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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

우연한 계기로 보게 되었다. 기본적인 메세지는 '반공주의에 대한 자유주의의 단죄'로 요약된다. 1980년 광주는 그렇게 다시 반공주의에 의해 억압 받은 자유주의적 가치의 기원으로 소환되고, 내전은 적색테러와 백색테러의 '동족상잔'이라는 이중부정을 거쳐 권력 내부의 '반공주의'의 기원으로 탈역사화된다. 이 또한 냉전에 대한 외재적 극복이 내전에 투사된 결과라 할 수 있다. 이것이 주선율인 이상 이 영화는 역사적으로 반공주의에 기초를 둔 신식민적 자유주의 권력에게는 조금도 불편함을 주지 않았을 것이다. 문익환 목사의 외침과 '그날이 오면', 그리고 화면에서 나타나는 현장의 역동성은 과거의 추억을 가지고 있는 많은 이들의 가슴을 울리겠지만, 이는 역사적 희생의 의미와 가능성을 이명박, 박근혜 정권의 낡은 어떤 것을 극복하고자 했던 2016~7년의 자유주의적 맥락에 가두는 효과가 영화에서도 성공했음을 나타내는 표지일 뿐이다.

희생자들에 대한 예의는 어떠해야 하는가? 주인공의 논리가 지배적 논리를 반영한 현실의 구도로부터 연역된 것이라면, 희생자를 주인공으로 만드는 것이 죽음에 대한 진정한 예의일 수 있을까? 광주, 1987... 세월호까지... 누가 희생자를 입맛에 맞게 주인공으로 만들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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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론적 권리담론

일전에 대만의 오랜 친구 가운데 하나인 대만 아방가르드 소극장의 관장에게 "신식민/분단체제와 '민주수업'의 불가능성"이라는 글을 보내준 바 있었다. 한국 쪽과의 합작 공연 기획과 관련해서 최근 상황에 대한 내 의견을 구해 왔던 것이다. 그 친구가 작품에 넣고자 한 단락의 한국어 번역을 요청해 왔다. 종말론적 권리담론을 비판하는 대목이다. 이 글을 읽어본 사람들 가운데 이 대목에 특별히 주목한 친구는 처음인 듯 싶다.

 

역사와 지리의 다원성을 소거해서 보편성을 얻은 주체는 인류와 사회로부터 추상된 권리의 담당자로 표상된다. 현대적인 보편주의의 틀에서 이러한 주체가 구성한 사회, 나아가 이러한 사회가 구성한 세계는 규범적으로 개체 사이의 차이와 사회/민족 사이의 차이를 소거한다. 이와 같은 인식론/존재론적 구도에서 세계사를 구성하는 운동적 에너지를 파악할 수 없게 된다. 결국 보편의 상 아래에서 제출된 진보의 방향은 기본적으로 이와 같은 무차별화의 완성이었다. 그리고 무차별화의 완성은 곧 횡적 시간성의 우위 하에서 역사지리적 차이가 소거된 세계의 종말이다. 물론 이와 같은 세계 종말은 담론적 구성물에 불과하다. 보다 장구한 맥락에서 보면 현실 역사의 전개는 여전히 다원성에 근거하여 자신의 논리를 관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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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수업의 불가능성

주체적 역사 복원의 계기인가? 또는 역사 단절의 공고화인가? 두 갈래로 큰 방향을 나눠 본다면 2016년 겨울 한국의 흐름은 시작부터 후자로 정향되어 있었다. 다시 말해 '민주 수업'이 될 가능성 보다는 '민주 수업'을 불가능하게 하는 담론적 선긋기가 너무도 명확했다. 그게 아니었다면 이러한 '규모' 자체가 불가능했었을 것이다.

 

광장이 '민주 수업'의 장소가 되려면 적어도 1945년과 1950년을 우리 사상운동 담론 안에 다시 들여와야 한다. 장기적인 제약조건이었던 외재적 억압의 효과를 무시할 수 없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를 핑계로 우리 내부의 단절을 합리화할 수 없다는 점이고, 이런 맥락에서 '민주'를 둘러싼 지식담당자들의 위선, 오만, 태만, 관성, 자기합리화는 '민주 수업'의 불가능성을 구성하는 핵심 요인이 된다.

 

결국 1987년에서 한 발짝도 못 나갔고, 오히려 퇴보했다는 짐작이 이제 확신으로 전환된다. 그리고 1987년을 낳았던 1960년대의 여전한 구속력 또한 확인된다. '대중'적 분노를 낳는 모순과 대립은 1960년대의 구속력 범위를 넘지 않는다는 점에서 '가상'적이다. 사례들은 무수히 많을 것이다. 이번 시위에서 역사교과서는 이러한 가상적 모순의 대표적 사례 가운데 하나다. 한편 농민의 트랙터 상경시위는 매우 드문 예외로 간주될 수 있다. 통합진보당 해산 사건 및 관련 간첩사건은 예외가 될 수도 있지만, 매우 제한적일 것이다.

 

정치의 주체가 '살아 있는 자들'만으로 제한될 때, 살아 있는 자들은 오히려 진정한 정치의 주체가 되기 어렵다. 그들은 단지 살아 있는 자들이 아니라 '살아 남은 자들'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살아 남은 자들'은 그들을 살리기 위해 죽은 이들을 기억하지 못하며, 그들이 '살아 남은 자들'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지금 그들은 그저 시혜적 '민주'가 호명한 역사 없는 '추상'적 주체일 뿐이다. 

 

광장에서 사람이 모여도 민주수업이 되지 못하는 이 상황은 하나의 부정적 추세를 갖는 악순환에 빠지게 되는 듯 하다. 마치 계속 마셔도 목이 마른 음료수와 같은 것이다. 또는 통증의 원인은 밝혀지거나 제거되지 않은채, 반복해서 통증의 완화를 위한 진통제를 먹고 있고, 점점 더 많이 먹어야 한다. 이런 조건에서 사람들의 호흡은 점점 짧아진다. 그리고 '역사'의 장역이 갖는 공간 또한 무화된다.

 

이 악순환을 끊고 역사를 다시 만날 계기가 좀처럼 나타나지 않는다. 어르신이 안 계시기 때문이다. 조정로의 소설 민주수업의 안 씨 어르신 같은 분들을 찾아가 뵈어야 한다. 살아 계시지 않아도 아직 우리 안에 책으로 글로 남아 있다.

 

지금 상황에서 '역사'를 부여잡고 있는 누군가가 있다면 아마도 '마녀사냥'의 대상이 되기 쉬울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신앙'을 가지고, 그로부터 확신과 용기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두려울 것이 없다.

 

역사는 곧 신앙을 준다. 신앙은 확신을 낳고, 확신은 용기를 낳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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