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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의 역사화

 

8월16일. 천안공원묘지 백조4열88.

내년엔 한번 찾아뵈어야겠다. 그 전에라도 한번 뵙고 인사를 드리고 싶다.

 

박현채는 현재 우리 담론에서는 여전히 80년대에 뿌리 박혀 있다. 그것이 '계급중심론' 또는 '노동자중심론'이었나? 그것이 '민족해방론'이었나? 씁쓸하다. 우리 담론에 구성되어 있는 80년대는 사실 '단절'을 전제한 80년대임을 확인하게 된다. 그래서 80년대의 '역사화'는 거의 불가능한데, 그 이유인즉, '역사화'라는 것이 사실은 '단절'의 심화에 기댄 결과물적 인식틀로 그 '단절'을 재확인하는 작업이 불과하기 때문이다. 오늘 동국대에 다녀온 소회는 대략 이런 것이다. 내일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든다.

 

역사의 단절이라는 성찰적 문제의식이 부재한 '80년대'의 역사화는 결국 그 단절을 심화를 넘어 망각하는 지경에까지 나아간다. 애도라는 수사를 동원해도 결국 그것은 '망각'일 뿐이다. 

 

역사화는 지금 자신의 언어로 과거의 언어를 재해석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언어 자체가 그럴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음을 먼저 고백하는 것이 옳다. 이때 필요한 것은 '언어의 전치'라 할만한 '언어 파괴' 장치이다. 사실 '동아시아'라는 상호참조의 틀은 그 본래의 언어를 자신의 언어로 환원하지 않으면서도, 역사 안에서 과거의 언어가 지금 우리에게 말하게 하는 장치이다. 

 

왕묵림 선생의 <안티고네>가 바로 그런 시도였다. 게다가 그것은 연극이었다. 몸이 있었기에 그 파괴는 해체로만 그치지 않았던 것 같다. 나는 어떤 몸을 보여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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