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홀로 살고 싶은 자가 이긴다.

'지켜서는 살 수가 없고, 살려면 허물어야 하는데.... 임금의 말에 정랑은 매달려 있었다. 자리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면서 정량은 임금의 말을 곱씹었다. 임금은 살려는 것이었다. 이판과 예판이 다르지 않을 것이고, 당상ㆍ당하와 성첩의 군변들과 마구간 노복이 다르지 않을 것이었다. 죽을 수도 없고 살 수도 없었지만, 정량은 글을 쓸 수 없었다. 나라가 없고 품계가 없는 세상에서 정랑은 홀로 살고 싶었다. 정랑의 몸은 남한산성에 있었다. 임금이 곶감을 보내 정랑의 노고를 위로했다. 정랑은 곶감을 윗목으로 밀쳐 놓고 먹지 않았다.

정랑은 간택되지 않을 글을 지어서 바칠 수밖에 없었다. 그것만이 살 길이었고, 달리 길은 없었다. 정랑은 붓을 들어서 썼다. 글은 쉽게 풀려 나왔다. '

 

......

 

'정랑은 미친 척을 하고 있는 것인가. 미친 척을 하고 있다면 정랑은 미치지 않았겟구나, 정랑은 제정신으로 제 앞을 내다보고 있겟구나, 임금은 또 지는구나, 정랑이 이기는구나, 정량이 임금을 이기고 묘당을 이기고 남한산성을 이기고 칸을 이기는구나. 매 맞은 정육품 수찬이 이기고, 죽은 정오품 교리가 이기고, 미치지 않은 정오품 정랑이 이기는구나......'

 

 

역사에 악역으로 기억될 수 밖에 없음을 스스로 아는... 충신의 길을 선택하는 자(최명길)가   자신을 아끼지 않고 고결한 명분으로 죽어서 살자라고 임금을 옥죄이는 자(김상헌)보다 때론 임금에게 더 절실한 거지 않나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선택이 고통인 순간에 결국 그 모두를 이기는 자들은 미친 척하거나 이름을 남기지 않고자 하는 자들인거 같다.

 

 

 

남한산성
김훈 지음/학고재

'나는 아무 편도 아니다. 나는 다만 고통 받는 자들의 편이다.' -작가의 말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