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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많은 경계들이 작동하고 있다. 그리고 대개 그 작동은 대립과 갈등을 수반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간절히 경계없는 세상, 경계없는 화합의 세상을 꿈꾼다. 경계란 사실 우리 모두가 같은 인간이라는 점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며, 나와 다른 타자에 대한 공포가 경계들 사이에서 갈등을 유발한다는 것이다. 경계란 부차적인 것, 허구적인 것일 뿐이며 본질적인 것은 우리 모두가 인간이라는 사실에 있다. 이렇게 해서 경계는 무화되고, 그 자리에 하나의 인간이 자리를 잡지만, 빈번히 그 이름 아래 폭력과 갈등은 계속된다. 경계없음에 대한 이야기는 어쩌면 함정일 수도 있다.
<철의 시대>에서는 경계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두 개의 인간관계가 그려지고 있다. 하나는 아파르트헤이트의 모순이 극에 달한 80년대 말의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고전문학을 가르치다 은퇴한 후 암에 걸려 죽어가는 백인 여성 엘리자베스 커런이 흑인의 해방을 위해 투쟁하는 흑인 하녀의 아이들과 맺는 관계이며, 다른 하나는 그녀가 암 선고를 받고 돌아오는 길에 자신의 차고에서 자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호의를 베풀게 된 흑인 부랑자와의 관계이다. 아파르트헤이트에 혐오감을 느끼는 휴머니스트 커런은 자신의 삶과 사고의 경계를 허무는 이 두 관계맺음 속에서 흔들리고, 괴로워한다.
커런은 투쟁하는 흑인 아이들, 철의 아이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들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부랑자 퍼케일을 폭행하고, 학교에 불을 지르고, 어른처럼 행동하는 아이들로 커런에게 혐오감을 준다. 커런에게는 그들의 극기, 자기희생, 동지애와 같은 가치들보다 인간의 가치, 삶의 가치를 더 높게 평가한다. 이 관계가 보여주는 것은 보편적 휴머니즘과 특정한 대상과 적을 갖는 정치 투쟁 사이의 갈등이다. 투쟁은 항상 보편성의 이름으로, 그리고 인간의 이름을 동반한다는 면에서 휴머니즘이 낳은 것이지만, 그것에는 또 언제나 휴머니즘을 초과하는 부분들이 존재한다. 커런은 아이들을 죽음으로 내몬다며 흑인들의 투쟁 방식을 비판하지만, 결국 그들을 무참히 죽이는 것은 언제나 백인이며, 백인으로서 커런은 그들로부터 보호를 받으며, 흑인들의 삶의 공간에 뛰어들었다가도 상황이 위험해지자 자신의 삶으로 '돌아가겠다'고 한다. 그 살인들에는 사실 커런 자신의 이름도 들어가 있는 것이다. 커런이 깨닫는 것은 백인인 자신이 휴머니즘을 보편적인 가치로 이야기할 수 없다는 사실, 휴머니즘의 보편성은 백인이라는 자신의 위치 앞에서 너무나 무력하다는 것이다. 결국 휴머니즘이 설정하는 추상적 인간은 다양한 권력관계로 경계지워져 있는 세계 속에서는 무력할 따름이다. 백인들의 방화와 총격으로 흑인들이 죽어가는 이 상황을 설명해 보라며 분노해서 외치는 사람들에게 커런은 그것은 오직 '신의 언어'로만 가능할 것이라고 대답한다. 이는 자신이 공모자인 구조 속에서 객관적 서술이 불가능함에 대한 시인이면서, 휴머니즘의 한계에 대한 시인이다. 휴머니즘은 위계적인 권력관계로 구획되어 있는 삶의 경계를 가로지를 수 있을 만큼 보편적이지 않다.
첫 번째 관계가 서로 이질적이고, 서로가 서로의 한계를 물고 늘어질 수 있지만 한 편으로는 서로 비슷한 뿌리를 가지고 서로 소통할 수 있는 것들 사이의 관계를 다루고 있다면, 두 번째 관계는 전적인 타자성과의 조우를 형상화한다. 부랑자 퍼케일은 커런이 그에게 보인 선의를 다른 뭔가로 보답하지도 않고, 손님으로서 허용된 행동의 범위를 따르지도 않는, 교환이라는 경제원리와는 완전히 담을 쌓은 인물이다. 커런은 그에게 끊임없이 이야기를 하지만 그는 대체로 반응하지 않고, 반응하더라도 그 의미를 명확히 알 수 없다. 이런 미지의 인물은 쿳시의 소설에 자주 등장한다. <포>의 프라이데이가 그렇고, <마이클 K>가 그렇다. 커런처럼 이 미지의 인물들을 만나는 백인은 언제나 그들이 뭔가를 '이야기하게' 하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노력하지만 실패한다. 그런데 <철의 시대>는 이 관계를 조금 다르게 그려내는 듯 하다. 커런은 퍼케일이 이야기하게 하는 데 보다도, 그가 그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데 관심을 보이고, 자신이 그에게 다가가 자선을 베풀었다기 보다는, 그가 자신에게 다가왔다고 생각하며, 후에는 그가 자신의 생명을 거둬가도 좋다고 생각할 만큼 그에게 자신을 열어 보인다. 다른 소설의 화자들이 '피부만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 타자의 내면을 헤집으려고 한 반면에, 커런은 그 존재를 순수히 감내하려고 한다는 점이 다르다. 소설은 퍼케일과 커런의 관계에 대한 애매한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애매하긴 하지만 전적인 무반응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장면. 물론 커런의 편지 형식인 이 이야기에서 퍼케일에 대한 모든 이야기, 그와의 관계에 대한 모든 평가는 커런 자신의 이야기일 뿐이다. 하지만 그녀의 이야기는 타자, 나의 경계 밖에 있는 것과의 어떤 새로운 관계맺음의 형태, 근거 없고 계산 없는 신뢰를 보여준다.
첫 번째 이야기가 어떤 면에서 꿈쩍도 하지 않는 경계의 확고함과 관계의 불가능성을 보여준다면, 두 번째 이야기는 경계 속에서의 관계맺음에 대한 나름의 상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쿳시는 언제나 작동하고 있는 경계의 흔적을 지우지 않으려 대단히 조심스럽다. 경계란 내가 내가 아닌 순간에야 지워질 수 있을테고, 그 때에야 허물어졌다 할 수 있는 것일텐데, 이는 결코 낙관할 수 있는 것도, 쉽게 서술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역설은 경계란 성찰 없이 허물어지지 않으며, 성찰하고 있는 한 존재한다는 점이다. 끝없이 이어지는 자기 성찰, 그걸 가능케 하는 공모의 구조, 이게 쿳시가 고군분투하는 방법이다. 나는 그게 섣부른 호언보다는, 최소한 솔직하다는 면에서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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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엘리자베스코스텔로 읽은 이후로 쿳시의 다른 소설들도 읽어보려고 하는데 참 엉덩이가 가벼워서 좀처럼 쉽지 않네요ㅋ포스팅보니 의지가 급 발동하긴 하긴 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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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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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vi/ 엘리자베스 코스텔로, 정말정말 굉장했어요. 정신없을 때 읽어서 많이 남기진 못 했지만 꼭 다시 한 번 차근차근 읽어보려구요. 철의 시대도 꼭 한 번 읽어보세요^^ 코스텔로가 다양한 사건을 만난다는 느낌이에요.부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