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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4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5/02/05
    이건 표결에 부칠 문제가 아니란 말입니다
    ninita
  2. 2005/01/07
    goodbye, 수전 손택.
    ninita
  3. 2004/12/29
    기쁜 재회.
    ninita
  4. 2004/12/04
    안 좋은 것들.
    ninita
  5. 2004/11/29
    난쏘공을 다시 읽어야겠다.(6)
    ninita
  6. 2004/11/27
    추운 겨울이 더디 오기를.(2)
    ninita
  7. 2004/11/23
    마르셀로의 서명지(5)
    ninita
  8. 2004/11/20
    어미는 50 먹은 아들을 걱정하고.
    ninita
  9. 2004/11/07
    시와
    ninita
  10. 2004/10/28
    어느 삼성 해고노동자의 눈물
    ninita

이건 표결에 부칠 문제가 아니란 말입니다


'폭력사태'의 진실 - 3. 단상점거 by 비정규직완전철폐를위한영상프로젝트

 

더 무슨 말이 필요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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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odbye, 수전 손택.

 

 

1933 - 2004

 

Let's by all means grieve together.

but  let's not be stupid together.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런 고통을 가져온 원인에 연루되어 있지는 않다고 느끼는 것이다. 우리가 보여주는 연민은 우리의 무능력함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고함도 증명해 주는 셈이다. 따라서 (우리의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연민은 어느 정도 뻔뻔한 그렇지 않다면 부적절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 (우리가 상상하고 싶어하지 않는 식으로, 가령 우리의 부가 타인의 궁핍을 수반하는 식으로)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 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이다. 사람들의 마음을 휘저어 놓는 고통스런 이미지들은 최초의 자극만을 제공할 뿐이니. (p.154 '타인의 고통')

 

일다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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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쁜 재회.


풍동에, 다녀왔다. 거진 6개월만의 방문?

풍동철대위가 승리 보고 대회를 했다.

오랜만에 마주한 채남병 위원장님은,

내게 승리라는 '선물'을 하게 되어 기쁘다고 하셨다.

나야말로 기쁘다. 올해 안에 풍동의 승리를 볼 수 있어서.

활동 초기에 만난 현장이 승리를 했다니, 정말 기쁠 수밖에.



풍동에 처음 간 건, 총선이 있었던 4월 15일.

 

3월엔 대통령 탄핵 사태가 있었고, 세상은 미쳐돌아가는 듯했다.

총선 날, 미친 세상과는 상관없이 일상적인 투쟁을 벌이고 있는 현장에 카메라를 가져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고심 끝에 선택했던 현장이 풍동 철거촌과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노숙 투쟁 중이던 장애인들의 집회였다.

 

(첫 방문 후에 썼던 기사 : 그 많던 풍동 사람들은 어디로 갔을까)

 

그렇게 첫 만남이 있은 열흘 쯤 뒤던가, 풍동에 침탈이 들어왔고, 침탈 직후에 다시 찾아갔었다. 그러다 5월 초, 새벽부터 밤까지 이어진 대대적인 침탈이 있었고, 그 날은 오후 내내, 저녁까지 풍동 골리앗 앞에 있었다. 애초에는 안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위원장님은 위험하니까 들어오지 말라고 하셨다. 별 수 없이 바깥에서만 발을 동동 구르며 서성거렸다. 비는 추적추적 내리고, 주변엔 덩치 큰 용역들 뿐. H빔을 단 포크레인이 골리앗을 두드려팼고, 철대위 분들은 정말이지 열심히 싸우고 있었다. 포크레인을 향해 화염병을 던지고, 돌을 던지고.. 그런데 용역들은 고립된 공간인 골리앗 안으로 화염병을 던져 넣고 있었다. 그건 안에 있는 사람들더러 죽으라는 소리나 다름없었다. 작은 카메라 한 대 들고, 추위에 떨고 있던 난, 용역들의 위협에 또 한 번 떨어야 했다. 두려움과 무력함. 그 날을 생각하면 그렇게 막막했던 기억 뿐이다.

 

사무실에 들어오자마자 아쉬운대로 내 촬영본을 편집해 올렸는데, 다음날, 풍동 골리앗 안에서 촬영한 소스를 얻었다.

결과적으로 내 촬영본은 아무 짝에도 쓸모없이 되어버렸지만. ^^

골리앗 안에서의 촬영본은 참혹함 그 자체였고,

(http://media.jinbo.net/news/view.php?board=public_access&id=1024&page=3)

사이트에 올리자마자 연대하던 여러 사람들이 소스를 퍼나르면서 반향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주류 방송사에서도 빨리빨리 움직여줬다.

 

수많은 언론에서 관심을 기울였고,

풍동은 미디어를 통해 호의적인 여론을 조성한 행복한 사례로 남게 됐다.

어느 누구도 풍동을 쉽게 건드릴 수 없었고,

수차례의 협상 끝에 결국은 요구했던 가수용과 영구임대주택 입주권을 쟁취했다.

 

(참세상에서 올린 기사 및 영상은 풍동 철대위 언론보도 페이지의 제일 위에 모여 있다.

 http://raracult.lin4u.com/nobreak/press.php)

 

그 과정에서, 내가 한 역할은 따지고 보면 참 미미했다. 기존에 열심히 연대하던 분들의 힘이 컸다. 그럼에도, 채남병 위원장님을 비롯해서 처음부터 매번 만나고 인사하고 이야기나눴던 몇몇 분들은, 내게 너무 고마워들 하신다.

나는 외려 그 분들이 고마운데 말이다.

 

골리앗 마당에 도착하자마자 소사 김상원 부위원장 아저씨랑 눈이 마주쳤는데,

아저씬 너무 반가운 나머지 나를 때리려 했다! ㅡ.ㅡ

김상원 아저씨는, 처음 봤을 때 무쟈게 무서운 인상이었다.

게다가 '나는 너를 믿지 않는다'는 태도를 깔고 말씀을 하시는데 정말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풍동에 가기 전에 철거민 운동에 대해 공부하고 간 덕에, 아주 다행스럽게도 아저씨의 질문에 적당하게 대답할 수 있었고,

그 후에도 여러 차례 찾아가면서 신뢰를 얻게 되었던 것 같다.

지금은, 어찌나 이뻐 하시는지.. ㅡ.ㅡ

소사 쪽도 붙고 있다는데, 꼭 한 번 오란다. 아....휴......

성락경 아저씨도, 조직부장 할머니도, 김 총무님도.. 뭐 다들 여전하셨다..

규찰 나섰다가 용역들에게 정신 잃도록 얻어터졌던 아저씨도,

아주 반갑게 나를 맞이해주셨다.

그 분만 해도, 김상원 아저씨 못지않게 나를, 내 카메라를 믿지 못 해 인터뷰 한 번 하기가 무서웠던 분인데, 지금은 나만 보면 고맙다고 웃으신다.

 

그건 뭐랄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이다.

내가 노력했던 과정들, 그리고 결과적으로 무한한 신뢰를 받고 있는 느낌.


 

풍동 분들은, '투쟁'이라는 걸 통해서 '연대'의 의미를 확실히 깨닫고 있었고,

자신들도 언제든, 어떤 문제에든 '연대'할 자세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난 그 분들을 쉽게 좋아할 수 있었다.

함께 하는 동지들이 있다는 것, 거기서 힘을 얻고, 또 싸워나가고, 그 과정 속에 단단해지고.

 

채남병 위원장님, 그 분이 늘 앞에 서 있었다.


 

참 수줍은 사람. 어쩌면 위원장이라는 직책이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수줍고, 긴장도 잘 하는 분.

 

처음 카메라를 들이댔을 때가 기억난다.

도무지 내 눈은 쳐다보지도 못 하고,

경직된 채로 문건을 그냥 줄줄줄줄 읽으면서도, 종이 든 손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어서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하지만 변화의 폭은 놀랍도록 컸다.

다음엔 내 눈을 보셨고, 다음엔 말도 자연스러워졌다.

기자회견 때는 가감없이 스스로의 감정을 표출하면서도 중요한 말씀을 잘도 하셨다.

괜히 내가 뿌듯할 정도로..

 

소주 한 잔 건네시는데, 흔쾌히 받았다. 그래봤자 입술만 적시는 나지만.

위원장님은 조만간 옥살이를 하게 될 거다.

어차피 다 아는 거, 그냥 인생대학 간다고 담담하게 말씀하신다.

어떻게 사실 거예요? 하고 물으니, 인생대학 다녀온 후엔 지역 일반노조 건설에 힘을 보탤 거란다.

 

내가 요즘 답답한 문제들에 대해 이런저런 얘길 했더니,

어차피 이 체제 하에서는 풀리지 않는 문제들이다, 고 하신다.

가난한 자들이, '체제 전복'과 '혁명'을 얘기하며 같이 웃었다.

 

풍동을 생각하면 한없이 기쁘지만, 동시에 다른 철거촌을 찾아가지 못 했던 죄스러움이 참 크다.

오늘만 해도 상도2동 철거민(작년 사제총 논란이 일었던, 그 건으로 감옥에 들어갔다 출소한 지 1달 되었단다), 소사 철거민, 월곡동 철거민, 청와대 앞에서 벌써 석 달 넘게 자리잡고 투쟁 중인 철거민.. 많은 분들을 만났고, 그 분들은 하나 같이 '한 번 찾아오라' 했다.

 

그 마음 안다. 너무 잘 안다. 그래서 정말 미안하다.

 

나는 '네'가 아니라 '노력할께요'라고 얼버무렸다.

그럴 수밖에 없어서 슬펐다.

그 자리에서 난 믿음을 드릴 수가 없었다.

 

이주노동자들도 여럿 눈에 띄었다. 민수씨랑도 오랜만에 인사했다.

 

풍동 가는 길은 참말이지 멀다.

버스를 타고 전철을 타고 마을 버스를 타고서야 겨우 도착하는 곳.

그래도 가길 잘 했다.

 

입주날에도 꼭 오라고들 하시는데, 가봐야지...

심지어는 그 후에도 놀러오라고 하시는데,

 

^^

고맙습니다...

승리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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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좋은 것들.

짜증이 늘었습니다. 걱정만 앞세우고 정작 몸은 뒷짐지고 있습니다. 타인을 부러워만 합니다. 챙겨야 할 것들을 챙기지 않고, 의지하려고만 합니다. 몸을 돌보지 않습니다. 먹지 않거나 자지 않고, 너무 많이 먹거나 너무 많이 잡니다. 똑바로 걸을 수 있는데 자꾸 비틀거립니다. 자주 눈물이 납니다. 다른 사람을 당황하게 합니다. 어린 아이처럼 굴곤 합니다.

 

스물여섯 겨울입니다.

 

스물일곱이 시작되는 겨울부턴,

모든 것으로부터 반발짝만 떨어지기. 반만 웃고 반만 울기.

 

그렇게만 해도 반뼘은 어른이 되어 있을거야.

 

...



glide / 호흡 (릴리 슈슈의 모든 것)

 

...

 

'그리하여
겨울이다. 자네가 바라던 대로
하늘에는 온통 먹물처럼 꿈꾼 흔적뿐이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기형도는 겨울의 통로를 비집고 들어가고.



1.

한 블로거가 이 글에 트랙백을 걸었다.

굳이 안 그래도 되는 것이지만, 그의 글에 트랙백을 다시 걸고, 덧글을 남겼다.

 

"개인적인 투정 속의 단어들이 타인에겐 이런 연상의 결과가 되기도 한다는 사실이 당혹스럽기도, 좋기도 합니다..... "

 

그러네 정말... 당혹스럽기도 하고.. 좋기도 하고..

덕분에 읽게 된 김명인 선생의 글은 참 좋았다..

 

2.

"몸 전체가 눈물주머니" 같다는 그는,  스스로의 "눈물의 힘"이 여전히 "소중한 삶의 밑천들"이며,  그 힘을 빌어 "겨자씨만큼이라도 그릇된 세상에서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 무언가 지불"한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일종의 대리체험이며 면죄의식"이라는 것을 경계하고 있었다. 그것을 경계하지 않는 순간, 그는 "세련된 세치 혓바닥을 지닌 눈물주머니"가 될 것임을 알고 있었으므로.

 

그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면서도 나는 그런 내가 무섭습니다" 라고 말하고,

"값싼 눈물로 곧 짓물러터지게 생긴 노안 두 덩어리"만 남았다며

"일찍 죽은 모든 사람들이 부러운 새벽"을 이야기했다.

 

그러나 그의 노안은 혜안일 터.

 

진심이 절절한 글에는 기꺼이 속을 테다.

 

3.

나 자신, 곧잘 울곤 하며,

아직까지는 그 "눈물의 힘"이 내 "삶의 밑천"이라 믿는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나 역시, 나의 눈물을 경계한다.

 

4.

요절 시인들의 시를, 

팔이 아프도록 베껴쓰곤 하던 십대 시절로부터 나는,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 한 것 같다.

 

두 가지 의미에서,

나의 눈물이 반이면서 두 배일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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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쏘공을 다시 읽어야겠다.

몇 줄만 떼어낼 수 없었다. 평생을 세상과 반목해 왔다는 사람. 어설픈 화해가 자꾸 회자되는 요즘, 그의 존재를 되새길 수 있어서 기뻤다.

 

 

"노동자들 신음소리에 숨이 막힌다" / 이문영 기자

(사진 클릭하면 레이버 투데이 기사로 넘어갑니다.)



이틀 만에 집에 들어와 난쏘공부터 찾았다.

2000년에 새단장하고 나왔을 때 구입한 건데,

지금 보니 이런 말이 적혀 있네.. 훗..


 

나로서는 꽤나 공들여서 또박또박 쓴 글씨다..

요즘은 저렇게 글씨 안 쓰는데...

 

4년 전에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살았는지는 기억 안 나는데..

그 때도 깨어있는 사람이고 싶기는 했나보다..

 

아직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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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운 겨울이 더디 오기를.

(각 사진 클릭하면 관련영상 플레이 됩니다.. 짧은 영상들이니 꼭 한 번씩 봐 주세요..)

 

 photo by 풀벌레

 

- 비정규직노조 총파업 결의대회에서 스무명에 달하는 비정규직 분들이 머리를 밀었다. 그 날은 날이 푹하더니, 하루만에 한겨울이 와버렸다. 삭풍이 불지 않기를. 이 비정규직 노동자들, 머리 시리지 않게.. (삭발 촬영은 어렵다. 그리고 늘 슬프다. 촬영:나, 편집:허경)

 



 

 

- 이 네 명의 노동자가 국회 옆 공사장의 고공 크레인 점거농성에 돌입했다. 크레인에 오르기 전, 그들과의 인터뷰. (촬영:김미례 편집:허경)

 

 

- 지지 방문 왔던 이들은 연행됐다가 곧 풀려났다. (촬영, 편집:허경)


모질고 찬 겨울의 시작이다. 또 이렇게.

박대규 위원장이... 총파업 1일차 무대 위에 올라와, 여느 때처럼 고래고래 외쳐댄 발언 중에...

여러분과 똑같은 몸을 가진 사람들이 45미터 크레인 위에 올라가 있다, 그런 얘길 했다..

 

저 크레인에 올라간 사람들은, 유난히 추위를 덜 타는 사람들도, 유난히 담력이 강한 사람들도 아니다..

그냥 나처럼 추우면 어깨를 옹송거리고, 높은 곳에 올라가면 아래를 잘 내려다보지 못 하는, 보통 사람들일 뿐이다..

 

그런 그들이 크레인에서 어둡고 추운 첫 밤을 보내고 있다.

 

네 명의 비정규직 노동자가 고공크레인에 올라가 있다는 거, 한순간도 까먹지 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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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셀로의 서명지

올해 노동영화제 개막작 감독, 마르셀로 안드라데.

열정적이고 혁명에 대한 신념이 또렷한 이 미디어 활동가는,

한국에 와 있는 기간 동안에도 참 열심히 '활동'을 하고 있었다.

 

세미나와 토론회 뿐만 아니라,

이주노동자 농성장에도, 전범민중재판 실행위에서 준비한 만민공동회 자리에도 나타나,

우리의 투쟁을 공유하고 싶어했고,

연대의 수사학을 넘어 joint rebellion을 호소했다.



그리고 나에게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건,

한국 일정 막판에 이르자 꼬깃해져버린 서명지다.

 

지난 10월 12일은 베네수엘라 정부에서 지정한 '선주민 저항의 날'이었다.

이 날, 볼리바르 혁명은 미완의 혁명이며 여전히 진행형이라고 믿는,

마르셀로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식민주의, 제국주의의 상징인 콜럼부스 동상을 무너뜨렸다.

차베스는 이를 두고 말 안 듣는 아나키들의 소행, 쯤으로 폄하하며,

마르셀로의 세 명의 동지들을 체포했다.

 

(아직까지는 차베스가 민중 권력에 대한 신념을 가진 사람이라고 믿기 때문에, 국가 권력 기구, 관료제가 적이지 차베스가 적은 아니라고 말하면서도, 마르셀로는 동료의 말을 빌어 차베스의 이러한 정신분열을 두고 '혁명의 비극'이라 말하기도 했다. 대중 연설을 할 때는 모두 점거하라!고 말하면서, 정작 점거를 하고 나면 정부의 노선을 따르지 않는다고 체포하는 이런 아이러니.

액트 원고 때문에 12일 이후의 몇몇 글을 찾아보다가, 차베스 정권과 민중 사이에 친밀감과 긴장감이 동시에 작용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고 좀 헷갈렸는데, 문제가 뭔지 명확해졌다.)

 

마르셀로가 어딜 가나 들고 다닌 그 서명지는,

바로 이 동지들을 석방하라고 요구하기 위한 것이다.

듣자 하니 지난 금요일에는, 그나마 괜찮은 판사가 우익의 폭탄 테러로 사망하는 일까지 발생했다 한다. (만민공동회에서 그 소식을 전하던 마르셀로의 표정은 정말 어두웠다.)

 

이 사진을 클릭하면, 아직 푸에르토리코 인디미디어에 얹혀 있는 베네수엘라 섹션으로 넘어간다. 페이지 중간쯤 이 사진이 있는 기사의 끄트머리에 가면 [English]: Sign Petition for the Release of the Prisoners 온라인 서명을 할 수 있다.

 

joint rebellion과 autonomous라는 말을 쉼없이 쓰던 이 활동가를 오래도록 잊지 못 할 것 같다. 그가 토해냈던 열정적인 문장들과 그것을 통해 쏟아져나온 나의 고민과 화두를 정리할 시간도 필요하고, 내가 선 자리에서 실천하고 행동하는 노력도 필요하고...

 

아. 그런데 요즘은 입에 한숨을 달고 산다. 왜 이렇게 일상이 뻑뻑한 걸까. 즐거워야 하는데 말이다. 사실 즐겁긴 한데, 빡빡해서 탈이다. 당장, 마르셀로는 콜럼부스 동상 뽀갠 거 관련 기사를 써달라는 요청도 했는데, 그조차도 못 하고, 대신 블로그에 끼적거리고나 있으니..

 

어쨌든 마르셀로 안녕, 잘 가요. 몇 시간 뒤면 떠나겠군. 조만간 UT-FPL(파차메리카 해방을 위한 어떤 전선) 프로젝트가 상당히 진행되어서, 파차메리카 대륙에서 제작된 다큐 시리즈를 볼 수 있으면 좋겠네.. 

무너뜨린 동상을 열심히 밀고 있는 두 사람 중 왼쪽 빨간 옷이 마르셀로.

 

(토론회 기사 : 해방의 집단적 의식을 키워가는 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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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미는 50 먹은 아들을 걱정하고.


 

빈민대회 때 내 눈에 밟힌 할머니들..

당신의 삶은 어떠하였길래, 손이 다 저렇게 곱았을까.

날바닥의 추위 가리는데, 당신께는 저 얇은 스카프면 정말 충분한 것일까.



의정부 지역 노점상들에 대한 용역들의 폭력 철거가 심각하다는 얘기는 빈민대회 때 들었다.

나이 6,70 먹은 노인들한테도 폭력을 휘두르고 그랬단다.

그저께는 노점상인들이 국가인권위에 진정서를 제출하고 긴급구제를 요청했다.

거기에 다녀온 동료 기자가 쓴 기사를 읽고 있자니, 이 문장이 눈에 들어와 박혔다.

 

"의정부 지역 노점상인들은 지난 달 28일 부터 의정부 동부광장에서 천막 농성 중이다. 이들은 깨진 머리와 멍든 몸뚱이보다도 앞으로 살아갈 걱정이 더 컸다. 박금녀 씨는 “장사를 못해 오십 먹은 장애인 아들을 굶기고 있다. 불법이라고 매 맞고, 물건 다 빼앗기고, 이제 무엇을 하고 살라는 말인지”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http://media.jinbo.net/news/view.php?board=news&id=31414

 

칠순의 어매가 몸이 편치 않은 오십 먹은 아들이 배를 곯고 있어 걱정이란다..

나는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빈민대회 때 내가 보았던 저 손이 곱은 할매일까, 스카프가 얇아 뵈는 저 할매일까,

박금녀 할머니는 그런 할매일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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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 이 글은 시와님의 [시와] 에 대한 트랙백 입니다.

 



사막은, 늘, 그리운 곳. 




꿈 같은 기억이 되어버렸다.

 

이집트. 나의 첫 여행지..

 

그리고 시와. 오아시스가 있던 사막. 태양과 바람, 모래만이 있던 곳.

 

매일같이 무언가 봐야만 할 것 같던 초보 여행자의 강박관념을

완전히 털어내 버리도록 했던 곳.

 

나는 이제 여행지에서 시간을 잊는다.

(때로 여행자의 의무 - 멈추었다가도 곧 떠나가야 하는 - 를 잊을 정도로.)

속도감과 의무로부터 벗어나,

내가 당도한 어떤 공간에 원하는 만큼 잠겨 있으면 그 뿐.

인도 여행이 그랬고, 앞으로 내가 할 모든 여행은 그런 식일 거다.

 

시와는 아주 우연찮게 찾아간 곳이었다.

예상과 달리 하루의 여유가 생겼고, 어디를 갈까 망설이다가 막판에 정한 곳이었는데.

사막에 대한 갈망 따위, 그 때만 해도 갖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막상 사막에 갔을 때.

그 부드럽고도 시원한 모래에 발을 담궜을 때.

그리고 부드럽고도 시원한 바람에 온몸을 맡겼을 때.

 

사막은,

내가 평생을 그리워 할 대상이 되고 말았다.

 

농반 진반으로 내년 여름엔 몽골에 가겠다고 말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다시 떠난다면,

어느 틈에 키워버린 내 안의 환상이 산산이 조각나 버릴 수도 있을 거다.

하지만 괜찮다. 슬퍼하지 않는다.

 

그리움이란 그런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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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삼성 해고노동자의 눈물


(사진 클릭하면 영상페이지로.)



삼성 SDI 인사과에 다닌다.

 

키가 190이 넘는 그 녀석과는 초중고 동창이다.

고등학교 때 녀석은 이미 180이 넘었고, 나는 겨우 160이 조금 넘는 정도였다.

복도에서 열라 뛰다가 그 녀석과 퍽 부딪치면 내 눈에 보이는 건 늘 파란 명찰 뿐이었다.

 

참 순하고 착한 그 친구가 삼성에 취직했다는 얘길 들었다.

그러려니 했다.

인사과랬다.

어떡하니.. 싶었다.

 

복제폰 소동이 한창일 무렵,

오랜만에 그 친구에게서 문자가 왔다.

 

잘 지내냐?

 

너야말로 잘 지내냐? 해골 복잡하겠다?

 

잘 아는구나..

 

5월엔가 고등학교에 갈 일이 있어서 갔다가 그 친구를 만났는데,

우리를 아는 선생님들이 재밌어 했다..

꽤 친하던 녀석들인데, 시간이 흘러흘러..

하나는 '초'일류기업, 하나는 사회단체에서 일을 하니..

 

어제 김명진씨 절규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기분이 이상해져버렸다.

 

야, 사표 내고 기냥 나와. 너라면 갈 데 많아.

한두 번은 그렇게 말하기도 했던가?

 

친구가 중학생일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리고 그 녀석은 장남이다.

나의 아버지는 아직 살아계시고, 게다가 정규직으로 아직은 일하신다.

그리고 나는 둘째이자 막내딸이다.

 

쉽게 막, 말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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