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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6/09/28
    평택 미군기지 확장저지 대구 수요선전전
    꿈꾸는나비
  2. 2006/09/20
    탕수육
    꿈꾸는나비
  3. 2006/09/14
    ‘한미 FTA를 우려하는 <녹색평론> 전국독자모임’ 성명서
    꿈꾸는나비
  4. 2006/09/08
    모난 돌이라 생각하며(1)
    꿈꾸는나비

평택 미군기지 확장저지 대구 수요선전전

평택 미군기지 확장저지 대구 수요선전전

 

일시: 2006년 09월 27일(수) 오후 7~ 8시

장소: 2.28공원 입구

 

9.24 평택 4차 평화대행진의 기운을 이어 받아서 힘차게 수요 선전전을 진행하였습니다.

6명의 땅과자유 동지들이 모여 300장 정도의 '사람이 살고 있다' 신문을 건네주며, 평택 대추리 도두리의 야만적인 마을파괴를 강행하고 있는 국방부와 청와대의 부당성을 알려내기 위해 뛰어 다녔습니다.

신문 배포 후 손수 만든 피켓을 흔들며, 기타 반주에 맞춰 함께 노래를 불렀습니다.

- 생존의 적, 평화의 적 미군기지 몰아내자! 
- 평택 미군기지 확장 전면재협상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고는 '땅의 사람들' 부르며 수요선전을 마쳤습니다.

 

어둠속에 빛나는 수 많은 별처럼
억눌리고 밟혀도 흔들리지 말자
오늘밤이 길다해도 끝내 싸워 이길 때까지
땅을 딛고 서야 한다 땅의 사람들

 

헐벗고 굶주린채 버림 받아도
우리들 가슴속엔  뜨거운 피 넘쳐 
온 몸으로 부딪혀서 우리 세상 만들때까지
땅을 딛고 서야 한다 땅의 사람들
땅을 딛고 서야 한다 땅의 사람들

                                                

                                               -땅의 사람들

 

*사진 전시를 진행하려고 했으나 갑작스레 부득이한 일이 생겨 1시간을 줄여 진행하였습니다. 다음 주는 추석연휴 기간이라서 참여가 저조하겠지만, 일단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동대구역이나 대구역으로 장소 변경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부정기적으로 진행하다가 수요일만은 제대로 하자는 약속으로 8월 23일부터 진행하고 있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9. 27  공원 입구에서 노래와 구호로 평택 미군기지 확장의 부당성을 외쳤습니다.


-9.20 폭력 정권의 치부를 보이고만 평택 현재 사진을 전시하며 선전전 진행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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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수육

탕수육

 

에어컨도 없는 칠곡 끄트머리 사무실을 들락날락 한지도 두 달이 되었다. 너무 더워 도망치고 싶을 때가 한 두 번도 아니었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이 선선한 바람이 불어온다. 시끄럽지 않고 공기가 좋다는 것 빼고는 사무실 조건으로 별로다. 끼니를 때워야 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1인분은 배달이 잘 안되니, 자장면 아니면 짬봉이다. 외근을 보고 온 선배랑 스페샬 메뉴로 자장면과 탕수육을 시켰다. 항상 그렇지만 느긋하게 먹기보다는 허겁지겁 허기진 배를 채우기 바쁘다. 빨리 먹지 말아야지 하며 먹는데도 그게 잘 안 된다. 어찌 오늘은 조금 느릿하게 먹었다. 그래도 중국집 탕수육은 나름대로의 맛이 있는데 이 집 음식은 그렇지 못한 것 같았다.

 

스무 살 시작을 탕수육으로 했던 그 맛과 똑같았다. 대학 시험을 보기 좋게 떨어지고 난 그 해 겨울은 정말 추웠다. 겨울은 매양 춥기는 마찬가지지만. 갈비집 망하고 몇 년을 쉬다가 엄마는 뭔가를 하기 위해 부산 이모 집에 있었다. 이종사촌 형과 경남여고 근처 시장에 점포를 얻어 천 원짜리 탕수육을 팔았다. 엄마는 그걸 배워 고향에서 장사를 하려고 했다. 엄마는 형한테서 일 배워 돈 벌어서 대학가라고 했다. 시집 몇 권을 챙겨 들고 부산을 찾았다. 옷에는 항상 느끼한 기름 냄새가 묻어 있었다. 손바닥만 한 점포에 이종사촌형, 엄마, 나. 3명이서 겨울을 견디기 위해 밥을 먹었고 난 눈치껏 책보는 것이 유일한 낙처럼 지나간 시간이 있었다.

 

천 원짜리 탕수육 맛이 학교 앞 주전부리용이지만, 반짝 장사로 그 해 돈 맛을 볼 수 있는 장사였던 것 같다. 천 원짜리도 배달하기 위해 50cc 오토바이를 타고 동네를 다녔다. 엄마랑 같이 배달 갔다가 도저히 들어갈 수 없어 엄마가 들어갔던 경남여고. 스티커 붙이려고 다니다 헬멧 안 썼다가 의경한테 걸려 벌금 물리 뻔 하다가 눈물 쪽 뺄 만큼 빌었던 적. 참 추웠다. 배짱이라도 있었으면 덜 추웠을 텐데.

 

짧은 봄이지만 봄이 왔다. 동가리 신작로에 천 원짜리 탕수육 점포를 마련했다. 내 고등학교 시절을 남의 식당 일을 하던 엄마가 드디어 장사를 했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식당 구정물 묻힌 사람이 식당 여는 게 숨통 트이는 삶일 것이다. 덩달아 설레었다. 하지만 그 설렘은 짧았다. 탕수육 팔던 분식집이 동네 어른들 술판으로 변해가면서 문을 닫았지만 요기로 탕수육을 솔찮이 먹었다. 문을 닫고 나서 난 한동안 맥주 안주로도 탕수육을 먹지 않았다. 하찮은 것들이 문득 너무도 또렷이 되살아나는 구질구질함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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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 FTA를 우려하는 <녹색평론> 전국독자모임’ 성명서

한미 FTA를 즉각 중단하라!

‘한미 FTA를 우려하는 <녹색평론> 전국독자모임’ 성명서

          


  한미 FTA라는 전대미문의 폭거가 그렇지 않아도 힘겹기만 한 이 나라 민중의 삶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다. 노무현 정부는 숱한 반대 여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독단적으로 한미 FTA라는 도박을 자행하고 있다. 지난 한 해만 하더라도 식량주권의 최후 보루인 쌀마저 개방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비준 동의를 강행하는가 하면, 경제성장이라는 미명 아래 그 동안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당해 온 농민과 노동자들을 죽음의 행렬로 내몰았던 이 나라 정부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그 어떤 보호 장치도 없이 소수의 수혜자들을 위한 한미 FTA를 추진함으로써 대다수 서민들의 삶을 송두리째 위협하고 있다. 이라크 파병, 부안 핵폐기장, 새만금 갯벌, 천성산 터널, 평택 미군기지 문제 등에서 보여주었던 노무현 정부의 반생태적이고 반민중적인 성격은 한미 FTA 강행으로 다시 한번 분명하게 입증되고 있다.

  자유무역협정이라는 그럴 듯한 이름으로 포장된 한미 FTA는, 실상에 있어서는 미국 주도의 일방적 경제통합에 다름없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이 땅 풀뿌리 민중들의 삶의 현장을 경제대국의 이윤추구 시장으로 전락시킬 것이 분명하다. NAFTA(북미자유무역협정) 이후 멕시코 민중들이 겪어야 했던 처참한 고통은 한미 FTA 체결 후 우리가 맞이하게 될 현실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이다. 극심한 양극화로 인해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농민, 노동자, 서민들의 삶은 한미 FTA로 인해 회복 불가능한 지경에 이를 것이다. 그럴 가능성도 높아 보이지 않지만, 설령 한미 FTA가 몇몇 산업 부문에서 이익을 가져온다 하더라도 그것은 대다수 풀뿌리 민중들의 생존을 담보로 한 위험한 도박의 결과일 뿐이며 극소수 수혜 계층에만 국한된 혜택일 뿐이다.

  지금 우리는 절체절명의 기로에 서 있다. 한미 FTA는 단순한 무역협정을 뛰어 넘어 사회, 문화, 제도, 관습의 영역까지 우리 사회의 근간을 뒤흔들 무서운 재앙이 될 것이다. 창간 이후 산업사회의 폭력과 생태위기에 맞서 우리 사회와 이웃의 삶을 걱정하고 고민해 온 <녹색평론>의 정신을 공유하는 ‘전국 녹색평론 독자’들은, 한미 FTA를 즉각 중단할 것을 촉구한다. 민심을 거역하고 오만과 독선으로 한미 FTA를 강행할 경우, 그에 따른 모든 책임은 전적으로 이 나라 정부에 있음을 엄중히 경고하며, 한미 FTA의 폭주를 멈추기 위한 투쟁에 연대할 것을 결의하는 바이다. 

 

 


2006년 9월 9일

한미 FTA를 우려하는 녹색평론 전국독자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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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난 돌이라 생각하며

모난 돌이라 생각하며


‘모난 돌’은 흔하게 사용되는 말이다. 그 단어가 요즘 내 주의에서 서성이고 있다. 마치 끙끙대며 말 못하고 좋아하는 사람 집 앞에서 서성거리듯이. 몇 날 며칠에 걸쳐 쌓여 있던 것을 토해내려고 쓰다 지우기를 반복하다가 스트레스가 극치를 이른 오늘 골방으로 가지고 와서 이렇게 풀어내려고 용을 쓰고 있다. 불평불만을 스스로한테 조근조근 이야기조차 못하는 것을 보며 틀림없이 모가 나도 엄청 나있는 것 같다.

 

지난주에 고향이라는 곳을 모자 꾹 눌러 쓰고 갔다 왔다. 밤늦게 도착해서 술친구이자 동지이자 뭐 그런 사이인 선생님을 보고 왔다. 이야기하지 못해서 병이라도 난 것처럼 밑도 끝도 없이 무게 잡으며 맥주 몇 잔에 풀어 놓았다. 여전히 나의 말을 차근히 듣고는 아기 달래듯 달래주었다. 어리광을 부리고 싶어 일 것이다. 여태껏 어리광 제대로 부리지 못한 것 같다. 코흘리개였을 때는 콩가루 집안이 그래도 살 만했는지 이래저래 투정도 부린 것으로 기억하지만, 반항으로 가득 차 있던 사춘기는 아니었다. 사춘기 때는 분명히 그랬다고 말할 수 있다. 상처 난 곳을 빨간 약 발라주며 괜찮다고 따뜻하게 대하는 엄마를 찾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골방에서 잠을 깰 때면 엄마라는 그 언저리가 희미하게 지나간다. 아침부터 우울해져 집을 나서기가 매일인 것 같다.

 

고향이라는 곳은 대낮에 고개 쳐들고 찾아 갈 수 없는 곳이라 했던가. 분명 그렇지 않는 놈들도 있을텐데. 도둑고양이처럼 찾아 갔다가 야한 비디오 틀어주는 여관에 잠시 눈을 붙이고는 허둥지둥 동네 아저씨라도 마주칠까 걱정이 앞선 채 고개 푹 숙이고 빠져나와야만 하는 그 곳. 언제쯤 그 짓을 그만 둘 수 있을까. 아이러니 하게도 그렇게 찾아간 날, 가방에 넣어 갔던 어쭙잖을 책을 해장을 하기 위해 선생님 기다리다 펼쳤다. 맑은 햇살 가득한 토요일, 하교 길의 여중학생을 보며 소주가 생각났다.

 

“고향은 피의 더러움과 성장기의 불우를 그때마다 확인시키던 ‘낙인’은 아니었던가.”

 

시발, 이번이 마지막이다. 다시는 이 지긋지긋한 곳을 안 올 것이라. 맹세하고 돌아서지만, 파도에 모래성이 사라지듯 다시 몰래 찾아오고 만다. 풀고 싶다. 근데 정말 풀리지 않는다.

꼬인 실타래처럼 꼬여만 간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받을수록 말을 잃어간다. 오히려 맞받아서 싸우고, 주사 부리듯 말을 더 해야 할터인데. 침묵으로 일관한다. 말을 잃어가고 말을 더듬는 것이 불안하다.

 

난 결코 그럴 수 없겠지만, 취직하고 열심히 싸이질로 뻔질나게 살고 있는 연락을 끊은 친구가 괜히 부럽기도 하며 심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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