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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26

이제 10월 말인데, 벌써 성탄절 생각을 문득 한다. 어려서부터 가장 따뜻했던 기억은 성탄절이었던 것 같다. 운 좋게도 그 외진 시골에서 마침 유일하게 교회가 있었던 동네에 살았던 덕분에 어린 시절부터 일상 안에 늘 교회가 있었다. 적어도 유년시절의 교회는 늘 따뜻했다.

중졸과 초졸 부모를 둔게 행운이었을까. 우리 남매는 그래도 그 시골에서 상대적으로 지적인 문화 안에서 성장했다(?). 왜냐하면 그 시절 우리 동네에도 적잖은 동학들이 학교를 다니지 못한 부모 밑에서 성장했기도 했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우리 집은 문화적 수준이 높았다. 그런데 좀더 특기할 만한 사실이 있다. 아마도 농민운동하신다고 맺은 인연 때문이었을까. 1990년 전후 그 시절 우리 집에 한동안 <한겨레 신문>이 배달되곤 했다. 물론 우리 집엔 <조선일보>와 <농민신문>도 배달되었다. 그 시골에서 <한겨레 신문> 지국을 맡았던 선친의 절친이었던 아저씨는 안타깝게도 얼마후 병으로 돌아가셨다. 선친은 그 이후 좀더 보수적 방향으로 선회했다. 어느덧 <한겨레신문>을 볼 수 없게 되었다. 가장 친한 친구를 잃은 것과 관련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 아저씨가 30대 초반에 돌아가셨고, 선친은 40대 후반에 세상을 떴다. 그 사이 이런 이야기를 물어볼 기회는 없었다. 나는 바빴고, 아버지는 힘들었다.

어쨌든 그나마 그런 영향하에 있어서였던지, 나와 형제 자매들은 시골에서 이른바 '수재'로 통했다. 확실히 어려서부터 아버지가 보고난 신문이 늘 우리 주변에 있었다. 읽을 수 있는 것이 많지는 않았지만, 티비로 보고 지나치는 것과 달리 신문에 실린 글자들은 한번 눈길을 주면 뇌리에 남았던 것 같다. 당시 가까운 친척 어르신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대학을 나오신 분이 우리집에 오시면, 늘 우리를 옆에 두고 우리 부모에게 우리들더러 천재는 아니지만 수재라고 치켜세우곤 했다. 물론 그 이후의 경과를 보면 그 말씀은 격려의 차원일 뿐이었다. 사실 그 시골에선 나의 친구들 가운데에도 담배 따는 시기가 되면 학교를 못 나오는 경우들이 종종 있었다. 물론 나도 우리도 종종 또는 일상적으로 여러가지 노동에 참여했었다. 박사까지 학위를 받은 입장에서 보면 물론 기이하기도 하다. 그런데 어머니의 고생을 생각하면 쉽지 않지만, 그래도 그나마 나는 상대적으로 '유복'한 유년을 보낸 셈이다.

암튼, 난 적어도 당시에는 교회에서도 전도사님들에게 큰 사랑와 기대를 받았던 것 같다. 그런 와중에 아마도 1988년 즈음일까? 성탄절 이브 이른바 '문학의 밤'이 우리 교회에서도 열렸다. '문학의 밤'은 내 기억에 사실상 동네 잔치와 비슷했다. 게다가 동네의 범위를 많이 넓혀야 했다. 사실상 시골에서는 거의 유일하면서 동시에 가장 품격있는 인문 행사라고 할까.

당시에 마침 나와 같은 '국민학교' 학생들이 배우로 참여하는 성극이 연출되었고, 나는 주인공을 맡았다. 지금 기억나는 것은 당시 모티브가 국회청문회에 기반한다는 것이었다. 마침 그해 광주5.18 청문회가 있었고, 나는 고등학교 누나들이 만들어준 성극의 주인공으로 '노무현' 의원의 역할을 맡았던 것이다. 성극의 구성은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지금까지도 인상깊었던 건 당시 아무도 넥타이를 매줄 사람이 없었는데, 막 중학교에 들어간 누나가 '가정' 시간에 배워서 아버지 넥타이를 가져다 나에게 매줬다는 것이다. 기억이 명확치 않지만 누나는 아마 그 '문학의 밤'의 사회를 봤을 것이다.

물론 이 기억은 한동안 잊고 지내다 대만 유학을 하면서 다시 생각해냈던 것이었다. 물론 당연히 노무현과 같은 정치인들과는 거리를 두던 시기다. 그렇지만 대만 유학시절 노무현의 자살 소식을 접하며 먹먹했던 기억은 지금도 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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