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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철거

문민정부와 함께 대학생활을 시작한 첫 해에 세상은 문민개혁으로 시끄러웠다.

경실련 대학생회가 출현하였고, 온통 '개핵'(영삼이말투)으로 넘쳐났다.

그래서인지 투쟁이라는건 별로 없었다. 기억나는건 원진레이온 노동자투쟁과 전해투 투쟁 두가지.

 

그 와중에 선배들은 후배들을 철거촌으로 자주 데리고 다녔다. 아마도 적절한 투쟁의 계기가 없어서였기도 했을 것이다. 서초동 꽃마을 공부방 교사로도 갔고, 남태령에 다솜 공부방에도 갔다.

철거가 긴박하게 다가온 철거촌에도 갔다. 그 중 신정동 '칼산' 철대위가 기억난다.

겨울이었는데 그곳에 규찰을 서러 가면 드럼통에 불을 피워놓고 마치 군대에서 보초를 서듯이 저 건너 용역깡패들이 있는 곳을 주시하면서 밤을 샜다.

처음에는 다소 긴장이 되었지만 얼마 지나고 나서는 별다른 긴장감 없이 주민들과 얘기도 하고 먹을 것도 먹으면서 여유를 부리기도 했다. 그 때에는 철거깡패라는 것을 대면하여 싸운 적이 없었고 철거가 들어오더라도 설마 사람을 다치게 할까 하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드럼통 난로가에 앉아서 같이간 사람들과 이런저런 얘기도 하고, 야참도 먹고  피어오르는 불을 바라보며 노래도 불렀다. 가끔은 괜히 하늘을 보면서 별을 즐기는 척도 했던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들어가지 않았을때 철거깡패들이 들어왔고 선배, 친구들이 깡패들에게 많이 맞았다. 소식을 듣고 달려갔을때에는 이미 상황이 끝난 뒤였다. 그 뒤에는 어찌 되었는지 사실 별 기억이 없다. 아마도 끝까지 남은 사람들이 임대주택에 입주하였을 것이다.

정확치는 않지만 그 뒤로도 해마다 홍제동이니 도원동이니 금오동이니 봉천동이니 하면서 여러 철거지역 연대 활동을 했었다. (서울에는 어디에나 철거촌이 있다)

 



그렇지만 선명하게 남아있는 것은 철거가 들어오기로 예정된 전날, 마을 골리앗에서 밤새 규찰을 서면서 느꼈던 긴장감, 초조함, 불안감 등이다. 특히 서서히 동이 터오면서 철거가 시작되는 시점에 일분일초 다가갈수록 육체적 피로감과 더불어 긴장감은 최고조에 달한다.

그러다가 마침내 철거깡패들과 경찰병력이 나타나면 오히려 그 상황이 현실이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불면으로 지샜던 밤이 지나면 당연히 몸을 누이고 쉬는 것이 현실이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눈앞에서 시커먼 것들이 달려드는 것을 보게 되면 그 광경이 너무나 기묘하게 보이는 것이다.

 

내일 새벽 대추리 도두리 주민들과 평택지킴이들은 그곳에서 비슷한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아니 이제까지 계속 해왔다. 3월 6일, 5월 4일, 그리고 그 이후 매일 매일...

벌써 경찰병력은 마을 외곽에 샅샅이 배치되었다. 내가 아는 사람들도 마을에 들어가 있고 마을 밖에서 모여있다.

 

간절함, 분노, 절망, 고통 등 일찍이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 휘몰아치면서 아침까지 잠들지 못할 것이다. 그러한 상태를 노무현정부나 경찰이나 철거깡패는 알지 못한다. 스스로가 얼마나 추악하고 가증스러운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지 일말의 자각도 없을 것이다.

빨리 해치우면 편해질 귀찮은 일 정도로 여길 것이다. 한쪽은 목숨을 걸고 한쪽은 그걸 짓밟으려 한다.

오늘밤, 잠들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내일 다가올 참혹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대추리 도두리 주민들과 평택지킴이들은 끝까지 평화적으로 항전하겠다고 결의했다. 그 결의를 마음에 새기고 저들의 야만적인 작태를 규탄해야 한다. 가능한 모든 수단과 방법을 통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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