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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6/10/25
    '평택지킴이'들의 겨울나기를 지원하는 모금운동
    꿈꾸는나비
  2. 2006/10/23
    ‘이남이’에서 ‘하나코’가 된 ‘훈’ 할머니(1)
    꿈꾸는나비
  3. 2006/10/11
    친구와 함께(1)
    꿈꾸는나비
  4. 2006/10/06
    [10월 4일] 평택 수요선전전
    꿈꾸는나비
  5. 2006/10/04
    서문시장에서 웃다
    꿈꾸는나비

'평택지킴이'들의 겨울나기를 지원하는 모금운동

평택을 지키는 또하나의 투쟁
'평택지킴이'들의 겨울나기를 지원하는 모금운동


모금운동 계좌
대구은행 254-13-094101 (박기홍)
국민은행 962701-01-223536 (박기홍)
농협 150103-52-009393 (박기홍)

 


전국에 계신 나락한알 카페 식구 여러분,

그리고 땅과자유 대구모임 동지 여러분!

 

평택 대추리와 도두리, 땅과 평화를 지키기 위한

주민들과 평택 지킴이들의 평화적 저항운동이

힘겨운 상황 속에서도 의연하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평택 미군기지 이전/확장을 저지하고

미군기지 재배치 전면 재협상을 이루어 내기 위한

전국 방방곡곡 양심적 시민들의 투쟁 또한 끈질기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지난 9월 24일 평화대행진에 적극 참여했던

땅과자유 대구모임은

매주 수요일 평택의 상황을 더 많은 시민들에게 알리고

투쟁의 불씨를 이어가기 위한 노력을

대구지역에서, 미약한 힘이나마 계속하고 있습니다.

 

비록 당장에 큰 투쟁을 우리 스스로 조직하지는 못하더라도

평택의 주민들과 현지에서 함께 투쟁하는 지킴이들과 마음과 뜻을 함께하고

투쟁의 불씨를 꺼뜨리지 않기 위해 기도하고

작은 실천으로라도 끈기있게 연대하는 것이

지금 시기, 우리 모두의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취지에서, 우리들 연대 투쟁의 일환으로서

땅과자유 대구모임 및 나락한알 카페 식구 가운데

평택 지킴이로서 현지를 지키고 있는 동지들의

겨울나기를 지원하기 위해 투쟁기금 및 물품을 모아 보내려고 합니다.

 

11월 말까지, 한시적으로 진행할 모금운동을 위해

별도의 은행계좌를 마련했습니다.

11월 한달 동안, 적극적으로 여기에 참여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대구은행 254-13-094101 (박기홍)

국민은행 962701-01-223536(박기홍)

농협 150103-52-009393(박기홍)

 

그리고 현지의 지킴이들과 연락해서, 긴요한 물품의 목록을 확인하겠습니다.

확인되는 대로 공지할 터이니, 모금과 함께 물품의 후원도 부탁드리겠습니다.

 

저희의 바람은, 이 작은 우리의 실천이

아래로부터의 상호부조와 연대의 잔잔한 파문을 일으켜,

비록 큰 투쟁, 거창한 운동은 아니더라도

운동의 현장을 지키는 우리 동지들을 실질적으로 지원하는

또하나의 뜻깊은 운동, 우정의 운동으로 확장되어 나가는 것입니다.

 

부디 우리 평택 지킴이 동지들이

고립감과 외로움, 그리고 현실적인 여러 악조건을 이겨내고

주민들과 함께 평화와 생명의 터전인 평택땅을 앞으로도 의연하게 지킬 수 있도록

마음과 정성을 모아주십시오.

 

다시한번 관심과 참여를 간곡히 호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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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남이’에서 ‘하나코’가 된 ‘훈’ 할머니

‘이남이’에서 ‘하나코’가 된 ‘훈’ 할머니

 

「일본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한번도 소리질러보지 못한 훈 할머니, 켜켜이 쌓인 분노를. 침묵을 강요한 세상에, 언제까지든 숨어있기를 바라던 세상에 말한다. 그들이 끌고 가 꽁꽁 감추어두었던 어쩌면 그대로 영원히 사라져 주기를 바랐을 ‘나’, ‘지금 여기 있다’고.」(본문 인용)


2005년은 해방 60주년, 그러나 올해 들어서 벌써 네 분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일본의 진심어린 사죄의 말 한마디 못 듣고 생애를 마감하셨습니다. 눈을 감는 그날까지 일본의 작태는 묵묵부답으로 생존자 할머니들이 빨리 생을 마감하기를 바라면서, 불난 집에 부채질하듯이 망언을 일삼고 있었습니다. 대구 상인동에 거주하시던 김분선 할머니께서 2005년 1월 10일 눈을 감으셨습니다. <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 시민모임>에서 활동하면서 제일 먼저 저를 반겨주시던 김분선 할머니를 떠나보내야 했습니다. 비통한 마음은 아직도 제 가슴 한 구석에 남아있습니다. 항상 저의 손을 꽉 잡고는 놓아주지 않던 할머니의 따뜻한 손이 자꾸 생각납니다. 해방 60주년이라. 그래서 기쁘신가요. 저는 자꾸 슬퍼집니다. 저의 슬픔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항상 그랬지, 냄비처럼 끓었다 식었지 않았던가 하지만 작년 이맘때쯤이죠. ‘이승연사건’을 물어본다면 어렴풋이 기억하시거나 아님 모를 수도 있으시겠죠. 또 지난 해 9월에는 서울대 경제학부 이영훈 교수가 TV에서 정신대가 조선총독부의 강제동원이 아니라 한국인의 자발적인 참여로 이뤄진 상업적 공창이었다는 요지의 망언은 기억하시겠죠. 모를 수도 있죠. 당장 내 발등에 떨어진 졸업과 취업이 더 중요하니까요. 하지만 감히 제가 부탁을 드리지요. 이건 아니지 않습니까. 잊지 마시고, 당신들이 생을 마감할 때까지 기억해주세요. 할머니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우째. 니들은 가만히 있노!” 잘 기억해보세요. 97년 6월 13일 캄보디아 신문 ‘프놈펜 포스트’에 놀란 만한 기사가 하나 실렸습니다. 1943년 일제에 의해 캄보디아에 위안부로 끌려간 한국 여성이 수도 프놈펜 북쪽 교외의 한 마을에 생존해 있다는 놀라운 소식이었습니다. 한국일보가 다음날 이를 특종으로 보도했고 나라 전체에 알려졌습니다. 바로 훈 할머니의 이야기입니다. 이제야 기억하시겠죠.

 

하나코가 되어야 했던, 훈 할머니가 되어야 했던 이남이
올해가 훈 할머니가 돌아가신지 4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훈 할머니가 한국을 찾을 때처럼 언론의 관심은 없지만 <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 시민모임>에서는 희미해져가는 기억과 자료를 모아 「버려진 조선의 처녀들」(아름다운 사람들)을 작년에 펴냈습니다.
할머니의 어릴 적 이름은 이남이입니다. 달거리도 시작하기 전인 열여섯 나이로 강제로 끌려간 곳은 싱가포르. 그곳에서 붙여진 이름이 하나코였습니다. 이남이라는 이름은 버려진 채로 오직 하나코로만 불려졌습니다. 캄보디아 프놈펜으로 옮겨지면서 하나코에서 다시 훈 할머니로 살아야만 했습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자기가 누구인가를 말하지 않아야 했습니다. 아무도 불러주지 않는 이름 이남이. 그렇게 이남이는 지워져갔습니다.

 

까만 뿔테의 두꺼운 안경, 짧은 머리, 훈 할머니를 만났습니다. 책으로였습니다. 이미 할머니를 놓쳐 버린 후였습니다. 무거운 마음으로 다가서면서 오히려 저의 그런 마음 때문인지 할머니의 마음만 더 불편하게 만들어 놓은 것 같습니다. 그저 외할머니한테 했던 것처럼 어리광도 부리고, 수다도 떨고 그렇게 다가가야 했었는데. “할머니 죄송해요” 다시 만난다면 그렇게 할게요.
책 표지의 할머니 얼굴을 다시 봤더니 보살님 얼굴입니다. 미간 위의 돋아난 점이 부처님의 그것과 꼭 닮았습니다. 당신께서 스쳐간 곳, 당신에게 눈물과 상처만을 안겨준 한국, 일본, 타이완, 싱가포르, 사이공, 캄보디아. 슬픈 아시아, 그 아픈 역사를 온몸으로 받아 안아 힘없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 그러나 당신께서는 오히려 우리의 상처를 보듬어 주듯 따뜻한 손을 내밀고 있습니다.

 

‘나’, 지금 여기 있다
매주 수요일이면 일본대사관 앞에서 수요시위가 있습니다. 시작한지 14년이라는 세월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2월 23일로 645회째를 맞이하였습니다. 기록을 갱신하기 위해서도, 기네스북에 오르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일본 정부는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는 부인을 하고, 한국 정부는 침묵하고 있습니다. 거동이 불편하신 고령인 할머들께서는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수요일이면 일본대사관으로 향합니다.

현재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 등록된 할머니들이 215명입니다. 일제강점하 강제로 끌려갔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기억한다면 등록된 피해자는 빙산의 일각일 뿐입니다. 전쟁터에서 또는 병으로, 무관심으로 생을 마감했던 분들이 훨씬 많습니다. 지금까지 89명이 돌아가셨습니다. 현재 생존 할머니들은 126명입니다. 이 숫자는 생의 마감을 기다리는 번호표가 아닙니다. 결코 착각하지 마세요. 여러분의 가슴 한 켠에 훈 할머니가 남아 있길 바랍니다.

 

대구대 신문 2005. 3. 2(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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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와 함께

추석 연휴 기간에 친구와 함께 팔공산을 올랐다. 대구와서 동갑내기 친구를 사귄 건 처음인데, 산을 좋아한다는 것에 마음이 맞아 첫 산행으로 팔공산을 잡고 몇 주 전부터 준비를 했다. 1박 2일 코스로 비박을 하기로 했다. 민간인 신분이 아닌 군바리 때 혹한기 말고는 비박이 처음이라 걱정 반 기대 반이었다.

 

파계사에서 시작하여 파계재를 지나 헬기장에서 잠을 잘까 한참을 둘이서 고민하다 조금만 더 가보자는 결론을 내리고 갔는데, 얼마 못 가서 어둑해주지는 바람에 적당한 곳에 자리를 폈다. 라면에 소주에 한잔 걸치고는 이런저런 이야기가 술술 나왔다. 이렇게 비박하며 한 잔하는 맛 정말 괜찮은 것 같았다. 헬기장에서 잤다면 야경과 별을 보며 더 좋았을텐데, 아쉬웠다.

 

몇 잔이 오고가며 말도 트고, 다음 산행 약속도 잡았다. 모난 성격에 죽마고우 빼고는 다시는 친구를 못 사귀줄 알았는데 이렇게 만날 수 있는 친구가 있으니, 그럭저럭 살만 한 것 같다.

 

이른 아침에 일어나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짐을 꾸렸다. 갈증으로 원래 가고자 했던 곳까지 마실 물을 확보해서 갈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마당재를 지나 서봉에서 라면에 맥주를 곁들여, 국물은 밥을 살짝 삶아서 아침을 해결했다. 알콜 파워 덕분에 동봉까지 가뿐히 올랐다. 원래는 신령재를 지나 갓바위까지 산행하려고 했으나, 그냥 신령재에서 내려왔다.

 

다 내려와 버스 타고 늦은 점심을 해결하기 위해 음식점에서 또 맥주를 까고 말았다. 술로 시작해 술로 끝나는 산행이었는데 낮인데도 취하기 보다는 말똥말똥 했다. 이런 기분 간만에 느꼈다.

 

  팔공산, 동봉을 얼마 안 남겨두고 내려다보니 대구가 손바닥하게 보였다.




  내 친구다.

 산행에 맞춰 티셔츠를 선물해준 재홍이형 고맙소~ 옷이 때깔난다^^

 내려오면 찍었는데 '구절초' 인 것 같은디^^;;

 쑥부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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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4일] 평택 수요선전전

평택 미군기지 확장저지 수요선전전 [10. 4]

 

일시: 2006년 10월 04일(수) 오후 6~ 7시 30분

 

장소: 동대구역 앞

 

 

9명의 땅과자유 회원들이 참가하여 평택 미군기지 확장저지 수요선전전을 진행하였습니다.

시내에서 진행하던 선전전을 추석을 맞아 동대구역에서 귀성객 대상으로 촛불을 들고 노래를 부르며 시작하였습니다. 사진 전시와 더 많은 유인물을 나눠주기 위해 발에 불이 나도록 뛰어 다녔습니다.

멀리 영양에서 오셔서 멋진 목소리로 노래도 불러 주셨고, 고향으로 가는 길에 들러 왕송편을 전해준 회원들도 있었습니다.  

 

다음 주도 변함 없이 수요선전전은 진행됩니다.

장소는 공지하도록 하겠습니다.

 

   동대구역에서 '평택 미군기지 확장저지'의 목소리를 외쳤습니다.


   선물 보따리로 가득 찬 귀성객의 양손에 유인물 나눠주는 게 쉽지 않았지만,

      한숨 고르며 열심히 배포했습니다.


   한숨 고르고 출구 앞에서 열심히 나눠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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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시장에서 웃다

서문시장에서 웃다

 

2년 가까이 일하던 사무실에서 그리 멀리 않은 곳에 있던 서문시장을 개인적인 일로 찾은 적은 없었다. 배낭 매듭이 터진 채 2년 동안 제대로 사용도 못하고 놔둔 것을 1박 2일이 산행 약속이 잡히고서야 발걸음을 뗄 수 있었다. 가방 수선 집이 있다는 정도의 귀동냥으로, 대목장으로 인산인해일 텐데도 이런 사정은 개의치 않고 그저 내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서문시장으로 갔다. 발품을 많이 팔아야 할 줄 알았지만 쉽게 가방 수선집을 찾았다. 조금만 기다리면 된다고 했다. 일단 맡겨 놓고는 사람 구경할 요량으로 시장 안으로 들어갔다.

 

생각만치 붐비지는 않았다. 건어물전에는 활기가 넘쳐났다. 선물 세트가 진열되어 있는 곳도 마찬가지였다. 칼국수, 수제비로 요기를 하는 사람들도 보였다. 시장에 오면 알 수 없는 힘이 생긴다. 가끔은 시장에 가고 싶을 때가 있다. 돈을 들고 뭘 사러가기 보다는 살아있다는 것을 보고 싶어서. 뚜렷한 목적 없이 마냥 걸으며 보고 있으니 이 시간에 이렇게 시간을 보내도 되나 일중독 비슷한 걱정이 밀려왔다. 그것도 잠시 지금의 기분을 만끽하고 싶었다. 오후 햇살 받으며 분잡한 시장을 걷는 이 기분, 정말 오랜만이었다. 잠시지만 내가 지금 행복하구나라고 느껴졌다.

 

엄마가 시장가는 날이면 기다렸다가 같이 가겠다고 생떼를 부리면서 함께 가면 엄마랑 같이 걷는 시장은 아주 풍족했다. 엄마랑 쪼그려 앉아 떡을 사먹거나, 보리밥집에 가서 집에서 먹는 반찬과 별반 다르지 않는 반찬에 아주 맛있게 먹었다. 그럼 엄마는 누가 보면 집에서 굶긴 줄 알겠다며 혀를 끌끌 찼다. 보리밥 주인 할머니께서는 어린애가 보리밥이 입맛에 맞지 않을 텐데 잘 먹네 라며 웃으셨다. 이런 기억들이 남아 있어서인지 백화점보다는 시장이 좋다. 화려한 불빛 아래 가격표 보기가 무서울 품목이 진열된 백화점에 가면 나의 허름한 옷의 터진 소매와 옷깃에 낀 때가 들통 날까봐 불안한 게 사실이다. 홈플러스나 이마트도 매한가지다. 시장은 전혀 그런 걱정 없이 낮술에 불콰한 얼굴로도 걷을 수도 있다.

 

포목점을 지나면서는 겨울용 이불이 없다는 사실이 막 떠올라 주춤거리며 이것저것을 보았다. 일 마치면 술 마시기 바쁘고, 주말은 그저 늘어지게 잠잘 뿐, 그 생활의 반복. 맹탕한 나를 스스로가 좀 더 챙긴다면 이번 겨울에는 따뜻하게 이불을 덮고 잘 수 있을 것이다. 서문시장에서 내가 좀 사람답게 살아야할 건더기를 만들었다. 조금 전에 지나친 양말 세트가 진열된 곳을 다시 찾았다. 항상 빚만 진 것 같았던 2년 가까이 일했던 사무실을 지척에 두고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더구나 추석 아닌가. 사람 구실하기 위해 양말 세트를 10개 샀다. 예쁜 것으로 고르기 위해 망설이기도 했다. 내내 인사 제대로 못 드리고 나와 할머니께, 사무국 일꾼한테 마음이 쓰였는데 차차 갚을 요량으로 더디지만 제대로 하자.

 

단단히 꿰맨 빈 배낭을 메고는 양말을 담은 봉지를 들고 사무실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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