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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평등, 박애의 맑스적 역설

                                                                                  에티엔 발리바르 씨 
                                          (http://myhome.naver.net/skreds/images/Balibar(100x98)89.gif)

 
 발리바르에게는 맑스주의적 사유의 전통을 철학의 언어를 경유해 정리해 내는 정말로 뛰어난 재능이 있는 듯 하다. 전통적인 맑스주의자들처럼 기존의 철학적 전통과 대별되는 맑스의 주장을 진리인 양 서술하거나, '포스트 모던'하게 반전과 아이러니의 지점을 포착해 내는 데 치중하지 않는다. 발리바르의 서술 스타일은, 맑스의 주장들이 어떻게 새로운 것인지를 보여주는 데 있고, 기존의 지평을 넘어서는 그 새로운 것들이 그 자체 속에서 어떻게 갈등하고 있는지를 그려내는 것이다. 맑스의 전복적인 주장들은 한 편으론 마치 진리를 잡은 듯한 생생한 경험을 제공하면서도, 그 서술의 맥락에서 벗어나 사고할 때는 이내 여러 가지 모순들로 가득 찬 것으로 경험되고는 한다. 발리바르의 글에는 논리적 궁지(aporie)라는 표현이 많이 등장하는데, 이 표현을 통해 그는 모순적 경험들을 통일해 내기 보다는 열어둔 채로 놓아두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는 맑스주의에 관하여 최소한 현존하는 최고의 교사라는 평가는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아래에 정리해 놓은 글은 1989년에 쓰인 <맑스라는 이름의 자코뱅?>이라는 짧은 글로, 19C 혁명의 표어였으며, 근대 정치에 그 이념적 지평을 제공하는 것인 자유, 평등, 박애와 맑스의 사유의 관계는 무엇인지, 맑스가 무엇을 새롭게 도입했으며, 그것이 그 개념들 속에 어떤 긴장을 불러일으키는 것인지를 설명하는 글이다. 읽은 것을 정리해 볼 요량으로 본문을 거의 긁은 것이라 거칠고 재미도 없지만, 어느 정도는 최근에 이글루에서 벌어지고 있는 논쟁-페미니즘에서 시작하여 이제 인권과 윤리의 문제로 나아간-의 맥락과도 닿아 있지 않나 싶다. 



 <맑스라는 이름의 자코뱅?>, 에티엔 발리바르

 발리바르는 프랑스 혁명을 역사적 단절의 순간으로 이해한다. 혁명은 그것을 "낳았던" 원인들의 축적을 그 효과들 속에서 넘어서는, 역사라는 직물의 단절이다. 이 단절이 제공한 사유와 가능성들의 개방이 닫힌 것은 19C 후반, 제국주의, "사회적 문제"의 제도화의 시작, 일반화된 학교교육 등이 도입되고 나서이다. 이 때가 되어서야 자유, 평등, 박애라는 표현은 안정되고 일의적인 의미를 소급적으로 부여받았다고 할 수 있다. 맑스는 아직 혁명이 열어 놓은 개방성, "단절의 칼날"위에서 사유하고 있다. 그 가능성 속에서 맑스에게(물론 승리할 부르주아들이 아닌 다른 혁명의 세력들에게도), 자유, 평등, 박애는 전적으로 다른 의미를 갖는다. 

  박애

 박애라는 논쟁적 표어의 채택은, 노동에 대한 권리(droit au travail)가 인간의 권리들과 헌법상의 원칙들에 끼어드는 것(그렇게 되면 그 형식적 안정성은 완전히 흔들리게 될 것이다. 최소한 소유권이라는 쟁점에 있어서도)을 "박애주의적" 시각에서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노동에 대한 권리가 불러 일으킨 쟁점에 대해서는 조앤 W. 스콧의 <페미니즘 위대한 역설>을 참조해 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19세기 프랑스 혁명의 전개와 더불어 그 속에서 여성의 권리라고 하는 개념이 어떻게 얽히는 지를 잘 보여주는 좋은 글이다.  이 책은 여성의 권리라고 하는, 층위의 다양성은 있겠지만, 지금 많은 사람들이 사고하는 데 별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 주제가, 얼마나 논쟁적인지를 잘 보여준다)
 박애는 또한 그것의 수행자로서 국가나 한 사회를 상정하는데,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는 맑스의 구호는, 박애의 실천적 지평인 국가를 뛰어넘는 것이며, 소유라는 개념이 갖는 균열을 통해 국민이라는 하나의 정체성을 둘로 분할하는 혁명적 주체성을 정초한다. 여기서 인간의 인류애라고 하는 관념이 그 정치적 기능의 폭로 속에서 해체됨과 더불어 여전히 다른 층위에서 작동하고 있는 역설이 출현하고 있다.

  자유
 
 자유는 한 편으론, 특권계급을 쳐부수어 주권을 집단적으로 쟁취하고 그리하여 "시민"이 되는 "주체"들의 운동(능동적)이며, 다른 한 편으로는, 공리주의, 자유경쟁, 그리고 그 결과 노동력으로서의, "상품"으로서의 개인(수동적)이다. 맑스는 <자본>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노동력의 판매와 구매가 그 한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상품 유통 또는 교환의 영역은 사실 천부인권의 진정한 낙원이었다. 
     여기에서 지배하고 있는 것은 오로지 자유, 평등, 소유, 그리고 벤담이다. 

 
이 문장을 통해 맑스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인권의 법적 형식들(자유와 "형식상의" 평등)을 밑받침하는 이데올로기는 상품의 일반적 유통의 형식들 그 자체, 특히 그 나름으로 인간의 "노동"을 합리적으로 착취할 수 있는 상품으로 만들 수 있게 하는 형식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문장은 단순히 자유라고 하는 것을 이데올로기로 환원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게 아니다. 임노동 착취가 억압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봉건적 군주, 주인은 아니다. 부르주아는 자본의 축적을 방해하는 봉건적 착취의 족쇄를 끊어 버렸으며, 바로 그 자리에 새로운 착취 관계를 집어 넣었다. 자유란, 한 편으로는 능동적이며 임노동 관계가 강요하는 불평등으로부터의 탈출을 의미할 수 있고, 한 편으로는 봉건적 관계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로운 상품이 '될' 권리를 의미한다.   


  평등 

 따라서 맑스의 눈에 '평등한 권리'란 실제적 불평등을 하나의 공통의 척도로, 형식적 평등으로 환원시키는 속성일 따름이며, 평등은 자신을 의식하고 있는 법적 이데올로기 바로 그것으로서의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핵심적 시니피앙이다. 이 맥락에서 대의제 민주주의 국가란 부르주아들이 자신들의 착취를 위해 피착취자인 노동자를 동원하는 장치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한 편으로, 맑스는 공산주의 사회로의 계기적 단계들을 규정하며, "평등 노동, 평등 임금", "능력에 따른 노동과 필요에 따른 분배"라는 용어를 사용하였으며, 엥엘스는 평등을 프롤레타리아적인 것과 부르주아적인 것으로 분할하였다. "프롤레타리아들의 평등에 대한 요구는 계급의 진정한 폐지를 그 내용으로 갖는다. 모든 평등의 요구는 필연적으로 부조리 속에서 죽어가게 된다."
이러한 모순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우선, 이것은 정치 투쟁으로서의 계급 투쟁은 정치의 보편적 언어(시민성의 언어) 속에서만 정식화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언어란 단순히 환상으로 환원될 수 없다. 다음으로 근대의 정치 속에서 맑스주의적 운동이 갖는 긴장을 형상화 한다고 할 수 있다.
한 편으로 평등의 요구가 계급의 폐지를 위한 집단적 투쟁이 아닌 형태로 나타난다면, 이는 계급투쟁의 현실을 은폐하는 것으로써 비난받는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 평등의 요구가 작업장에서의 착취에 반대하는 투쟁으로 축소된다면, 그것은 자본주의가 강요하는 개인의 상품으로의 환원을 수긍한다는 비난이 가능할 것이다. 이런 갈등은 맑스주의 정치의 역사에서 형태를 달리해서 계속 되풀이 되어 왔으며, 미결의 문제로 남아 있다. 마지막으로, 엥엘스의 인용문은 평등개념의 역설을 잘 보여준다. 한 편으로는 개인들의 동일화의 극단들이 있으며, 다른 한 편에는 그들의 차이화의 극단들이 있다. 



  어떤 의미에서, 맑스주의의 모든 것은 근대 정치에서 대두되었던 이 개념들의 역설적인 해석의 지평 속에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맑스주의 뿐만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기획을 어떤 식으로든 이어나가고 있는 지금의 정치 현실에도 마찬가지다. 브레히트가 <임시야간숙소>에서 자선 행위를 씁쓸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은 박애의 정신에 대한 맑스주의적 사유의 결과물이지만, 항공회사에서 스튜어디스를 채용할 때 외모의 조건을 묻는 것이 정당한 일인가에 대한 공방이 일어나는 것은 자유와 평등이라고 하는 것이 지금의 정치 현실에서도 상이한 개념 속에서 기능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그러므로 모순은 사실 도처에 널려 있다. 맑스는 그것을 특정한 방식으로 개방했을 뿐이다. 지금 권리들이 너무나 '쉽게' 운위된다면, 그것은 자신의 개념에 내재한 모순을 은폐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한 권력을 갖는 해석의 결과물일 뿐이다.  


 ( 에티엔 발리바르, 윤소영 엮음, <맑스라는 이름의 자코뱅?>, [루이 알튀세르 1918-1990], 민맥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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