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은하해방전선

  • 등록일
    2007/12/10 03:46
  • 수정일
    2007/12/10 03:46
"내가 뭘 어쨌다고?"라고 말하는 듯한 저 표정 구려 짜증나 진짜 멜로를 하고 싶으면, 은하의 이야기를 들으란 말이야.


무임승차한 좌파 새삼스럽게 색깔이나 방향논쟁을 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영화속의 영재가, 또는 윤성호감독이 좌파라는 관념을 즐기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스럽다. 좌파라는 관념에 무임승차하려는 노력이 이 영화에서 엿보이기 때문이다. 아주아주 짜증이 났다. 가끔씩 스크린쿼터에 대한 이야기도 던지고 FTA이야기도, 대선 이야기도 조금씩 끼워져 있지만, 어느것 하나 진지하게 공격하지 않고, 다만 그것은 허황된 듯한 느낌의 샷으로 말로만 다가올 뿐이다. 감독은 영화의 초반부에 "무임승차한 좌파"라는 말을 던져놓았다. 영재는 민주화투쟁을 겪지 않아서 무임승차한 좌파란다. 자신이 좌파인 것은 어느정도 구린 거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그리고 군대고참의 입에서 "민중은 안중에도 없냐"는 질타가 나오는 상황, 지하철에서 승객들이 악기로 연주하는 장면과 그것을 억압하는 한 남성이 오버랩된다. 이 장면은 두 가지를 동시에 보여주고 있는데, 하나는 (연주를 통해서 드러나는) 대중의 운동이 (남성의 폭력에 의해서) 억압되는 장면 그 자체이고, 다른 하나는 "민중은 안중에도 없냐"라고 말하던 군대고참이 그 순간에 폭력과 억압에 대해서 시선을 외면해버리는 장면이다. 나는 여기서 후자의 장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감독이 하고 싶은 말은 후자의 것에 있었다고 본다. 좌파들이 말하는 민중성에 대한 경배가, 그 도덕이 겨우 이것밖에 되지 않는다는 비아냥이다. 그 장면을 거친 후에 영재의 영화에는 민중성에 대한 고민이 완전히 빠져버려도 상관없게 되었다. 그런데 감독의 메세지는 그 뒤에 더 크게 다가온다. 영재가 실어증 때문에 병원에 갔을 때, 가족에 문제가 있는 분이 있냐고 하니까, "사촌에 조선일보 기자가 있다"라는 말을 쓴다. 관객은 웃는다. 하하하. 웃기려고 만든 설정이다. 조선일보가 문제라는 이야기를 우회적으로 한 센스. 그것에 관객은 웃고 말았다. 하지만, 관객이 여기서 웃은 것은 감독의 메세지에 말려든 셈이 되었다. 감독은 그 유머를 통해서 관객에게, "이 영화를 보는 당신 좌파지?" 이렇게 묻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이 영화에서 설정된 관객의 수준이다. 조선일보가 문제라는 이야기는 민주화투쟁 같은 거 거치지 않아도 할 수 있는 말이다. 하지만, 감독은 그보다 훨씬 이전에 무임승차한 좌파라는 말로 자신을 낮췄고, 조선일보에 대한 유머를 통해서 관객의 시선을 자신의 규정과 같은 것으로 몰고 간 셈이다. 이미 여기에, 많은 관객이 걸려들었다고 본다. 간단히 말해서, 이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에게, "당신도 구려"라고 말하고 있는 셈이다. 왜 구린지 아는가? 당신은 좌파니까. 다른 이유가 없다. 이 영화속에서 찾을 수 있는 좌파는 처음부터 스크린쿼터를 사수하는 것에 찬성하고, FTA를 반대하고, 이명박을 반대하고, 조선일보를 반대하는 입장을 가지면 되는, 그런 것이었다. 즉, 입장만 가지면 되기 때문에 무임승차가 되는 것이다. 우리모두 무임승차한 좌파가 되어서, 구린 걸 인정하자는 메세지. 좌파라는 말을 영화의 초반부터 굳이 꺼낸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것도 무임승차하지 않은 좌파는 이미 이 시대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민중에 대한 고민"은 자신을 좌파라고 규정하는 사람들에게는 늘상 있는 강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영재는, 윤성호감독은 지하철의 군대고참의 외면 장면 하나로 그것을 가볍게 부정해버렸다. 그리고 관객에게 유머로서 말하고 있다. "자 당신도 그런 강박 던져버려", "관념 뿐인 민중은 필요없다구". "중요한 건 조선일보가 문제라는 거야." 하지만, 조선일보가 왜 문제인지는 어디에도 진지하게 언급되지 않는다. 그냥 그것은 잘못된 매체고, 병원에서 굳이 관객을 웃기기 위해서 문제라고 적을 만큼의 '문제'일 뿐이다. 실어증과 피해의식 영재는 실어증에 걸린다. 자고 일어나니까, 실어증에 걸렸다는 설정이다. 실어증은 은하앞에서 말 많던 영재가 은하에게 차였다는 것과 동일한 맥락에 있다. 더 이상 은하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말할 수 없게 되었다는 의미다. 그리고 동시에 자신의 영화 시나리오도 영화 관계자들에 의해서 심하게 변형되며, 거기에 대해서 영재는 의견을 제시하기 어렵게 된다. 그리고, 끝내 그렇게 변행되어서 완성된 시나리오는 다른 사람에게 빼앗긴다. 영재는 억울하다. 시나리오를 빼앗긴 것도 억울하고, 은하에게 차인 것도 억울하다. 그런데, 영재는 시나리오를 빼앗긴 것에 대해서는 어떠한 반전도 꾀하지 못하면서, 은하에게만 다시 잘해보자는 식으로 대한다. 은하가 다른 감독보다도 더 만만하기 때문이다. 시나리오를 빼앗은 것은 다른 감독이지만, 그것을 되찾는 것은 빼앗긴 순간부터 아예 불가능하다. 이미 게임이 끝났고, 영화계에서 다른 소통의 여지는 없다. 하지만, 은하는 소통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게 영재의 생각이다. 그래서 마지막까지 다시 시작하자고 말하지만, 은하는 당연히 소통해주지 않는다. 이 설정은 영재의 머릿속에 왜곡된 피해의식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실어증을 통하여 영재의 피해의식은 크게 증폭된다. 아무것도 소통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실어증은 영재가 자의가 아닌 타자에 의해서 소통할 수 없는 존재가 된 것처럼 표현하기 위한 장치로 등장했다. 실어증을 통해서 영재는 은하와의 관계에 대한 책임을 지나쳐갔다. 영재가 영화작업을 통해서 뭔가 일이 꼬이고, 피해를 보지만, 그곳에서는 아무것도 스스로 되찾아오지 못한다. 시도조차 하지 못한다. 그리고 영재는 은하에게로 간다. 영재에게는 이 모든 일들이 특정한 기간에 동시에 일어나서, 영재의 위기를 낳고 있는 셈이지만, 영재의 대응 방법은 명확하다. 은하가 제일 만만하고, 그런 은하에게서 관계의 복원이 이루어지지 않게 되자, 이번에는 시나리오 상 다른 여성들을 영재에게 던져준다. 이번에 던져진 여성은 하룻밤의 섹스만으로 소통하는 여성이었고, 그 다음에 결정적으로 등장하는 여성은 말을 하지도 듣지도 못하는 여성이었다. 그것으로 영화는 끝이다. 마치 은하라서 문제였다는 식이 되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렇게까지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줄 필요가 없으니까. (특히 마지막의 장애인의 설정에 주목해야 한다. 어차피 말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영재는 해방감을 느낄 수 있는 게다.) 마치 은하에게 결정적인 한계가 있었던 것처럼. 모든 시점은 영재에게 맞추어져 있기 때문에, 은하는 무조건 외계인이 되어야 했다. 이렇게 해서 영재가 다른 사람의 말을 들어주지 않는 것이 연애관계에서 본질적인 문제가 아닌 게 된다. 그런데 은하는 그게 마치 본질적인 문제인 듯 영재에게 말하니 영재가 답답할 뿐이다. 은하는 영재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길 원했다. 이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영재의 시점에서만 기록이 되었기 때문에, 은하가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몇가지 정황을 근거로 추측할 수 있을 뿐. (섹스에 대한 피동적 표현에 대한 문제, 또 김밥과 샌드위치를 싸왔을 때, 오이때문에 먹지 않은 영재와의 갈등 등등) 은하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길 원하지만, 영재는 그것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관심이 없다. 다만 영재는 은하가 자신의 옆에 있길 바랄 뿐이다. 이 영화에서는 이런 중대한 갈등을 처음부터 끝까지 영재의 시점에서만 보여주고 있다. 이런 점에서 편파적이고 이기적이다. 그냥 영재는 말이 많아서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지 못하는 단점이 있는 사람이고, 은하는 그걸 감싸주지 못하는 외계인과도 같은 존재가 되어버리는 셈이다. 그런데, 영재와 은하의 연애관계에 대해서, 누가 더 진지하게 고민했을까? 당연히 은하다. 이것은 은하가 더 진지했을 때, 감독의 의도에 더 부합하는 셈이다. 섹스에 대한 영재의 피동적인 표현이 은하의 기분을 매우매우 상하게 했던 갈등. 그리고 은하가 영재의 촬영장에 음식을 준비해서 왔을 때, 영재가 절대로 먹지 않는 것에 대한 갈등. 이런 식의 영재와 은하 사이의 갈등은 영재가 문제라서 갈등이 시작된다. 바로 그렇게 설정되었다. 그리고 이 영화는 철저하게 영재의 시점으로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표현하는 의도는 간단하다. 영재에 대한 변명을 하는 것이 이 부분에 있어서의 목표라고 할 수 있다. 즉, 감독 자신의 변명이다. 지나간 연애관계에서 자기가 잘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관객들은 자신의 입장에서 이런 관계를 봐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은하를 외계로 밀어내는 한이 있더라도... 그래서 이 영화는 제목이 "은하해방전선"이지만, 은하의 생각과 은하의 고민 따위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은하는 영재의 모든 것으로 위장된 하나의 연애대상일 뿐. 영재는 비겁하다. 사실은 감독이 비겁하다. 자신의 피해의식에 대하여 관객으로부터 동정표따위나 얻고자 이런 영화를 만들다니. 쯧. 공통점의 후까시, 언어유희 영화와 연애의 공통점은 "응석"이란다. 도넛과 영화의 공통점은 "핵심을 떼야 잘 팔린다는 것"이란다. 이 영화에서는 이런 식으로 서로 다른 두가지의 단어의 공통분모를 찾으려는 노력이 있다. 물론 이것은 철저하게 영재의 대사를 통해서 나타난다. 참 재밌는 표현들이다. 무릎을 탁 치게 한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이런 연애작업용 멘트같은 표현들이 앞에서 논한 진지하지 않음과 비겁함을 강화한다. 영화와 연애의 공통점은 "응석"이라는 표현은 결국 감독의 연애관이 "응석"이라는 사실을 말하기 위한 것이었고, 도넛과 영화의 공통점은 "핵심을 떼야 잘 팔린다는 것"이라는 표현은 감독의 영화에 대한 생각이 "진지하지 않음"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표현이었다. 지금 감독은 관객에게 대놓고 "진지하지 않음"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관객들이 언어유희에 무릎을 치고 즐거워하는 것 그 자체를 중요하게 보고 있을 뿐이다. 그 유희의 의미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고민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영재는 다음의 말을 계속 이어간다. 영재가 말이 빠르고, 수사가 현란하다는 것은 이렇게 "진지하지 않음"에 직결되는 문제가 된다. 즉, 처음부터 영재의 결정적인 단점은 말이 빨라서 자기이야기만 하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언어유희를 즐기는 데에 열을 올리고, 진지한 생각들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심지어 은하가 영재와 다시 이야기하려고 메신저에서 만났을 때, 영재는 "연애는 발명"이라면서, 자신이 "사랑의 에디슨"이 되겠노라고 말한다. 그것으로 은하는 영재와의 대화를 끊어버린다. 영재의 언어유희 속에서 은하는 더 버틸 수 없는 상황에 내몰렸다. 그것이 연애의 끝으로 다가왔고, 또 전혀 진지하지 않은 영재는 은하가 무엇을 말하든지 "사랑의 에디슨"이 되겠다는 작업용멘트만을 날리고 있을 뿐이다. 부산영화제에서 단편이 상영된 후에 관객과의 대화 시간에 영재는 배우인 혁권에서 "소통"이라는 키워드를 던져준다. 혁권은 영재가 알려준대로 관객들의 질문에 "소통"만을 강조하면서 대답한다. 이 순간 모든 질문에 대한 공통의 대답은 "소통"이다. 동시에 "소통"이라는 말은 혁권의 대답을 통해, 이미 한번 유희의 대상으로 떠오르고 말았다. 그 다음에 다시 이야기하는 "소통"은 더이상 관객과의 대화 이전에 고민하던 "소통"과는 다른 것이 되고 말았다. 적어도 관객과의 대화 이전에는 "소통"이라는 것에 대한 고민의 영역이 많았을 것이, 그 후에는 "소통"이라는 말도 피상적인 것이 되었으니까. 그 후로는 더 이상 "소통"에 대한 고민이 있을 수가 없다. 즉, 영재에게는 "소통" 역시도 언어유희로 진지함을 해체할 수 있는 하나의 단어에 불과하다. 이런 영재에게 은하가 돌아오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영화의 끝에 "은성"이라는 장애여성을 등장시켜서, 은성과의 연애로 영화를 맺는다. 은성은 말을 하지도, 듣지도 못한다. 하지만, 노트북에 말을 쓸 수는 있어서 대화가 가능하다. 즉, 최소한의 의사소통은 할 수 있고, 많은 말을 할 수는 없다는 의미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영재는 은하에게 썼던 작업용멘트를 은성에게 똑같이 사용한다. "3천원이 있다면 3천원을 다 주겠다"로 시작하는 멘트. 결국 영재는 달라진 게 아무것도 없다. 은성과의 연애를 위해서 수화를 배웠지만, 수화로 결국 은하에게 했던 말과 같은 말을 하고 있을 뿐이다. 어쨌든 수화를 써야하니까, 말이 조금 느려졌을 뿐. 마지막의 공통된 작업용멘트는 영화 전체의 내용이 영재의 고민을 상승시키지 못하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즉, 감독의 고민은 여전히 같은 수준에서 머물러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독은 관객으로 하여금, 영재의 입장에 몰입하도록 요구한다. 그것은 곧 감독 자신에 대한 변명일 뿐이다. 비합리성에 대한 동정표 [은하해방전선]의 주제는 결국은 "비합리성에 대한 동정"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매우 모호한 듯한 생각들. 감독은 영재의 입을 통하여, 굳이 완벽한 결론을 내리지 못한 내용에 대하여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는 식의 속사포처럼 지나가는 말들을 늘어놓으면서 진리의 애매모호함을 느껴보라고 권유하고 있다. 그리고 좌파의 민중성에 대하여 관념적이라고 치부하며 반기를 들었다. 연애에서의 소통의 문제 역시 진지한 고민을 하지 않음으로서, 소통에 대해서도 반기를 들었다. 그것으로부터 출발한 이 영화는 영재가 영화계에서 소통이 되지 않는 상황을 보여주고, 극단적으로 실어증까지 설정하면서, 결국 영재가 꼬이게 된 원인을 영화계에서의 낮은 위치의 한계인 듯 표현하고 있다. 그 다음은 그런 영재의 고민은 완벽하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는 듯한 동정표가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마지막으로 적절한 언어유희에 대해 이미 웃음을 지은 관객들은, 영재의 진지한 고민의 부재에 대하여 한마디도 반격하지 못한다. 이제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 [은하해방전선]은 코미디 영화인가? 그냥 웃기면 끝인 영화인가? 웃기는 것 자체가 목표인 영화는 절대 아니다. 이 영화는 분명한 목적이 있는 영화다. 그 목적은 제목자체에서 드러냈듯이, 은하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 은하의 진지함에 대한 욕구가 영재를 그늘로 몰고 가는데, 그것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이 영화에서 감독의 목표다. 그리고 영재의 이와 같은 해방은 바로 관객을 향한 언어유희에서, 치밀하게 설정된 실어증에서 출발한다. 이 영화를 보면서 영재의 화려한 수사에 웃어버린 당신은 이미 영재를 은하로부터 해방시키는 데에 일조한 셈이다. 그리고 그것은 곧, "진지하지 않음"을 "진지함"으로부터 해방시키는 데에 일조한 셈이 되는 것이고, "비합리성"을 "합리성"으로부터 해방시키는 데에 일조한 셈이 되는 것이다. 영재가 관객에게 하고 있는 말들은 관객에게는 매우 편하게 들릴 것이다. 더이상 고민하지 않아도 되니까. 바로 그렇게 되는 순간 은하는 어디에도 없게 된다는 사실. 그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대중의 비합리성을 정당화하는 것. 우리는 그런 걸 파시즘이라고 불러오지 않았던가? 언어유희에 대한 관객들의 웃음이 무얼 의미하는가? 부산영화제에서 관객과의 대화 도중에 한 사람이 던진 "연애는 뭐라고 생각하고, 사랑은 뭐라고 생각하냐?"는 질문에, 그 관객을 끌어내버리는 것. 그것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하게 되던가? 적절히 "진지하지 않음"을 희망하는 대중의 욕구가 이 영화를 통해서 힘을 얻게 되는 것. 그게 이 사회에서 필요한 영화일까? 나는 그것이 의심스럽다. 결론 이 영화의 제목의 의미는 결국 "은하로부터 영재가 해방되는 전선"이라고 할 수 있다. "난 너와 대화를 한 적이 없어"라는 은하의 말에 "다 들어줄게"라고 하는 영재의 말은 어쩌면 국민들의 정치적 요구에 대해, 대통령후보가 선거때 "다 들어줄게"라고 형식적으로 말하는 것과 같다. 이 영화에서는 영재가 은하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봤지만, 사실 우리가 고민해야 했던 것은 은하가 영재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아니었을까? 나는 어제 이 영화를 보고난 후에, 그 자리에서 윤성호감독과 관객과의 대화가 있었더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진지하게 한마디 하고 싶었다. 당신 파시스트냐고... 그래서 결국 영화속에서 은하는 어디로 갔느냐고. 포스터에 있듯이 진짜 멜로를 하고 싶다면, 소통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했으면 좋겠다. 제발 진지해져라. 영재, 그리고 윤성호감독. 그리고 이 영화에 대하여 찬양 일색인 언론과 관객들도...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