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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에서 찾기2005/05/12

[펌] 뒤바뀐 연대와 적대

뒤바뀐 연대와 적대 
 
 
 장귀연  
 
 1.


나는 정말 몰랐다.
만국의 노동자들이 치루는 세계노동절대회에서, “일본의 망동”에 대해 “남북 노동자가 한 목소리로 철저한 응징을” 하겠다는 외침이 울려퍼질 줄은.


민주노총과 한국노총 그리고 북한 조선직업총동맹의 <일본의 독도영유권 주장과 역사왜곡 행위를 규탄하는 남북 노동자 공동성명>이 결연한 목소리로 낭독되었다. 노동절 행사 마지막 즈음 하이라이트 시간대였다. 그 순간 당황해서 어쩔 줄 몰랐던 것은 나 뿐이었을까?


“일본은 우리가 나약한 민족이 아니라는 점을 똑바로 알아야 한다”는 경고를 듣고, 과연 일본이 섬뜩해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섬뜩했다. “나약한 민족이 아니”라서 어쩌겠다는 것인가? “응징”하겠다고? 전민족이 “한목소리로”?
일본의 침략 전쟁 기도에 대해 반일투쟁을 결연히 벌여나가겠다는 선언에서, 만국 노동자의 인터내셔널을 주창했던 노동자들과 노동 대표자들이 전쟁이 예기(豫期)되자마자 애국주의 광풍에 몸을 맡겼던 역사를 떠올렸던 것은, 역시 나의 과민반응이었을까?


물론 일본의 독도영유권 주장과 역사왜곡행위는 규탄할 만한 일이다. 일본 우익의 군국주의적 경향도 우려할 만하다. 그러나 또한 그만큼 우려스러운 일은, 외세에 대해 전국민 전민족이 똘똘 뭉쳐야 한다는 또다른 애국주의의 발상이다.


어째서 그것이 우려스러운 것이냐 하면, 전국민과 전민족은 똘똘 뭉쳐 통일된 목소리를 낼 수가 없고 내어서도 안되기 때문이다. 국가간 경계와 민족이라는 상상적 공동체를 가로질러, 자본과 노동이라는 심대한 계급 분열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본주의 국가에서 이른바 국민적·민족적 목소리는 짐짓 이러한 계급 적대를 은폐하고 자본의 이익을 대변하기 마련이다.


기실, 일본의 군국주의화와 우경화라는 현상 자체가 바로 이에 근거한다. 일본 자본주의의 성장 신화가 한계에 부딪치고 장기 불황에 접어든 90년대 이래, 갈수록 어려워지는 일본 노동자 민중들의 불만을 달래고 상실되어가는 자부심과 희망을 환상적으로 재구축하려는 시도가 극우 민족주의 선동의 배경을 이루고 있다.


그런데 그게 어디 일본뿐인가. 한국 역시 정확히 이러한 상황에 해당한다. 그러니 남을 규탄하기에 앞서, 그를 거울로 삼아 우리를 성찰해야 할 일이다.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위기에서 나라마다 난무하는 강한 국가와 민족이라는 수사가 전세계적 자본과 노동의 적대와 대립을 은폐하고 있음을 밝히는 것이, 노동자와 노동 대표들의 임무일 터다.
그러나 노동절대회에서 그런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한국노총 위원장의 연대사를 듣다가 잠시 귀를 의심해야 했던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내가 잘못 들은 것이 아니라면, “국가경쟁력이 세계 10위 안에 들고 노동자들이 살맛나는 세상이 오도록 노력해 나갈 것”이라는 말이 스쳐 지나갔다. 노총 위원장이 국가경쟁력이란 말이 곧 자본의 경쟁력을 의미한다는 것을 모를 리는 없을 테고, 한국의 자본이 잘 되면 노동자들이 더 많은 것들을 얻어내도록 열심히 투쟁(!)하겠다는 취지였을 게다. 그러나, 백번 양보해서 자본이 잘 나가면 노동자들에게 돌아오는 것이 많아질 가능성이 그나마 높아진다 하더라도, 자본의 경쟁력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것이 노동자 대표가 할 소리인가?


이 말이 성립되려면 또다른 국가주의의 기반 위에서만 가능하다. 우리나라 국가경쟁력이 높아지면 노동자들도 잘 될 거라는 생각. (‘강대국 건설’을 외치는 일본 우경화의 대중적 기반과 무엇이 다른가?) 그리하여 국가의 경쟁력 자본의 경쟁력을 위해, ‘우리나라’ 정부와 손을 잡고 ‘우리나라’ 자본과 손잡을 수 있다. 그리고 그 연대 속에서 계급의 분열과 적대는 환상적으로 사라진다.


2.


노동절대회 동안 받은 많은 선전물들 중에서, <2005년 노동절대회 문선을 하지 못하게 된 수도권지역 문화패들의 입장>이라는 제목의 글이 있었다.


이미 <참세상>에서 보도한 대로, 사회적 교섭 반대와 총파업 투쟁 호소를 형상화하려 했던 문화패들은 노동절대회 전야제를 참가하지 않았다. 또는, 못했다.


민주노총 지도부는 ‘그런 내용은 올릴 수 없다’고 단호하게 거부하며 지도부가 밝힌 기조와 지침에 따를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문화패들은 민주노총 집행부 전속 쇼단이 아니다. 그들은 현장의 노동자들이고 기층 조합원들이다. 노동자로서 조합원으로서, 밑으로부터의 목소리를 지도부에 전달할 권리가 있고, 노동자의 대회에 그 생각과 표현을 맘껏 펼쳐보일 권리가 있다. 자신의 생각과 다른 내용을 노래하고 몸짓한다면, 상업적 연예인만도 못한 일. 따라서 문화패들이 지도부의 요구에 응할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하다.


다른 한편으로 민주노총 지도부의 입장에서는, 그렇잖아도 사회적 교섭 논란으로 분열이 심각한 와중에 그런 문선을 용납할 수는 없다는 마음이 들기도 할 것이다. 민주노총 문화미디어실장의 인터뷰대로 “조합원들을 혼란에 빠뜨릴 가능성이 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분열이 심각하고 지도부의 지도력이 누수되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더욱, 노동절대회 문화패들의 공연을 봉쇄해서는 아니 되었던 것이다.

잘 알다시피, 이번 일은 사회적 교섭을 강행하려는 지도부와 그를 결사저지하려는 측 사이 분열과 대립의 연장선상에 있다. 지난 대의원대회 이후 양측은 서로 공공연하게 비난할 뿐만 아니라 서로를 적으로 규정하는 말들을 쏟아냈다. 나는 아연실색했다.


뜨겁게 흥분한 시점에서 양측의 적대심을 저울질할 수 없어 보였지만, 결정적인 책임은 지도부에게 있을 수밖에 없다. 지도부는 지도부이기 때문이다. 지도부는 왜 존재하는가? 노동자들의 분열을 막고 계급적 연대를 형성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 아니더냔 말이다. 자신이 대표해야 할 노동자들을 적으로 규정한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조건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민주노총 지도부는 분열과 대립을 막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조장하기조차 했다. 대의원대회에서 발언과 참여를 봉쇄했고 이번 노동절대회에서 문선을 봉쇄했다.
민주노총 지도부는 그것이 자신의 지도력을 공고히 하는 방도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만약 그렇다면 대단한 오해다. 지도부의 지도력은 밑으로부터의 다양한 목소리를 포괄하고 아우르고 집중해나가는 힘에서 나오는 것이지, 그것을 봉쇄하는 힘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봉쇄란 적대하고 있는 적에 대해서 하는 것이다. 노동자들이 서로 적인가? 물론 자본은 언제나 노동자들을 서로 분열시키고 대립시키려 한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연대로써 그것을 극복해야 하고 지도부는 바로 그것을 임무로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노동절대회 전야제는 반쪽이 되어 버렸고, 배제된 노동자들은 무대 아래서 자신의 입장을 호소하는 유인물을 돌리고 있었다.


3.


광화문 거리에 앉아 나는 심각하게 자문했다. 노동자들은 누구와 적대하고 있고 누구와 연대하는 것일까?
내겐 너무 명백했던 답이 흔들리는 순간, 나는 아노미 상태에 빠져들었다.


2005년 5월 1일, 115주년 세계노동절기념대회, 전세계의 노동자들이 일제히 거리로 나오는 날. 바로 그 날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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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술.

교원평가제와 내신 경쟁으로 인한 고1 학생들의 연이은 죽음과 눈물을 보며

학원과 나를 생각한다.

 

논술이 강화된다는 소식에 늘어난 입시 상담.

하루에도 수십 명씩 찾아오는 학부모들과

중간고사 때는 내신에 집중해야 한다며 한 달 간 학원을 쉬겠다는 아이들.

 

그들 앞에서 나는 가치관과 윤리를 논하고 각종 사건과 사회적 쟁점들을 꺼내 놓고 토론을 요구하지만

토론의 결론이 무엇이 되던 간에

결국 그들이 바라는 건 '입시에 유리한 답변을 정리하는 것' 뿐이다.

어차피 자신의 가치관이나 입장을 심각하게 고민하는 것은 입시에 별 도움이 되지 않을테니까..

 

수업을 진행하는 나는,

나의 생각과 가치관과 입장을 아이들과 공유하길 원하지만

입시 앞에서 어쩌면 그것은 우스운 바람일 지도 모른다.

 

학원 교사의 대부분이 노조나 단체에서 활동하고 있는

소위 '운동권'이라 할 지라도

입시 앞에서 그것은 별다른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결국 그 곳은 '학원'이고,

'학원'은 '입시'를 위한 곳이니..

 

아이들이 경쟁에 짓눌려

입시를 위해 자신의 가치관과 입장을 사건별로 정리해 '외우고' 있는 상황을 보면서

'논술학원 교사'라는 나의 위치에 심각한 회의가 밀려온다.

 

논술학원의 아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이들의 현실 속에서는, 부르디외의 아비투스 개념이 명백히 입증되고 있음을 느낀다.

 

사회적, 문화적 자본이 풍부한 이 아이들은

자신들의 환경을 매우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철거민이나 노숙자, 노동자와 사회적 소수자들의 삶에 대해서 대부분 공감하지 못한다.

 

이들의 부모는 대개 의사나 교수, 사장, 이사 등이며

이들의 가정에서 구독하는 신문은 오로지 조선일보.

 

갈수록 심난해져만 가는 교육 현실과

'논술학원의 교사'라는 나의 입지가

자꾸만 나의 머릿속을 헤집고 있다.

 

오늘도 결국,

제대로 자기는 어려울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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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 그리고 이것저것.

이야기 하나.

 

평소에는 잘 표현하지 않던 일이나 인식하고 있지 않은 듯한 일.

그러나 무의식 중에 항상 머리속에 잠재하고 있는 일들이

꿈에서는 '기억하라'는 듯

항상 나타난다.

 

4월 말 경에는

4월까지만 활동을 하겠다던 혜진이가 나타나

나를 보며 활짝 웃으면서

"나 다시 계속 활동 할려구"

하면서 활짝 웃었다.

혜진의 어깨를 두드리며, 나 역시 활짝 웃었다.

"그래, 잘 생각했어!"

 

육교를 건너면서는 종필과 도끼가 나와 함께

'문화예술교육지원법'에 관해 심각하게 논의했다.

 

저 아래, 버스 정류장에서

문화연대 사람들이

"빨리 와~!"하고 부른다.

 

어느 날엔,

바람소리 사람들과 판굿을 신나게 뛰었다.

송글송글, 사람들 이마에 맺힌 땀방울들과

신명나는 풍물 소리에 취해

나도 덩달아 열심히 뛰었다.

 

한 동안 거의 매일 나타나던 전경들은

최근엔 잘 나타나지 않는다.

 

그들과 대치하게 되는 장소는

어딘 지 모를 휘황찬란한 건물 앞 거리

또는 덕성여대이다.

 

학교에서는 수미 언니가 나와 함께 쫓기고 있다.

우두두두 달려드는 새까만 전경들을 피해

언니와 나는 건물과 건물 사이를 지나

가쁘게 계단을 오르내리고,

결국엔 막다른 곳에 다다라

전경들과 대치하게 되지만

잡히기 일보직전,

천장에 난 작은 문을 급하게 열고

옥상으로 힘겹게 뛰쳐 올라간다.

 

거리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투쟁하고 있다.

전경들이 몰려오고

우리는 전경들과 대치하며 잔뜩 긴장하고 있다.

전경들이 우리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세우면

꽉 막힌 골목의 끝에서

우리는 필사의 힘을 다해 전경들의 방패를 밀어낸다.

 

작년에 꾸었던 꿈 중에

너무 생생해서 절대 잊혀지지 않는 꿈은,

범국민교육연대 동지들과 함께 어떤 건물의 제일 윗층에서 세미나를 하던 중

폭탄이 날아들었던 꿈이다.

 

폭탄이 건물 한 가운데로 떨어졌고

우리는 사다리가 잔뜩 쌓인 비상계단을

미끄러지듯이 내려가고 있었다.

 

내가 정신없이 사다리에 밀려 무너지듯 그 계단을 내려가고 있을 때

뒤에서 천보선 선생님이 외친다.

"나영아~!! 성명서 써야 하는데~!!!!"

 

최근엔 꿈을 잘 꾸지 않거나

꿈의 내용을 금방 잊는다.

 

자기 전에 먹는 약의 영향인 것 같은데,

꿈을 꾸고 있을 때는 괴롭고 긴장되더라도

그 꿈들이 기억나지 않는다는 게

조금 섭섭하긴 하다.

 

이야기 둘.

 

학원 아이들이 요즘 신입생 환영회다,

수학여행이다. 소풍이다 해서 다들 바쁘다.

 

나는 수학여행 가서 밤마다 술만 마시고

다음 날엔 버스 안에서 잠만 자서

수학여행에 이렇다할 추억거리가 남아있지 않다.

 

슬프다.

 

그래서 요즘 학원 아이들에게 항상 강조한다.

"얘들아, 나처럼 후회하지 말고 술은 적당히 마시고 재밌는 추억을 많이 만들어라"

 

술은, 추억을 남기는 데 그리 좋은 도구는 되지 못한다.

 

이야기 셋.

 

우리 동네는 임대 아파트 단지이다 보니

이 동네엔 무언가 부족한 사람들이 많다.

 

혼자사시는 할머니, 할아버지들.

몸이 불편한 장애인들.

한부모 가정의 아이들.

부모님이 일주일에 한 번 올까말까 하여

매일 밤을 친구들과 술로 지새는 아이들.

폭력을 휘두르는 남편을 피해

아이와 함께 숨어 사는 여성들...

 

이들이 우리의 이웃이다.

 

이런 환경의 아이들이 있는

단지 앞 중학교에서 문화교육 프로그램을 요청해서 찾아갔더니

교사라는 사람이

"얘네들 수준을 몰라서 그렇지, 얘네 전국 꼴지예요. 얘네들한테는 많은 걸 기대할 게 없어요"

라고 망언을 내뱉는다.

 

"당신이야 말로 최악이야. 당신같은 교사에게, 아이들도 기대할 게 없다구!"

소리치고 싶었지만 하지 못했다.

 

그 날, 그 말을 하지 못한 것이

내내 마음에 걸린다.

 

지금도

밖에서 어떤 아주머니가

술에 취해 뭐라고 울부짖으며 비틀비틀 걸어간다.

 

슬픈 일이 있나보다.

 

이 동네에는 슬픈 사람들이 참 많다.

 

오늘 밤에는,

우리 동네 사람들이 모두 행복한 웃음을 짓는

꿈을 꾸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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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만큼 다 안다는 자만에 대하여.

알만큼 다 안다는 자만에 대하여.

 

몸에 병을 달고 살게 되면서 얻은 한 가지 교훈은,

타인의 고통을 절대 자신의 잣대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자신이 직접 그 사람이 되어 보지 않는 이상,

어느 누구도 그 사람이 지닌 고통의 크기를 짐작조차 할 수 없을 것이며

따라서 어느 누구도 그 사람이 지닌 고통의 크기를 평가할 자격은 없다.

 

우리가 특히 경계해야 할 것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타인에 대한 평가이다.

 

누구나 사래에 걸려본 적이 있다고 해도

개인이 지닌 경험치에 따라,

건강 상태에 따라,

그 사람이 처한 환경에 따라

그 고통의 크기는 어마어마한 차이를 지니며

그것의 영향 또한 다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지닌 사래의 경험이

몇 차례 목이 따끔하고 괴로웠던 정도의 것이었다 해도

다른 어떤 이는 그의 상태에 따라

사래로 인해 치명적인 상처를 입을 수도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졸음을 이기지 못해 괴로워할 때

다른 이에게 그것은 이해할 수 없는 고민일 테지만

당사자에는 그 자체만으로

자신의 삶을 침해하는 커다란 고통일 수 있다는 사실을

타인은 알지 못한다.

 

따라서 나는

누군가의 고통에 대해

절대 함부로 평가하지 않기로 하였다.

 

우리의 경험은 철저히 주관적인 것이며

때문에

타인에 대한 평가에 앞서,

우리는 그 사실을 항상 명심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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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폭력 논란, 새삼스럽다.


 

학교 폭력 논란, 새삼스럽다.

 

학교 폭력이니, 일진회니 하는 말들로 한 달째 세상이 떠들썩하다.

초-중-고등학교까지 이어지는 조직화에 전국연합 조직의 결성, 선배의 후배를 이용한 금품 갈취, 일상적인 구타, ‘살인축구’에 ‘섹스머신’ 등의 ‘퇴폐놀이문화’까지. 언론을 통해 일파만파 퍼진 이른바 ‘일진회’의 실태는 소심한 어른들의 간을 그만 개미허리만큼 오므라들게 만들어버리고 말았다.

매일, 뉴스에는 새로운 학교 폭력 소식이 올라오고, 정부와 언론은 학교 폭력의 심각성에 대해 호들갑을 떨면서 ‘스쿨폴리스’, 학생 연행, cctv에 이어 심지어 ‘야간 통행금지 조치’에 ‘병영체험’까지 동원하며 연일 강경 대책만을 제시하고 있다.

이쯤 되면 학교 폭력에 대한 정부의 알레르기 반응은 거의 7,80년대의 실미도나 삼청교육대에 버금간다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하다.

메일을 확인하기 위해 포털 사이트를 클릭할 때마다 새롭게 떠오르는 ‘학생이...폭행’, ‘정부...강경대응 방침’ 뉴스를 보며 생각한다.

도대체 뭔 난리야? 새삼. 학교에 폭력이 존재하지 않았던 적이 있었던가? ‘학교=구타’ 아니었냐고. 참 내...


학교. 일상적 폭력의 장.


우리 모두가 익히 알고 있지 않은가.

일제와 군국주의의 군대문화 유산을 그대로 물려받은 학교 현장에서 폭력은 새삼스러운 화두가 아니라는 것쯤이야.


아침 7시 등교. 서서히 교문이 닫히고 미처 그 사이를 통과하지 못한 지각생들은 운동장에 열 지어 서서 ‘앉았다 일어서기’ 100번, ‘운동장 10바퀴’, ‘오리걸음 왕복 10번’ 등의 특훈을 받고 9시 정규 수업이 시작될 때까지 교사에게 회초리 세례를 받거나 교무실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어야 한다.   

저기. 한 놈이 된통 잘못 걸렸다.

운동장을 달리다가 담배 한 갑을 떨어뜨린 놈.

“너 이 새끼 이리와!” 불호령이 떨어지고, 어기적어기적 교사 앞으로 간 녀석에게 교사의 커다란 주먹과 발이 무작위로 날아든다. 몇 대? 셀 수도 없다. 어느 새 녀석의 입가에 피가 맺히고 녀석이 조그맣게 읊조린 “아이, 씨” 한 마디에 또 다시 무기들이 세차게 날아든다.

그 녀석, 맞거나 말거나 수업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린다.

첫 시간부터 숙제를 해오지 않은 아이들이 연이어 불려나가 교탁 앞에서 회초리로 엉덩이를 맞았다. 회초리 10대쯤 아무것도 아니다. 아이들은 그냥 엉덩이를 슥슥 문지르며 자리로 돌아온다. 시간은 흘러 3교시. 악명 높은 물리 시간이다. 뒤에서 킥킥거리며 만화책을 돌려보던 녀석들이 ‘걸리면 죽는다’고 별명이 ‘폐암말기’인 ‘물리’에게 딱 걸리고 말았다. 처음부터 뭔가 안 좋은 일이 있었던 듯 연신 툴툴대던 ‘물리’가 놈들을 불러내더니 교탁부터 교실 끝까지 쫓아가며 두 녀석의 뺨을 후려친다.

“너희들 같이 쓸모없는 새끼들은 진작에 공장이나 가! 뭐하러 여기 앉아서 시간 낭비하고 있어 이 ** 같은 새끼들아!”

‘물리’의 목소리가 교실에 쩌렁쩌렁 울리고 놈들의 뺨은 붉게 부어 달아올랐다. 잠시 후 ‘물리’는 씩씩거리며 교탁으로 돌아왔다. 순간 교실에는 숨소리마저 조심스러운 정적이 감돈다.


점심시간이다. 

좀 전에 ‘물리’에게 뺨을 맞아 얼굴이 달아오른 한 녀석이 동아리실로 향했다. 점심시간까지 열 명이 집합해 있어야 하는데 세 놈이 보이지 않는다. 들어서자마자 동아리실에 서 있는 일곱 명의 후배들에게 ‘일렬종대’ 명령을 내리고, 나머지 세 녀석을 기다린다. 잠시 후 세 녀석이 동시에 헐레벌떡 들어섰다. 한 놈씩 차례로 발길질을 당하고 다시 열 명은 일렬로 섰다. 오늘 집합명령이 떨어진 이유는 ‘인사를 하지 않아서’이다. 대략 삼십 분 정도 훈계를 들은 후배 녀석들은 오늘 저녁 노래방으로 다시 집합하여 전체 선배들로부터 얼차려를 받고 몇 대씩 돌림 빵을 당해야 할 것이다. ‘물리’에게 뺨을 맞은 녀석은 후배들이 ‘싸가지가 없다’며 연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폭력은 순환되기 마련.


참고로 위의 서술은 철저히 필자와 친구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이다. 더 심한 이야기도 많으나 소심한 어르신들 그나마 간당간당한 심장 무너져 내릴까봐 이쯤 하기로 한다.

일진회를 비롯하여 조직화된 학생들의 폭력은 이러한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결국 이들의 폭력이란 온갖 종류의 폭력이 당연하게 자행되는 학교와 사회에서 그들이 배운 삶의 방식에 불과한 것이다.

힘으로 권력을 과시하고, ‘시키면 무조건 따르고 때리면 그냥 맞아야 하는’ 법칙이 초중고 12년의 삶 속에서 그대로 관철되고 있다.

하기에, 이렇게 길들여진 폭력 문화를 다시 공권력으로, 감시와 통제로 해체하겠다는 교육부와 경찰청의 발상은 결국 또 다른 폭력의 확대와 악순환만을 야기하게 될 것이다.

‘cctv’는 감시의 눈길을 피하는 방법을 가르치게 될 것이고, ‘병영캠프’는 소위 말해 ‘까라면 까는’ 힘의 문화가 무엇인지를 더욱 강력하게 인식시키게 될 것이다.

3월 초, 신입생이 들어오면 상담 일정을 잡기 이전에 보충수업 시간표를 짜기 바쁘다는 한 교사의 말이 그대로 학교의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공부 못하고, 조직에 적응하지 못하는 놈은 학기 초부터 일찌감치 골라 내버리는 것이 이 사회의 냉정한 ‘경쟁의 법칙’을 가르치는 학교의 교육 방법이다.


학교 폭력? 호들갑 떨 것 없다. 작금의 사태는 지금 호들갑 떨고 있는 교육부, 경찰청, 정부 당신네들이 오랜 세월에 거쳐 갈고 닦은 결과일 뿐이니.

하기야, 여의도 돔 뚜껑 아래에 앉아 허구헌날 머리 쥐어뜯고 양복 찢어가며 싸우는 어르신들이 어찌 ‘폭력의 순환’을 끊어내는 방법을 알 수 있으리오.

 ‘인권’이란 두 글자의 깊은 의미를 어찌 알겠느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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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도 당연한 권리! 장애인 교육권 쟁취를 위하여!

너무나도 당연한 권리! 장애인 교육권 쟁취를 위하여!

장애인 교육의 현실

다음은 사단법인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의 ‘입학거부를 통해 본 장애우 교육권, 무엇이 문제인가’(2001.5)라는 토론회에서 제시되었던 사례이다.

○ 피해학생 인적사항
․장애유형: 정신지체 1급
․학년: 초등학교 2학년

『지난해 초 A지역 ㅂ초등학교로 전학을 하려고 했던 L군(정신지체1급)이 한 학기동안 전학을 하지 못했다. L군은 진해의 일반초등학교에서 1학년을 마치고 치료와 교육을 위해 A지역으로 주소지를 변경했다. 두 개의 특수학급이 있는 ㅂ초등학교로 전학하려고 했으나, 교장과 특수학급 교사가 특수학급은 장애를 가진 학생들이 있는 반이 아니라 학습부진 학생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장애를 가진 학생이 전학을 오게 되면 수업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와 지역의 특수학교에 진학할 것을 권유하며 전학을 거부했다.
이 과정에서 문제 해결을 위해 교육청에 중재를 요구했으나 교육청은 이러한 과정이나 절차에 대해 아무런 언급이 없었으며, ‘전학에 관한 건은 학교장에게 책임이 있으니 학교장과 협의 바람’이라는 공문으로 처리했다. 이후 교장은 L군의 입학을 전제로 L군에게 무슨 일이 있을 경우 부모가 책임진다는 ‘각서와 동의서’를 부모에게 요구했으나 서명하지 않았다. 이후 법적 소송을 준비했으나 L군의 ㅂ초등학교 전학을 수락해 이 사건은 마무리되었다.』

특수교육진흥법 제13조에는 ‘각급 학교의 장은 특수교육 대상자가 당해 학교에 입학하고자 하는 경우에는 그가 지닌 장애를 이유로 입학을 지원 거부하거나 입학전형 합격자의 입학을 거부하는 등의 불이익한 처분을 하여서는 아니 된다.’라고 명시되어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이 엄연한 법 조항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위의 사례와 같이 입학 거부가 이루어지는 사례는 부지기수이다. 특히 초등학교 장애학생의 지정 및 배치는 학교에 직접 지원과 특수교육운영위원회의에 지원하여 지정, 배치를 받는 것 모두가 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학교는 임의로 전학을 거부하였다. 이후 교육청에 중재를 요청하기도 했으나 교육청은 “학교장의 소관이므로 학교장과 협의하기 바란다”는 답변만을 했을 뿐이었다. 이후 학교장은 부모에게 전학을 허락한다는 조건으로 ‘각서와 동의서’를 요구하였고 부모는 결국 ‘아동에게 문제가 발생했을 때 부모가 책임을 진다’는 그 내용에 동의하지 않아 끝내 전학 접수증을 제출하지 못했다. 초등학교 교육과정이 특수교육진흥법 제5조(의무교육등)에 의해 국가에서 보장하는 의무교육인데 학생이 장애를 가졌다는 이유로 각서를 요구하는 것은 또 하나의 차별이며 다시 한번 전학을 거부당한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교육청과 교육부의 학교장 설득으로 7월초에 다행히 ㅂ초등학교에 전학이 가능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로 인해 한 학기 동안이나 학교교육을 받지 못한 장애학생은 보장된 교육권을 또 한번 침해받았다.



교육관계법 관련 조항의 개정 없는 특수교육진흥법은 있으나마나

우리나라 교육의 근간을 이루는 교육기본법에는 ‘특수교육’에 대해 단 한 개의 조항만이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초중등교육법’을 비롯한 관련 교육법에는 여전히 장애 학생의 교육권 확보에 불리한 조항들이 삽입되어 있다. 따라서 특수교육진흥법만으로는 장애인 교육권을 제대로 확보하는 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장애인 교육권 확보를 위해서는 관련 교육법들이 전반적으로 함께 개정되어야 하는 것이다.
우선 ‘교육기본법’의 내용을 보면 제18조에서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는 신체적․정신적․지적 장애 등으로 인하여 특별한 교육적 배려가 필요한 자를 위한 학교를 설립․경영하여야 하며, 이들의 교육을 지원하기 위하여 필요한 시책을 수립․실시하여야 한다.’ 고 명시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결국 교육기본법에서부터 ‘장애인 교육은 특수학교에서’라는 협소한 개념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또한 초중등교육법 제14조에는 ‘질병 등 부득이한 사유로 인하여 취학이 불가능한 의무교육대상자에 대하여는 대통령령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제13조의 규정에 의한 취학의무를 면제하거나 유예할 수 있다.’ 1994년 특수교육진흥법이 전면 개정되면서 장애인 의무교육의 실시를 명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초중등교육법에서는 ‘취학의무의 면제’를 정당화하고 있는 것이다.
장애 학생의 교육은 특히 조기교육이 매우 중요하다. 조기교육을 통해 장애에 대한 적응을 도울 수 있고 사회 적응력을 높일 수 있으며 후차적인 장애 또한 방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초중등교육법’ 제 36조에서는 ‘유치원에 입학할 수 있는 자는 만3세부터 초등학교 취학 전까지의 유아로 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유아교육은 만 3세부터’라고 규정함으로써 장애를 고착화시키고 조기 통합교육의 기회를 빼앗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만 3세 이하 아동의 조기교육을 위해 장애 아동의 부모들은 사설 교육기관을 전전해야 하고 결국 이로 인한 과도한 교육비 지출 구도까지 만들어지고 있다. 실제로 일반 아동의 경우에는 월평균 12만 원 대인 유아교육비가 장애아동의 경우 월평균 최소 70만원까지 소요되고 있다. 장애아동의 유아교육이 만 3세 이하로 규정되어 장애를 발견한 즉시 교육과 치료를 겸비할 수 있도록 규정되어야 한다.
또 제57조에는 ‘고등학교이하의 각급 학교에 관할청의 인가를 받아 특수교육을 필요로 하는 학생을 위한 특수학급을 둘 수 있다.’고 되어 있다. 이 때문에 특수학급은 행정편의주의에 의해 설치되거나 학교 동문회 및 학교운영위원회의 반대로 설립이나 존폐가 크게 좌우되기도 한다. 따라서 이와 같은 일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조항을 개정하여 특수학급을 ‘반드시 설치’하도록 해야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제59조를 보면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는 특수교육을 필요로 하는 자가 유치원․초등학교․중학교 및 고등학교와 이에 준하는 각종학교에서 교육을 받고자 하는 경우에는 별도의 입학절차, 교육과정 등을 마련하는 등 통합교육의 실시에 필요한 시책을 강구하여야 한다.’고 되어 있다. 현재의 통합교육은 통일된 기준 없이 특수교육교사의 재량으로 운영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므로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에서 통합교육에 대한 연구 및 프로그램 등의 개발이 절실히 필요하다. 이에 대한 예산 지원과 전문인력 등을 보장해야 할 것이다.



장애인 교육권, 그 당연한 권리를 위하여

이 밖에도 ‘특수교육운영위원회’와 ‘특수교육심사위원회’의 실질적 역할 강화, 학생의 학습 수준에 따른 장단기 교육 목표와 교육 방법, 평가 등을 계획하여 교육을 수행하는 ‘개별화교육계획’의 실현, 분리의 개념을 가지고 있는 ‘특수학급’ 이 아닌 비 장애 학생과 장애 학생의 통합교육 실현을 위한 구체적 정책 및 지원, 장애인 교육 연구비의 편성,  각급 학교의 편의시설 설치 등 장애인 교육권 실현을 위해 헤쳐 나가야 할 장벽은 많다.
그러나, 넘지 못하고 무너뜨리지 못할 장벽은 없다. 이 장벽을 무너뜨리기 위해 오늘도 수많은 장애 학생과 교사, 학부모는 단식에 전국순회까지 하며 장애인의 교육권 쟁취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다.
제발! 이런 피눈물 없이도 가장 기본적인 국민의 권리인 ‘교육권’의 보장을 위해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기를 다시 한 번 촉구한다.

** 이 글은 2004년 420 장애인차별철폐투쟁의날을 앞두고 <문화사회> 기획 기사로 게재하였던 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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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범지대이자, 사각지대 대학내 교수 성폭력을 말하다>(5)

4회의 기획기사가 연재되는 동안에도, 변함없이 또다른 교수 성폭력 사건들이 언론을 통해 보도되었다. 2년이 넘는 시간동안 고통 속에 살아온 서강대의 피해자는 여전히 교원징계위원회에 나가 가해 교수와 다시 대질을 해야하는 어려운 상황들에 직면하면서 힘겹게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교수 성폭력 사건들이 빈번하게 언론에 등장하면서 수많은 비판과 성토의 목소리가 터져나왔음에도 여전히 대학 당국들과 교수 집단, 대학 사회의 모습은 혹여 사건 하나라도 외부로 유출될 새라 감추고 억누르기에만 바쁠 뿐, 어디에도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하기 위한 노력들은 보이지 않는다.
대학 사회가 하루빨리 진지하고 성숙한 성폭력 정책을 마련하고, 새로운 문화를 구축하기를 바라며 마지막으로 성폭력 없는 대학 사회를 만들기 위해 마련되어야 할 대학 사회 문화와 성폭력 정책들을 제안한다.

대학에 성폭력 정책 수립을 의무화해야 한다.

각 대학의 정관과 학칙에 준하여 성폭력 정책이 별도로 수립되고 적용될 수 있도록 의무화해야 한다. 외국의 경우, 별도의 성폭력 정책이 구체적으로 마련되어 있으며 사건이 발생했을 시 이를 정관이나 학칙과 동일하게 적용하여 가해자에 대한 명확한 징계 조치를 취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대부분 대학의 경우 학칙은 처벌 조항 등이 보다 구체적인 데 반해 정관 상의 교원 및 직원에 관한 처벌 규정은 상대적으로 매우 모호하게 되어 있어 대학 당국의 임의대로 적용할 수 있으며, 하기에 악용되는 사례도 많다.
성폭력과 관련한 문제에 있어서도 2000년 이후 몇몇 대학에 학칙이 마련되기는 했으나 대학의 전 구성원을 대상으로 한 구체적 신고 및 사건 처리 절차와 피해자에 대한 보호책 등을 담은 구체적 정책의 수준은 아니기 때문에 여전히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하기에 이제는 전국의 대학이 대학에 소속된 전체 구성원을 대상으로 하는 구체적 성폭력 정책을 마련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 대학의 각 구성원이 정책 수립 논의에 동등한 자격으로 참여해야 한다. 그리고 국가적으로 이를 의무화하여 전체 대학에서 성폭력 사건이 형사법상의 처벌 원칙과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지난 연재글에서 살펴 본 미국 각 대학의 경우에도 각 대학의 성폭력 정책은 대학이 소속된 연방 주의 법률에 따라 동일하게 적용되도록 하고 있다.
대학 내에서의 성폭력 사건들도 범죄 행위와 동일하므로 각 대학에서는 이를 기준으로 한 처벌 원칙을 세우고 의무적으로 성폭력 정책을 마련하도록 하여야 한다.

성폭력 정책은 대학의 일상적 교육과 문화까지 다루는 구체 내용이어야 한다.

성폭력 정책은 결코 가해자에 대한 처벌과 이를 위한 기술적인 처리 과정을 기술하는 데 머물러서는 안 된다.
성폭력 정책은 대학에서의 일상적인 성폭력 예방 교육과 대학 문화 전체를 지속적으로 평가하고 개선해가기 위한 내용들을 담고 있어야 하며 아주 구체적이고 세심하게 성폭력 사건의 신고 및 처리 과정과 관련한 지역 센터들과의 연계망 설정, 피해자 보호 정책, 징계위원회의 구성 원칙 등을 담아내야 한다.
앞서도 검토해 보았듯이, 성폭력은 구조적 문제이다.
성폭력 사건의 발생은 결코 개인만의 문제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며, 가해자와 피해자가 소속되어 있는 사회의 특수한 문화와 그 안에서 지닌 그들의 위치가 성폭력 사건의 발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하기에 성폭력 문제의 책임을 여전히 개인에게만 남겨 놓는다면 결코 성폭력 문제는 해결될 수 없다.
각 대학은 성폭력 정책을 마련하기 전에 반드시 대학 문화와 특히 교수 학생 간 관계에 관하여 구성원 상호간에 명확하게 성찰하고 반성하는 과정을 거쳐야 하며 정책 수립 이후에도 향후 시행할 지속적인 예방 교육과 대학 문화 개선을 위한 내용들을 담아내고 시행하여야 한다.

성폭력 사건의 처리는 대학 구성원 외의 전문 카운슬러가 담당하여야 한다.

성폭력 사건이 접수된 순간부터 사건은 외부의 전문 카운슬러에게 전적으로 위임되어야 한다. 많은 사례들에서 보듯이 대학 내 구성원에 의한 성폭력 사건이 발생했을 경우 학교 당국의 권위와 입장이 관여될 수 있으며 이에 피해자는 이중의 고통을 당하게 된다.
사건의 처리 과정에서 피해자에게 불리하게 진행되는 사태가 발생하더라도 피해자는 문제제기를 하기 어렵게 된다. 하기에 대학 내 성폭력 사건의 처리는 전적으로 외부의 카운슬러에게 맡겨져야 하며 사건의 처리 과정에서 학교 당국이나 가해자가 개입했을 경우에도 이에 대해 문제제기하고 대응할 수 있는 구조가 형성되어야 한다.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세밀하고 광범위한 보호책이 마련되어야 한다.

대학 내의 성폭력 피해자는 사건의 발생부터 처리 과정 및 그 이후까지도 이중, 삼중의 고통에 시달리게 된다. 하기에 대학의 성폭력 정책에서는 무엇보다도 피해자를 중심으로 한 세밀하고도 다양한 보호책들이 마련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대학이 성폭력 발생에 대비한 체계적인 시스템을 마련해 놓아야 하는데 가장 기본적으로 지역의 병원, 경찰서, 상담소 등과 상시적으로 연계망을 구축해 놓아야 하며 언제든 신고와 상담을 할 수 있는 상담센터가 설치되어야 한다. 그리고 피해자가 가해자로부터의 2차 성폭력을 피할 수 있는 체계가 마련되어야 하며 필요하다면 별도의 공간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 사건의 발생 후 피해자가 정신적, 신체적 상담과 치료를 받을 수 있는 여건을 대학 당국이 책임지고 제공해 줄 수도 있어야 한다. 또한 사건의 처리 이후에 피해자가 별도의 부담 없이 다시 학업을 계속할 수 있도록 필요한 여건을 조성하는 등의 배려가 필요하다.

마지막 제언, 학생에 대한 교수 1인의 영향력을 줄여야..

대학 전공 교수의 학생에 대한 영향력은 실로 막대하며 특히 대학원 지도 교수의 경우는 더욱 심각하다. 교수 1 인이 학생의 인생을 뒤흔들 수 있는 상황은 성폭력 뿐만 아니라 교수의 학생에 대한 각종의 폭력을 가능케 하는 구조라 할 수 있다.
이에, 성폭력 대응책으로서의 제안을 포함하여 대학 사회의 전반적인 권위적 구조와 문화를 타파하기 위한 제안으로써 학생 평가에 대한 교수 영향력의 분산을 제안한다.
1인의 지도 교수가 아니라 관련 학과의 다양한 교수진이 학생에 대해 평가하고 조력할 수 있는 구조가 형성되어야 학생-교수간에 보다 협력적이고 비 권위적인 문화가 형성될 수 있을 것이며 학문적 토양도 보다 다양화되고 깊어질 수 있을 것이다.

 

** 이 글은 제가 문화연대의 주간 문화정책 뉴스레터 <문화사회> (http://weekly.culturalaction.org)에 게재했던 기사입니다. (2003.8.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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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범지대이자, 사각지대 대학 내 교수 성폭력을 말하다>(4)

미국의 경우, 70년대부터 대학 성폭력 문제가 본격적으로 이슈화되고, 제도화되었다. 그러나, 오랜 노력을 기울여 온 이들 대학의 경우에서도 아직까지 성폭력 문제의 신고와 해결 과정에서 많은 문제점들이 지적되고 있으며, 이에 미국의 대학들은 성폭력 사건의 체계적 대응과 해결을 위한 방책들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번 호에서는 이와 같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사례로 미국 하버드의 '성폭력 대응 연합'의 사례와 로렌스 대학의 성폭력 정책을 살펴보고 이들이 지적하고 있는 문제들과 성폭력 정책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를 찾아보고자 한다.

하버드 '성폭력 대응 연합'이 노력하고 있는 것들.

하버드의 '성폭력 대응 연합'에서 학생들로부터 자주 들어오는 성폭력에 관한 질문과 이에 대한 답변을 모아 놓은 글을 보면 대학 보건국의 조사 결과 2000년에만 128명의 학생이 유사 성폭력을 경험했으며, 52명의 학생이 성폭행을 당했음이 밝혀졌다고 한다. 심지어 사법부가 2000년 12월에 발표한 보고서에 의하면 1000명 중 27.7 명의 여성이 강간을 당했으며, 이 수치를 하버드에 적용한다면 3000명의 여학생 중 한 해에 거의 83명이 강간을 당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그 심각성을 지적하고 있다.
이들에 의하면, 하버드에서는 2000년에서 2001년 사이에 128명의 학생이 강간 시도를 당하고, 52명이 강간을 당했으며, 21명의 학생이 신고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대학 행정위원회는 이 중 오직 7건만 다루었고, 그나마 가해자 중 한 학생만 퇴학 조치되었다. 그러나 그 학생마저 2002년 가을 학기에는 다시 복학하였다.
하버드의 '성폭력 대응 연합'은 이와 같은 문제들이 대학의 행정 당국이 사건과 관련한 증거들을 제대로 확보하지 못하고 사건 처리 과정이 체계적이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들로 보고,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대학의 행정 당국에 대하여 성폭력 사건의 사례들과 해결을 위한 증거들을 체계적으로 수집하고, 구체적이고 충분한 해결 과정을 마련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하버드의 이와 같은 사례는 대학 내에 성폭력 정책이 수립되고 집행되더라도 제대로 된 사건 해결을 위해서는 대학 당국의 사건에 대한 철저한 집중과 체계적 집행이 뒷받침되어야 함을 보여주고 있다.

로렌스 대학(Lawrence University)의 성폭력 정책

위스콘신 주 로렌스 대학의 성폭력 정책은 그간 대학 당국과 구성원이 많은 논의와 노력을 기울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대학의 성폭력 정책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것들을 몇 가지 소개해 보면 다음과 같다.

◎ 대학 내 모든 구성원을 대상으로 하고 있으며, 가해자는 대학에서 퇴출 된다.

로렌스 대학의 성폭력 정책은 이 대학이 소유 또는 임대하거나 프로그램을 시행하고 있는 모든 장소의 학생, 교수, 직원 또는 방문자 모두를 그 대상으로 하고 있다.
이 정책에 따르면 로렌스 대학은 피해자가 자신에게 성폭행을 가했다고 믿고 있는 사람과 성폭력 행위가 고발된 사람 모두를 대학에서 퇴출시키도록 되어 있다. 또한 사건을 고발한 이에 대한 보복 행위와 그에 동참하는 행위 또한 금지하며, 학생과 교수, 직원 중 서로 신분이 동등하지 않은 이들간에 성폭행이 자행된 경우, 이들이 서로 사랑하는 관계라는 것이 명백하게 입증되지 않는 이상 정책을 위반한 것으로 하고, 처벌은 동일하게 적용한다. 그리고, 적용 대상에 대한 마지막 절에서는 특별히 교수와 학생, 행정 책임자와 아르바이트 학생간의 관계에서 자신의 가진 권위를 이용하여 성폭력을 행한 경우에는 더욱 엄중히 처벌할 것임을 명시하고 있다.

◎ 성폭력 사건의 신고와 처리에 관한 체계적 방법과 충분한 환경 조성

우선은 긴급한 상황에 대비한 시스템이 충분하게 갖추어져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대학 내에서는 보안처와 의료센터, 병원, 성폭력 센터가 긴급한 성폭력 상황에 대비하여 언제든 신고를 접수할 수 있도록 하고 있으며 신고가 접수되면 경찰서와 병원 등으로 바로 연결될 수 있는 시스템을 제공하고 있다. 또한 피해자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학생처나 보안처에서는 피해자를 위한 공간을 제공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총장은 최대한 빨리 피해자의 보호와 사건에 대하여 대학 당국이 취할 행동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 또한 행동이 요구될 경우에는, 총장의 권한으로 관련자를 대학으로부터 분리시키는 행동을 포함하여 즉각적으로 필요한 행동들을 취할 수 있다.
피해자가 공식적인 고발 절차를 진행하지 못한 상태라 하더라도 해당 상황에 대한 청문회와 토론을 거쳐 그에 상응하는 처벌을 내릴 수도 있다. 대학 당국은 공식적으로 고발된 사건의 모든 경우에 대해서 피해자의 기소 여부의 결정에 필요한 각종 정보, 의학적 원조, 내부 고발 절차, 대안 공간, 자신감 회복을 위한 심리 상담, 학과 공부를 지속할 수 있는 환경 등을 제공하며, 사건의 기소를 위한 증거의 확보와 보안 유지 등을 위해 대학 경찰 또한 피해자를 위해 제공하도록 되어 있다.

◎ 사건의 처리 과정에 대해 전문성을 보장하며, 처리 과정 중에도 다양한 경로로 대학 당국에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로렌스 대학의 성폭력 정책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있는 내부 고발 과정에 대한 설명 부분에서는 사건의 해결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다양한 가능성들에 대한 대책들을 설명하고 있으며, 사건의 해결에 전문성과 객관성을 기하기 위한 대책들을 제시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대학 내 성폭력 사건의 접수와 해결은 대학의 정규 직원이 아닌 관련 분야에서 전문적 교육을 받고 경험을 쌓은 전문 상담가가 책임지고 진행한다. 이는 사건의 해결이 대학 당국의 관련자에게 맡겨지게 될 경우, 악덕한 총장이나 학장, 부처장 등에 의해 피해 학생이나 교수, 직원 등이 문제를 제기해야 하는 어려운 상황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며 전문 상담가는 대학 내의 모든 교수, 학생, 직원 및 방문자를 대상으로 조사를 진행하게 된다. 또한 고발된 사건에 대한 청문회는 교수, 학생, 직원이 동수로 참여하며, 결과에 따라 가해자는 상담이나 경고의 수준에서부터 정직 또는 파면 수준의 처벌까지 받게 된다. 그리고, 그 결과는 반드시 공지된다.

◎ 대학의 성폭력 정책에 대한 일상적 교육과 모든 대학 구성원을 대상으로 한 성폭력 예방 교육의 실시

마지막으로, 로렌스 대학은 정책적으로 대학의 성폭력 정책에 대해 전 구성원에게 핸드북을 통하여 숙지하도록 하고 정기적으로 교수, 학생, 직원을 포함한 대학 내의 전 구성원에게 성폭력 예방 교육을 실시하며 이에 필요한 면담과 수업, 관련 프로그램의 개설과 출판 등을 상시적으로 제공하도록 지원하고 있다.

 

** 이 글은 제가 문화연대의 주간 문화정책 뉴스레터 <문화사회> (http://weekly.culturalaction.org)에 게재했던 기사입니다. (2003.7.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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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범지대이자 사각지대, 대학 내 교수 성폭력을 말하다>(3)

연줄과 권위가 지배하는 사회, 대학

대학에는 학문 연구의 기능 외에도 다양한 기능이 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사람들을 죽자 사자 대학에 매달릴 수밖에 없게 만드는 중요한 기능이 또 하나 있으니 그것은 바로 '연줄'을 만드는 기능이다.
같은 학교, 같은 학부 출신을 넘어 같은 학계, 같은 학회, 같은 지도교수로 이어지는 수도 없는 연줄에 연줄이 대학 사회와 나아가 이 사회를 거미줄처럼 얽어매고 있다. 게다가 지나치게 기능화 되고, 세분화 된 분과학문 체계는 대학 사회의 이러한 병폐에 풍부한 토양이 되어주고 있다. 이러한 대학 사회의 특수한 배경이 있기에, 대학 내에서 한 교수의 권위란 연륜이 쌓일 수록 절대적인 것이 되며 소속된 학계나 학회의 힘이 클수록 그 위치는 안정적인 것이 된다. 그러나 뒤집어 말하면, 그 만큼 교수의 위치란 불안정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자칫하다가는 '왕따'가 되거나 심지어 교수직을 잃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기에 이런 상황에서 '원하는 연구'를 하고 그것을 발표하기란 그리 녹녹치 않은 일이다. 나아가 입바른 말이라도 한 마디 하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크나큰 결심과 용기를 필요로 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대학과 대학원 역시 이와 같은 문화의 영향권 아래에 있을 수밖에 없다. 특히, 대학원의 경우 각종 학계 행사나 학회 행사를 준비하거나 교수들과의 프로젝트를공동으로 수행하게 되는 일도 잦기 때문에 교수 사회 또는 학계, 학회에서 발생하는 온갖 문제들에도 자연스럽게 연관될 수밖에 없다. 게다가 논문 심사 등에 있어서 지도교수의 영향력이 절대적이기 때문에 지도교수가 학생에 대하여 가지게 되는 권위도 그만큼 절대적이다. 이번 호에서는 교수 성폭력 사건의 발생에서부터 해결 과정까지에서 보여지는 특징들이 이러한 대학 사회의 문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지적하고자 한다.

교수 성폭력 문제의 해결을 어렵게 하는 대학 사회 문화의 발동.

나이 많은, 학계의, 대 선배이자, 남성, 교수인 가해자의 위치는 상대적으로 나이 어린, 학계에 막 진입하려는, 까마득한 후배인, 여성, 학생 피해자에게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상당한 압력으로 작용한다. 특히 잦은 행사와 프로젝트 등으로 교수와 술자리를 함께 '해야하는' 일이 많은 대학원생들에게는 더욱 이와 같은 상황이 일상에서 매우 신경 쓰이는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게다가 2차, 3차까지 암묵적 반 강제로 이어지는 술자리 뒷풀이 문화는 자주 곤혹스러운 상황을 발생시키는데, 여학생들에게 술을 따르게 하거나 노래방에서 어깨동무를 하고, 손을 잡는 등의 행위는 학부와 대학원을 막론하고 사실상 흔히 있는 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일은 남녀공학이나 여학교를 불문하고 이루어진다.
문제는, 이러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 이에 대해 제대로 판단하고 대처하는 일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이다. 바로 상대가 나이 많은, 남성, 교수이기 때문이다.
나이 많은 어른이니까 술 좀 따라드릴 수도 있고, 교수니까 제자와 친근하게 지내고 싶어서 손 한 번 잡고, 어깨에 손 좀 올릴 수도 있지 않느냐는, 오랜 세월 머리와 몸으로 길들여져 온 관념들이 우선 머리를 스친다. 기분이 나쁘지만 다음 순간, 우선 피해자는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문제제기 후 자신에게 돌아올 상황들에 대하여...
'교수가, 어른이 함께 즐기는 술자리에서 그런 걸 가지고 뭘 그러느냐', '그러니까 여자들이 사회에서 도태되는 거다', '어디 다음부터는 신경 쓰여서 여학생들하고 술자리 할 수 있겠느냐' 는 등의 뻔한 말들이 쏟아져 나올 것이다. 그리고 용기를 내어 입을 연 다음 순간부터, 상황은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그대로 현실이 되어 나타난다.


사진/유뉴스

특히 사건이 '술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우리의 현실은 처음부터 여성에게 불리하게 작용한다.
사건에 대한 1차적 관심은 가해자가 한 행동보다 '여자가 왜 밤 늦게까지 술자리에 함께 있었는가'에 맞춰지고, 이 때문에 가해자가 사건에 대하여 '술에 취해 있었기 때문에 기억나지 않는다'고 부인해도 남성이자 교수인 가해자의 행위는 '우선 교수이고' '술에 취해 있었으므로 그럴 수도 있는 것'이 되고, 여성이자 학생인 피해자가 당한 상황은 '여자가 조심하지 못하고, 밤 늦게까지 술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당한 일'이 된다. 하기에 사건에 대하여 언급한 이후부터 피해자는 이와 같이 자신에 대해 불합리한 시선들부터 감당해내야 한다.
많은 사건들이 학생들과의 MT 자리나 술자리에서 발생하지만, 사건이 술자리에서만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일상적인 자리에서도, 교수라는 권위를 이용하여 대학원생 조교나 학생들에게 언행을 함부로 하는 사례가 흔히 발생한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매일, 너무나도 익숙하게 이루어지기 때문에 이에 대해서는 더더욱 피해자가 문제를 제기하기가 쉽지 않다.
여하간 이러한 어려움을 감수하고 문제제기를 하더라도 피해자에게 이중, 삼중의 고통을 가하는 상황들은 사건이 교수 사회와 학교, 학계에 알려지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학교는 우선 '학교의 명예'를 생각하기에 바쁘다.
혹여라도 사건이 외부로 새나갈까 두려워 인터넷과 학보 등의 학내 여론부터 차단하려 애쓰고 사건을 빠른 시일 내에 마무리하기 위하여 피해자에게 일방적으로 합의를 요구한다.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학생들에게 의도적으로 유포되는 '이러다가는 학교의 명예가 실추된다'는, 위기의식을 조장하는 이데올로기는 또다시 화살을 피해자에게 돌려 고통을 가하며 이와 더불어 각종 루머로 피해자에게 '모종의 의도가 있을 것이라는' 혐의를 덮어씌운다.

사건이 발생하면 학교 당국과 교수 사회, 학계는 삼위일체가 된다.
피해자의 인권에 앞서 교수로서의 위치를 사수하기 위한 '교권'이 이들에게는 보다 중요하게 부각되기 때문에 가해자가 어떠한 행동을 했던지 간에 우선 그가 교수로서의 지위를 박탈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앞 뒤 가리지 않고 힘을 모으며 여기서 '연줄'이 본격적으로 힘을 발휘한다.
가해자가 지도교수인 경우, 가해자는 '학점'을 무기로 2차 성폭력을 가하고 다른 교수들과 학교 당국 역시 피해자에게 합의를 요구하며 이 때, 가해자를 보호하기 위해 나오는 논리들이 '가해자 교수가 학교와 학계에서 얼마나 중요한 인물인지', '학생들과 함께 몇 년을 노력해 왔는지 '따위 들이다. 하기에 학내에서 징계위원회가 열리더라도 이와 같은 논리로 맞서는 교수 사회와 학계 측의 압력으로 인해 사실상 가해자에게는 '징계'를 가장한 '연구년'이나 '휴가'가 주어지고 마는 것이다.
설령, 정직 처분이 내려진다 하더라도 동국대의 경우처럼 교수들과 학계가 나서서 막무가내로 서명운동을 벌여 복직시키기까지 하며, 이미 보았듯이 그 과정에서 '서명'을 하는 행위는 서명 목적의 옳고 그름에 앞서 학계의 '연줄'에서 '의리를 지키고', '왕따 당하지 않기 위한' '의무감'에서 발로되는 것이다.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하여

문제제기 되지 않았을 뿐, 크고 작은 교수 성폭력은 대학 사회에서 빈번히 이루어져 왔다. 그러나 뿌리 깊은 교수 사회의 권위의식과 '연줄'과 '명예'를 기반으로 한 대학 사회의 만만치 않은 문화가 피해자에게는 이중, 삼중의 고통을 가하면서 문제의 해결 또한 더욱 어렵게 하고 있다.
하기에 교수 성폭력을 뿌리뽑기 위해서는 '성폭력 학칙 제정'에서 나아가 대학 사회의 '연줄 '문화와 학생/교수 간의 권위적 관계를 해체하기 위한 노력 등이 다각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다음 호에서는 우리의 대학 문화와는 다른 외국 대학의 교수/학생간 관계와 대학 문화, 그리고 교수 성폭력과 대학 내 성폭력을 방지하기 위한 그들의 구체적 사례들을 살펴본다.

 

** 이 글은 제가 문화연대의 주간 문화정책 뉴스레터 <문화사회> (http://weekly.culturalaction.org)에 게재했던 기사입니다. (2003.7.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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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범지대이자 사각지대, 대학 내 교수 성폭력을 말하다>(2)

성폭력 사건은 사건 당시부터 그 사건을 제기하고 증명하여 해결하기까지의 과정 자체만으로도 피해자에게 전적으로 엄청난 정신적, 육체적 고통이 따르는 과정일 수밖에 없다.
사건을 다시 기억해내는 순간, 피해자의 온몸은 사건 당시의 고통을 그대로 재현해낸다. 같은 크기만큼의 정신적, 육체적 고통이 사건을 다시 언급할 때마다 피해자에게 다가오는데 그것도 모자라 피해자는 사건의 공개 이후부터는 그 배에 달하는 비난과 압박 또는 동정의 눈길 속에서, 가해자와 그 주변 인물들로부터 가해지는 현실적 피해(2차 성폭력에 해당되는) 속에서 고통의 시간을 견뎌야 한다.
가해자의 뻔뻔함은 시간이 갈수록 극에 달하고, 처음에는 "미안하다", "한 번만 봐달라" 하다가도 자신이 불리해질 상황에 처할 것 같으면 어김없이 사건을 부정하고 심지어 피해자에게 사건의 책임을 돌리기까지 한다.
이 때, 가해자의 '남성' 이라는 사회적 위치는 그가 '가해자'임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으로 그에게 유리하게 작용한다. '남자가 그럴 수도 있지 ', '취해서 그런 걸 가지고', '여자가 오죽했으면'하는 논리들이 가해자를 감싸고, 피해자는 '얼마나 극적으로 가해자의 행위에 반항하려 노력했는지', '왜 피해자가 술에 취했는데도 같이 있었는지' 증명해야 하며, 심지어는 '피해자가 원했던 건 아닌지', '가해자를 음해하기 위한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닌지' 인격모독적인 의심의 눈초리까지 감내해야 한다.
'남자'라는 위치만으로도 이럴진데, 하물며 그 당사자가 '교수'임에랴.
'교수'란 어떤 사람인가.
그는 '이 시대 최고의 지성' 이자, '국가와 학교와 사회를 이끌어 가는 지식인', '학생을 위해 헌신해 온 사람' 이기에 한낱 '술취해 저지른 실수에 불과한' 성폭력 사건 한 번 때문에 피해자의 말만 믿고 그를 해임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큰 국가적, 교육적 손실이며 '교수'인 그에게 가혹한 행위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이번 기사에서는 이와 같은 교수 성폭력 사건의 특징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대표적 사례 두 가지를 살펴보고 그 심각성을 진단한다.

동국대 사회학과 K 교수 사건의 경우
- 교수사회와 학교당국, 교육부의 교권 수호를 위한 강고한 합체!


2000년 7월. 연구차 일본에 가 있던 동국대 사회학과 교수 K는 같은 학교의 졸업생이자 일본인인 피해자와 재일교포 학생 1인을 만나 술을 마시고, 3차로 노래방에 갔다. 그는 만취한 상태에서 노래방에서 피해자를 붙잡고 억지로 춤을 추려 하였으며, 피해자의 가슴과 다리 사이를 더듬고 강제로 키스를 시도했다. 놀란 피해자는 가해자를 거부하고 뛰쳐나와 집으로 돌아간 후 다음날 피해자에게 전화를 해서 사과를 요청했다. 그러나 가해자는 기억이 안 난다며 그저 '교수로서 학생을 실망시킨 것에 대한' 사과만을 하고 사실을 부인했으며 피해자에게 사건을 잊어줄 것을 부탁했다. 이후 피해자는 함께 같던 재일교포 학생과 상의하고 그달 말 경, 동국대 사회학과 학과장과 전 학생회장에게 메일을 보내 사실을 알렸다.
이후 비대위가 결성되고 학교에서 사실이 알려지기 시작하자 가해자는 처음에는 "학생들이 원한다면 사퇴할 의사도 있다"며 사태를 마무리지으려 하다가 사태가 커지자 도리어 피해자를 음해하기 시작했다. 가해자 K 교수는 사건의 공론화 이후 제출한 해명서에서 '피해자가 한국인 유학생과 파혼을 하여 제자의 상심을 달래주고자 술을 마시다가 피해자의 요청으로 노래방에 가자고 하여 노래방에 갔고 만취해 몸조차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자신이 어떻게 피해자의 몸을 더듬었겠냐'며 도리어 '피해자가 방조하지 않았으면 있을 수 없는 일' 이라면서 억지 논리를 펴고 있다. 심지어 그는, '피해자가 그렇게 취한 자신을 왜 여관으로 바래다 주지 않았는지' 의문을 던지고 있다.
그러나 피해자의 가해자 해명서에 대한 반박글을 보면 '피해자는 약혼도, 파혼도 한 적이 없고, 노래방에 가자고 한 것도 가해자'였다. 우리는 경험 상, 술에 취한 사람은 혼자서 잘 쓰러지더라도 억지를 부리거나 폭행을 하면 말릴 수 없을 만큼 힘이 세진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여관으로 왜 바래다주지 않았냐니! 피해자가 그 상황에서 여관까지 바래다 주었으면 더 큰 일이 벌어졌을 것이다. '교수'인 가해자는 자신의 해명서에서 도무지 상식적으로도 이해할 수 없는 억지 주장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욱 기가 막힌 상황은 그 다음의 일이다.
결국 K교수는 학교에서 해임되었으나 이번에는 사회학과 동문들과 학계, 동료 교수들이 K 교수 구명운동에 나선 것이다. 그 탄원서의 요지는 'K 교수가 학계와 학교의 발전에 공헌한 바가 지대함에도 불구하고 '일본인' '피해자' 의 말만 믿고 '학생들의 인민재판식 여론몰이에 밀려' K 교수를 해임하기까지 한 것은 가혹한 처벌' 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동국대 여교수들까지도 이러한 논지의 탄원 성명을 내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후에 이 구명운동은 '같은 학계'이자 '같은 교수'라는 명분만으로 '결코 흔들려서는 안 되는 교권을 수호하기 위해' 동일 학계와 교수직에 있는 이들에게 내용확인도 없이 무작위로 진행된 것임이 밝혀졌다. 이에 동아대 사회학과 한석정 교수와 서울대 사회학과의 김진균 교수는 자신이 제대로 된 내용확인 없이 서명에 동참한 것을 반성하며 서명을 철회하는 성명을 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결국 K 교수는 교육부 ‘교원징계재심위원회’에 재심을 청구하여 ‘정직 1개월’ 처분을 받고 학교 당국의 침묵을 발판 삼아 복직하였다. 그리고, 그는 다시 '사랑하는' 제자들 앞에 서서 '사회학'을 강의하고 있다.


사진/스포츠 투데이


서강대 대학원 영상미디어학과 K 교수 사건의 경우
- '학교의 명예'를 지키기 위한 피해자 죽이기


서강대의 경우는 교수에 의한 성폭력 사건에 대한 학교측의 대응 양태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서강대 측은 '학교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사건의 공론화에 대응하여 학내 언론 등 학생들의 자치활동을 심각하게 탄압하였다.
서강대 사건의 가해자 K교수는 학과 간담회 행사 후 가진 1차 회식 자리에서 학과 남학생들에게 고기 집게를 들고 "이걸로 네 배를 확 쑤셔서 내장이 딸려 나오면 내가 그걸 씹어먹겠다"는 등의 폭언을 하고, 2차 회식 자리에서 술에 취해 피해자에게 본격적인 성폭행을 가했다. 그는 피해자의 머리와 얼굴을 쓰다듬고, 러브샷을 강요하였으며, "너를 여인으로 만들어주겠다"며 피해자의 입술에 강제로 키스를 시도했다. 피해자는 이후 서강대 여성위원회에 사실을 알리고 가해자에게 사과를 요구했으나 가해자는 피해자에게 "○○양 놀랍군, 앞길이 구만리 같은 자네가"라는 발언을 하여 피해자를 간접적으로 협박하기까지 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사건의 공론화 이후 서강대 측의 대응과정이다.
서강대 여성위원회는 사건을 접수받고 총장 면담을 신청하였으나 거절당했으며, 이후 학교측은 인터넷 게시판에서 성폭력 사건과 관련하여 올라오는 글들을 삭제하고, 학보사에 관련 기사 삭제를 요구하였다. 서강대 측은 여성위원회와 공동대책위 주도의 서명운동이 벌어지고 한 달 후에야 겨우 부총장 면담을 진행하고 '교내성차별진상규명위원회' 회의를 '비공개'로 진행했다. 다음 해 1월, 교원징계위원회가 소집되었으나, 학교측은 교원징계위원회의 내용 일체를 공개하지 않았으며, 결과도 공고하지 않았고, 여성위원회 및 피해자에게조차 결과를 통보하지 않았다. 결국 여성위원회가 수차례 전화통화를 시도해서야 '3개월 정직 처분' 이라는 결과를 알았지만 가해자 K 교수는 이미 연구년을 신청해 놓은 상태였다.
결국 말이 징계이지 가해자에게는 '정식 연구년'으로 잠시 쉬고 돌아오는 것에 불과한 처분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피해자는 이후 법정 싸움을 시작하였고 올해 2월이 되어서야 비로소 재판에서 승소하여 2천만원 배상 판결을 받아냈다.
그러나 2천만원이라는 돈이 결코 피해자의 상처를 치유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2년이 넘는 사건의 해결 과정에서 피해자는 '학교의 명예'를 실추시킨 댓가로 사건 당시보다 더욱 심한 이중, 삼중의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사건이 알려지기 시작하자, 총장은 도리어 일부 교수에게 "뒤에서 누가 조종한 것 아니냐"고 물어보았고, 학과장은 학생들을 불러 침묵을 강요했다. 상황이 자신에게 불리해지자 K교수는 사과문을 게재했지만 사과문이 나오자 일부 교수는 "BK21 평가가 있는데 이런 사실이 밖으로 알려지면 좋을 게 없다"고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고, 학생들 사이에서 동요가 일어났다. 학교측은 게시판에 올려지는 글들의 IP 주소를 추적하기까지 했다.
이후 '학교의 명예'를 지키고자 하는 이들은 수많은 루머를 만들고, 피해자를 음해하기 시작했다. 피해자가 학교를 떠난 교수들의 종용을 받아 대학원에 진학하여 K 교수를 음해할 목적으로 일을 벌인 것이라는 둥, 원래 헤픈 여자였다는 둥, 정신이 원래 이상한 사람이라는 둥 피해자가 감당하기 힘든 엄청난 비난과 음해가 피해자에게 가해졌고, 이에 피해자는 스트레스로 인한 심각한 위장장애와 알레르기 등 신체적 고통까지 겪어야 했다.
그러나 피해자의 고통은 승소 이후 복학한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오랜만에 들어간 수업의 다른 교수마저도 다시 피해자를 불러 "학생이 학교를 위해 이제 K 교수를 용서하라"는 말을 해 피해자에게 2차 성폭력을 가한 것이다.
이제 대학원 마지막 학기이지만, 그녀는 이런 상황에서 학위를 제대로 받을 수 있을지 조차 불안하기만 하다. 피해자의 상처는 이렇게 계속되고 있다.

 

** 이 글은 제가 문화연대의 주간 문화정책 뉴스레터 <문화사회> (http://weekly.culturalaction.org)에 게재했던 기사입니다. (2003.7.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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