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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신문의 철딱서니 없음에 대한 단상

사상은 단편적인 생각이나 사변이 아니다.
사상은 체계적이며 유기적인 가치관이다.

 

사상의 투절한 특정 주체는 그 사상의 토대에서 말과 행동을 관철한다.
따라서 어느 주체가 발언을 함으로써 사상을 표현하고 장차 자신의 신념(사상)을 실천할 기회가 닥쳐올 때 기회를 놓치지 않고 실천할 개연성이 농후하다 할 것이다.

 

혹자는 이런 사상의 자유를 절대적이라고 한다.


그런데 사상의 자유를 천착하여 분해해 보면 사상형성단계와 사상이 외부로 표출되어 사상의 주체와 연계되는 외부와의 관계를 맺는 단계로 나눠볼 수 있다.

 

이 때 사상형성단계는 외부에서 포착할 단서가 없으므로 개입의 여지가 없다. 따라서 일응 절대적보장을 받는 영역이다.  그러나 이러한 속성때문에 사상의 자유가 절대적이라고 주장한다면 일부분이 검은 콩을 보고 검정콩이라고 단정하는 부당한 일반화를 범한다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하여 우리는 외부와의 연계로 나아가는 다음 단계의 사상의 자유에 대해 그 자유가 절대적인가를 고찰할 필요가 있다. 그리하여 그것마저 절대적으로 무제약적인 자유라 하더라도 법체계내에서의 제한을 또 살펴봐야 한다.


인간은 천부적인 자유를 누리는 주체로서 존엄하고 평등하다. 이러한 절대의 대명제로부터 필연적으로 즉자대자적인 사회속에서 각각의 구성원들이 누리는 자유는 일정한 한계를 가진다.


이른 바 법 이전의 자유의 범위문제로 이른바 한계라고 말하여진다.

 

사상의 자유가 외부로 표출 될 때 역사적으로 명백하게 부정적으로 평가되는 파시즘, 나찌즘, 폭력혁명을 맹종하는 공산주의가 있다.

 

이러한 부정적인 사조(경향)는 그것이 사회적으로 위해하다는 점을 재차 검증할 필요가 없다.  이런 역사적으로 명백하게 부정적인 사상들이 사회에서 활보하는 것을 용인하고 여론과 사상의 자유시장이라는 자체정화기능으로 그것을 정리해야 한다는 이른바 똘레랑스를 들먹이는 부류들은 똘레랑스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소이이다.

 

똘레랑스는 관용으로 번역될 수 있는 불어로서 또한 앙똘레랑스라는 반대어를 가지고 있다.


똘레랑스는 잡다하고 다양한 사상들을 무조건 용인하는 환경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앙똘레랑스를 배제하는 사상의 자유경쟁환경을 지칭하는 말이다.

 

예를 들어 토론 혹은 사상의 자유시장의 대전제는 토론의 주체들의 자유로운 의견개진과 대등한 지위로 상호 논박하여 정화하는 환경이다.  그런데 파시즘 나찌즘 폭력혁명을 맹종하는 공산주의는 앙똘레랑스 성격을 갖는다.  즉 토론이나 사상의 자유시장에 진입할 자격미달의 사상인 것이다.  이 자격미달의 사상들은 인류역사에서 수천만의 인권유린이라는 희생으로 검증된 진리이다.

 

강단좌파들이나 좌파진보주의자들이나 민노당이 말하는 사상의 자유의 절대적주장은 이런 점에서 비효율적이기 짝이 없다.  도대체 사상의 자유시장에서 경쟁할 때는 옳고 그름을 빼고 한다는 말인가?  역사적으로 명백하게 부정적이라고 단정된 사조(사상)마저 사상의 자유시장에서 꽃피우는 것을 용인해야 한다는 주장을 한다면 그런 주장을 내 뱉는 주둥이에 나찌식 가스를 채우든가 사상범으로 단죄해도 좋다는 사고방식이므로 덜 떨어진 사고방식에 재갈을 물려야 마땅하다.

 

즉 사상의 자유는 절대적인 자유가 아니라 그 자유의 속성상 법 이전에 한계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상의 자유는 법 이전의 한계만을 가진 제한적 자유인가? 

 

그것은 아니다. 법체계내에서 사상의 자유를 제약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공공의 안녕질서, 국가안보등을 위해 제한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  이때 즐겨 언급되는 제한원리가 미제의 홈즈 대법관의 판례법(Case law)의 원리로서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의 법리'가 있다.

그리고 서독기본법에 규정된 방어민주주의 개념도 있다.


그런데 강단죄파나 좌파진보주의자들은 오로지 사상의 자유가 절대적 자유라고 주장하면서 이러한 제한원리를 즐겨 인용한다. 한 마디로 똥인지 된장인지 분간조차 못하는 어리석은 작자들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엉터리 주장을 하는 매체로 한겨레신문과 이른바 진보매체들이 있다.

 

자유의 적에게는 자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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