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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19

선생님 연구실 이사를 며칠 동안 도와드렸다. 90년 대만으로 오셔서 지금까지 축적된 수많은 넘치는 문서들을 어떻게 정리할지 어쩔 줄 모르시는 선생님 옆에서 나도 어쩔 줄 모르는 상황이었다.

오늘 마지막으로 짐을 정리하고 나서 남겨두고 가신 책들을 살펴보다, 구석에서 다시 엄청난 문서들이 남아 있는 걸 발견하고, 아주 일부분만 꺼내서 살펴보았다. 80년대 말부터 90년대까지 대만, 아시아, 구미를 넘나들며 관계망을 만들기 위해 분주하게 주고 받은 서신과 공부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눈에 들어왔다.

지금은 익히 잘 알려진 사람들이지만, 당시에는 다들 30대 초중반이었을 수많은 그들의 사진도 남아 있었다. 다시 한번 비참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지금 나는, 우리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그런 작업들을 하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나, 그리고 우리의 작업들도 그런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억울한 감정을 갖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사람을 탓하지 않으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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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26

요즘 문득 자주 '과학'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철학'이라고 해도 다르지 않을 것 같다. 우리의 이론은 과학을 추구하면서 실천성을 잃었다. 과학은 보편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엘리트의 언어라고 할 수도 있다. 아마 실천성을 잃고 나서 과학으로 나아갔다고 할 수도 있겠다. '문화/과학'은 그런 의미에서 1990년대의 시대적 전환을 표지한다. 과학에 의해 규정된 문화는 현실이 실천성이 제거된 이론에 환원된 담론구성물일 뿐이다. 문화연구가 본래 가졌던 실천성은 제거된 채 추상적 이론만 수입되어 현실에 적용된 것이었다. 물론 여기에서 현실은 '이론적 현실' 안에 포섭될 수 있는 것만을 의미한다. 자본주의/세계화/신자유주의적 현실이 대표적 예 가운데 하나다. 탈식민주의가 식민주의적으로 소비된 것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문화연구와 탈식민주의 모두 20세기 내내 동아시아와 우리 역사 안에 지속되어 왔다. 분단/신식민으로 역사를 잃어버린 우리들에게는 그것이 낯선 것이자 새로운 것으로 보였지만... 그렇게 해서 분석된 문화가 강변한 것은 이론의 올바름일 뿐이었다. (5.4운동에서 제시된 '과학'과 '민주'라는 낯선 과제가 다시 문제화되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론의 올바름'과 '정치의 올바름'은 평행구조를 갖는다.)

 

그러나 실천적인 문화연구는 삶의 양식을 바꾸는 것이어야 한다. 이렇게 살지 말고, 다르게 살자는 제안이어야 한다. 역사를 가진 이 땅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수입된 이론의 보편/특수적 반복에 불과한 문화연구담론이 이러한 제안을 할 능력을 가질 수 없었다. 자본주의 비판, 신자유주의 비판, 생태주의, 페미니즘, 성소수 등등 그 어떤 비판이론도 공동체가 영위해 온 삶의 양식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지 답을 주지 못했고 지금도 그렇다. 그러한 이론은 과학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실천성이 아주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것은 대체적으로 땅 그리고 역사와 분리된 특정 계급/계층/엘리트 내부에서만 고립된 자기만족적 공동체로 확장성 없이 생성/소멸을 반복해 왔다. 물론 그것이 완전히 소멸하지 않음은 그 자체로 체제 재생산의 중요한 구성요인임을 말하는 것이다. 특히, 엘리트주의/이론주의가 포퓰리즘 없이는 작동하지 않는다는 차원에서 더욱 그렇다.

 

어쩌면 이런 맥락에서 "문화연구"가 실천성을 회복하기 위해 '역사' 및 '사상'과 만나야하는 이유가 밝혀지는 듯 하다. 구조 비판 자체가 주체적으로 재구성되기 위해서 기존의 '국민/현대/식민'적 틀에서 해방된 역사적/권역적 접근이 필요하고, 구조 변혁과 늘 맞물려 있는 삶, 의식, 가치, 즉 문화가 변화하기 위해서는 사상에 기반한 실천을 통한 사람/공동체의 변화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과거의 문제는 이와 같은 문화를 또 하나의 구조로 보고, 여기에 다시 '과학'의 칼을 댔던데 있다. 필요한 것은 노신이 말한 입인立人이라는 문제설정이다. 사상에 기반한 실천은 동아시아적 전통에서 '문예'로 불렸다. 사상의 회복과 동시에 문예와 결합하고 양자의 상호삼투를 위한 노력이 필요할 것 같다. 이론이 사상을 대체할 수 없고, 구조분석이 실천을 보증하지 못한다. 문예 없이 사상은 공허할 수 밖에 없다는 박현채 선생의 인식을 다시 전유해야 하지 않을까.

 

이제 경제의 파탄은 갈수록 표면화/가속화될 것이다. 2018년 여름을 거치며 자유주의적 반공주의가 가진 능력(의 한계)이 표면화되고 있는 듯 하다. 나는 '촛불'의 진정한 함의가 무엇이었는지 드러난다고 보고 있다. 이미 여러차례 왜곡을 거쳐 성립된 진보/보수라는 구도에서 진보는 기본적으로 자유주의적 반공주의였다. 물론 내가 이야기하는 반공주의는 단순히 공산주의라는 추상적 이념에 대한 반대가 아니라, 우리 나름의 주체적인 대안 사회를 기획하기 위한 기반이 되는 구체적인 역사에 대한 왜곡, 그로부터의 단절을 의미한다. 남의 잔치에 숟가락을 얹으며 '진보'에 편승했던 다기한 좌파와 이론주의적 급진주의는 또다시 무너지는 현실 앞에서 다시 새로운 이론을 찾게 될까. 다케우치 요시미가 이야기했듯이 기존의 이론에 현실(또다른 관념)이 맞지 않으니 다시 새로운 이론을 가져오면 된다고 생각할까. 진정으로 현실을 바꾸려는 실천성이 필요하다. 그러나 작금의 반공주의가 개별 주체에 내면화되어 있다는 점에서 이는 상대하기 매우 어려운 두텁고 강고한 반공주의다.

 

사상의 재건과 실천양식의 회복이 동시에 요구되는 상황이다. 구조 비판의 다양한 층위에 대한 분석이 역사적 종축(주요모순)을 기반으로 다시 결합되어야 함은 사상의 기본적 과제인데, 그와 동시에 실천양식의 단절을 문제화함을 통해 그 회복의 경로 또한 함께 고민되어야 할 것 같다. 우선 문학을 먼저 고민해보는 수 밖에 없다. 사상적 각성은 어떻게 문예로 승화될 수 있을까. 당분간은 사상적 각성의 내용을 조금더 풍부히 하면서, 조금씩 실험적으로 문예적 실천을 시도해야 할 것 같다. 주어진 답은 없을 것 같다. 한 걸음씩 발걸음 내딛다 보면 길이 보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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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16

[현상을 마주하며 고민되는 바가 있었다. 공부를 하고 쓴 글은 아니기 때문에 정리되지 않는 논점이 많다. 내가 설정한 역사적 공산주의라는 과제와 연동되는 사회적 질문에 대해 본래 내가 가진 문제설정 속에서 질문을 다시 맥락화해보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한겨레, <"명백한 동의 없으면 성폭력"이 상식이 되어야>

http://www.hani.co.kr/arti/opinion/editorial/857758.html

 

법원이 현행법체계에서는 처벌이 불가능하다는 의견을 낸 것을 두고 한편으로는 책임을 입법부로 넘겼다고 비판하면서도,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입법을 촉구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만들어지는 듯 하다. 일단 법원은 '위력'에 의한 성폭력을 엄격하게 적용하겠다는 입장이고, 이번 건과 같이 명시적인 부동의는 없었지만 나름의 방식으로 원치 않음을 표명한 성교에 대해 처벌하려면 새로운 입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번 건에 대해 '위력'에 의한 성폭력을 계속 적용하려면 추가로 객관적 증거가 제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법이 현실의 변화와 관련해서 가장 보수적인 입장을 취한다는 점을 다시 한번 보여주는 것이었는데, 법원이 입법을 제안하는 모습은 다소 낯선 것이었다. 현실적 부담을 느끼긴 했던 모양이다.

 

이를 바로 받은 미디어 JTBC는 대 놓고 No means No, Yes means Yes 등의 영어 문구를 가지고 현행 법체계를 보완할 것을 주문하기도 했다. 그다지 어렵지도 않은 영어를 우리말로 번역하지 못하는 이 난처한 상황은 Me too가 미투로 번역 될(되지 않았을) 때에도 우려되었던 점이다. 왜 번역하지 못하는가와 관련된 식민주의적 탈맥락화의 문제는 복잡한 설명이 필요한 문제이기에 여기서는 상세한 논의를 생락하는데, 기본적으로 '마르크스주의'와 마찬가지로 '페미니즘' 이론 자체도 동일하게 엘리트주의적 식민성 문제를 우회할 수 없다는 점만 확인한다. 이 문제는 단순히 페미니즘이 기층/제3세계 여성에게 관심을 갖는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포스트식민주의 또는 탈식민주의 이론이 얼마나 식민주의적으로 소비되어 왔는지와 유사성이 있다.

 

일정한 기간 문제의식은 축적된 듯 하다. 낯선 사람에 의한 강간과 같은 전통적인 의미의 성폭력과 다른 차원의 '성침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부부와 같이 친밀한 사이, 나아가 가족/친구/선후배/직장동료와 같은 지인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성적인 활동은 '국가'의 법으로 규정하기 어려운 모호한 부분이 아주 크다. 낯선 사람에 의한 강간은 양자 간에 강간 외에 다른 관련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법적 처벌에 의존할 수 있다. 상대적으로 물적 증거의 확보 또한 용이하다. 그러나 서로 알고 지내는 사람들 사이에는 다양한 관계가 얽혀 있기 때문에 성적 관계(범죄 포함) 자체도 다양한 차원과 결합되어 해석될 수 밖에 없다. 처벌, 치유 등이 이 복잡한 맥락 속에서 진행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법에 의한 해결이 갖는 의미가 제한적일 수 밖에 없다. 이는 궁극적으로 '사회'의 영역으로 오히려 공동체의 '운동'이 이 영역을 책임질 필요가 있다. 물론 이는 제도적으로 볼 때, '가족'의 재구성이라는 큰 과제를 포함한다.

 

특히, 구조분석의 차원에서 보면, 이와 같은 성폭력/성침해의 구분은 일정하게 노동에 대한 자본의 형식적 포섭과 실질적 포섭이라는 마르크스적 구분에 비유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위력'에 대한 해석을 두고 의견이 분분한 것은 일상적으로 심지어 '자발'적으로 보일 수도 있는 수많은 성 착취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노동자의 근면과 여성의 성적 피대상화의 노력 모두 일정하게 주체에게 내면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노동자에게 자본주의적 고용노동은 일상적 노동 착취이며, 여성에게 '현대/식민'적 가족제도를 전제로한 성적 관계는 일상화된 성 착취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성 착취는 가족, 학교, 회사에 일상적으로 존재하며, 그 수위도 다양할 것이다. '위력'에 의한 성관계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만약에 실질적 포섭으로서 노동 착취의 해결이 문화적 차원에서의 장기간의 실천을 기반으로 한 노동자의 주체화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면, 일상화된 성 착취 또한 마찬가지로 기나긴 여성의 주체화 과정이 필요할 것이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미디어 그리고 '페미니즘' '운동'이 가장 보수적인 법원의 판결을 비판하면서 이 제안을 받아들이는 모양새는 그동안의 주류 페미니즘의 접근에서 보면 이해는 되지만 이를 둘러싼 '페미니즘' 진영 전반의 태도가 가진 일괴암성은 다소 뜻 밖이었다. 페미니즘 내에서도 다양한 운동의 흐름이 있다고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사법적 접근이 주는 가능성도 있지만, 그 자체가 주는 제약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을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 법적 테두리 내에서 요구의 실현은 늘 이중성을 갖는다. 그리고 우리 법체계가 궁극적으로 자본주의적 '현대/식민'적 가족제도를 지탱하는 핵심적 장치 가운데 하나라는 점을 볼 때, 사실상 '헌법'적 체계를 넘어서는 가능성을 가진 사안과 관련해 제대로 그 의의가 민간/사회에서 충분히 논의되고 토론될 여유를 갖지 못하고, 곧바로 '법률'적 체계에 놓여지면서, 가능성을 스스로 닫는 상황으로 접어들었다는 생각이 든다. 어떤 조급함이 이를 낳지 않았을까 하는 의구심도 든다. 노동운동가들이 법원 앞에 가서 '자본주의 박살내자'라고 이야기하는 것과 비슷한 어떤 느낌이다. 여기서도 다시 한번 유비될 수 있는 것은, 노동/자본의 문제가 기본적으로 '반공주의'에 의해 규제된다면, 성평등/성착취의 문제는 기본적으로 가족주의에 의해 규제된다는 점이다.

 

따라서 '반공주의'와 '가족주의'는 그에 위반되는 언행이 공개적으로 단죄될 수 있다는 점에서 정치적 올바름이 작동하는 담론 영역이다. 그러나 역사를 갖는 민간/사회의 영역에서 전일적으로 이러한 올바름이 관철될 수는 없는 법이다. 일상의 영역은 이와 같은 위로부터 주어진 담론에 담기지 않는 풍부함을 갖기 때문이다. 그래서 '법'과 '미디어'에의 호소는 이 영역이 법과 미디어의 영역에 대해 갖는 상대적 자율성을 축소시킬 위험이 있다. '위력'에 의한 성관계와 관련해서도 그것이 법과 미디어의 담론 영역에 놓이는 순간, 사실상 '강간'이거나 아니면 '불륜'이라는 이분법적인 논리에 갇히게 된다. 문제는 개별사안의 차원을 넘어서서 '불륜' 논리가 가족주의를 강화하는 핵심적 역할을 하면서 다시 여성 성착취의 기제 재생산에 복무하게 된다는 점이다.

 

따라서, 여기에는 사실상 이중전선이 놓여 있는 것 같다. 1) 현대/가족적 '불륜' 논리, 2) 성적 자기결정권 부정의 논리. 전통적 성폭력으로서의 강간으로부터 보호되어야 할 여성, 현대/가족적 정조를 지켜야 하는 의무주체로서의 여성, 이 둘 모두 성적 자기결정권을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여성 주체와는 무관하다. 여기에서 아마도 평등의 전제로서 해방/자유의 문제설정이 제기될 수 있을 것 같다. 일상화된 성착취에 대한 저항과 비판이 '강간'과 '불륜'의 논리로 환원되지 않기 위해서는, 약자/피해자 정체성을 넘어선 성적 자기결정권의 주체 논리가 중요해진다. 그런데 이 부분이 법적 판단의 대상이 되면, 사실상 '불륜' 논리와 대결할 수 없게 되고, '강간' 논리를 수용해야 하는 상황으로 몰리게 된다. '불륜'이면서 '성침해'일 수 있는 사안은 논의될 수 없게 된다. 즉, 자유와 평등이 분리되게 된다. 성적 자기결정권은 권리 침해에 대한 저항과 방어에서도 소극적으로 주장되지만, 성적인 활동과 교제에 있어서 현대/식민주의적인 가족의 틀을 넘어선 스스로의 욕구/욕망을 실현함을 통해 적극적으로 주장되며, 양자는 분리되어 있지 않다고 볼 수 있다.

 

내가 정작 궁금한 것은 일상의 민간/공동체에서 민중적 차원의 성적인 평등과 자유는 어떻게 억압에도 불구하고 실천되고 있는가이다. 자본주의의 실질적 포섭에서 문화와 이데올로기, 그리고 주체(화) 등의 범주에 주목하게 되었지만, 이론 중심적인 접근 하에 정작 그것을 매우 두텁게 밑받침하고 있는 역사적인 것들이 배제되면서 사실상 문화분석은 이론의 동어반복이었던 과거를 참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내가 보기에는 우리의 성 관념과 문화가 어떤 상황인지는 제대로 분석된 바 없어 보인다. '현대/식민'적 가족제도 하에서 우리는 순응하며 살았는가? 어떻게 반역하며 일상을 다시 만들어 왔는가? 지금 나는 남한 민중의 성적 활동에서 '위선'이 일상적으로 용인되는 흥미로운 상황에 처해 있음에 주목한다. 다들 겉으로는 불륜을 비난하면서 불륜의 삶을 살고 있다. 가족은 신성하다고 하지만 현실에서 신성한 가족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그나마 민중의 위선적인 '욕'은 마지못해 '정치적 올바름'에 참여하기 위한 단발성의 비난으로 끝나지만, 의제설정을 담당하는 엘리트들은 위선의 구조를 유지하며 먹고 사는 이들이다. 엘리트의 언어로 역사를 갖는 민중의 삶은 분석되지 않고, 민중의 성적 실천은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다.

 

우선 지금의 상황이 그동안 가려진 심각한 성폭력/성침해 경험들이 드러나는 중요한 계기라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 여성간 그리고 남성과 이 경험을 공유함을 통해 남성은 각성하고 여성은 스스로 보호하며서 동시에 주체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경험들이 더욱 적극적으로 '페미니즘'이라는 추상적 규정을 경유해서 우리 안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함의를 고민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지금까지는 기본적으로 성적인 불평등에 대한 문제제기로 귀결되는 것 같은데, 평등의 궁극적 전략과 지향이 무엇인지 모호하다는 고전적 질문은 여전히 남는다. 무엇을 위한 평등인가. 내가 보기에 평등은 결코 최종 목적이 아니다. 평등은 자유를 위한 것, 해방을 위한 것이다. '해방'과 결합되지 못하는 평등은 공허할 수 밖에 없다. 자유와 해방은 본래적으로 국가/법으로부터 주어지는 권리에 제한되지 않는다. 오히려 자유와 해방을 위한 노력의 성과가 부분적으로 법에 표현될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성과 관련한 '자유'와 '해방'의 민중적 역사적 맥락을 읽는 것이 중요해진다.

 

*그다지 관련 없는 노트...

'아니라고 표현을 했음에도 그 의사에 반하는 성적 관계'가 있었을 경우에 처벌할 수 있다는 反의사 처벌(No means No)이 도입되면 정말 안희정 처벌이 가능하다고 법원은 판단했을까? 그러나 새로운 법이 도입되어도 사법적 절차는 바뀌지 않는다. 형법이 바뀌지만 형사소송법이 바뀌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무죄추정원칙은 유지된다. 결국 '원치 않았다'는 것이 증명되어야 하는데, 검사는 다시 구체적 상황 속 여성에게서 증거를 찾을 수 밖에 없다. 여성은 다시 어떻게 '원치 않았다'는 표시를 했는지 증명해야 한다. 부동의 처벌(Yes means Yes) 또한 반의사 처벌(No means No)과 크게 다르지 않다. '반의사 처벌'에서 '부동의 처벌'로 조금더 나아간 것이지만 법적으로는 여전히 '쌍방의 동의 여부'가 증명되어야 한다. '원치 않았다'는 것이 물리적 저항을 넘어서 확대된다고 해도 물적 증거는 필수적이다. 역시나 증명은 쉽지 않다. 전통적인 성폭력과 달리 물적 증거의 확보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논리적으로 볼 때, '위력' 자체를 '위력의 행사'로 보는 관점은 앞서 말한 실질적 포섭과 같은 일상적 성착취에 관계되는 것 같다. 그래서 '위력' 자체가 위력의 행사인 경우는 대부분 법적으로 미성년자, 장애인에게 적용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보충하자면, '반의사 처벌'과 '부동의 처벌'은 사법적으로 유사하지만, 성적 관념과 관련해서는 큰 차이가 있어 보인다. 이른바 '성적 자기결정권', 즉 나의 어떤 것(권리/소유)을 침범 당하는 것과 관련하여, 전자의 경우는 그 침해 자체가 나에게 주는 상해가 너무 커서 또는 싫어서 이 폭력에 즉각적으로 저항할 것이라는 전제를 가진 성 관념이라고 한다면, 후자의 경우는 스스로 동의하지 않음은 먼저 표명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침해가 발생할 수 있고 사후적으로 처벌을 요구할 수 있다는 성 관념이다. 전자가 전통적인 정조관념, 또는 현대 가족주의적 일대일 결합의 관념과 부합한다면, 후자는 성과 가족/일대일 결합을 분리하는 성 해방 관념과 부합한다. 캐나다 또는 스웨덴 등에서 먼저 후자가 도입된 것은 가족제도 및 성 관념의 변화와 관련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여기에서 '원함'과 '동의함'이 갖는 뉘앙스의 차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원했는지 여부'를 묻는 것은 사실상 일반적인 성교가 '동의'를 암묵적 전제로 한다고 보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 대해 '원하지 않았음'을 통해 증명하여 처벌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동의 여부'를 묻는 것은 일반적인 성교에 동의를 전제할 수 없기 때문에 '동의'를 필수적인 사전 절차로 두고, 그렇지 않은 경우 처벌하자는 것이다. 전자는 이미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 대해 '원하지 않음'을 표명하는 것이고, 후자는 진행되기 이전에 상호간에 '동의'의 절차를 밟는 것이다. 후자로의 전환이 성적인 관계가 갖는 모호함의 지대를 없애는 데는 매우 유효할 것인지만, 인간의 성적 활동이 갖는 다양성과 역동성을 고려하면 상당히 비현실적이긴 하다. 성관계에서 상호 의사를 존중하는 노력이 중요하다는 교육적 효과를 기대할 수는 있겠지만...

 

** 성해방과 성노동 관련한 쟁점을 논의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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