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글 목록
-
- "새 봄, 새 교육"...
- 틈새
- 2008
-
- Revolutionary appreciation...
- 틈새
- 2008
-
- 스트리트 아트가 보여주는 ...(6)
- 틈새
- 2007
-
- '맹세'와 '충성'을 강요하는...
- 틈새
- 2007
-
-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3)
- 틈새
- 2007
33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예부터 '난 사람 이전에 된 사람이 되라'고 했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깝게도 소위 '진리의 상아탑' 이라는 대학에 책만 열심히 팠지 미처 사람이 되지 못한 '교수'라는 신분의 사람들이 곳곳에서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게다가 그들은 죄책감을 가지고 자신의 죄가를 반성하기는커녕, 자신의 신분과 학교의 명예를 지키기 위한 방패막에 둘러싸여 문제를 일으키고도 버젓이 '휴가'를 받고, 다시 돌아와 수업을 하는 뻔뻔스런 작태들을 보이고 있다.
이번 기획을 굳이 대학 내 '교수' 성폭력으로 정한 이유도 특별히 그들이 '교수'이기 때문에 피해의 심각성이 더 크고, 해결도 어려울뿐더러 2차 성폭력의 발생 가능성 등 그 후유증 또한 크기 때문이다.
지난 98년 서울대 '신 교수 사건'(피해자의 이름으로 사건명을 언급하는 '우조교 사건'이란 말대신 '신 교수 사건' 이라 하겠다.) 이 사회적으로 커다란 파장을 일으키면서 대학가에서는 성폭력 학칙' 이 제정되는 등 가시적인 노력들이 진행되어 왔다. 그러나 아직 '성폭력 학칙'이 제정· 시행된 학교는 소수에 불과하고, 그나마 제정된 학칙도 '학칙'에 불과할 뿐 대학 특유의 권력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성폭력을 제대로 예방하고 대응하기에는 역부족이다.
가해자가 '교수'이며, '어른'이기 때문에 피해자인 '어린' '학생'은 막상 성폭력 상황이 발생했을 때 다른 상황에서보다 더욱 제대로 대처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이는 피해자가 대학원생일 경우 더욱 심각하다. 서강대 'K 교수' 사례처럼 대학원생 피해자의 피해 정도는 지도교수와 특수한 관계에 놓여 있는 '대학원생'이라는 위치 때문에 성폭력 발생 당시에 받는 고통과 상처를 넘어서 인생 전체를 뒤바꾸어 놓을 수 있을 정도로까지 확장된다.
이렇게 막대한 정신적, 신체적 피해에도 불구하고 가해자 교수는 보통 징계 기간 동안 '연구년'으로 처리되어 공식적으로는 '휴직' 상태가 되거나, 잠시 쉬고 있다가 잠잠할 쯤 되면 복직하는 것이 보통이다. 학교 당국 역시 사건이 외부로 유출되고 확산되면 학교의 명예가 실추될 것을 우려하여 피해자 학생에게 대충 이해와 합의를 요구하거나 심하게는 되려 피해자 학생을 불러 다그치고, 협박하기까지 한다. 게다가 교수들간의 연대의식이란 굳이 정당치도 못한 일들에서 자신들의 신분에 불안감이 느껴지면 어찌나 강하게 발휘되는 지 동국대에서는 성폭력을 자행하고 징계 당한 교수를 동료 교수들이 서명운동으로 복직시키기까지 했다.
이러한 대학 사회의 모순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모두 서울대에 있다.
서울대는 '최초로' 대학 내 성폭력 문제의 심각성을 일깨운 '신 교수 사건' 이후 '최초로' '성폭력 학칙'을 제정하여 '최초로' 성폭력을 저지른 '학생'을 제명 시켰지만 바로 지난해까지, 총장은 심심하면 '신 교수 옹호 발언'을 하여 많은 이들을 분노케 했다.
'학생'은 당연히 제명시키면서 더욱 심한 행동을 저지른 '교수'는 사회적 비판을 감수하면서까지 총장이 나서서 '옹호' 해주고, 복직시켜주는 이 모습이 바로 대학 내 '교수 성폭력' 문제의 심각성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올해 들어서만도 벌써 수 차례 대학 내 교수에 의한 성폭력 사건이 폭로되었다.
이제 대학 내 교수 성폭력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학칙 제정'이나 '제도 마련'의 차원을 넘어 교수와 학생, 선배와 후배, 교수자와 연구자 사이의 권력 관계가 권위적 상하관계로 놓여지지 않도록 하기 위한 다각도의 대책을 함께 고민해야 한다.
** 이 글은 제가 문화연대의 주간 문화정책 뉴스레터 <문화사회> (http://weekly.culturalaction.org)에 게재했던 기사입니다. (2003.7.9)**
| 영화 속의 ‘인터내셔널’ |
지금은 하늘에서 편히 쉬고 계실 정은임 아나운서가 어느 날엔가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영화음악이라면서 ‘인터내셔널’ 가를 들려주었다죠. ![]() 영화 <랜드 앤 프리덤>에는 또 하나의 감동적인 ‘인터내셔널’이 있습니다. 한 명의 목소리로 조용히 시작되어 마침내는 우렁찬 합창이 되는 <랜드 앤 프리덤>의 ‘인터내셔널’은 동지의 무덤 앞에서 다시 한 번 결의를 다지는 힘찬 노래와 구호로 감동을 주었습니다. 이렇게 감동적인 ‘인터내셔널’이 있는 한편, ‘인터내셔널’을 사랑하는 이들의 뒷통수를 날리는 한 방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바로바로...<에어 포스 원>!! <에어 포스 원>, ‘인터내셔널’을 비웃다. 아... 잊을 수 없는 <에어 포스 원>의 추억! 위대한 미국 대통령님께서 러시아 테러리스트들을 물리치기 위한 작전으로 그들의 장군을 석방해 주는 장면. 감옥에 갇혀 있던 그들의 동지들이 장군의 석방과 동시에 한 목소리로 부르던 ‘인터내셔널’ 위로 곧 자랑스런 미국의 총탄이 날아들더군요. ‘인터내셔널’을 가비압게! 무시하고 테러리스트들을 진압하여 인류를 구원하시는 멋진 헤리슨 포드 대통령님이 어찌나 주먹 떨리도록 존경스럽던지요!!! 오늘날도 그 헤리슨 포드 대통령님처럼 전 인류를 구원하고자 밤잠 못 이루고 계실 저 미국의 부시 대통령님, 여하간 수고가 많으시겠습니다. 그려. 자본의 ‘인터내셔널’을 넘어 민중의 ‘인터내셔널’ 그 날까지!! ![]() 우리의 현실에는 그 영화 속의 현실들이 그대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 문장을 누르시면 '인터내셔널' 러시아 합창곡을 들으실 수 있습니다. |
|
<정사>의 ‘Bachianas Brasileiras No.5’ 그리고 ‘Manha De Carnival’ |
<밀애>의 미흔, <디 아워스>의 브라운 부인 그리고 <정사>의 서현. ![]() 한 때는 그녀(들)도 ‘전설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였다. 그러나 자신의 삶을 돌아본 어느 순간, 그녀(들)은 어느 새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가 되어버린 자신을 발견한다. ![]() Manha Tao Bonita Manha |
|
'Cucurrucucu paloma' in |
|
그는 수많은 긴긴 밤을 술로 지새었다 하네. ![]() 그러던 아휘가 장을 만난다. ![]() 스페인의 가장 유명한 여자 투우사 리디아. |
| <밀애>, 무상한 것을 위하여. |
<밀애>. ![]() 미흔. ![]() 독사진. 그리고 ‘무상한 것을 위하여’ |
|
<배틀로얄>, ‘Requiem' -"인생은 게임이다. 끊임없이 싸워서 생존하라!” |
![]() 실업자 1천만 명에 등교거부 학생 80만 명, 교내 폭력에 의한 순직교사가 1,200만 명에 달하게 된 미래의 혼란스러운 일본. 급기야 일본정부는 일 년에 한 번씩 무작위로 한 학급을 선발하여 무인도에서 3일 간 단 한 명만 생존하도록 ‘진짜’ 서바이벌 게임을 시키는 이른 바 ‘BR' 법을 제정하기에 이른다. ![]() 한편, 중앙 본부에 서서 아이들의 전쟁을 지켜보는 선생(기타노 다케시)는 자신이 가르치던 제자의 칼에 찔리고, 자신의 딸에게는 멸시를 당하며 도무지 소통할 수 없는 10대들에게 자신이 받은 깊은 상처를 배틀로얄을 통해 아이들에게 되돌려주려 한다. ![]() 불신의 세상, 탐욕의 세상, 경쟁의 세상을 만들어 놓은 무책임하고 잔혹한 어른들은 이제 영문도 모른 채 어른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거나 서로를 죽이며 살아가야 하는 아이들 앞에서 어떻게 그 책임을 질 수 있을까. |
지긋지긋한 감시의 공간인 감옥에서 벗어났지만 도피자의 생활은 물론 이들에게 곧바로 자유를 안겨주지는 못한다. 그럼에도 네 여자는 이들의 유일한 낙이자 희망인 음악과 함께 들판을 달리고 대중의 한 가운데에서 호흡한다. 이들이 가는 곳마다 대중이 환호하고, 대중이 환호하는 곳에는 경찰이 따라다닌다. 그 와중에 약삭빠른 자본가 음반 기획사 사장은 이들의 노래를 음반으로 만들어 신나게 장사를 해댄다.
유명해 질수록 수사의 범위는 좁혀져 오고, 함께 연주를 하며 도피 생활을 하는 동안 네 여자의 지난한 삶이 하나 둘씩 드러난다.
“애인 하나 잡아서 새처럼 살고 싶다”는 앤젤리카는 허영심 많고 혼인 사기를 저지르고 다녔지만 사실은 진정한 사랑에 목마른, 의리 있는 여자, 정신분열로 남편을 죽인 ‘살인범’ 마리는 클래식 연주자였다. 마리는 그녀에게 언제나 ‘늘 곁에 있겠다고’ 했던 남편 오토를 잊지 못해 매번 자살을 기도한다. 그녀는 그 죄책감 안에서만 살아갈 수 있다. 자신이 죄책감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를 얻는 순간, 그녀는 살 자격을 잃는 것이다.
한편 이성적인 성격으로 밴드의 맡 언니 역할을 하는 엠마 역시 애인에게 맞아서 뱃속에 있던 아기를 잃은 상처를 안고 있다. 그리고 매사에 거칠고 즉흥적인 루나는 사회의 고정관념과 질서에 따라 살아가기를 거부하는, 누구보다도 자신의 본능에 충실한 인간이다.
결국 네 여자의 삶에서는 감옥이 곧 구속을, 감옥 밖의 세상이 자유를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줄에 묶인 개’ (puppet on a string)에 불과했던 그녀들의 삶이 곧 구속이자 감옥이요, 음악과 동료들을 통해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받았던 상처들을 드러내며 자신들을 구속하고 있던 사회의 시선과 고정관념, 피해의식으로부터 자신을 스스로 해방시키고, 치유하는 과정이 곧 진정한 자유인 것이다.
Now, hear my song
도피 중 마리는 경찰의 속임수에 걸려든 엔젤리카 때문에 다리 위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마리를 보낸 남은 세 명의 멤버는 바닷가 항구 앞의 옥상에 서서 붉은 노을을 뒤로 하고 경찰들 앞에서 마지막 연주를 시작한다. 팬들의 아우성 속에 한 편의 뮤직비디오와 같은 연주를 마치고 군중 속으로 다이빙하는 세 여자는 마침내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된 듯 보인다. 다음 순간, 항구를 향해 달려가는 그들의 모습 뒤로 몇 발의 총성이 울리고 엔딩 크레딧과 함께 그들이 진정으로 남기고자 했던 메시지, ‘Puppet'이 흐른다.
.
.
.
You keepin' me , just hangin on
Now hear my song
Just like a puppet on a string
Now can't you see you're killing me
.
.
For end this game you always win
당신은 나를 구속하고, 묶어 두고 있지만.
이제 내 노래를 들어요.
줄에 묶인 개와 같은 나의 노래를.
이제 당신이 죽이고 있는 내가 보이지 않나요.
.
.
언제나 당신이 이기는 이 게임의 끝을 위해...
어느덧 몇 년이 흘렀다.
그 날, 극장에서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를 보면서 무언가 마음속에 응축되고 있던 것들이 영화의 엔딩 크레딧 자막에 이르러서 결국은 강하게 결집하여 나의 가슴 깊숙이 자리를 잡고야 말았다.
도움을 준 이들의 이름들 속에 또렷이 새겨져 올라가던 ‘풍문여자 고등학교’.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3년 만에, 다시 찾아온 내 고교시절의 기억들.
나는 실제로 수많은 효신과 시은과 민아와 지은이와 연안이....그리고 그 영화 속의 아이들과 똑같은 많은 아이들을 만났고, 그들과 함께 다사다난한 18세를 보냈다.
영화 속 아이들의 모습 속에서 내 친구들의 모습들이 그대로 펼쳐지고 있었고, 그들을 보며 나는 때론 어떤 죄책감에 가슴 아프다가 때론 어떤 즐거운 추억들을 떠올리며 웃음 짓기도 했다. 어쨌든, 그것은 내게 성큼 다가와서 크게 남겨진, 또렷한 충격이었다.
여고, 열여덟
스무 살이 되고도 우리 더 나이를 먹을 수 있을까. 열여덟! 이 순간이 영원히 지속된다면 어떨까? 너무 지겨울까? 죽음이 있기에 짧은 인생이 의미 있는 걸까?
- 효신과 시은의 교환일기 중에서-
열여덟. 열여덟은 성장에 대한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 나이이다.
열여덟에 세상은 갑자기 성큼 다가오지만 어릴 적에는 그렇게도 하루빨리 끼어들고 싶던 세상의 모습은 상상만큼 멋지고 아름다운 모습이 아니었다. 자라면서 보다 현실적으로, 적나라하게 마주하게 되는 어른들의 모습은 추하고, 편견으로 가득 차 있으며, 학교에서 배워왔던 도덕적인 삶의 모습은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그러다가 어느새 그렇게도 혐오하던 어른들의 모습을 그대로 닮아 가고 있는 스스로의 모습을 발견했을 때, 어떤 친구는 자신을 더욱 혐오하였고, 어떤 친구는 자신에게는 해당되지 않고 남에게는 철저하게 적용되는 이중의 잣대를 세워가면서 닮아가던 모습 그대로 어른들의 모습을 내면화해 갔다.
우리들은 이렇게 달라져 가는 서로를 목격하고, 혼란 속에 서로 충돌하고는 했다. 그래서 시간이 갈수록, 한 편으로는 빨리 현재에서 벗어나고 싶으면서도 사실은 그 속으로 뛰어들기가 두려워지는 것이 바로 열여덟 우리의 세상에 대한 감정이 아니었을까.
아마 나도, 나의 친구들도 그랬던 것 같다.
여고에서 동성 커플이 많이 나타나는 것은 이러한 감정과 관계가 깊다. 여고에 커플이 많은 것은 흔히들 생각하듯이, ‘여자 아이들만 있어서 남자 같은 아이들이 인기를 얻게 되기 때문’이 아니다. 사실, 정말 중요한 이유는 비로소 이 시기에 남자들과 나눌 수 없는 세밀한 감수성의 영역이 생성되기 때문이다. 여자 아이들 간의 감수성의 연대가 시작되는 것이다.

교환일기는 그 연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행위이다.
우리는 교환일기를 통해서 나의 혼란과 감정을 끊임없이 친구들과 공유하고, 확인하고자 했고 그 안에는 남자 아이들은 오로지 ‘남자이기 때문에’ 이해하지 못할 우리만의 감수성과 고민이 솔직하게 담기곤 했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교환일기를 통해 더욱 친해질 수 있었다.
‘같은 여자이기에’ 보다 편하게 나눌 수 있는 감수성과 이야기들이 있기에, 여고에서의 커플 친구는 이상적 남자 친구를 대체하기 위한 대상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하지만 열여덟이 영원할 수는 없었다.
세상을 따라 그때까지의 순수한 감수성과 연대에서 벗어나기를 끊임없이 요구받으면서 우리는 다시 한 번 갈등해야 했다. 세상에 길들여지기 위해, 세상이 금기하고 거부하는 현재의 내 감정, 내 삶과 단절할 것인가 그대로 버텨서 세상과 부딪히며 살아볼 것인가.
아무도 없다. 아무도 있다. 그러나 없다. 아닌가 있나?
없는 것 같아. 아니야 있어. 없다고 했지?
그것은 진실. 진실은 있다. 있다는 거짓. 거짓은 있다. 있다는 진실.
아무도 몰라. 아무도 없어. 그래서 몰라. 아무도 있어. 그래도 몰라.
정답은 있다. 아니다 없다.
있다는 진실. 없다는 진실. 없다는 거짓. 있다는 거짓. 진실은 거짓.
거짓은 진실.
나는야 몰라. 아무도 나야. 나는야 아무다.
누구도 나도 나는야 누구도 될 수 있다.
진실이 거짓이 되듯...
효신의 시는 열여덟의 갈등을 대변해 주고 있다.
그리고 결국, 진실이 거짓이 되고 나는야 누구도 될 수 있는 세상임을 애써 가리면서 세상에서 규정한 진실과 거짓의 잣대에 맞추어, 세상에서 주어지는 자신에 대한 호명에 따라 길들여져 살아가기를 강요하는 어른들의 논리를 거부한 효신은 결국 죽음을 택했다.
하지만 시은은 갈등했고, 그래서 효신과의 관계를 단절하려 했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처럼. 시은은 함께 빠져들어 가던 물 속에서 둘의 다리를 묶고 있던 끝을 풀고 혼자 물 위로 올라온 것이다.
효신이 모든 아이들을 학교에 가두고, 시은에게 끊임없이 죄책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열여덟에 주어진 갈등의 상황에서 세상에 길들여지기를 택한 친구들에 대한 원망일지도 모른다.
따라서 나도, 영화를 보면서 같은 죄책감에 빠졌었다.
영화를 보면서 응어리졌던 그것의 실체가 바로 그 죄책감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이 영화가 ‘여고’‘괴담’일 수 있는 진짜 이유라고 나는 생각한다.
성장의 발걸음.
효신과 시은의 다정하던 한 때. 옥상위에서 맨발로 뛰어다니며 둘만의 교감을 나누던 두 아이의 모습 위로 한 발짝씩, 조심스럽게 다가오는 듯한 피아노 멜로디가 흘러나온다.
지는 햇살, 초록색 지붕, 아무렇게나 입은 교복과 행복한 웃음.
마냥 평화롭고 행복해 보이는 아이들의 모습에 반해 그들이 행복한 한 때를 보내고 있는 공간인 지붕 위는 너무나도 아슬아슬해 보이듯, 음악은 평온하지만 왠지 슬픈 듯, 불안하다.
그래서 이 장면과 음악은 그들과 같은 열여덟, 여고에서의 한 시기를 보낸 우리에게 그 때의 순수한 감수성과 거친 혼란을 잊지 말라는 듯 오랫동안 마음의 울림을 전달하고 있는 것만 같다.

시은아, 드디어 새날이 밝았구나. 어때, 기분이? 널 만나기 위해 걸었던 그 길이 얼마나 행복했는지 아니? 새해 첫날에 내 얼굴도 보고 영화도 보고 손잡고 말야 헤헤... 눈이 왔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말야.. 넌 어땠니? 난 감동 그 자체였다... 밤공기가 차가웠지만... 그리고는 하루가 얼마나 길고 덧없는지를 느끼지 않아도 좋은 그 다음 날이 왔고 그날은 오래 잊혀지지 않았다. 붉은 잎, 붉은 잎 하늘에 떠가는 모든 붉은 잎들의 모든 흐름이 나와 더불어 움직여가고 또 갑자기 멈춘다. 여기 이 구름들과 끝이없는 넓은 강물들... 어떤 섬세하고 불타는 삶을 나는 가지려고 했었다. 그리고 그것을 가졌었다, 그렇다. 다만 그것들이 얼마나 하찮았던가... 여기 붉은 잎 붉은 잎들 허공에 떠가는 더 많은 붉은잎들 바람은지고 물도 맑은날에 나의 외로움이 구름들을 끌어당기는 곳. 그것들은 멀리 있다.. 더 멀리에.. 그리고 때로는 것잡을 수 없는 흐름이 그것들을 겨울하늘 위에 소용돌이치게 하고 순식간에 차가운 얼음 위로 끌어내린다. 겨울 숲에서 노려보는 여우의 눈처럼 잎뒤에 숨은 붉은 열매들처럼 나를 응시하는 것이 있다 내 삶을 지켜보는 것이 있다... 서서히 얼어붙은 수면에 시선을 박은 채 돌틈에 숨어 내다보는 물고기의 눈처럼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건방진 새처럼.....

물론 <영웅본색>은 ‘의리’를 폭력과 짝짓고, 그것을 ‘남자들의 상징’이자 ‘전유물’이며 심지어 ‘남자의 존재 이유’로 만든 대표적 영화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대에 <영웅본색>을 보았던 우리 대부분은 남녀를 불문하고 이 영화에 대한 왠지 모를 애틋한 감정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아마도 그 이유는 그 시대에 <영웅본색>이, 10대들에게는 주윤발, 장국영, 유덕화로 대표되던 여타의 홍콩 영화들과 함께 ‘화려한 홍콩’을 대표하는 하나의 문화적 코드였으며, 혼란과 격변의 거리에서 최루탄에 눈물 흘리던 한국의 20대 젊은이들에게는 ‘의리’와 거침없는 청춘을 상징하는 무엇이었기 때문이리라.

2003년의 오늘, <영웅본색>을 새삼 추억하게 되는 것은 ‘홍콩 정통 느와르의 부활’이라는 <무간도> 시리즈가 우리 앞에 나타났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나는 지금, 악의 무리로부터 세계를 구원하겠다며 당치도 않은 영웅을 자처한 이들이 벌인 무자비한 전쟁과 그 앞에서 ‘의리’를 가장한 비굴이 판을 치고 있는 오늘날의 상황을 보며 그들의 순수한 ‘의리’가 차라리 그리워지기 때문이다.
최근 댓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