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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에서 찾기2005/05/12

<우범지대이자, 사각지대 대학 내 교수 성폭력을 말하다> 1

예부터 '난 사람 이전에 된 사람이 되라'고 했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깝게도 소위 '진리의 상아탑' 이라는 대학에 책만 열심히 팠지 미처 사람이 되지 못한 '교수'라는 신분의 사람들이 곳곳에서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게다가 그들은 죄책감을 가지고 자신의 죄가를 반성하기는커녕, 자신의 신분과 학교의 명예를 지키기 위한 방패막에 둘러싸여 문제를 일으키고도 버젓이 '휴가'를 받고, 다시 돌아와 수업을 하는 뻔뻔스런 작태들을 보이고 있다.
이번 기획을 굳이 대학 내 '교수' 성폭력으로 정한 이유도 특별히 그들이 '교수'이기 때문에 피해의 심각성이 더 크고, 해결도 어려울뿐더러 2차 성폭력의 발생 가능성 등 그 후유증 또한 크기 때문이다.

지난 98년 서울대 '신 교수 사건'(피해자의 이름으로 사건명을 언급하는 '우조교 사건'이란 말대신 '신 교수 사건' 이라 하겠다.) 이 사회적으로 커다란 파장을 일으키면서 대학가에서는 성폭력 학칙' 이 제정되는 등 가시적인 노력들이 진행되어 왔다. 그러나 아직 '성폭력 학칙'이 제정· 시행된 학교는 소수에 불과하고, 그나마 제정된 학칙도 '학칙'에 불과할 뿐 대학 특유의 권력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성폭력을 제대로 예방하고 대응하기에는 역부족이다.
가해자가 '교수'이며, '어른'이기 때문에 피해자인 '어린' '학생'은 막상 성폭력 상황이 발생했을 때 다른 상황에서보다 더욱 제대로 대처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이는 피해자가 대학원생일 경우 더욱 심각하다. 서강대 'K 교수' 사례처럼 대학원생 피해자의 피해 정도는 지도교수와 특수한 관계에 놓여 있는 '대학원생'이라는 위치 때문에 성폭력 발생 당시에 받는 고통과 상처를 넘어서 인생 전체를 뒤바꾸어 놓을 수 있을 정도로까지 확장된다.
이렇게 막대한 정신적, 신체적 피해에도 불구하고 가해자 교수는 보통 징계 기간 동안 '연구년'으로 처리되어 공식적으로는 '휴직' 상태가 되거나, 잠시 쉬고 있다가 잠잠할 쯤 되면 복직하는 것이 보통이다. 학교 당국 역시 사건이 외부로 유출되고 확산되면 학교의 명예가 실추될 것을 우려하여 피해자 학생에게 대충 이해와 합의를 요구하거나 심하게는 되려 피해자 학생을 불러 다그치고, 협박하기까지 한다. 게다가 교수들간의 연대의식이란 굳이 정당치도 못한 일들에서 자신들의 신분에 불안감이 느껴지면 어찌나 강하게 발휘되는 지 동국대에서는 성폭력을 자행하고 징계 당한 교수를 동료 교수들이 서명운동으로 복직시키기까지 했다.
이러한 대학 사회의 모순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모두 서울대에 있다.
서울대는 '최초로' 대학 내 성폭력 문제의 심각성을 일깨운 '신 교수 사건' 이후 '최초로' '성폭력 학칙'을 제정하여 '최초로' 성폭력을 저지른 '학생'을 제명 시켰지만 바로 지난해까지, 총장은 심심하면 '신 교수 옹호 발언'을 하여 많은 이들을 분노케 했다.
'학생'은 당연히 제명시키면서 더욱 심한 행동을 저지른 '교수'는 사회적 비판을 감수하면서까지 총장이 나서서 '옹호' 해주고, 복직시켜주는 이 모습이 바로 대학 내 '교수 성폭력' 문제의 심각성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올해 들어서만도 벌써 수 차례 대학 내 교수에 의한 성폭력 사건이 폭로되었다.
이제 대학 내 교수 성폭력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학칙 제정'이나 '제도 마련'의 차원을 넘어 교수와 학생, 선배와 후배, 교수자와 연구자 사이의 권력 관계가 권위적 상하관계로 놓여지지 않도록 하기 위한 다각도의 대책을 함께 고민해야 한다.

 

** 이 글은 제가 문화연대의 주간 문화정책 뉴스레터 <문화사회> (http://weekly.culturalaction.org)에 게재했던 기사입니다. (2003.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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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의 ‘인터내셔널’

영화 속의 ‘인터내셔널’

지금은 하늘에서 편히 쉬고 계실 정은임 아나운서가 어느 날엔가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영화음악이라면서 ‘인터내셔널’ 가를 들려주었다죠.
비도 오는데 유난히 어디선가 “국가보안법 수호”“국가보안법 수호”하며 거리를 배회하는 목소리가 들려오는지라 그들 들으라고, 더욱 크게 ‘인터내셔널’을 불러보렵니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글을 시작하려니 새삼 ‘인터내셔널’ 앞에서 부끄러워지네요.
나의 삶을 돌아보며, 우리의 현재를 돌아보며 영화 속에 등장했던 ‘인터내셔널’을 꺼내어보려 합니다.

노동자, <단스(Daens)>, <랜드 앤 프리덤(Land and Freedom)> 그리고 ‘인터내셔널’

<단스>라는 영화를 처음 본 건 대학 2학년 때 ‘연극영화감상’이라는 교양 수업 시간이었습니다. 교수님은 영화를 틀어 놓고 자리를 뜨셨고 불이 꺼진 후 자리에 앉아 있던 저는 슬슬 졸음이 밀려오던 참이었죠. 오래된 듯한 화면색과 지루한 듯한 첫 화면에 실망하고 잘 준비를 하던 즈음, 영화 속에서는 점점 게으른 제 머리와 몸을 깨워 일으키는 사건들이 진행되었습니다. 어느 신부가 사람들과 격렬히 토론하는 듯 하더니 곧 바뀐 장면에서는 수많은 민중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인터내셔널’을 부르며 행진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행진 대열 옆을 지나는 마차 안에는 돈 많은 부호들이 앉아 행진하는 이들을 바라보며 혀를 차지만, ‘인터내셔널’을 부르며 행진하는 이들의 표정에는 분노와 함께 자신감이 가득 차 오르고 있었습니다.
그 '인터내셔널'을 듣는 순간,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나왔습니다.
열악한 노동 환경에서 아동들은 중노동에 시달리고 열두세 살 여자아이는 임신한 채로 시달리다 목숨을 잃어 쓰레기처럼 버려지던 1893년 벨기에의 공업도시.
작가 루이스 폴이 실존 인물 아돌프 단스의 삶을 소재로 쓴 소설 《피에테르 단스 Pieter Daens》를 바탕으로 이 영화를 만든 감독은 참혹한 노동 현실과 자본가들의 비정하고 야비한 모습들을 적나라하게 비춥니다. 그 잔인한 현실 속에서 급기야 한 어린아이가 사망하고 이에 분노한 노동자들의 결의에 찬 행진 속에서, ‘인터내셔널’이 울려 퍼졌던 것입니다.
비록, 봉기는 곧 잔인한 경찰에 의해 진압 당했지만 노동자들의 ‘인터내셔널’은 최초로 그들의 힘을 보여주었습니다.


영화 <랜드 앤 프리덤>에는 또 하나의 감동적인 ‘인터내셔널’이 있습니다.
파시스트의 반동에 맞서기 위한 스페인 내전의 민병대에 자원하여 스페인으로 향하던 영국인 데이빗은 기차 안에서 프랑스인 베르나르와 여러 민병대원들을 만나 POUM(품 - 맑스주의 통일 노동자당)의 민병대원으로서 프랑코 파시스트들과의 투쟁대열에 동참합니다.
어느 날 새벽, 부대는 파시스트들이 점령하고 있던 한 마들을 공격해 탈환하지만 그 전투에서 IRA출신의 쿠간이 파시스트 사제의 저격으로 사망하고 그의 장례식을 치른 후 누군가의 조용한 선창을 시작으로 '인터내셔널'이 울려 퍼집니다.



한 명의 목소리로 조용히 시작되어 마침내는 우렁찬 합창이 되는 <랜드 앤 프리덤>의 ‘인터내셔널’은 동지의 무덤 앞에서 다시 한 번 결의를 다지는 힘찬 노래와 구호로 감동을 주었습니다.
이렇게 감동적인 ‘인터내셔널’이 있는 한편, ‘인터내셔널’을 사랑하는 이들의 뒷통수를 날리는 한 방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바로바로...<에어 포스 원>!!

<에어 포스 원>, ‘인터내셔널’을 비웃다.

아... 잊을 수 없는 <에어 포스 원>의 추억!
위대한 미국 대통령님께서 러시아 테러리스트들을 물리치기 위한 작전으로 그들의 장군을 석방해 주는 장면. 감옥에 갇혀 있던 그들의 동지들이 장군의 석방과 동시에 한 목소리로 부르던 ‘인터내셔널’ 위로 곧 자랑스런 미국의 총탄이 날아들더군요.
‘인터내셔널’을 가비압게! 무시하고 테러리스트들을 진압하여 인류를 구원하시는 멋진 헤리슨 포드 대통령님이 어찌나 주먹 떨리도록 존경스럽던지요!!!
오늘날도 그 헤리슨 포드 대통령님처럼 전 인류를 구원하고자 밤잠 못 이루고 계실 저 미국의 부시 대통령님, 여하간 수고가 많으시겠습니다. 그려.

자본의 ‘인터내셔널’을 넘어 민중의 ‘인터내셔널’ 그 날까지!!


우리의 현실에는 그 영화 속의 현실들이 그대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저 오래전 <단스>가 있던 시대 벨기에 노동자들의 현실이, <랜드 앤 프리덤>의 현실과 <에어 포스 원>의 현실까지도. 그래서 여전히 지구 한 쪽에서는 열 서너 살 어린 아이들이 축구공을 꿰메거나 100원이 없어서 굶어 죽어가고 또 다른 한 쪽에서는 이루 상상할 수 없는 액수의 자본이 국가와 국가 사이를 넘나들며 어떤 이들의 배를 채우고 심지어 어떤 곳에서는 날마다 폭격과 테러로 수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어가고 있죠.
이제 정말로 ‘인터내셔널’을 현실로 불러내야 하겠습니다.
자본의 ‘인터내셔널’이 아닌, 노동자, 민중의 ‘인터내셔널’을 말입니다.


이 문장을 누르시면 '인터내셔널' 러시아 합창곡을 들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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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사>의 ‘Bachianas Brasileiras No.5’ 그리고 ‘Manha De Carnival’

<정사>의 ‘Bachianas Brasileiras No.5’ 리고 ‘Manha De Carnival’

 
 
 

<밀애>의 미흔, <디 아워스>의 브라운 부인 그리고 <정사>의 서현.
이들은 모두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평범하고 안정적인 가정에서 살고 있다. 어느 정도 능력 있는 남편과 별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아이가 있고 삶은 평온하다.
그러나 지겨우리만치 평온한 일상은 점점 건조해지고, 그저 남편의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인 지루한 남편과 그저 누군가의 아내, 누군가의 엄마로서의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인 주인공은 어느 순간, 자신의 삶을 뒤돌아보게 된다.
‘나는 왜 이 자리에 있는가’
‘나는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Bachianas Brasileiras No.5'


한 때는 그녀(들)도 ‘전설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였다. 그러나 자신의 삶을 돌아본 어느 순간, 그녀(들)은 어느 새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가 되어버린 자신을 발견한다.
자신에게 더 이상의 신선한 사랑의 감정이나 아름다움, 행복이란 ‘사치에 불과할 뿐’이라는 생각으로 자신을 포기하고 살아갈 무렵, 그녀(들)에게, 자신이 억지로, 억지로 깊숙이 가두어 놓았던 그 욕망과 감정들을 다시 깨워 일으키는 사건이 찾아온다.
그렇게 시현에게는 ‘동생의 남자’ 우인이 나타났다.
우울한 모노톤의 화면 위에서 서현과 우인은 점차 서로에게 빠져들어 가고, 결국 서현이 우인에게로 찾아간 첫 날, 서로를 감싼 서현과 우인의 불안한 몸 위로 ‘Bachianas Brasileiras No.5'가 흐른다.
느리고 낮게 시작되는 첼로의 선율, 그리고 그 위로 흐르는 클라리넷의 숨소리와 라틴 풍으로, 조금은 격앙된 듯 흐르는 기타의 스트로크.
서현과 우인의 불안하면서도 격정적인 사랑이 선율을 따라 화면 위에서 흐른다.
브라질 출신의 작곡가 에이토르 빌라로보스(Heitor Villa-lobos)의 음악을 조성우가 편곡한 이 곡은 영화 <밀애>에서도 미흔과 인규의 첫 베드신에 등장하는데 <밀애>에서는 현악기의 선율만으로 보다 무겁고 우울한 느낌으로 느리게 연주되어 우울증에 갇혀 있던 미흔의 감정을 표현하면서 두 사람의 불안한 시작을 암시한다.
이렇게 ‘Bachianas Brasileiras No.5'은 단조롭고도 무거운 바흐와 우울하면서도 서정적인 남미의 감성이 만나 의미 없는 일상과 가정과 결혼이라는 제도 속에 갇혀있던 그녀들의 첫 해방을 조용히 쓰다듬어 주고 있다.

‘Manha de Carnaval'



Manha Tao Bonita Manha
Ee Um Dia Feliz Que Chegou
O Sol, O Ceu Surgiu E Em Cada
Cor Brilhou Voltou O Sonho Entao

Ao Coracao Depois De Este Dia
Feliz Nao Sei Se Outro Dia
Vera Em Nossa Manha Tao
Bela Fimal Manha De Carnaval
Canta Ao Meu Coracao
Alegria Voltou Tao Feliz A Manha
Desse Amor

카니발의 아침, 너무나 아름다운 아침
다가왔던 행복한 날 태양과 하늘이
높이 솟았고 그것은 모든 현란한 색채로 빛을 내지
희망(꿈)이 가슴 속에 다시 파고들었지

이러한 행복한 날 뒤에 나는 또 다른 이를 그가 볼 수 있을지 모르겠어
우리의 아침에 오, 너무나 아름다운 끝
카니발의 아침 내 마음에 노래가...
행복은 되돌아왔어 오, 너무나 행복한 사랑의 아침


<정사>의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에 이 음악은 세 가지의 버전으로 수록되어 있다.
첫 번째는 가장 잘 알려진 Astrud Gilberto의 버전이고 두 번째는 Al DiMeola, John McLaughlin & Paco DeLucia의 버전, 그리고 마지막은 조성우의 버전이다.
여러 영화에서 영화의 분위기와 가장 잘 맞아 떨어지는 음악을 영상 위로 실어 보낸 조성우는 <정사>에서 역시 'Manha de carnaval'을 그만의 감각으로 새롭게 편곡하여 서현과 우인의 사랑을 표현해 냈다.
허밍으로 시작되는 조금은 우울한 분위기의 원곡과는 달리 재즈적 감성이 묻어나는 보사노바 리듬의 조성우의 곡에서는 ‘Manha de carnaval'의 가사에서와 같은 사랑의 기운이 오히려 원곡보다 더 짙게 묻어난다.
다시는 찾아오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사랑, 아니 두 번은 있을 수 없다 믿었던 그 사랑, 있어서는 안 된다며 감추고 가둬왔던 그 사랑의 감정 앞에서 결국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고 마는 서현. 그리고 우인.
이미 이룬 가정과 앞으로 이루어야 할 가정 앞에서 두 사람은 결국 서로를 선택했다.
그리고 그렇게, 두 사람의 ‘너무나 아름다운 카니발의 아침’은 시작되었다.

**이 문장을 누르시면 <정사>의 OST를 들으실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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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currucucu paloma' in <Happy together>, <그녀에게>

'Cucurrucucu paloma' in , <그녀에게>


 

그는 수많은 긴긴 밤을 술로 지새었다 하네.
밤마다 잠 못 이루고 눈물만 흘렸다고 하네.



<해피투게더(춘광사설)> 의 보영과 아휘.
동경하던 이구아수 폭포를 향해 무작정 달려가던 중 길 위에서 차를 멈추고 싸워버린다.
사랑의 감정이란 것은 늘 사람을 민감하게 만들어 버리고 말아서 아주 오묘하고 작은 일로도 서로의 가슴에 생채기를 내고 만다.
보영은 늘 떠난다.
아휘는 그런 보영에게 매번 상처받으면서도 그를 사랑하는 마음만은 어쩌지 못하고 결국 또 다시 자신의 필요가 충족되기만 하면 그를 훌쩍 떠나고 말아버릴 보영을 받아들이고 만다.
보영이 곁에 있어도, 보영이 그의 곁을 떠나도 아휘에게 남는 것은 늘 일상적인 불안과 상처 뿐이다.


그러던 아휘가 장을 만난다.
장이 건넨 녹음기에 보영에 대한 아픈 메시지를 남기고 아휘는 혼자서 이구아수 폭포를 찾는다.
그들을 아르헨티나까지 오게 한 그 곳.
그들이 헤어지게 되었던 계기.
그런 와중에도 아르헨티나에서의 아픔과 상처를 견디고 희망을 가지게 해 주었던 그 폭포.
쏟아지는 물줄기 위로 ‘Cucurrucucu paloma'가 흐른다.

Dicen que por las noches
Nomas se le iba en puro llorar,
Dicen que no comia,
Nomas se le iba en puro tomar.......

이 문장을 누르시면 <해피투게더(춘광사설)>의 'Cucurrucucu paloma' 를 들으실 수 있습니다.

세상의 끝을 찾아 떠난 장, 혼자서 이구아수 폭포를 찾은 아휘, 그리고 사실은 가장 상처 투성이로 덮인 보영.
폭포는 끝에서 찾은 새로운 시작이고, 'Cucurrucucu paloma'의 애절함을 상처를 씻고 희망을 담는 애수의 분위기로 만들어내고 있다.

그의 눈물에 담아낸 아픔은 하늘을 울렸고
마지막 숨을 쉬면서도 그는 그녀만을 불렀네



스페인의 가장 유명한 여자 투우사 리디아.
그리고 그녀의 지독한 사랑을 취재하다 그녀에게 빠져버린 여행 저널리스트 마르코.
그러나 리디아는 그만 경기 도중 머리를 크게 다쳐 식물인간이 되고 만다.
그녀의 옆 방에는 발레리나 알리샤와 언제나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던 베니그노가 있다.
베니그노는 알리샤에게 자신의 존재조차 알리지 못했었지만 알리샤가 식물인간이 된 후로는 4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알리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말을 걸며 그녀를 돌본다.
반면 마르코는 리디아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리디아와 서로의 상처를 나누며 결국 리디아를 사랑하게까지 되었지만 정적 리디아가 병상에 눕게 된 후로는 그녀와 더 이상 무엇도 나눌 수 없음에 혼란스러워 한다.
베니그노의 알리샤에 대한 사랑과 행동은 조각상을 만들어 놓고 그녀와 사랑에 빠져버린 그리스 신화의 피그말리온을 떠올리게 한다.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 그녀에게 지치지 않고 애정과 사랑을 쏟아 붓는 피그말리온과 베니그노의 모습은 아름답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을 드러내고, 소통을 시작하게 될 때 시작될 상처가 두려운 그들의 내면을 생각하게 한다.
한편 많은 것을 공유했기에 더더욱 그 단절이 두려운 마르코의 모습은 ‘사랑이라는 감정은 무엇을 통해 지속되는가’라는 의문을 던진다.
한 번도 자신을 그녀에게 드러낸 적 없지만 꾸준히 그녀를 사랑하는 베니그노의 희생적이면서도 소극적인 사랑. 그리고 많은 것을 나누었지만 소통이 단절되자 혼란스러워하는 마르코의 사랑.
결국 우리는 사랑의 무엇 때문에 울고, 웃게 되는가...
마르코의 혼란 속에 회상되는 장면에서 리디아와 함께 찾아간 노천 까페 앞에서는 Caetano Veloso 가 직접 연주하는 ‘Cucurrucucu paloma'가 울려퍼지고 각자 사랑의 아픔을 안은 리디아와 마르코는 ’Cucurrucucu paloma'의 슬픈 사랑의 노래에 빠져들어 눈물을 흘린다.

Juran que el mismo cielo
Se estremecia al oir su llanto;
Como sufrio por ella,
Que hasta en su muerte la fue llamando...

이 문장을 누르시면 <그녀에게>의 'Cucurrucucu paloma' 를 들으실 수 있습니다.

‘Cucurrucucu paloma'

Dicen que por las noches
Nomas se le iba en puro llorar,
Dicen que no comia,
Nomas se le iba en puro tomar,
Juran que el mismo cielo
Se estremecia al oir su llanto;
Como sufrio por ella,
Que hasta en su muerte la fue llamando

Ay, ay, ay, ay, ay,... cantaba,
Ay, ay, ay, ay, ay,... gemia,
Ay, ay, ay, ay, ay,... cantaba,
De pasion mortal... moria

Que una paloma triste
Muy de manana le va a cantar,
A la casita sola,
Con sus puertitas de par en par,
Juran que esa paloma
No es otra cosa mas que su alma,
Que todavia la espera
A que regrese la desdichada

Cucurrucucu... paloma,
Cucurrucucu... no llores,
Las piedras jamas, paloma
¡Que van a saber de amores!
Cucurrucucu... cucurrucucu...
Cucurrucucu... paloma, ya no llores

그는 수많은 긴긴 밤을 술로 지새었다 하네.
밤마다 잠 못 이루고 눈물만 흘렸다고 하네.

그의 눈물에 담아낸 아픔은 하늘을 울렸고
마지막 숨을 쉬면서도 그는 그녀만을 불렀네.

노래도 불러보았고 웃음도 지어봤지만
뜨거운 그의 열정은 결국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갔네.

어느 날 슬픈 표정의 비둘기 한 마리 날아와
쓸쓸한 그의 빈집을 찾아와 노래했다네.

그 비둘기는 바로 그의 애달픈 영혼
비련의 여인을 기다린 그 아픈 영혼이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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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애>, 무상한 것을 위하여.

<밀애>, 무상한 것을 위하여.

<밀애>.

영화 <밀애>의 포스터가 극장에서 내려지는 속도가 예상보다 빨라지자, 나는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결국 더 늦기 전에 ‘오늘만은 꼭 보아야겠다’고 마음먹었던 날, 영등포 연흥극장에서 간신히 표를 한 장 구할 수 있었다. 영화 자체에는 별 관심이 없는 듯 보이는 4,50대 아저씨, 아주머니들이 듬성듬성 자리한 썰렁한 극장에 혼자 어색하게 앉아서 나는 두 시간 내내 미흔의 감정을 따라가느라 참으로 힘든 감정의 노동을 버텨내야 했다.
힘겨운 두 시간을 보내고 극장을 나온 후 뒤늦게 참석한 회의 자리에서는 어떠한 논의가 이루어지는지 집중할 수도 없었다. 그렇게 멍하게 회의를 끝내고 나오자 어느 새 연흥극장에는 <밀애> 대신 새로운 영화의 포스터가 걸려있었다.
나는 그렇게 마지막 <밀애>의 상영장에서 미흔의 삶과 사랑 그리고 상처에 짓눌린 가슴을 받아 안았다.

여자, 엄마, 남자

이혼 후 한결 밝고 씩씩해진 우리 엄마는 어느 날 우리 앞에 ‘좋아하는 사람’이라며 한 아저씨를 데리고 왔다. ‘엄마의 새로운 남자’. 그건 분명 환영할만한 일이면서도 솔직히 매우 불편한 일이었다. 엄마의 이혼 후 엄마와 우리 세 딸. 이렇게 여자만 넷이서 살던 집에 익숙치 않은 남자가 나타났다는 사실 자체가 그랬고, 그 남자가 풍기는 석연치 않은 분위기는 더욱 그랬다. 그러나 그보다 더 결정적인 불편함은 그 남자에 대한 엄마의 태도였다.
엄마는 그 새로운 남자에게 독상을 차려주고, 바쁘다고 우리에게는 해주지도 않던 반찬을 새로 만들어 주었으며, 따끈따끈한 밥을 사기그릇에 담아 정성스레 내어 주었다.
나는 엄마의 그런 태도에 매우 짜증이 났다.
왜! 도대체 왜! 엄마는 남자라는 존재에게 그렇게 당해놓고도 또 새로운 남자를 데려와 저렇게 지극정성을 보인단 말인가! 질리지도 않았나, 그렇게 상처를 받았으면서도 아직도 남자라는 존재에 대한 사랑이 남았는가, 도대체 남자에 대한 믿음이란 게 다시 생기냔 말이다. 그날 이후, 나는 엄마에게 짜증이 나서 집에도 잘 들어가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후 엄마는 그 남자와 헤어졌다. 엄마의 의지가 아닌, 그 남자에 의해서.
엄마는 한 동안 매우 슬퍼했다. 자식들 앞이라 티는 내지 않으려 했지만 부쩍 우울해하고 외로워하며 신경질적이 된 엄마는 온몸으로 다시 자신의 빌어먹을 팔자를 원망하고 있었다.


미흔.

나는 미흔을 보며 내내 엄마의 사랑에 대해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 노래의 가사처럼 ‘아무것도 아닐 마음의 사치’에 불과한 그 알량한 사랑이라는 감정에, 더 이상 상처받거나 구속당하기 싫은 미흔과 인규의 게임이 오히려 가슴 아프도록 안타까워보였다.
요즘은 쿨한 사랑법이 워낙 유행이라 모 잡지에서는 ‘친구끼리 섹스를 즐기는 법’ 같은 것까지 소개하기도 하지만 사실 알고 보면 쿨한 사랑을 하겠다는 명분 좋은 구실에는 결국 사랑이라는 감정에 굳이 구속되기도, 상처받기도 싫은 이들의 회피 전략이 숨어있는 것은 아닐까?
사랑, 가족, 결혼.
인간의 삶에서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이 골치 아픈 주제들로 인해 오늘도 어딘가에서는 또 다른 미흔이 지치고 상처받은 영혼을 짊어진 채 억눌려왔던 욕망의 탈출구를 찾고 있을 것이고 또 다른 인규가 사랑과 욕망 사이에서의 줄타기 게임을 아슬아슬하게 즐기고 있을 것이다.

‘쉼터’의 여자

매일 맞으면서도 그 곳을 벗어나지 못하는 구멍가게 ‘쉼터’의 여자.
미흔과 ‘쉼터’의 여인 사이에는 많은 말이 필요치 않다.
그저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서로의 감정에 깊숙이 공감할 수 있는 두 여인은 아쉽게도 도로변에서 헤어졌다.
미흔이 차라리 인규가 아니라 ‘쉼터’의 여인과 훗날을 함께했다면 둘은 더 행복하지 않았을까? 하고 나는 생각했다.


독사진. 그리고 ‘무상한 것을 위하여’

혼자 남은 미흔은 빨간 옷을 입고 사진관을 찾아가서 웃는 얼굴로 자신의 독사진을 필름에 남긴다. 나는 두 시간 가량의 이 영화에서 이 장면만이 유일하게 편하고 가장 아름답게 보였다. 미흔은 이제 새로운 자신을 찾고 자신 있고 당차게 홀로서기를 해나갈 것이다.
물론, 미흔은 또 다시 새로운 사랑을 찾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그 때쯤 미흔에게는 이전에 미처 깨닫지 못했던 사랑과 욕망과 관계에 관한 새로운 힘이 생성되어 그녀의 사랑을 신선하게 해줄 것이다. 그것이 무엇일지는 아마도 이 영화를 보고 미흔에게 공감을 느꼈던 사람만이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엄마가 지금 다시 한 번 찾아온 사랑에 그 힘을 적극 활용해 행복한 관계를 만들어가고 있듯이.
영화 마냥 내내 우울한 OST의 마지막 트랙처럼, 결국 나 역시 사랑, 그 ‘무상한 것을 위하여’ 새롭게 도전하는 그들의 선택을 응원하고 축복할 수밖에...

<밀애> OST 들으러 가기! (이 문장을 누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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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틀로얄>, ‘Requiem'-&quot;인생은 게임이다. 끊임없이 싸워서 생존하라!”

<배틀로얄>, ‘Requiem'

-"인생은 게임이다. 끊임없이 싸워서 생존하라!”

 


실업자 1천만 명에 등교거부 학생 80만 명, 교내 폭력에 의한 순직교사가 1,200만 명에 달하게 된 미래의 혼란스러운 일본. 급기야 일본정부는 일 년에 한 번씩 무작위로 한 학급을 선발하여 무인도에서 3일 간 단 한 명만 생존하도록 ‘진짜’ 서바이벌 게임을 시키는 이른 바 ‘BR' 법을 제정하기에 이른다.

전투 규칙.
첫째, 처음 각자에게 주어진 무기만을 가지고 출발하여 상대방을 죽이고 새로운 무기를 획득해 나가야 한다.
둘째, 목에 장착된 목걸이를 통해 중앙 통제실에서 학생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할 것이며, 목걸이를 빼려 하거나 함부로 수상한 짓을 하면 목걸이는 자동 폭파될 것이다.
셋째, 매일 정해진 시간에 새로운 제한구역을 발표할 것이며 그 시간 이후에 제한구역에 남아있는 사람의 목걸이 역시 자동으로 폭발하게 될 것이다.
넷째, 제한시간은 3일. 3일 후에는 반드시 한 명만 남아야 하며 한 명 이상이 남게 되면 모두 죽는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상황 앞에 당황하여 웅성거리던 아이들 사이로 규칙을 설명하던 선생이 던진 칼 한 자루가 날아들고 정수리에 칼을 맞은 학생은 그 자리에서 즉사한다. 더 이상 선생과 이성적으로 소통을 할 수 있으리란 기대는 가질 수 없다. 그리고 이제 선택의 여지는 없다. 냉엄한 생사의 갈림길에서 살기 위해서는 서로에게 무엇이든 겨눠야 한다.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 이것이 바로 ‘진짜’ 세상이다.

이것은 영화가 아니다.

안타깝게도,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을 감안해 본다면 실업자가 1천만 명에 이른 시대를 상상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이미 우리는 인간의 노동이 돈을 모으는 것이 아니라 돈이 돈을 모으는 세상, 돈의 가치가 인간의 생존보다 우위에 서 있는 세상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실업자 1천만 시대에 이른 상상속의 미래 일본 사회에서 학교 폭력으로 1,200만의 교사가 사망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매우 현실성 있는 가정일 수 있는 것이다.

아니, 이것은 가정이 아니라 현실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경쟁과 탐욕으로 인한 죽음의 행렬은 계속되고 있고 그 현실은 <배틀로얄>의 학생들에게 던져진 극단적인 상황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영화의 첫 부분에서 주인공 슈야의 아버지는 ‘슈야, 힘내라’는 유언 한 마디만을 남겨 놓고 목을 매어 자살한다. 서로를 끊임없이 밟고 죽여야 간신히 살아갈 수 있는 현실을, 그는 더 이상 극복해낼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가 미처 극복하지 못한 세상 속에서 혼자 살아갈 아들에게 그는 ‘힘내라’는 한 마디밖에 남길 것이 없었다.
전쟁과도 같은 잔혹한 현실에서 아무것도 해주지 못하고, 어떤 말로도 소통이 되지 않는 무책임한 어른. 아이들은 어차피 소통조차 되지 않는 무능력하고 보수적이기만 한 기성세대들에 대한 기대를 버리고 단절하며, 기성세대들은 자신들이 정해놓은 잣대에서 자꾸만 벗어나는 아이들을 버릇없다 여기고 자신들의 뜻대로 길들여 복종시키려고만 한다.
버릇없고 철없는 아이들에게 기성세대가 택한 방법은 단 한 가지.
냉혹한 현실을 직접 체험하게 함으로써 아이들을 무장시키는 것이다.
이리하여 배틀은 시작되고, 서로를 믿자던 아이들은 일순간에 상대방으로부터 배신을 당하고, 현실에서 도피하려던 두 친구는 서로를 의심하다 함께 죽음을 맞이하며, 서로의 힘을 모아 본부를 해킹하고 탈출을 감행하려던 아이들은 결국 날아드는 총탄에 모두 목숨을 잃고 만다.


한편, 중앙 본부에 서서 아이들의 전쟁을 지켜보는 선생(기타노 다케시)는 자신이 가르치던 제자의 칼에 찔리고, 자신의 딸에게는 멸시를 당하며 도무지 소통할 수 없는 10대들에게 자신이 받은 깊은 상처를 배틀로얄을 통해 아이들에게 되돌려주려 한다.
그러나 결국 그에게도, 아이들에게도 서로의 모습이 안타깝게 보이고 마는 것은 그렇게 치열한 전투의 와중에서 가장 절박해 지는 마음이란 모순적이게도 ‘진정한 사랑’, ‘진정한 믿음’, 진심으로 누군가에게 ‘고마워’라고 말할 수 있는 단 한번의 기회. 그것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감독 후카사쿠 긴지는 일본이 일으킨 태평양 전쟁 시대를 살았던 사람이다.
그는 영화속의 주인공들과 같은 나이인 15세에 미군의 사격으로 죽은 30여명의 친구들의 시체를 처리해야 했다. 이러한 경험으로 그는 한 인터뷰에서 “전쟁 후 모든 어른들을 불신하게 되었다”라고 말한 바 있다.
결국 <배틀로얄>에는 이러한 감독의 경험이 그대로 투사된 셈이다.
영화의 말미에서 기타노 다케시는 죽으면서 “이제 어른들은 어떻게 하면 좋을까”라고 중얼거린다.


불신의 세상, 탐욕의 세상, 경쟁의 세상을 만들어 놓은 무책임하고 잔혹한 어른들은 이제 영문도 모른 채 어른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거나 서로를 죽이며 살아가야 하는 아이들 앞에서 어떻게 그 책임을 질 수 있을까.
<배틀로얄>은 질문하고 있다.

‘Requiem', 잔혹한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두에게 바치는.

각종 종류의 총기는 물론 낫과 도끼를 비롯한 동원 가능한 모든 무기가 등장하는 피 튀기는 전쟁의 현장에서 우리가 듣게 되는 음악은 당황스럽게도 요한 스트라우스의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강’이거나 바흐의 ‘G선상의 아리아’다.
때때로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웅장한 오케스트라풍의 아마노 마사미치의 음악이 관객을 영화의 긴장감과 잔혹한 분위기에 잔뜩 몰입시키지만 사실 소통 부재의 냉혹한 경쟁 사회에서 간신히 빠져나와 어딘지 모르는 곳을 향해 일단 손을 잡고 달려가는 마지막 두 아이들의 뒷모습이 보여주듯, 결국 '살아남고', '달려나가',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는 영화의 진짜 메세지는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강’이나 ‘G 선상의 아리아’가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두 아이의 달려가는 뒷모습 뒤로 남겨진 주검으로 가득찬 황폐한 섬과 그 섬의 밖에서도 똑같이 서로를 죽이며 살아가야 하는 모두를 위해, 베르디의 ‘Requiem' 이 울려퍼진다.

* <배틀로얄> OST 들으러 가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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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 아워스’의 ‘The Hours', 세 여인의 다른 시대 같은 시간

‘디 아워스’의 ‘The Hours', 세 여인의 다른 시대 같은 시간



주체할 수 없는 우울이 아주 화창한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올 때가 있다.
하늘엔 새하얀 구름이 작은 바람결에 밀려 서서히 떠다니고 햇살은 따사롭게 머리 위로 내려와 미세한 바람과 함께 내 머리를 어루만지는 날, 홀로 어딘가엘 다녀오다 잠시 머문 공원에서 작은 새들이 포로롱 내려앉아 풀 잎 위를 뛰어다니는 정경을 보며 가만히 앉아있는데 갑자기 눈물이 고여 당황했던. 그런 날이 있다.
그 시간만큼은 도심을 쌩쌩 달리는 차들의 소음도, 시끌벅적한 사람들의 수다 소리도 들리지 않고 잠시 오로지 그 평화로운 정경에 빠져 갑자기 내 삶에 대해 뒤돌아보게 되었다.

‘나는 지금 내가 원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니 눈물이 났다.
내가 이 세상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 타협하고 있는 것들과 숨기고 있는 것들.
내 자신이 원하는 대로, 내 모습 그대로를 드러내 놓지 못하고 내 삶이 이어지고 있음에 대한 작은 분노와 그 안에 갇혀 있는 내 욕망이 갑자기 폭발하면서. 그렇게. 화창한 어느 날.

브라운 부인


아침에 늦게 일어나서 남편과 무뚝뚝한 인사를 나누고 모처럼 마음먹고 남편의 생일을 위해 파티를 준비하려 해도 케이크 하나 제대로 만들지 못하는 브라운 부인. 그래도 그녀에게는 그녀를 사랑해주는 남편과 귀여운 아들, 그리고 뱃속에 있는 또 하나의 작은 생명이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평범하고 단란해 보이는 가정인데 왠지 이들의 평화는 불안해 보인다. 브라운 부인은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 남들과 같은 삶을 살고 있을 뿐인데, 그저 평범하게 남편과 아이가 있는 단란한 가정에서 아내라는 이름으로, 엄마라는 이름으로 똑같이 살고 있을 뿐인데 그녀 마음에 채워지지 않는 것은 무엇일까.

델러웨이 부인


델러웨이 부인. 그녀는 버지니아 울프의 동명 소설 속 주인공과 같은 이름을 가지고 있다.
그녀에게는 에이즈에 걸린 평생의 친구 같은 애인 리처드가 있고, 함께 살아가고 있는 또 다른 애인 샐리도 있다.
그녀의 본명은 클라리사 이지만 소설 속 델러웨이 부인의 남편이 리처드였으므로 그녀는 자신을 ‘델러웨이 부인’이라 부르는 리처드를 통해 클라리사로서의 삶과 동시에 ‘델러웨이 부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간다.
리처드는 클라리사의 안식처이자 동시에 도피처였다.
그녀에게는 ‘평범한 삶’에의 욕망과 동성애자로서의 삶에 대한 부정할 수 없는 자기 정체성이 모두 존재하고 있었기에 실제 부부는 아니지만 평생을 서로 아껴주었던 리처드의 존재는 그녀를 ‘평범한’ ‘누군가의 아내’, ‘델러웨이 부인’으로서 존재할 수 있게 해 주었던 소중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로 인해 클라리사 혹은 ‘델러웨이 부인’은 자신의 진짜 행복이 무엇인지 모른 채 살아가고 있다. 그 공허는 리처드의 문학상 수상 기념 파티를 통해 자신의 존재 가치를 확인하려는 그녀의 행위를 통해 드러난다. 그러나 문학상 수상식이 있던 그 날, 리처드는 ‘우리 둘보다 더 행복했던 사람들이 있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아’라는 말을 남기고 그녀 곁을 떠나버린다.
이제 클라리사는 오로지 클라리사로서의 새로운 삶을 살아가야 한다.

버지니아 울프


클라리사에게 리쳐드가 있듯, 버지니아 울프에게는 소중한 동반자 레너드가 있다. (아니, 사실은 리쳐드와 클라리사가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델러웨이 부인'의 삶을 살았으므로 서술은 거꾸로 되어야 한다. '버지니아 울프에게 레너드가 있듯 클라리사에게 리쳐드가 있다'로. 클라리사와 리쳐드의 관계는 버지니아와 레너드의 관계를 모방하고 그 역할을 뒤집은 것이다.)
리처드는 ‘보통 사람 같은 부부 생활을 하지 않을 것과 작가로서의 길을 가려는 자신을 위해 공무원 생활을 포기해 달라’는 버지니아의 요구를 받아들이고 작은 시골 마을에서 신경쇠약과 우울증에 시달리는 그녀를 돌보며 살아가는 삶을 택했다.
어린 시절 부모의 이혼과 이른 죽음, 오빠의 잦은 성폭행 등으로 아픈 상처를 안고 살아왔던 버지니아에게 ‘남성이면서도 그녀를 위해 헌신하는’ 리쳐드는 아마도 그녀의 아픈 기억을 보상하고 치유해주는 존재였을 것이다.
그러나 남성중심의 사회에서 남성 권력의 폭력적 속성이 극단적으로 결집되어 휘몰아친 전쟁의 광풍과 결국 그에 동조하고 마는 리쳐드의 모습을 보며 그녀는 한 장의 유서를 남기고 강물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여성들의 시간

브라운 부인은 남편의 생일 케이크을 엉망으로 준비하다 갑자기 찾아온 친구의 불임 소식을 듣고는 그녀에게 연민의 마음을 담아 조용히 키스한다. 그 순간 그녀는 깨달았다. 그녀의 마음속에 채워지지 않고 있던 것이 무엇이었던가를.
그녀는 자기 자신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볼 기회도 없이 살아왔고, 자신이 결혼을 하는 이유도 생각해보지도 못한 채 결혼을 해서 그저 남들과 똑같이 가정을 꾸리며 살아왔다.
그녀에게는 여성으로 호명된 주체로서의 삶이 아닌 온전한 ‘그녀 자신의 삶’이 필요했던 것이다.
키스를 계기로 한 삶의 전환은 브라운 부인과 친구 키티의 키스에서 뿐만 아니라 리쳐드가 죽은 후의 클라리사와 샐리의 키스, 버지니아와 언니 바네사의 키스를 통해서도 나타나는데, 이 영화에서 여성간의 키스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단지 동성애의 욕망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여성이 여성으로부터 느낄 수 있는 동질감과 연민을 표현하는 행위이며 그 감정에 대한 깨달음과 동시에 자기 자신에 대해 깨닫게 되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햇살이 물 위에서 만나 반짝거리던 어느 날 버지니아는 평화로운 강물 속으로 서서히 걸어 들어가 삶을 마감했다.
브라운 부인과 클라리사가 다른 시대를 살면서도 버지니아의 고민과 우울의 시간을 공유했듯이, 남성 중심의 사회와 싸우며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는 많은 여성들과, 또한 여전히 자신에 대해 고민할 기회조차 찾지 못한 채 가슴 한 구석에 뭔지 모를 허전함과 우울증을 안고 살아가는 오늘 날의 모든 여성들에게도 버지니아와 클라리사, 브라운 부인의 시간이 공유되고 있다.
마치 버지니아가 몸을 담근 강물처럼, 고요한 듯하지만 격정적이고 멈춰 있는 듯하지만 끊임없이 흐르고 있는 여성들의 시간이.


저는 지난 30년 동안 남성중심의 이 사회와 부단히 싸웠습니다. 오로지 글로써. 유럽이 세계 대전의 회오리바람 속으로 빨려들 때 모든 남성이 전쟁을 옹호하였고, 당신마저도 참전론자가 되었죠. 저는 생명을 잉태해 본 적은 없지만 모성적 부드러움으로 이 전쟁에 반대했습니다. 지금 온 세계가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제 작가로서의 역할은 여기서 중단되어야 할 것입니다. 추행과 폭력이 없는 세상, 성차별이 없는 세상에 대한 꿈을 간직한 채 저는 지금 저 강물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 버지니아의 유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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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줄에 묶인 개처럼 살지는 않겠어! ‘Puppet' in <Bandits>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나는 학교 총장실에 있었다. -_-;; 장소가 좀 거시기 하지만 서도 여하간 그 곳에서 추석 연휴에 후배들이 집에서 싸온 전들을 얻어먹으며 나는 이 매력적인 네 여자들의 수배전단이 인쇄된 테이프를 총장실의 멋진 비디오 데크에 집어넣었다.
밖에는 사복을 입은 형사들이 학교 건물을 예의 주시하며 어슬렁거리고 있었고 나는 그들의 감시 따위에는 이미 만성이 되어 별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다.
어쩌면 나를 구속하고 있던 진정한 적은 건물 밖의 그들이 아니라 그들의 감시에 길들여진 나 자신이었는지도 모른다.

Puppet on a string

남편을 독살한 마리, 함께 활동하던 재즈 밴드의 단원을 총으로 죽인 엠마, 중혼 사기죄의 엔젤리카, 무장 강도 루나. 이름만 들어도 무시무시한 죄명의 네 여자는 감옥에서 밴드를 결성하고 급기야 경찰의 날 행사에서 연주를 하게 되는 영광(?)을 누리게 된다. 그러나 도중에 경찰의 추행을 참지 못한 루나의 폭행으로 이들은 뜻하지 않은 도피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지긋지긋한 감시의 공간인 감옥에서 벗어났지만 도피자의 생활은 물론 이들에게 곧바로 자유를 안겨주지는 못한다. 그럼에도 네 여자는 이들의 유일한 낙이자 희망인 음악과 함께 들판을 달리고 대중의 한 가운데에서 호흡한다. 이들이 가는 곳마다 대중이 환호하고, 대중이 환호하는 곳에는 경찰이 따라다닌다. 그 와중에 약삭빠른 자본가 음반 기획사 사장은 이들의 노래를 음반으로 만들어 신나게 장사를 해댄다.
유명해 질수록 수사의 범위는 좁혀져 오고, 함께 연주를 하며 도피 생활을 하는 동안 네 여자의 지난한 삶이 하나 둘씩 드러난다.
“애인 하나 잡아서 새처럼 살고 싶다”는 앤젤리카는 허영심 많고 혼인 사기를 저지르고 다녔지만 사실은 진정한 사랑에 목마른, 의리 있는 여자, 정신분열로 남편을 죽인 ‘살인범’ 마리는 클래식 연주자였다. 마리는 그녀에게 언제나 ‘늘 곁에 있겠다고’ 했던 남편 오토를 잊지 못해 매번 자살을 기도한다. 그녀는 그 죄책감 안에서만 살아갈 수 있다. 자신이 죄책감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를 얻는 순간, 그녀는 살 자격을 잃는 것이다.
한편 이성적인 성격으로 밴드의 맡 언니 역할을 하는 엠마 역시 애인에게 맞아서 뱃속에 있던 아기를 잃은 상처를 안고 있다. 그리고 매사에 거칠고 즉흥적인 루나는 사회의 고정관념과 질서에 따라 살아가기를 거부하는, 누구보다도 자신의 본능에 충실한 인간이다.
결국 네 여자의 삶에서는 감옥이 곧 구속을, 감옥 밖의 세상이 자유를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줄에 묶인 개’ (puppet on a string)에 불과했던 그녀들의 삶이 곧 구속이자 감옥이요, 음악과 동료들을 통해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받았던 상처들을 드러내며 자신들을 구속하고 있던 사회의 시선과 고정관념, 피해의식으로부터 자신을 스스로 해방시키고, 치유하는 과정이 곧 진정한 자유인 것이다.

Now, hear my song

도피 중 마리는 경찰의 속임수에 걸려든 엔젤리카 때문에 다리 위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마리를 보낸 남은 세 명의 멤버는 바닷가 항구 앞의 옥상에 서서 붉은 노을을 뒤로 하고 경찰들 앞에서 마지막 연주를 시작한다. 팬들의 아우성 속에 한 편의 뮤직비디오와 같은 연주를 마치고 군중 속으로 다이빙하는 세 여자는 마침내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된 듯 보인다. 다음 순간, 항구를 향해 달려가는 그들의 모습 뒤로 몇 발의 총성이 울리고 엔딩 크레딧과 함께 그들이 진정으로 남기고자 했던 메시지, ‘Puppet'이 흐른다.


.
.
.
You keepin' me , just hangin on
Now hear my song
Just like a puppet on a string
Now can't you see you're killing me
.
.
For end this game you always win

당신은 나를 구속하고, 묶어 두고 있지만.
이제 내 노래를 들어요.
줄에 묶인 개와 같은 나의 노래를.
이제 당신이 죽이고 있는 내가 보이지 않나요.
.
.
언제나 당신이 이기는 이 게임의 끝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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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 Main Theme

어느덧 몇 년이 흘렀다.
그 날, 극장에서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를 보면서 무언가 마음속에 응축되고 있던 것들이 영화의 엔딩 크레딧 자막에 이르러서 결국은 강하게 결집하여 나의 가슴 깊숙이 자리를 잡고야 말았다.
도움을 준 이들의 이름들 속에 또렷이 새겨져 올라가던 ‘풍문여자 고등학교’.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3년 만에, 다시 찾아온 내 고교시절의 기억들.
나는 실제로 수많은 효신과 시은과 민아와 지은이와 연안이....그리고 그 영화 속의 아이들과 똑같은 많은 아이들을 만났고, 그들과 함께 다사다난한 18세를 보냈다.
영화 속 아이들의 모습 속에서 내 친구들의 모습들이 그대로 펼쳐지고 있었고, 그들을 보며 나는 때론 어떤 죄책감에 가슴 아프다가 때론 어떤 즐거운 추억들을 떠올리며 웃음 짓기도 했다. 어쨌든, 그것은 내게 성큼 다가와서 크게 남겨진, 또렷한 충격이었다.

여고, 열여덟

스무 살이 되고도 우리 더 나이를 먹을 수 있을까. 열여덟! 이 순간이 영원히 지속된다면 어떨까? 너무 지겨울까? 죽음이 있기에 짧은 인생이 의미 있는 걸까?
- 효신과 시은의 교환일기 중에서-


열여덟. 열여덟은 성장에 대한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 나이이다.
열여덟에 세상은 갑자기 성큼 다가오지만 어릴 적에는 그렇게도 하루빨리 끼어들고 싶던 세상의 모습은 상상만큼 멋지고 아름다운 모습이 아니었다. 자라면서 보다 현실적으로, 적나라하게 마주하게 되는 어른들의 모습은 추하고, 편견으로 가득 차 있으며, 학교에서 배워왔던 도덕적인 삶의 모습은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그러다가 어느새 그렇게도 혐오하던 어른들의 모습을 그대로 닮아 가고 있는 스스로의 모습을 발견했을 때, 어떤 친구는 자신을 더욱 혐오하였고, 어떤 친구는 자신에게는 해당되지 않고 남에게는 철저하게 적용되는 이중의 잣대를 세워가면서 닮아가던 모습 그대로 어른들의 모습을 내면화해 갔다.
우리들은 이렇게 달라져 가는 서로를 목격하고, 혼란 속에 서로 충돌하고는 했다. 그래서 시간이 갈수록, 한 편으로는 빨리 현재에서 벗어나고 싶으면서도 사실은 그 속으로 뛰어들기가 두려워지는 것이 바로 열여덟 우리의 세상에 대한 감정이 아니었을까.
아마 나도, 나의 친구들도 그랬던 것 같다.
여고에서 동성 커플이 많이 나타나는 것은 이러한 감정과 관계가 깊다. 여고에 커플이 많은 것은 흔히들 생각하듯이, ‘여자 아이들만 있어서 남자 같은 아이들이 인기를 얻게 되기 때문’이 아니다. 사실, 정말 중요한 이유는 비로소 이 시기에 남자들과 나눌 수 없는 세밀한 감수성의 영역이 생성되기 때문이다. 여자 아이들 간의 감수성의 연대가 시작되는 것이다.


 

교환일기는 그 연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행위이다.
우리는 교환일기를 통해서 나의 혼란과 감정을 끊임없이 친구들과 공유하고, 확인하고자 했고 그 안에는 남자 아이들은 오로지 ‘남자이기 때문에’ 이해하지 못할 우리만의 감수성과 고민이 솔직하게 담기곤 했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교환일기를 통해 더욱 친해질 수 있었다.
‘같은 여자이기에’ 보다 편하게 나눌 수 있는 감수성과 이야기들이 있기에, 여고에서의 커플 친구는 이상적 남자 친구를 대체하기 위한 대상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하지만 열여덟이 영원할 수는 없었다.

세상을 따라 그때까지의 순수한 감수성과 연대에서 벗어나기를 끊임없이 요구받으면서 우리는 다시 한 번 갈등해야 했다. 세상에 길들여지기 위해, 세상이 금기하고 거부하는 현재의 내 감정, 내 삶과 단절할 것인가 그대로 버텨서 세상과 부딪히며 살아볼 것인가.

아무도 없다. 아무도 있다. 그러나 없다. 아닌가 있나?
없는 것 같아. 아니야 있어. 없다고 했지?
그것은 진실. 진실은 있다. 있다는 거짓. 거짓은 있다. 있다는 진실.
아무도 몰라. 아무도 없어. 그래서 몰라. 아무도 있어. 그래도 몰라.
정답은 있다. 아니다 없다.
있다는 진실. 없다는 진실. 없다는 거짓. 있다는 거짓. 진실은 거짓.
거짓은 진실.
나는야 몰라. 아무도 나야. 나는야 아무다.
누구도 나도 나는야 누구도 될 수 있다.
진실이 거짓이 되듯...


효신의 시는 열여덟의 갈등을 대변해 주고 있다.
그리고 결국, 진실이 거짓이 되고 나는야 누구도 될 수 있는 세상임을 애써 가리면서 세상에서 규정한 진실과 거짓의 잣대에 맞추어, 세상에서 주어지는 자신에 대한 호명에 따라 길들여져 살아가기를 강요하는 어른들의 논리를 거부한 효신은 결국 죽음을 택했다.
하지만 시은은 갈등했고, 그래서 효신과의 관계를 단절하려 했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처럼. 시은은 함께 빠져들어 가던 물 속에서 둘의 다리를 묶고 있던 끝을 풀고 혼자 물 위로 올라온 것이다.
효신이 모든 아이들을 학교에 가두고, 시은에게 끊임없이 죄책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열여덟에 주어진 갈등의 상황에서 세상에 길들여지기를 택한 친구들에 대한 원망일지도 모른다.
따라서 나도, 영화를 보면서 같은 죄책감에 빠졌었다.
영화를 보면서 응어리졌던 그것의 실체가 바로 그 죄책감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이 영화가 ‘여고’‘괴담’일 수 있는 진짜 이유라고 나는 생각한다.

성장의 발걸음.

효신과 시은의 다정하던 한 때. 옥상위에서 맨발로 뛰어다니며 둘만의 교감을 나누던 두 아이의 모습 위로 한 발짝씩, 조심스럽게 다가오는 듯한 피아노 멜로디가 흘러나온다.
지는 햇살, 초록색 지붕, 아무렇게나 입은 교복과 행복한 웃음.
마냥 평화롭고 행복해 보이는 아이들의 모습에 반해 그들이 행복한 한 때를 보내고 있는 공간인 지붕 위는 너무나도 아슬아슬해 보이듯, 음악은 평온하지만 왠지 슬픈 듯, 불안하다.
그래서 이 장면과 음악은 그들과 같은 열여덟, 여고에서의 한 시기를 보낸 우리에게 그 때의 순수한 감수성과 거친 혼란을 잊지 말라는 듯 오랫동안 마음의 울림을 전달하고 있는 것만 같다.


 

시은아, 드디어 새날이 밝았구나. 어때, 기분이? 널 만나기 위해 걸었던 그 길이 얼마나 행복했는지 아니? 새해 첫날에 내 얼굴도 보고 영화도 보고 손잡고 말야 헤헤... 눈이 왔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말야.. 넌 어땠니? 난 감동 그 자체였다... 밤공기가 차가웠지만... 그리고는 하루가 얼마나 길고 덧없는지를 느끼지 않아도 좋은 그 다음 날이 왔고 그날은 오래 잊혀지지 않았다. 붉은 잎, 붉은 잎 하늘에 떠가는 모든 붉은 잎들의 모든 흐름이 나와 더불어 움직여가고 또 갑자기 멈춘다. 여기 이 구름들과 끝이없는 넓은 강물들... 어떤 섬세하고 불타는 삶을 나는 가지려고 했었다. 그리고 그것을 가졌었다, 그렇다. 다만 그것들이 얼마나 하찮았던가... 여기 붉은 잎 붉은 잎들 허공에 떠가는 더 많은 붉은잎들 바람은지고 물도 맑은날에 나의 외로움이 구름들을 끌어당기는 곳. 그것들은 멀리 있다.. 더 멀리에.. 그리고 때로는 것잡을 수 없는 흐름이 그것들을 겨울하늘 위에 소용돌이치게 하고 순식간에 차가운 얼음 위로 끌어내린다. 겨울 숲에서 노려보는 여우의 눈처럼 잎뒤에 숨은 붉은 열매들처럼 나를 응시하는 것이 있다 내 삶을 지켜보는 것이 있다... 서서히 얼어붙은 수면에 시선을 박은 채 돌틈에 숨어 내다보는 물고기의 눈처럼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건방진 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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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본색>의 ‘奔向未來日子’ . 인생의 참뜻은 아무도 몰라.

80년대 후반의 한 때, 골목길 어귀마다 교실마다 학교마다에는 온통 성냥개비를 잘근 잘근 씹다가 콧구멍으로 집어넣는 요상하고도 우스운 묘기를 연습하는 남자 아이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묘기도 묘기였지만 의리를 위해 총을 40발이나 맞으면서 쓰러져가는 주윤발의 모습과 “강호의 의리는 땅에 떨어졌지만 영웅은 살아있다”던 그의 한 마디는 온몸에 닭살을 솟아오르게 함과 동시에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찌릿한 전율을 흐르게 하는, 그 얼마나 대단한 것이었던가! 우리는 모두 그 ‘영웅의 세계’에 몸 둘 바를 모르고 빠져들었던 것 이었다!
그 뿐인가! 영웅은 또 다시 나타났으니, 총 40발 맞고 죽으면서 ‘의리’를 보여주었던 형 친구를 보았던 동생은 겁도 없이 혼자 범인들의 아파트에 잠입했다가 그 의리를 본받아 역시 총을 맞고 쓰러져 가며 갓 출산을 한 아내와의 애절한 통화 끝에 공중전화 박스에서 안타깝게 쓰러지니 이 어찌 또 한 번 애절하지 않았겠는가!
아! 역시 영웅은 의리에 죽고 의리에 살 뿐만 아니라 아내에 대한 사랑도 저렇게 애틋하다!


물론 <영웅본색>은 ‘의리’를 폭력과 짝짓고, 그것을 ‘남자들의 상징’이자 ‘전유물’이며 심지어 ‘남자의 존재 이유’로 만든 대표적 영화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대에 <영웅본색>을 보았던 우리 대부분은 남녀를 불문하고 이 영화에 대한 왠지 모를 애틋한 감정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아마도 그 이유는 그 시대에 <영웅본색>이, 10대들에게는 주윤발, 장국영, 유덕화로 대표되던 여타의 홍콩 영화들과 함께 ‘화려한 홍콩’을 대표하는 하나의 문화적 코드였으며, 혼란과 격변의 거리에서 최루탄에 눈물 흘리던 한국의 20대 젊은이들에게는 ‘의리’와 거침없는 청춘을 상징하는 무엇이었기 때문이리라.



2003년의 오늘, <영웅본색>을 새삼 추억하게 되는 것은 ‘홍콩 정통 느와르의 부활’이라는 <무간도> 시리즈가 우리 앞에 나타났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나는 지금, 악의 무리로부터 세계를 구원하겠다며 당치도 않은 영웅을 자처한 이들이 벌인 무자비한 전쟁과 그 앞에서 ‘의리’를 가장한 비굴이 판을 치고 있는 오늘날의 상황을 보며 그들의 순수한 ‘의리’가 차라리 그리워지기 때문이다.

奔向未來日子
(장국영, 당신을 가슴 깊이 추모합니다.)

無謂問我今天的事
無謂去知 不要問意義
有意義 無意義 怎嚰定判
不想 不記 不知

*無謂問我一生的事
誰願意講失落往事
有情 無情 不要問我
不理會 不追悔 不解釋意思
無淚無言
心中鮮血傾出不願ni知
一心一意奔向那未來日子
我以後陪ni尋覓好故事

無謂問我傷心的事
無謂去想 不再是往時
有時 有陣時 不得已
中間經過不會知 不會知


오늘의 일을 묻지 말아요
알려고도 하지 마세요
인생의 참뜻은 아무도 몰라
기쁨도 슬픔도 죽음도

내 인생을 묻지 말아요
돌아올 수 없는 강물이에요
사랑도 미움도 묻지 말아요
후회도 미련도 지나간 추억
한마음으로 미래를 향해
행복의 나래를 펼쳐요
슬픔을 묻지 마세요
모든 것 잡을 수 없어
연기처럼 아무도 몰라요

오늘의 일을 묻지 말아요
알려고도 하지마세요
인생의 참뜻은 아무도 몰라
기쁨도 슬픔도 죽음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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