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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자기 진술, 당신의 심문에 의한"

라오스의 수도 위앙짠.

한국인 게스트하우스를 찾아서 도미토리에 짐을 풀고, 한국말로 된 책들이 한가득인 책꽂이를 구경했다. 그리곤 고민에 빠졌다. 끌리는 소설이 두 권, 공지영의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와 이인성의 "마지막 연애의 상상".  두 권을 빼 들고 이리저리 저울질을 하다가 아는 사람의 소설을 골랐다.
아는 사람이라, ㅎㅎ

나는 알고 상대방은 모르는 사람. 이인성 교수.

작품을 하나도 읽어본 적은 없지만 어려운 소설을 쓰고 인정받는 작가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대학교 1학년 때, 여러개 있는 불어1 수업 중 그 분의 수업을 골라서 들었었다. 소설가에 대한 로망 같은 것 때문이었겠지. 거의 세 달 동안, 빠짐없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수업을 들어갔었는데, 수업시간에 뭘 들었는지는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소설책에 인쇄되어있는 것과 같은 얼굴, 카랑카랑한 목소리, 수업 중에 가끔 담배를 피워물던 모습 같은 것들만 조금씩 기억날 뿐. 그 이후, 불어에 연관된 나의 사건들은 모두 암울하기만 한 것이어서, 한번도 떠올려 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그런데 10년도 지난 지금 위앙짠에서 그 얼굴을 다시 만나게 될 줄이야... '솔'이라는 출판사에서 낸 '21세기 작가총서'라는 것 중 하나. 한국과는 다른 시간 속에 있는 곳이기에 1992년에 간행된 이 책을 만날 수 있었던 것 같다.


작품집 중에서 겨우 단편 하나를 끝냈다. (게스트하우스 밖으로 책을 가지고 나갈수가 없기 때문에, 답답하다.) '나의 자기 진술, 당신의 심문에 의한', 정말 오랫만에, 활자 하나하나를 따라가기 위해 내 뇌 속에 있는 세포들이 마구 움직이는 느낌. 형태적 새로움(15년 전에 새로웠던 것이겠지만, 나같은 문학 문외한에겐 여전히 새로운)도 그렇거니와, 치열하게 구사된 언어들, 그 속에 들어있는 사회적 존재이자 작가로서의 자기 고민이 무척이나 박력있게 치고들어왔달까. 짧은 글을 읽는 동안 몇 번이나 책을 내려놓고 크게 숨을 쉬었다. 담배도 세 대, 와인맛이 나는 술(예전에 태국에서도 좋아라 했던 spy)과 함께.
불행을 경험하지 안은, 적어도 불행하다고 느껴오지 않은 엘리트, 겨우겨우 타인을 제대로 인식하고 받아들이고 소화하고자 하는 인간으로서의 고백에서 약간의 공감, 같은걸 느꼈다면 좀 우스운가? 물론 그에 비하면 나는 아주 낮은 레벨에 불과하지만, 그런 거, 아, 맞아... 하는 느낌.

훌륭하다. 오랫만에, 언어의 깊은 곳에 살짝 닿고, 그 언어가 담고 있는 의식의 농도를 맛본 경험.

 

아마도 나에게는 너무나 한계적인 영어라는 언어를 가지고 생존에 필요한 사고만 하던 시간이 너무 길었던 영항도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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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009 두 번째 작은 해탈

여행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뭔가 이게 아닌가 싶어 혼자 보라카이에 갔었다.

생전 처음, 진심으로 혼자서 바다를, 해변을, 여유를 음미했던 것 같다.

그 투명한 초록 바다빛에 젖어들면서, 지난 5년 동안 여러 내용과 형태로 알게모르게 쌓여있었던

일과 활동에 대한 앙금, 이랄까 답답하고 한편으론 허전했던 것들을 쓸어내릴 수 있었던 것 같다.

 

여행의 막바지,

어제 자전거로 루앙프라방 이곳저곳을 한참 달렸다.

오랫만에 보는 파란 하늘과 새하얀 구름들, 메콩강변의 바람, 땅콩과 커피 향기

자전거를 잠시 세워두고 강변에 앉아서 바나나쉐이크를 한 잔 마시며 담배를 피고 있자니,

아, 좋은 여행이었어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지난 6개월

 

이제까지 거의 30년을 사는 동안 처음으로

나 자신의 욕구와 필요에 따라, 그것에만 충실하며 지냈던 시간들이었다.

의무, 기대, 욕심, 성실, 책임... (적어도 철들고 나서 부턴) 나를 규정해왔던 것들로 부터 자유로워져서

바야흐로 진정한 나 자신을 발견하고 마주볼 수 있게 되었달까.

 

 

이제 남은 여정은 돌아가기 위한 것이다.

한국에 가면 어떻게 될지, 겨우 조우한 나 자신이라는 존재를 어떻게 가지고 갈 수 있을지,

걱정과 기대가 동시에.

 

어쨋거나

나에겐 참 훌륭한 여행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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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008 드디어 비가 그치다

어제, 사흘 내내 내리던 비가 그쳤다.

덕분에 여행자들 모두 분주한 모습.

나도 지난번에 왔을 때 못가봤던 쾅시폭포에 가기 위해서 교통편을 제공하는 여행사 프로그램에 참가.

다섯 명의 아이리쉬, 스위스에서 온 커플, 그리고 아르헨티나와 캐나다에서 온 언니 한명 씩.

아일랜드 애들이 어찌나 떠드는지, 게다가 그 영어가 얼마나 빠르고 알아듣기 힘든지.

 

폭포는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하지만, 생각보다 중간으로 올라가는 길이 험하고, 폭포수를 엄청 맞아야 했다.

3일 동안 비를 맞다가 다시 폭포수를 맞으러 가다니.

덕분에 홀딱 젖고 좀 추워서, 드디어 감기기운.

그래도 아직 남아있는 옷과 새로 빨래거리가 된 옷을 빨아 널고

화콜을 하나 먹고 잤다.

 

밤에 비가 와서 걱정했더니, 오늘도 개임.

자전거를 빌렸다.

여기저기 구석구석 훑어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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