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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4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4/10/28
    화려한 저녁.
    ninita
  2. 2004/10/14
    평화를 위한 용기.(5)
    ninita
  3. 2004/10/07
    팔레스타인의 저항은 테러가 아니다(6)
    ninita
  4. 2004/09/20
    사람이나 새나
    ninita
  5. 2004/09/15
    사람 취급(2)
    ninita
  6. 2004/09/10
    산다는 것은 위대한 걸까.(3)
    ninita
  7. 2004/08/30
    평택, 마을이장단의 혈서식과 삭발식(1)
    ninita
  8. 2004/08/30
    팽성읍 할머니, 할아버지들..
    ninita
  9. 2004/08/27
    학교는 다다
    ninita
  10. 2004/08/11
    우리 동네에서 생긴 일 (2)
    ninita

화려한 저녁.

* 이 글은 랄라^^*님의 [진보네에 새가족이 늘다^^*] 에 대한 트랙백 입니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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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를 위한 용기.

 

<광야의 목소리> 설립자인 반전활동가 kathy kelly가 내한했다.

 



요즘 동화작가 박기범님이 전범민중재판 운동을 좀더 알리기 위해 "전범민중재판 기소인 릴레이 인터뷰"를 하고 있는데, 엊그제부터 촬영 차 동행을 하고 있다. 나로써는 무척 고마운 기회다.

 

캐시 켈리는, 스물 여섯번이나 투옥되었던 미국의 대표적인 반전 활동가다.

풍성하게 곱슬거리는 회색 머리가 인상적인 이 가녀린 느낌의 여성은,

미사일 격납고에 가서 옥수수를 심는 저항행동을 하기도 했다.

첨에는 '옥수수를 심었다'기에 왠지 귀엽다는 생각이 들어 웃었는데,

누군가가 그 행동의 의미가 무엇인지 물었을 때 그녀는..

 

면도날이 뒤섞인 빵을 자기 아이한테 먹이려 하는 부모가 세상에 존재하겠는가, 라며..

mother earth는 무언가를 자라게 하고 보듬어주는 공간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미사일 격납고는 아이에게 줄 빵에 섞여있는 면도날 같은 것이 되는 거고,

그래서 그 자리에 옥수수를 상징적으로 심어놓은 것이었다.

 

그 자리에서 군인에 의해 무릎 꿇린 켈리는,

뒤에 서서 자신의 머리에 총을 겨누고 있는 이에게..

지루해진 차에 이런저런 얘길 건넸단다.

 

켈리가 물었다.

- 옥수수가 자랄 것 같나요?

군인이 답했다.

- 잘 모르겠지만, 그랬으면 좋겠어요.

 

군인이 물었다.

- 목말라요? 물 줄까요?

켈리가 답했다.

- 네, 주세요.

 

켈리는 고개를 젖혔고, 군인은 그녀의 입에 물을 부어주었단다.

 

켈리가 말하길, 그게 희망이란다.

총을 든 손으로 수통을 꺼낼 수는 없을 것이고,

군인은 자신에게 물을 주기 위해 잠시라도 총을 내려놓았을 것 아니냐면서.

 

...

 

courage for peace, not for war.

전쟁이 아닌, 평화를 위한 용기. 그녀가 한 말이다. 멋지다.

 

...

 

강연 중, 13일자 인디펜던트지에 나온 기사를 인용했는데,

2004년에만 5,460명이 장티푸스에 걸렸고,

도시 5가구당 1가구, 시골 5가구당 3가구가 수돗물을 구할 수 없단다.

2003년 통계로, 전체 인구의 27%가 2달러 미만의 수입으로 빈곤에 시달리고 있고.

영양결핍은 3명당 1명.

전국에 돌림병이라도 돌면 생명이 위험한 사람이 대다수...

 

...

 

박기범씨가 45일 동안 단식을 했다 하니,

켈리가 한 가지 제안을 한다. 단전을 하라고.

밥은 먹어라, 전기를 끊어라.

 

와, 멋진 생각이다! 싶었는데...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단전은 단식보다 더 어려운 행동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집에 있을 때면, 꼭 한 번씩 해 보리라는 다짐을 하며..

불 끄고 컴 끄고 자야지..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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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의 저항은 테러가 아니다


 

사진출처 : 팔레스타인평화연대

 

 



그런 게 있다면, 이라크의 '테러'(한국에서 '테러방지법' 제정까지 운운하며 그토록 두려워하는 '테러'), 팔레스타인의 '테러'가 그것일 터.

늘상 얘기하듯 부정적인 의미로만 따진다면, 우리는 미국과 이스라엘을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인티파다 4주년.....

9월 말부터 일주일 가량 계속된 이스라엘의 무차별적 공격으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300명 가까이 죽거나 다쳤단다. 팔레스타인이 먼저 미사일 공격을 해서 자기들이 보복했다고 하는데, 어쩌면 그리 뻔뻔한지...

 

멀쩡한 남의 집 부수고 터를 닦아 분리장벽을 세우고,

사람들을 고립시키고 억압하고 살던 땅에서 떠나게 만들고,

아이들에게 분노 이외의 것은 배울 수 없게 만들어버린 게 누구던가.

누가 누구에게 보복을 하겠다는건지 아주 우습다.

 

테러라는 말이 참 많이 쓰인다.

테러는 호러를 등에 업고 있다.

그리고 호러는, 이성을 마비시킨다.

 

호러... 공포에서 벗어나야 한다.

공포에 사로잡힐 것이 아니라 공포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하고 공포를 조장하는 세력과 싸워야 한다. 파병을 하니 테러의 가능성이 생기는 거고, 쓰레기통이 없어져서 불편하고, 테러방지법이 제정되어서 계엄이 아닐 때도 군이 출동하는 꼴을 보며, 나의 기본권 제한을 견뎌야 하는 것이다. 너무 단순한가? 너무 명확하다.

 

(벌써 22차!) 팔레스타인 화요캠페인에 다녀와서 짧은 영상을 정리하면서 또 울컥했다.

(이스라엘 대사관 건물 외벽에는 현판 하나 안 달려 있다. 아주 웃기는 나라다. 왜 숨어있지?) 

 

전쟁이 일상화된 공간이 지구상에 여러 군데 존재한다.

나는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을 매일 같이 누군가는 겪어야 한다는 잔혹한 사실.

그건 나를 너무 비참하게 만든다.

아무리 잘 먹고 잘 살아도 온전하게 행복할 수 없을 테니까.

 

세상 사람들은 모두 어디에 있습니까, 를 다시 한 번 봐야겠다.

워낙 길어서 자막 넣느라 고생했지만, 넣길 잘 했다는 생각.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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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나 새나

사람이나 새나

 

시. 이건직 / 노래. 백창우

 

사람이나 새나 죽으면 불쌍하다

우리가 새를 죽여도 불쌍하고

새가 우리를 죽여도 불쌍하다

사람이나 새나

새나 사람이나

 


초등학생 시에, 백창우씨가 곡을 붙여 만든 노래.

평화유랑단과 기차길 옆 작은 학교 아이들이 함께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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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취급

다 사람인 것 같은데 사람 아닌 사람 많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사람답게 살고 싶다'고 외친다.



요즘 하고 있는 작업 - 노숙인에 대한 철도공안의 폭력 행위 문제 있다 - 때문에 구성안을 쓰다가,

문득 제목을 뭘로 할까, 고민하는데..

 

산다는 것...

사람...

 

뭐 그런 것들이 생각 났다..

인터뷰 중에 "강아지 패듯 그렇게 패더라고" "개만도 못 하게 취급해", 이런 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억을 되살려 보니,

 

장애인들이 용산 육교 밑 도로를 점거했을 때 촬영한 속보 영상 제목이 "우리는 사람입니다"였고,

이주노동자들의 피켓 속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말이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였고,

뭄바이에서 어느 여성 단체 부스에서 샀던 티셔츠 뒷면에 적힌 말이 "페미니즘이란, 여성이 사람이라는 급진적 개념이다 - Feminism is the radical notion that women are people"였다.

 

그리고 수많은 노동자들이 노래한다.

"단 하루를 살아도 인간답게 살고 싶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 꼭 찾아오리라"

 

그렇다면 도대체 이 세상에서 '사람'은 누구인가?

 

이 많은 사람들이 '사람 취급'을 받고 싶어 한다면,

'사람'은 누구란 말인가?

 

참 어이없는 세상이다.

'사람' 같지 않은 것들이 '사람' 행세하고,

'사람'들은 '사람 취급' 해 달라고 목에 핏대를 세워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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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는 것은 위대한 걸까.

저녁엔 서울역에 갔었다.

 

지난 7월, 철도공안의 폭력에 의해 (거의 확실시) 숨진 일시적 노숙자(혹은 부랑자) 문 모씨 사건을 계기로 대책모임을 꾸린 노숙인 지원단체들(노숙인 복지와 인권을 실천하는 사람들, 노숙인 다시서기 지원센터 등)과 노숙인 당사자들이 준비한 추모문화제가 열렸기 때문이다.



철도공안에 의한 폭력 피해 당사자 인터뷰를 어떻게 할 지 고민하고 있는데,

마침 한 노숙인이 특유의 술냄새를 풍기며 다가왔다.

 

"나 맞았어요. 할 말 있어요."

 

노숙인들이 부당하게 인권유린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에 관해 분노하며 이 자리에 왔다손 치더라도,

'어딘가 이상해 보이는' 노숙인들이 문득 말을 걸어왔을 때의 당황스러움은,

익숙치 않은 내게 당연한 일인 듯 싶다.

어설프게나마 한 분 한 분 알아가면서 그런 문제는 옅어져간다 해도.

 

그 분은 얼굴 모자이크 처리할 것을 강력하게 요청했다.

원하시는대로 꼭 해드리겠다, 몇 번이고 다짐을 해도 기어코 명함을 달란다.

마음 속으로 살짝 갈등이 인다 - .. 간단치 않은 마음이다.

 

TV 보다가 술에 취해 잠들었는데, 행패를 부린 것도 아니고 그저 잠을 잤을 뿐인데, 공안실로 끌려가 구타를 당했다고 했다.

살아나가려고 빌고 또 빌었다고 말하는 그의 마음에는, 이미 너무 큰 분노와 상처가 남아 있었다.

 

인간... 취급도 받지 못 하는 그들이지만,

분명 그들은 철도청에서 좋아하는 '시민'이고,

대통령이 좋아하는 '국민'이고,

무엇보다.. '인간'이다..

 

IMF 이후 하던 사업이 망하고, 아내는 자살하고, 아이는 누나에게 맡겨진 채 홀로 노숙생활을 한다는 권 모 아저씨. 그는 건대 84학번이다.

가슴을 치다가 눈물을 흘리다가 목이 메어 '미안해요''미안해요' 하다가..

마지막엔 '노숙인 무시하지 말아요'라고 말한다.

내게 어느 학교를 나왔냐고 물으면서, 자신이 대학 교육까지 마쳤음을 재차 강조하고도 싶어했다.

 

그와 인터뷰를 마쳤을 때, 천지인의 '청계천 8가'도 끝나가고 있었다.

 

"산다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비참한 우리 가난한 사랑을 위하여..

 끈질긴 우리의 삶을 위하여.."

 

그럴까.

인간 취급 못 받으며 살아도, 산다는 것은 위대한 것일까.

끈질기고 비루한 인간들의 삶, 단지 산다는 것만으로도 위대한 것일까.

 

오늘도 살기 위해 발버둥 쳐보지만,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는 속상함을 달래주는 건 술 밖에 없고,

공안 단속에 잠은 깊이 들지 못 하고, 자꾸만 여기저기 아파는 오고, 이렇게 시간은 가고, 나이는 들고..

 

노숙인들은 '청계천 8가'를 무척 좋아했다. 박수소리는 힘찼고, 그들은 앵콜을 외쳤다.

 

그들은 분명, 믿고 있었다.

산다는 것은 위대한 것이라고.

 

그들이 그렇게 말하는데, 내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지하철을 타고 돌아오다가 손바닥에 코끝을 대보았다.

오늘만 해도 여러 노숙인과 악수한 이 손.

 

문득 좋지 않은 냄새가 나는 듯도 싶다.

술냄새.. 오랫동안 제대로 씻지 못한 몸냄새.. 고단한 숨냄새..

그건 고통스런 삶의 냄새였고,

나로써는 거역할 수 없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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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 마을이장단의 혈서식과 삭발식

8명의 마을 이장들은 몇 번이고 칼로 손가락을 그어댔다.

 

뷰파인더로 클로즈업 된 손만 보고 있으니, 그 손가락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는데도 내 머릿 속엔 엉뚱한 생각이 떠올랐다. 마을에서는 꽤나 젊은 축에 속할 이 분들, 어려서부터 동무였겠지.. 들로 산으로 놀러다니며 구슬도 치고 딱지도 치고, 몰려다니며 함께 놀던 사람들 아닐까.. 시골을 잘 모르는 혼자만의 생각일 수도 있겠지만, 그랬다.. 유치한 장난치며 놀던 동네 개구쟁이들이, 이제 다 커서, 우리 마을 지키겠다고 제 손으로 피를 짜내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할머니들은 아이고, 아이고, 아파하며 눈물을 찍어냈다. 미.군.기.지.이.전.반.대, 였던가. 새하얗던 피씨천은 한 글자, 한 글자 붉게 물들어 갔다. 내 옆에 서 있던 할아버지는 "잘 찍어, 이게 현실이야, 잘 찍어야 돼", 그러셨다.



할아버지 죄송해요.. 제대로 못 찍었다.. 젠장.. ㅡ.ㅡ

암튼...

 

글자 하나씩 앞에 두르고 삭발식이 진행됐다..

농민가가 흘러나오고... 잘려나가는 검은 머리칼.

 

하얀 보자기에 머리카락을 모아 담았다. 항의서한을 낭독한 후,

이장단은 K-6 정문을 향했다.

 

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아무도 이장단을 맞이하지 않았다.

 

아무도 안 나올 거냐, 팽성대책위 김지태 위원장의 다소 경직된 목소리가 정문을 타고 넘어갔다.

되돌아온 건, "미8군으로 보내세요" 하는 들으나마나 한 소리.

 

결국 머리카락은 부시 대통령에게 직접 우편으로 보내기로 하고,

들고 간 서한은 구겨서 정문 안으로 던져넣었다.

 

그런데 다음 순간, 아주 당황스럽게도, 안에 있던 한국군인이 그 서한을 정문께로 도로 던지는 것이 아닌가.

 

내 목까지 육두문자가 치밀어 오르는데, 마을이장들은 오죽했을까.

 

집회 순서가 다 끝나고, 마을 어른들은 어느 새 그림자도 챙겨 돌아가셨다.

서울로 갈 버스를 기다리며 앉아 있는데,

전경버스도 사라진 깨끗한 거리로 K-6 정문이 열리고 있었다.

정문을 열던 두 명의 군인 중 한 명은 문 열리는 속도가 빨라질 때쯤 아이처럼 문에 매달려 공기를 저었다.

 

서글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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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성읍 할머니, 할아버지들..




참 치사스러웠다. 평생 농사만 지어온 힘없는 노인네들, 그동안 고생한 것도 서러운데 이제 땅 내놓고 나가란다. 한 할머니 말마따나 억만금이 문제랴.

 

28일엔 캠프 험프리 (K-6) 정문 앞에서 미군기지 확장 저지를 위한 주민 총궐기대회가 열리는 평택에 다녀왔다. 집회의 첫인상은 '전국노래자랑'... '우리나라'와 '희망새'가 공연할 땐 정말정말 그랬다! 제일 어려뵈는 얼굴이 40대였고, 300여 주민들은 모두 주름살 가득한 할머니, 할아버지들이었다..

 

함정리, 도두리, 신대리, 대추리..

 

이름부터 참 촌스럽고 귀여운.. 자그만 시골마을일 터였다.. 땅 일궈먹기를 평생의 업으로 살아온 그 분들께, 미군 기지 이전은 청천벽력이었을 것이다.. 인터뷰에 응한 예닐곱 분의 대답이 다 다른 듯 똑같은 걸 보며, 모두 한마음이구나, 싶었다..

 

- 벼농사 짓다 이 땅에 묻히는 게 소원이여.
- 나는 흙을 사랑하다 죽으면 흙으로 갈껴.

- 사람이 입으로 먹는 건 다 땅에서 나온겨. 땅을 지켜야 뎌.
- 현금 억대로 준대도 못 가고, 내 손으로 만든 땅, 내가 지킬껴.

 

시끄러운 집회장 뒷쪽으로 빠져나와 인터뷰 시도를 했을 때, 마이크를 한사코 거절하던 한 할아버지는 이런 말씀을 하셨다.

 

"젊은 사람은 하나 없어. 무슨 상관이여. 우리가 다 죽으면 되는 거여. 그쟈? 우리만 죽으면 다 뎌."

 

순간 가슴이 애렸다.

 

미국의 신군사전략이 어떻고, GPR이 어떻고, 하는 게 다 필요없었다.

이건 명백한, "생존"의 문제인 걸.

지금 당장 이 곳을 떠나면 어디로 갈텐가.

땅을 일궈먹지 않으면 달리 무슨 일을 할텐가.

아파트가 무어냐, 보상금이 무어냐.

 

이런 타는 속내는 아랑곳않고, 반대편에서는 "미군 기지 이전 적극 지지" 등 상인연합회 명의의 배너가 걸린 집회가 열리고 있었다. 우리는 미군을 환영하며, 너희는 빨갱이니 북으로 올라가라. 소주와 먹거리들이 한상 차려져 있었고, 필리핀 여성들이 있었다. "미군이 떠나면, 이 아가씨들도 가야 돼. 우리한테 잘 해 주고 있는데", 이런 말도 언뜻언뜻 들려왔다.

 

벌써 흉흉한 소문은 동네를 분열시키고 있었다. 가겟집 계단에 앉아있던 한 아주머니는 땅을 치고 있었다. 보상금을 얼마를 받아처먹었다더라, 그러고도 더 받아먹을라고 저 지랄들이라더라, 아이고 속터져, 아이고 분해.

 

<아름다운 시절>이 떠올랐다. 이런 거구나, 우리는 여전히 이렇게 첨예하게 대립하고 서로에게 생채기를 내는구나.. 반대편의 사람들은 대책위 방송차가 지나가는 것도 독을 품고 막아섰다. 지칠대로 지친 난 음료수를 마시며 그 광경을 힘없이 지켜보고 앉아 있었다.

 

이게 뭔가 싶었다.

 

340여만 평의 땅. 미군을 위한 그 너른 땅에는 공원이 두 개, 뭐가 몇 개, 또 뭐가 몇 개 들어설 거랜다.

그 땅은 그저 '평택 미군 기지'라고 불릴 땅이 아니다, 저마다 자신의 이름을 가진 땅이다.

 

그 곳의 이름을 불러본다. 함정리, 도두리, 대추리, 신대리, 내리, 동창리...

들판 이름도 불러볼랜다.. 흑무개들, 도두리들, 신대리들, 내리들...

 

그 정겨운 이름들이 사라져간다. 평생을 그 곳에서 살아온 사람들이 죽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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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는 다다

 

훗..


 

불량제품들이 부르는 희망 노래

(mms://mms.plsong.com/plsong/jkj/bulrayng/01.wma)

 



미소.

썸머힐.

핑크 플로이드 - 더 월.

서태지.

불량제품들이 부르는 희망 노래.

모던 타임즈.

시험문제들 - 늘 귀여운 만화가 그려져 있던. 최민식 인물 사진.

에포케.

기독교 좌파.

레이몽 아롱.

고개 숙인 멕시코 농부 인형 - 멕시코 혁명을 얘기하고 싶었던 걸까?

교직원 회의 땐, 울보였다고, 말하던 기억.

뚜껑을 열면 작은 인형이 또 나오고 또 나오는 러시아 인형 마뜨로쉬까를 보여주며,

내 안에는 너희들이 모르는 또다른 내가 있어, 라고 말하던 '선생님'

 

그리고, 작은 영화광이었던 내게 선물해 준 '헐리우드 키드' - 어렸을 땐 정말 '헐리우드 키드'였다. ㅡ.ㅡ 볼 수 있는 게 주말의 명화 뿐이었으니.

 

책들이 지구를 감싸고 있는 책세상 카드.

 

넌 신경 안 써줘도 잘 하는 아이니까, 그 말을 넉넉하게 받아들이기엔 '아이'였던 내게 아직도 섭섭한 그 말.

 

...........

 

블로그를 돌아다니다, 누군가 <학교는 다다>를 북 폴더에 올려둔 걸 보았다..

'선생님'이라는 존칭을 한 번도 빼놓은 적 없는, 몇 안 되는 선생님 중의 한 분, 의 책.

 

중고등학교 6년을 가르친 우리들이 졸업할 때,

사표를 냈고,

이듬해 나온 책이 <학교는 다다>, 우리 동네에선 베스트셀러다..

 

문득 다시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많은 것들을 떠올리게 해서 독일 수도 있지만.

 

20061231.

일다 인터뷰에 실린 선생님 기사
http://ildaro.com/Scripts/news/index.php?menu=ART&sub=View&idx=2006122700006&art_menu=1&art_sub=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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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네에서 생긴 일 (2)

(우리 동네다. 나는 고층아파트에 살지만,

고층아파트는 12동 뿐, 나머지는 5층 이하의 나즈막한 아파트들이다.)

(여기도 우리 동네다. 옛날에는 고위직 가족들이나 

외국인 기술자 가족들이 살았는데,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다.)



문득 87년이 떠오른다. 포항에서 광양으로 이사온 지 2년 째, 난 초등학교 3학년이었고 없는 형편에 그래도 남들 다 하는 거라고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 해엔 인신매매단에 관한 흉흉한 소문이 끊이지 않았고, 테레비에선 서울의 대학생 언니 오빠들이 연일 데모하는 소식이 나왔고, 같이 테레비를 보던 엄만 "너 대학교 가서 데모질 하면 다리몽댕이 분질러버린다"라고 위협하곤 했다.

또 하나 잊을 수 없는 것은, 외부 사람들(포스코 사원들은 주택단지 내에 살고 있었고, 그래서 단지 외의 사람들을 '우리'는 '외부 사람들'이라 불렀다.)이 데모를 하는 바람에 광양 장에 나갈 수 없었던 일이다.

원래 광양은 김양식으로 유명한 곳이었다.(김양식이 대한민국 최초로 시작된 곳으로 알고 있다.) 그 바다는 제철소가 들어설 곳으로 낙점됐고,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 바다는 땅이 되었다.

그로 인해 강제이주를 당해 삶터를 잃어야만 했던 원주민들이 동네로 들어가는 길목 - 전남동부건설노조가 얼마 전에 막았던 - 을 막은 것이었다. 장날이라고 버스 타고 광양에 나갔다가 무거운 시장바구니를 들고 씩씩대며 걸어들어온 엄마의 말에 따르면, 외부 사람들이 퇴비더미로 길을 막았고, 동네 사람들에게 그 퇴비를 던져대는 통에, 그거 피해서 걸어들어오느라 고생바가지를 썼다는 거다. 어디 나갈 때 포스코 마크가 찍힌 옷을 입고 나가서는 안 된다는 충고도 잊지 않았다.

 

- 회사에서 보상금은 아쉽지 않게 줬을텐데 왜 저 난리들인지 몰라.

그게 어디 단지 보상금만의 문제였으랴. (아쉽게 줬는지 아쉽지 않게 줬는지는 알 수 없다.) 어부였거나 농부였던 그들이 생소한 지역 혹은 생소한 직업군으로 내몰리며 겪었을 어려움과 고통을, 억만금이라도 '보상'할 수 있었을까.

우리 동네는 참 예쁘고 깨끗하고 조용하다. 어른들은 그래서 살기 좋다고들 한다. 학교 앞엔 오락실도, 떡볶이 장사도, 뽑기도, 만화가게도 없다. 그래서 애들 교육하기에도 좋은 곳이다.

하지만 코딱지만한 동네, 누구네 집 숟가락이 몇 개인지도 훤해서 별별 소문이 다 도는 동네, 아빠들은 똑같은 작업복, 애들은 똑같은 교복을 입지만 집전화번호부터 아빠들의 직위가 들어있고, 누구네 아빠는 차장, 누구네 아빠는 부장, 아빠 직책 따라 애들 씀씀이도 달라서 계급의 차이가 더 잔인하게 드러나던 동네. 아빠의 대학 나온 직속상관 딸과 한 반에 있어서, 죽어도 그 애는 이겨야만 했던 고졸 주임 어린 딸래미의 오기.

난 우리 동네를 죽도록 싫어했고, 지금도 싫어한다.

1년이면 두세 번도 찾아가지 않는 우리 동네,
잊고 살고 싶은데, 이렇게 또 내게 가슴 아프게 달려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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