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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로스 클라이버, 카라얀


" 기야(夔)야, 명하노니 음악을 관장하여 자제들을 가르치되, 곧으면서도 온화하고 관대하면서도 위엄 있어야 하느니라. 강직하되 포악하지 말고, 대범하되 거만하지 말라, 시는 뜻을 말로 표현한 것이고, 노래는 말을 읊조린 것이요. 소리는 읊조림에 의지하고 음률은 소리와 화하는 것이니, 여덟가지 소리가 화해를 이루어 질서를 잃지 않으면 귀신과 사람이 이로서 화합하리라.  

 

- 상서 . 요전 (堯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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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clipse, total,


Diamond Ring

 

 

 


 

Large Corona

 

 

 


 

Total Eclip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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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esco maiden holding flowers

"This damsel, like unto a fluttering tender bud, in fact became one who spoke with the buds and flower in her hand. It is therefore an untrue word that has been said; the ladies do not speak."

 

(187) Sigiriya Graffiti - Paranavithar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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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ease, don't...


 

◆ Shaftesbury

 

인간의 여러 심적 능력들 중에서 아름다움에 반응하는 특수한 미의 능력으로서 '취미(Taste)'가 있으며, 이는 도덕적 감관과 미의 감관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는 '내적 감관'이다. (inward eye, internal sensation) 곧, 내적 감관을 통해 윤리적, 도덕적 행위를 즉각적으로 알 수 있듯이, 아름다움 역시 개념적 추론이나 판단없이도 즉각적으로 우리에게 즐거움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미'에 대한 판정은 '도덕성'에 대한 판정과 깊은 연관을 맺는다.

 

※ 취미론자들에 있어서 사회와 윤리의 문제 (무관심성의 문제와 관련하여)

 

  자본주의의 발달은 모든 개인으로 하여금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개인적, 이기적 활동을 사회적으로 정당화시켜 주었다. 이제 모든 개인들은 어떠한 종교적, 신분적, 사회적 제약을 떠나서 자신의 능력에 따라 자신의 이익을 추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적 상황은 다른 한편으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라는 무정부적 혼란상태에 대한 불안을 예견케 하였다. (물론, 이러한 상황에 대한 거대한 낙관주의도 존재하였는데 그것이 고전 경제학이었다. 그들에 의하면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려고 행동하다보면 경제법칙이라는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서로의 이해관계가 자동적으로 조절될 것이라고 여겼다.) 곧,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서 노력한다면 그들의 이해관계의 충돌은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이 시기에 등장한 '사회 계약론'은 이러한 불안감에 대한 가설적 대안 중의 하나였다. 곧, 사회를 이루고 있는 개인들은 최초의 원시적 대결의 상태에서 자신들의 자유의 일부를 귀속시켜 '국가'와 법률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국가나 법률은 그 사회 구성원들이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위해서 자신들의 자유를 일부 헌납한 '공동의 이해관계를 위한' 권력으로서 정당화된다.
  취미론자들은 이와는 다른 방식으로 경쟁적 사회에 대한 조심스러운 낙관론을 펼친다. 샤프츠베리에 의하면 '모든 사람은 적어도 어느 정도 도덕적 가치들을 지각하고, 덕과 악덕을 구별할 수 있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조화와 부조화, 균형과 균형의 결핍의 차이들을 지각하는 능력과 유사한 하나의 능력으로서 양심 또는 도덕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마음의 눈은 "볼품없는 것과, 더러운 것, 싫은 것, 비열한 것과 아름답고 볼품있는 것, 호감을 주는 것과 칭찬할만한 것'을 구별하고 알아볼 수 있다. 이러한 구별들은 자연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이러한 마음의 눈과 내적 감관은 모든 인간에게 내재해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아무리 사악한 사람이라도 적어도 칭찬받을 만한 행위와 벌을 받을만한 행위를 구별할 수 있는 도덕감을 갖는다. 모두에게 있어 근원적인 도덕감은 나쁜 습관, 잘못된 종교적 관념들을 통해 흐려지거나 곡해될 수도 있다." 이러한 도덕감이나 도덕적 능력들은 개념이나 관습에 의해 만들어지거나 주입되는 것이 아니라 '본유적'인 것이며, 이러한 본유적 능력은 우리가 대상에 대해 '무관심적으로' - 이기적 이해관계를 떠난 상태에서 - 대할 때 발휘될 수 있는 것이다. 아름다운 대상에 대해 반응하는 능력인 '취미'역시 이와 같이 대상에 대해 '무관심적'으로 관계할 때 발휘되는 것이다.
  
 ⇒ 이로부터 도덕적 심성과 취미가 연관되어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곧, '아름다움'에 대한 판단은 '유용한 것'에 대한 판단과는 구별되지만, '선한 것'의 판단과는 뒤섞여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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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Human Zoo

Desmond Morris


Clearly, then, the city is not a concrete jungle, it is a human z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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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에 관하여

개성은 한 사람의 독특성입니다. 독특성은 뛰어남과 다릅니다. 노래 잘 하고 공부 잘 하는 것이 개성은 아닙니다. 노래를 잘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사람만의 독특한 스타일, 심지어 그 사람 식으로 언제나 틀리는 것도 개성일 수 있습니다. 자신이 뛰어나지 않아서 개성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괜한 자격지심입니다. 개성을 가지려면 남들이 (거의) 다 하는 것 중에 안 하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남들이 하는 것 다 따라 하면서 개성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남들이 하는 것을 안하는 것만으로 개성이 성립되지는 않습니다. 모자람이 개성은 아니거든요. 개성을 가지려면 남들이 안하는 것 중의 한 가지를 할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남들이 (거의) 다 하는 것 중에 안 하는 것이 있고, 남들이 안 하는 것 중에 한 가지를 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바로 집중입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의 집중, 그것이 개성을 만드는 가장 중요한 원천입니다. 개성이 독특성이라지만 그냥 튀는 특성만으로 개성이 되지 않습니다. 독특성은 존중받을 만한 어떤 삶의 방식을 보여주는 것일 때만 개성입니다. 그래서 그가 세상을 읽고 남을 대 하는 마음을 표시하는 표정이나 어법, 그가 좋아하는 삶의 방식을 보여주는 옷입기 방식은 개성을 표시하는 것일 수 있어도 신장이나 몸무게는 개성의 표시일 수 없습니다. 자기가 정열을 쏟아 좋아하고 남에게 존중해주길 요구할만한 삶의 방식이 문득문득 드러날 때 사람들은 그의 개성을 알아챕니다. 다시 한번, 개성은 능력의 문제가 아닙니다. 정열과 사랑과 용기의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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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본성에 관한 악의적 해석

변요섭     메일보내기

야수들의 밤
오시이 마모루
황상훈 옮김, 황금가지, 2002

1. 배경과 줄거리

이 소설의 시대적 배경은 1969년, 극단을 치닫던 냉전 구도를 뒤흔들며 당장이라도 관성화된 지배 질서를 전복시킬 듯한 낭만적 환상으로 불타올랐던 시기이다. 베트공의 전투환경인 정글 자체를 초토화하기 위해 고엽제까지 살포하는 무자비한 물리력으로 월남을 공략하는 미국의 넘치는 야욕은 반전운동과 함께 전 세계 자본주의 질서의 중심점을 겨냥한 반미운동을 일으켰으며, 전 세계 사회주의의 종주국으로 추앙받아온 소련 사회주의의 본질은 일당독재권력의 상징인 크렘린궁, 그리고 이들을 비호하는 비밀경찰과 붉은 군대일 뿐이라는 냉소가 터져 나왔고, 산업문명의 과도한 성장이 자연환경에 치명적 부하를 일으킴을 보여주는 사건들이 불거져 나오자 자연적 삶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태적 각성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파국 직전의 위기감이 감도는 이러한 상황을 일소해 버리려는 이상주의적 열정은 결과적으로 폐허만을 남겨두고 말았지만, 견고한 벽에 대치한 채 변혁에 대한 꿈으로 부풀었던 당시 투쟁의 거리는 잠시나마 해방구였다. 바로 여기서 소설은 시작된다.

  반전공동투쟁의 밤, 고대 로마의 백인대 보병단과 유사한 사각 밀집 대형으로 전투대형을 형성해 가두투쟁에 나선 대열에 섞인 무당파 소속 고교생 레이는 진압경찰에 쫓기다가 대로변 이면의 구석진 골목길에서 밤의 어둠을 핏빛으로 물들이는 괴이한 사건을 목격한다. 자신을 형사라고 소개하며 이 사건과 연루된 레이에게 접근해 사건의 위험성을 알려준 고토다와 레이, 레이가 소속된 학내 무당파계열 민주화투쟁 위원회 멤버들 간에 동맹관계가 형성된다. 형사와 과격 운동파 사이의 동맹관계라는, 뭔가 어울리지 않는 동맹이 결성된 이유는 이 사건이 에스에르(Social Revolution)파에 소속된 고교생만을 겨냥한 연쇄살인이라는 의혹이 불거지면서 학내에선 레이와 같은 무당파 위원회 소속이면서도 학외에선 에스에르파의 일원으로 활동하는 친구 아오키에게도 살인의 그림자가 다가오고 있다는 절박함에 있었다. 강력한 용의자로 지목된 사야라는 이름의 소녀는 살해된 에스에르파 학생들이 다니는 학교만을 골라 전학을 했는데, 사건이 끝나면 다른 에스에르파 학생이 다니는 학교로 전학하는 행보를 해왔고 이번에는 레이의 도립 K고교로 전학을 했으므로 아오키가 살해될 차례가 된 셈이었다. 일본도를 휘두르며 야수 같은 눈빛으로 레이를 노려보는 이 사야라는 소녀를 둘러싸고 거대한 음모들 간의 충돌이 일어난다. 이상의 스토리 라인 위에서 전개되는 이 소설에서 가볍지만은 않게 눈여겨 볼만한 대목은 두 부분이다. 하나는 시체처리의 사회사라 할만한 담론이 펼쳐지는 고토다와 레이 일행의 싸구려 숯불 고깃집 회식 장면이며, 다른 하나는 사야라는 정체불명의 고교생을 보호하며 또 다른 정체불명의 영장류를 찾아 전세계를 배회하는 유태계 일족의 노인과 고토다, 레이간의 대화 부분으로, 여기서 장구한 인류의 진화사에서 얽혀져 나온 사건의 전말이 드러난다. 여기서는 두번째 부분만을 집중적으로 다뤄본다.

2. 문명의 근간 : 폭력

서구문명의 토대를 성적 욕망의 압박과 이를 제지하려는 통제의 이원체제로 설명하는데 주력하는 프로이트의 문명관은 긴장과 갈등의 장이다. 갈등의 양상을 성적 욕망의 우세 위에 두었던 그의 초기 저작으로부터 멀어질수록 성적 욕망은 강력히 등장하는 통제의 벽에 가두어 지지만 불안한 대립구도는 깨지지 않는다. 이런 대립 양상에 기름을 붓는 또 하나의 불안한 해석이 더해진다면, 그것은 폭력이다.

  이 소설에서 인간의 본질을 살육으로 보는 이론적 근거로 제시되는 것은,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발견자로 알려진 레이몬드 다트의 ‘수렵가설’이다. 긴 팔로 밀림의 나무줄기를 헤쳐 가며 날아다니다시피 활공하는 유인원으로부터 쫓겨나 땅바닥에 두발로 서게 된 인류의 조상이 더 이상 날지 못하는 무기력한 팔을 연장해 무기를 만들어 자신의 잡식성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동족 간에 살육을 하기 시작함으로써 문명의 필요조건이 구비되었다는 것이 대략적인 수렵가설의 내용이다.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 『2001년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첫 장면에서 유인원이 흉기로 사용한 뼈다귀를 하늘로 집어 던지자 이것이 우주선으로 변하는 장면이 수렵가설을 상징적으로 설명해 준다(이 영화는 68년에 나왔으며 다트의 수렵가설은 53년에 발표되었다). 큐브릭을 포함해 이러한 다트의 아이디어를 차용해 많은 작품들이 쏟아져 나왔는데 그 중 하나인 로버트 아드레이의 『아프리카의 창세기 African Genesis』에서는 수렵에의 적응이 인간을 유인원으로부터 이탈시켜 비로소 자연법칙의 구속에서 벗어나게 했다는 좀더 과격한 주장이 나온다(P214). 이러한 해석은 그야말로 다윈의 자연선택론과 함께 사회생물학자들이 즐겨 사용할 만한 소재임에 틀림없다. 이것이 정당화된다면 사실상 온갖 종류의 범죄나 전쟁, 부당한 폭력을 용인하는 결과가 되고 만다. 과연 이런 해석은 타당성이 있는가?

  사실상 인간이 자연법칙의 구속에서 벗어나는 과정을 설명하는 이론은 여러 방향에서 분기되어 제기될 수 있다. 또한 인간의 살육의지에서 나왔다는 도구의 개량과 과학의 발전 또한 전혀 다른 각도에서 볼 수도 있다. 사회 생태학자 머레이 북친은 대량살상과 자연파괴의 도구로 사용되어온 과학이 역으로 인간사회와 자연을 재구성하는 긍정적 도구로 활용될 수 있다는 보는데(M. Bookchin, The Ecology of Freedom : The Emergence and Dissolution of Hierarchy), 이러한 생각의 이면엔 헤겔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은 서구철학의 지적전통인 합리적 이성주의가 아직 건재해 있다. 항해 중에 바다의 요정 사이렌이 부르는 노래를 듣다보면 그 마력에 빠져 들어 모든 부하들이 급류에 휩쓸려 익사해가는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오디세우스는 전원에게 귀마개를 꽂을 것을 명령하면서도 자신의 귀는 그대로 유혹에 노출시킨 채 자신을 마스트에 동여매도록 한 오디세이 신화는 자연의 폭력을 지략(이성)으로 이겨내는 인간의 승리를 보여준다고 말한다(호르크하이머, 아도르노 공저 『계몽의 변증법』). 아도르노는 이 책에서 궁극적으로 이성의 역할을 회의적으로 보지만 대안설정에 있어 이론구성의 역할자로서 합리적 이성주의의 전통을 완전히 부정하는 데까지는 나아가지는 못한다. 자연을 폭력의 근원으로 돌리는 이성주의가 지배의지의 폭력성에 다름없다는 주장은 이제는 더 이상 획기적으로 들리지는 않지만 여전히 유효한 함축을 갖고 있다.

  돌려서 생각해 본다. 살육으로 인간의 본질을 규정하는 시도는 사실의 추구라기보다는 또 하나의 선험적 가정이 아닌가? 이것은 철두철미한 회의주의의 양식인 귀납의 방식이 아니라 전제된 가정을 보증하는 발견을 찾아내 기계적으로 가정에 발견사실들을 집어넣는 또 하나의 이데올로기이다. 유인원 내지 원시인, 원시적 생활을 답습하고 있는 원주민을 현대사회를 설명하는 성적 욕망 내지 폭력의 이론틀에 이용해 먹는 프로이트와 다트 류의 음산한 시각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원시인을 바라보는 시각도 있다.  

  프로이트, 레비 스트로스로부터 연원하는 원시인에 대한 주도적 시각은 원시사회가 결핍사회라는 것이다. 결핍의 내용은  문명사회를 야만사회와 구별 짓는 것으로 이해되는 생산 잉여와 국가기구이다. 이 지점을 피에르 클라스트르는 다르게 읽는다. 그것은 마치 원시인들이 생산 잉여를 내기위한 축적을 의도적으로 하지 않았다는 것이며, 이 때문에 권력이 생길 수 없으며, 권력 자체가 생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생존 이상을 넘어서는 비균등 생산활동을 기피했다는 것이다. 한편 원시사회는 끊임없는 전쟁상태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이 전쟁은 정치의 연장으로서의 전쟁이 아니었다. 즉 권력의 최종 결제수단으로서의 전쟁이 아니다. 왜냐하면 원시사회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동원할 정도로 과도한 힘이 집중된 권력 자체가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 그중에서도 서구인에게로 전유된 사유체계를 붕괴시키기 위해서 클라스트르가 원시인에게 과도한 투사를 덧씌운 면이 있지만 폭력과 야만으로 점철되어 악용되어온  원시인을 다르게 보는 시각을 성공적으로 제시한 면에서도 충분히 수용할 만한 가치가 있다(장 프랑스와 스크립차크, 『오늘을 위한 프랑스 사상가들』).

  인간기원에 대해서 어떤 가정을 세울 것인가? 희소 자원과 인간의 폭력성으로 물든 디스토피아로? 넘치지는 않더라도 풍만한 유토피아로? 이것은 비단 인류학적 문제일 뿐만 아니라 현재의 지배질서가 몰아가는 이념의 문제이기도 하다.

3. 이외의 주제들

이 책에서 오시이 마모루는 수렵가설을 불변의 진리 따위로 보려는 우매함을 범하진 않는다. 이것을 둘러싼 여러 반론을 충실히 전하면서도 그것이 지지받는 이유를 그는 말한다. 그것은 ‘살육하는 유인원’이란 신화가 지배 문화의 가치관을 어느 정도 지지하는 사상적 도구로 즐겨 이용되기 때문이다(P. 219~220). 이라크에선 침략전쟁이 일어나고 피시방에선 흐물거리는 이뮬레이터를 살육하는 게임이 판치는 세상에서 블러드 프로젝트라는 복합 엔터테이먼트 기획 하에 나온 이 책은 지배 가치관에 정신없이 휘둘리는 시장질서에 봉헌하는 셈이다. 그렇다고 이 책은 값싼 유흥거리나 의미 없는 잡설만 늘어놓는 현학으로 무장된 것으로  치부될 만한 것은 아니다. 재미와 교양을 갖추면서도 간헐적으로 보이는 오시이 마모루의 짧은 상념에는 어느 정도의 진실성이 있다. 특히 노인과의 대화 부분에는 곰곰이 생각해 볼만 한 사상적이고 사회사적인 주제들이 산재해 있다. 정신을 물질로 환원시켜 나가는 근대 지성사의 흐름이라든지, 육식의 논리적 근거를 쫓는 대목, 카톨릭의 야만적 마녀사냥, 이스라엘과 바티칸의 오래된 대치관계, 현대 금융자본의 계보 등. 장르를 넘나들며 폭넓게 전개되는 그의 문제의식은 최근에 국내에 개봉된 그의 신작 애니메이션이자 『공각기동대』 속편인 『이노센스』에서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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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세들어 살 방을 얻다,

딛고 선 땅을 울리는,

그래서 어지럼증이 그치지 않는,

그런 삶의 연속이다,

 

달려왔다 달려가는 세 마리의 말.들.

떠 오를 수 있는 높이는 점점 가라앉는데,

 

발을 붙이게 해 주지 않는다,

 

어디라면,

숨을 휘휘.. 돌리며 깊은 잠을 들 수 있을까,

 

여기저기,

물질화된 곳을 둘러보다,

불어난 체중만큼 공간.들이 부담스럽다,

 

하여,

여기, 작은 방 하나 세들다,

열리지 않는 문 하나.둘.셋. 그리고 more 닫아두다,

 

눈물이 왈칵 쏟아질 듯,

조용한 주변,

시끄러운 마음으로 앉아, 둘.러.본.다,




♪ 마음 깊은 곳에 그대로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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