도할 것이 두렵습니다. 자신들과 단지 '코드'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빨갱이 좌파 매도하는 경직된 그들입니다. 그들의 기준에 다양성과 도발의 상징인 존레논 솔로 노래의 최소한 절반 이상은 금지곡입니다(과거 실제로 그랬고 현재 그렇게 시도하려는 무리들이 남아있지요). 05/07 08:46 |
sickduck |
영화 '다빈치 코드'가 한국에서 정상 개봉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과거 단지 Karl Marx 얼굴이 조그맣게 인쇄되어 있다는 이유만으로 Sgt. Pepper 앨범 커버 전체가 난도질 당한 것에 준하는 국제적인 망신입니다. 그런 모션을 떼로 취하는 인간들, 그에 대해 정치적/법적으로 검토해서 지원하겠다는 정계 무리들... 어떻게 21세기에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 그런 발상을 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꼭 원판보고 돌아갈겁니다. 05/07 08: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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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ckduck |
현직 대통령이라는 작자가 등신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본인이 전에 새시대 세종보다는 구시대 마지막 태종이 되겠다고 했습니다. 정말 그렇다면 과거처럼, 태종처럼 검찰/안기부 권력 손 아래 꽉 쥐고 이견내는 무리들 총/칼로 통제하고 고문하면서 삼겹살 판갈이 확실하게 하는게 차라리 낫습니다(제왕적 총재로 정부여당 위에 군림하고 일일히 지시하면서). 사람들이 무능을 탓하는 이유는 조중동 프레임도 한몫하지만 이런 아쌀한 액션을 보여주지 못해서 그런 측면도 있습니다. 불과 반세기전 나찌-파시즘 기억을 잊고 네오 나치 극우 수구 파시스트들이 발호하는 것은 전세계적 추세이기도 하지만 근원적으로 대한민국같이 일사불란한 아쌀함이 선호되는 국익 우선 획일주의 파시스트 사회에서 과연 다양성의 민주주의가 가능한가 회의가 들 정도이기도 합니다. 05/07 09: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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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ckduck |
개인적으로 조중동 프레임 용어인 코드를 입에 담는 것을 꺼려하지만 이쪽 코드는 반대편에서 나오는 이견을 수용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저쪽 코드에서는 반대편에서 나오는 이견을 '인정못하겠다, 깜이 아니다'하면서 압살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보는 2중 잣대도 문제입니다. 예컨대 이쪽에서는 동전 한잎만 받아도 '니들도 그럴 줄 알았다, 똑같다'하고 매도하면서 저쪽에서 그러면 '원래 그랬잖아, 전보다 오히려 액수 줄었네'하면서 넘어가는 것과 같은 패턴입니다(상습 강간범이 성추행만 하고 넘어가면 그게 그렇게 칭찬받을 일인지). 05/07 09: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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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ckduck |
오히려 진정한 코드 정치를 기다려 봅니다. 세상에 영국 노동당(Ah-ha Mr. Wilson)이 집권해서 보수당 인사를 입각 시키는 경우가 있습니까? 역으로 보수당(Ah-ha Mr. Heath)이 집권해서 노동당 인물 장관 자리 안주는게 욕먹을 일입니까? 오히려 보수당 정부가 노동당 인사를 입각시키면 욕먹어야지요. 선거 민주주의 투표를 형해화시키는 것이니까!(물론 파시스트 사회처럼 반대파들의 씨가 아예 사라지도록 하면 외형상 거국 내각이 가능합니다). 사회적/계급적 분열 및 다양성이 제도적으로 용인되는 진정한 민주주의 코드 정치를 기다려 봅니다(히틀러 집권 수단인 '수권법'의 정식 명칭은 아마도 <국론 통합을 위한 법>이었을 것입니다. 네이버 검색 해보시기를). 05/07 09: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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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ckduck |
저는 개인적으로 비틀즈와 존레넌을 통해 세계사 및 시대 정신에 대해 관심갖고 배우게 된 것에 대해 감사합니다. 격동의 60년대 반전운동, 흑인 민권 운동, 히피 무브먼트, 연대(solidarity), 켄트 주립대 발포 사건, 우드스탁, 블란서 파리 68혁명(1번 및 9번), 독일 비판 철학, 반레이건 반닉슨 운동, IRA, feminism, 애티카 형무소 학살 사건 등등등... 존레넌의 가사는 '시'라면서 왜 사람들은 특정 발라드만 편애해서 듣고 가사는 안 듣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동양의 마녀 원숭이 요꼬가 착한 존레넌을 버려놓고 조종해서 비틀즈가 해산되었다는 orientalism 시각을 답습하는거지요. 05/07 10: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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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ckduck |
역사 얘기를 하자니 요즘 일본 학생들의 80%가 자기들의 야만의 과거사를 모른다던데 우리 나라도 별 차이 있겠나 싶어요(맥아더 반공 이래로 제대로 청산되지 않은 것은 한일 모두 마찬가지). 일본인들은 '자학사관'을 타파하자면서 왜곡한다던데 우리 나라 일각에서도 우리 역사 교육에 대해 '자학사관'이라는 단어를 씁디다. 얘들 무지몽매해 지는 것은 둘째치고 어떻게 일본 군국주의 세력이 쓰는 기만적 용어를 강제징용/정신대 피해국에서 똑같이 쓸 수 있는지 이해가 안되요. 워낙 얼굴 철판들이 두꺼운지 자학사관 운운하며 활보해도 부끄러움도 몰라요. 유럽 기준으로는 명백히 극우수구인데 자기들이 보수라고 집단 착각 자위하면서요. 결코 선진국이 아닌 단지 경제대국 일본 추종하는 일제 식민사관에서 언제나 벗어날 수 있을지 걱정입니다(일본은 존레넌을 우익적으로 해석하는 전세계 유일한 나라라던데). 05/07 10:21 |
서강석 |
Sickduck님의 고견에 많이 공감합니다. 레논을 단지 '발라드' 가수로, Imagine을 듣기좋은 발라드곡으로만 안다면 레논을 이해했다고 보기 어렵다는 점 역시 공감합니다. 저 역시 레논을 통해서 60년대의 진정한 의미를 알아가고 있습니다. 비록 서구 사회의 역사이지만 우리에게도 많은 점을 시사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05/08 04: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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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ckduck |
바로 그 말씀인데 60년대 68혁명의 실패 그러나 68세대의 여파와 한국의 87년의 실패 그러나 386세대의 여파는 참으로 유사한 점이 많습니다. 세계사적 보편성이 20년 시차를 두고 관철된다는 것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그러나 20년이고 나발이고 불과 5-10년 전에 IMF 위기로 나라를 말아먹은 무리들에게 벌써 까먹고 몰표주는 현실을 보면 답답할 뿐입니다. 자기들이 후질러놓은 것을 아직까지 설거지하고 그 고통을 앞으로 얼마나 더 감내해야 할지 아직도 멀었는데 이 정부 들어 양극화가 어쩌구하니 하는 후안무치를 보면 할 말을 잊게 만듭니다. 부끄러움을 모르면 즉 수오지심이 없으면 짐승과 같다던데... 05/08 18: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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