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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영남패권주의의 온상 추미애 프리미엄

부제: 영남패권주의 척결의 과제:  문화적 측면의 선결 필요성  


적어도 민주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한국의 지역주의의 병폐는 지역등권으로 풀어야 한다는데 커다란 공감을 표하곤 한다. 


그러나 지역등권이라는 출중한 정책 대안의 채택을 강고히 방해하는 현실조건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그들은 심각히 여기지 않는 것 같다.  내 견해로, 그 장애물은 정치구조의 훨씬 하부에 또아리를 틀고 있다. 저작권: 국회사진기다단


민주앙들의 정치인 추미애에 대한 애증을 읽다보면 그 하부구조의 실체가 자연히 드러나고 만다. 


한 때 우리들의 가슴에 슬며시 다가온 적이 있던 민주당 전 의원 추미애, 그녀가 어떻게 호남인들의 큰사랑을 받을 수 있었는가?  그것은 합당한 과정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추미애가 한 전라도 출신 대학 선배와 연애를 하고 결국 결혼을 하여 잘 살고 있다는 사실로 인하여 그녀가 전라도라는 <집단>에 대한 한국사회의 비우호적 관점이나 영남우월주의 관념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라고  보는 것은 심히 위험한 가정이다.  


자신과 개인적 친분을 맺게 된 특정 개인에 대한 관계를 근거로, 그 개인의 배경이 되는 집단 전체에 대하여마저 그의 편견이 다 해소된 것으로 판정해주는 것은 큰 실수다.


어느 한 <개인>에 대한 호불호는 그가 가진 배경보다는 그가 갖고 있는 인간적 매력과 지위와 능력 등 거의 전적으로 개인적인 면모에 의해 결정된다.   적어도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면들에 의해서 판단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가지는 어느 한 <집단>에 대한 호불호는 개인간의  문제처럼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면들에 대한 검증을 거쳐 결정되지 못하고, 자신이 그 집단에 대하여 이미 내면에 쌓아두고 있었던 파편적인 이미지를 제 구미에 따라 선택적으로 짜깁기하므로써 결정하고 만다는 사실이다.  집단에 대한 호불호는 매우 피상적인 정보의 파편들과 자신내의 이기적인 실속 추구에 따라  갈리는 법이어서, 사람은 그 안에 자기가 끝내 거부하고 마는 집단을 꼭 모셔두면서도 그 집단의 중추적 배경을 공유하고 있는 어느 특정 개인에 대한 호감은 동시에 보이는 모순된 일을 얼마든지 한다. 


이렇듯 사람이 어느 한 <개인>과 어느 한 <집단>에 대하여 호불호를 결정하는  메커니즘은 서로 완전히 다르자료: 추미애 홈페이지므로 그 사람이 어느 한 개인을 지지했다고 하여, 그가 그 개인이 가진 특정 배경을 공유한 집단까지를 모두 지지하는 것이며 그 집단에 대한 편견을 다 버린 상태다라는 증거로 삼는 것은 얼토당토않은 논리적 오류다.  

특정지역에 대한(즉, ‘집단’에 대한) ‘편견의 극복’이란, 그 지역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새로운 것으로 대체하는 것이 겨우 아니다.   그것은 그 지역에 대한 자신 안의 비뚤어진 ‘인식틀’을 고쳐 바르게 세우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자신안의 상대적 우월주의 등의 사고편린들을 하나하나 성찰하여 깨끗이 클린징할 것을 요구한다.  마치 담배를 끊듯이 단 한번의 옹골찬 결단으로 완벽한 이별을 고할 수 있는 한번의 <사건>이 아니고, 뇌수에 숨어있는 편견의 찌꺼기들이 남모르게 자라나 어느새 반란을 일으킬까 초조한 심정으로 내내 감시하는 <과정>인 것이다.

추미애가 영남의 상대적 우월주의 문화에 대한 영남인으로서의 반성을 조금이라도 보였던 적이 있는지가 나는 심히 의문이다.  

그녀가 전라도인 남편(개인)과 살고 있다는 것이 곧 그녀가 전라도(집단)에 대해 갖는 각별한 사랑의 표현인 양 브랜드화된 것은 통탄스러운 한국의 저급문화 풍토 때문이다.  .  

추미애가 호남며느리가 된 것이 그녀의 정치적 프리미엄으로 작용토록 허용하는 문화는, 전라도 총각이 혹시라도 영남사위가 되기 위해서는 영남인들의 전라도인에 대한 혐오를 상쇄하고도 남을 메릿을 필히 제공해야 할 것이라는 전제를 깔고 있다.  이것은 또한 그럴만한 능력이 안되는 수많은 호남의 처녀들이 영남의 며느리가 됐을 때 영남식구들에게 잘보이려 두 배 이상 애써야만 할 것이라는 문화적 압력을 깔고 있다.  지금 막 태어나는 아기도 그가 전라도산(産)이면 이미 이 멍에는 씌워진 셈이다.  그 아기가 영남산이면 추미애와 같은 프리미엄을 품고 태어난다.  영남인 한 사람의 가치와 호남인 한 사람의 순수 가치가 미리부터 평등하지 않다는 가치규준이다.  다시 말해, <불공평>이 버젓이 규범으로 자리잡은 문화다. 그 문화는 영남패권주의의 공기다.

추미애는 자신의 ‘전라도인 며느리’ 이미지가 하나가 엄청난 정치적 프리미엄이 되어 정당치 못한 혜택을 간단없이 누려온 것에 대하여 부채감이 조금이라도 있는가?  그것이  일말이라도 시위된 적이 있는가?   그녀는 전라도인 편에 서서 이 불평등 구조에 정면으로 대항해본 적이 있는가?   그것을 위해 제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조금이라도  희생시켜본 적이 있는가?  

오히려 추미애는 그 <불공평 프리미엄>을 극대화키켜  저 자신의 정치적 패권의 동력으로 삼으려고 그간 얼마나 추한 모습을 노정해왔더란 말인가!  (물론 그 결정판은 그녀의 삼보일배 쇼였으렷다.)  

나는 그녀가 거저 줏어먹은 이 프리미엄의 실체가 영남우월주의 사고에 찌든 노무현이 “통째”로 줏어먹은 전라도 “현찰”의 실체와  어디 한 점 다름이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

‘인간’ 추미애와 ‘인간’ 노무현은 완전 별개의 개인들이다.  그러나 ‘정치인’ 추미애와 ‘정치인’ 노무현은 ‘전라도차별/경상도우월주의’라는  이 나라의 야비한 문화풍토병을 그 자궁으로, 그리고 “전라도 현찰”이라는 마르지 않는 젖줄기를 빨고 자라난 한 뱃속 오빠 누이지간이다.

이 나라의 모오든 정치인들의 출생 배경과 성장과정이 그러했으나, 특히 추미애는 이제껏 그 누구보다도 넘치수갑, 차꼬게 누려왔던 경상도프리미엄 부스럼을 자신의 피부에서 온전히 벗겨낼 일이다.  지금 혹 추미애한테 남들보다 더 높은 도덕성을 요구하려는 것이라고 보고 있다면 오해다.  그녀의 정치적 잠재력을 아껴서 이말을 하고 있는 것이 전혀 아니다.  그녀의 정치적 성장 문제와는 아무 상관없이, 터무니없는 이유로 혜택만 받아온 정치인으로서 그녀가 이 땅의 불공평, 그 왜곡된 가치규준들을 바르게 돌려놓는데 이제라도 일조하기를 요구하는 것 뿐이다. 아니 그저 반성만이라도 할 수 있기를 요청하고 있을 뿐이다.

“영남인이 전라도인과 부부의 정을 맺어 살고 있는 것을 보면 그 영남인은 전라도인이나 마찬가지제…” 라고 생각하는 호남인들의 사고는, 부단히 대항하고 극복해나가야 할 당사자들마저 정작 영남패권이데올로기에 이미 깊이 물들어 있음을 웅변하고 있다. 사실을 말하자면 결정적으로는, 이들 전라도인의 사고방식이 오늘의 추미애를 키워온 비옥한 토양이었다.  본의 아니게 영남패권 구조를 견고히 하는데 호남인들이 반지원, 반동원됐던 셈이다.

‘영남’ 자체가 우리의 일상 문화와 정치영역을 관통하여 프리미엄으로 우대되는 이 기이한 현실의 형성에 부역한 것을 호남인들부터 통절히 자성할 일이다.  그와 함께  정치인 추미애는 그러한 영남패권문화를 최대로 향유해왔던 장본인임을 지금부터라도 심히 부끄러워 하고 통렬한 비판을 수용할 일이다.  그녀가 제2의 노무현이 되지 않으려면 더욱 그러하다.

오늘도 이 사회를 휩쓰는 영남패권이데올로기  문화와 노무현혼돈, 그리고 작금의 추미애증후군은 모두 한 묶음이다.  

지역등권으로 가는 우리의 길을 근본적으로 가로막고 있는 깊은 늪은 결코 영남패권집단이나 영남민만이 아닌, <영남패권이데올로기>라는 이 사회의 광범위한 <문화>다.  그 문화는 노무현이나 추미애 뿐만이 아니라 미래의 노무현 복제인간을 끊임없이 양산해낼 것이다.  가치관이 잘못된 인간을 우대하는 문화를 우리가 가지는 한, 이 사회는 지역등권의 길을 영영 거부할 수밖에 없다.  


원제목 : 영남패권주의를 온존시키는 토양: 추미애의 예에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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