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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빠는 필요없다] 2차 세미나(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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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지]전희경, 『오빠는 필요없다』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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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랑시에르 불화 출간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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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11/10/01
    2011/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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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는 필요없다] 2차 세미나

일시 : 2011년 11월 6일 일요일 정오 즉, 12시 (아점은 먹고 오시기를 권장!)

장소 : 합정역 6번 출구

읽을 범위 : 전희경, [오빠는 필요없다] 3부부터 끝까지

 

(*) [오빠는 필요없다] 마무리 세미나를 합니다. 저번 세미나에서는 이 독서회가 항상 그렇듯이 책의 내용과 본인의 경험이 겹치는 부분들을 말하며 진행되었습니다. 논의된 주제는 여성주의적인 주제를 왜 남성은 계속 반문하는 반면 여성은 직관적으로 이해하나, 왜 가부장성에 대한 비판은 '격렬한' 반응을 낳는가, 이런 지식들이 어떤 교양으로 자리잡은 사회에서 가부장성은 어떻게 변화된 형태를 띠고 나타나고 그걸 가부장성으로 보는 건 온당할까, 능력은 젠더차별적인 것인 동시에 객관적인 것일 수 있다,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능력에 따라 여성을 차별하지 않고 그렇다고 능력을 허구적인 개념으로 비판하지 않으면서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까, 저자가 너무 상투적인 푸코주의적 표현에 묻어가지 않나, 100인위라는 대목에서 조심하는 것 같다 무서운 일이라더라, 감성과 이성의 대립이 문제인가 남성의 감성과 여성의 감정의 이중평가가 문제인가, 맑스주의와 페미니즘의 대립점은 무엇이고 왜 저자는 90년대 페미니스트들은 이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다고 말하는가 등을 이야기하였습니다.

 

(+) 이번에 온다고 하고 못/안 오신 분들 이번에 꼭 뵈용. 신규 참석 문의는 xleexyz@naver.com @bideologie입니다. 진보넷 메일은 잘 열어보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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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전희경, 『오빠는 필요없다』읽기

일시 : 2011년 10월 30일 일요일, 오전 11시 

장소 : 합정역 근방 까페

커리 : [오빠는 필요없다] 2장까지

 

(*)당분간 휴식기를 가졌던 독서회를 재개합니다. 이번에 읽을 책은 전희경의 [오빠는 필요없다]는 책으로 진보세력의 가부장제적 성격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 책입니다. 인터뷰를 대강 30명 정도 따서 책을 구성하셨더군요.

 

(+)개인적으로 요즘 페미니즘에 일부러라도 관심을 가지려고 노력중입니다. 저자신의 이론중심주의가 어떤 학문의 '남성적' 권위를 추종한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고(물론 이런 반성에 동원되는 '남성적' 형용사도 남성적일 수 있겟죠), 개인적으로는 최근 실패한 이성과의 관계에서 페미니즘적 감성이 없다고 지적을 당해서요. 뜨끔하기도 했고 끝난 마당에는 화가 나기도 해서 그래 그 페미니즘이 뭔지 보자는 심정도 없지는 않습니다. 

 

(++) 그러면서 든 생각이 페미니즘에 대해서 그런 감정을 가졌던. 것이 이번 처음은 아니더군요. 페미니스트를 바라볼 때 저의 생각은 너무 작은 문제에 골몰한다던가 한계가 있다든가 그런 생각들을 많이 했고, 또 그의 역편향으로 그런 마초성을 극복해야 된다며 모든 가치판단의 준거를 제가 '여성중심적'이라고 생각하는 사고틀에 맞추기도 했습니다.  

  지금 와서도 뭔가 정돈이 안 되는 느낌입니다.  사적이라고 왜곡된 문제들이 사실은 공적이었다는 것을 폭로하면서 시작되는 정치 속에서, 그러면 사적인 영역은 존재해서는 안 되는 것인지. 남성이 여성주의자라고 자칭하는 것은 입페미라는 기만인지, 그렇다면 남성은 페미니즘적 반성을 유지하는 유사-페미니스트로서 존재하는 게 최선인지. 이렇게 페미니스트라는 용어가 자의식의 차원에서 논의되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닌지 등등. 트위터 세계의 김영하조영일, 성노동, 야외속옷건조, 빅자지쇼 등등의 이야기들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왜 하필 이 주제들, 성에 관련된 것들이 입장이 어떻건 격앙된 반응들을 이끌어내는지도 궁금하고요.

 

  이번에 이 책을 보면서 이런 의문들에 대한 모든 답은 아니더라도 생각을 정리할 출발점을 얻고 싶습니다. 이게 제가 이 책을 함께 읽고자 하는 이유입니다. 문의사항은 xleexyz@naver.com로 주세요

 

(**)시간 및 장소는 합의하에 변경될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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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시에르 불화 출간 뉴스

  http://blog.naver.com/virilio73/80141456938

 

1. "한국이라는 레퍼런스"를 언급한 진태원의 말에 동의한다. 이론이 다른 이론과 가지는 관계뿐만이 아니라, 이론이 그것이 언표되는 장소에 대한 감각이 필요하다. 그래야 이론적 갱신이든 뭐든 이루어져도 그게 현실 자체까지는 아니더라도 현실을 대하는 태도나 전략의 변화로 이어질 수 있다. 

 

2. 이재원의 랑시에르 독해는 인상적이다. 문제가 언어학적 공통이 아니라 그런 공통을 부정하는 '척'하는 제스쳐에 있으며, 따라서 해결책은 공론장의 설립만이 아닌 현행화라는 문제의식. 랑시에르는 말의 '삶'에 대해 정말 이것저것 많이 생각해본 철학자같다. 이를 언론운동이나 기타 담론상황들에 적용해 좀더 재밌는 생각을 해볼 수도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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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0/01

"사회주의자라고 떠들며 소위 이론 얘긴 끝없이 늘어놓으면서 현안에 대해서는 말 한마디 못하는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사회주의를 얘기하는 것은 좋은데, 그래서 강만수의 메가뱅크론에는 찬성할 건가, 반대할 건가? 반대한다면 무슨 대안이 가능한가? (...) 내 얘기는 좌파를 확실히 하자는 얘기도 아니고 선명한 이념을 말하자는 얘기도 아니다. 제발 자기 머리로 생각하고 자기 입으로 말을 하라는 것이다. 대중의 바다에 나가서 대중에게 사회주의를 주입시키는 것이 아니라 대중의 말을 들으란 말이다. 대중의 말을 듣고 뭘 해야 할지를 정하라는 말이다." -이상한 모자 http://blog.jinbo.net/bideologue?page=10

 

"곰곰이 생각해 보면 아이러니칼하게도 사회과학 지식은 도로 별로 쓸모가 없는 것이 되는 것 같다. 왜냐하면 사실 사회과학은 대개 당장 쓸모가 없으며 특정한 소수에게만 그리고 특정의 목적을 위해서만 직접적인 '쓸모'가 있기 때문이다. 첫째, 이러한 지식들은 대개 그 지식의 보유자가 조직에서 높은 위치에 있을 경우에 실질적으로 사용 가능하다. 예를 들면 경영학에서 배우는 경영전략이나 경제학에서 가르치는 거시정책 같은 것은 아무리 공부해도 일반인이 그런 지식을 실제로 사용할 기회는 거의 없다. 둘째, 사회과학에서 배우는 이론적 지식은 당장 쓸모가 없다. 사회과학이란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나름대로 해석하는 세계를 다시 해석하고 재구성하는 작업이다. 예를 들면, 경영학자가 기업의 업무능률 향상법이나 혁신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업무능률이 향상되거나 혁신이 일어난 실례를 먼저 연구해야 한다. 이렇게 그 본질상 현실세계에 의존적인 사회과학이 현실의 실제상황에 상관없이 당장 적용될 수 있기를 기대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대학이 당장 쓸 만한 인재를 배출하지 못한다고 기업이 불평하는 것은 많은 부분 심각한 착각의 결과이다. 셋째, 어떤 이는 사회과학적 지식이 '당하지 않기' 위해서 필요하다고 할 수도 있다. 상당부분 맞는 말이기는 하지만 어쩌면 그 반대인 경우가 더 많다. 왜냐하면 알면서도 당하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자본이 노동을 착취한다는 것을 알고 있더라도 결국 자본이나 생산수단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먹고 살기 위해서 '자발적'으로 착취당하기(취직하기)를 바라고 선택해야 하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회과학은 극히 일부의 사람들에게만 쓸모가 있는 것일까?" -Pepe http://moraz.egloos.com/page/31

 

"나는 스피노자 철학의 더욱 예민한 세부 항목들에 대한 학문적인 논쟁을 원치 않는다. 그러한 것은 다른 때에, 다른 장소에서 했으면 좋겠다. 내가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나의 독자들이 관심을 갖기를 바라는 것은 중요하고 매우 가치 있는 사상가의 생애와 시대와 사고이다.
   이 전기의 중심에 놓여 있는 질문은 스피노자의 민족적인 배경과 사회적인 배경, 암스테르담의 포르투갈계 유대 공동체와 네덜란드 사회와 같은 두 다른 문화 사이를 유랑하는 그의 입장, 그의 지적인 발전, 그의 사회적이며 정치적인 관계와 같이, 스피노자 생애의 다양한 측면들이 어떻게 스피노자를 역사적으로 가장 급진적인 사상가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만드는 데 작용했는가 하는 점이다. 그러나 내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다른, 더욱 일반적인 질문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네덜란드의 황금기에 철학자이며 유대인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했는가?" -스티븐 내들러, 『스피노자』, 김호경 옮김, 24쪽. http://blog.jinbo.net/bideologue/127

 

"평생 현실 사회와 정치에 대한 적극적인 사고나 글쓰기를 굳이하지 않고도 나름 괜찮은 직업적 사회과학 연구자로 살 수 있고, 반대로 훌륭한 사회, 정치평론을 하기 위해 반드시 사회과학 연구자가 될 필요도 없다." -하늘타리, http://skytary.tistory.com/m/post/view/id/4

 

어제 술자리에서 '이론'이 쓸데없다는 이야기를 했다. 

 

항상 과거를 반성하고 거리를 두는 내가 이런 말을 할 때 의미하는 것은 그토록 버닝했던 현대정치철학 이론들이고, 지젝으로 시작되어 고진을 거쳐 읽은 발리바르까지를 대강 말할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쓸모 없다'는 말은 이런 이론들이 현실 분석에 도입되었을 때 위에 이상한모자님이 말한 것같은 메가뱅크 사태들에 대한 일상적인 주제들에 대해 유의미한 시사점을 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런 이론들을 통해 또는 활용해 말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겠지만 꼭 그럴 필요도 없을 뿐더러 오히려 독자층을 제한하는 효과를 가진다는 것이다. 만약 이런 제한점에도 불구하고 괜찮은 글이 쓰여진다면 그것은 그 이론이 유용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관점이 좋아서이고 이론은 오히려 그런 관점들이 구체화되는 데 짐이 되는 것이 아닐까라는 게 내 최근 가설이다.

 

하지만 어제에도 반박되었듯 이런 무리한 가설들은 쉽게 반박에 부딪친다. 그 글이 문제지, 이론 일반이 문제냐고 할 수 있다. 확실히 그렇다. 그래서 위에서 말했듯이 내가 부정하는 이론들이라는 걸 현대정치철학, 더 구체적으로는 서유럽/프랑스 출신 남성 학자들의 정치철학 이론이라는 것이라고 수정해야겠다. 그리고 위의 볼드 표시한 아닐까아닐 수 있다로 수정해야 할 것이다. 내가 아직 확신을 담아 말할 수 있을 만큼 국내든 국외의 글을 읽지 못했고, 적어도 최소한 나를 반박한 사람만큼은 읽지 못했지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잘못 생각했다기보다는 자신있게 주장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어제 자리를 마치고 나서, 좀더 고집을 부릴 걸 하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어제도 말했지만 "필요없다"나 "아니다"같은 무리하고 취약한 형태의 주장을 하는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돌이켜보면 정말 이론을 활용해서 좋은 시사점을 던져준 글을 본 기억이 없다. 뭔가 얻었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현실을 새롭게 보기보다는 그 이론의 언어게임의 예증으로서의 현실을 본 것일 뿐이었다. 그리하여 내가 이것들을 읽는 데 말하는 데 쓰는 데 들이는 노력이 헛되지 않았다는 위로를 얻고자 한 것일 뿐이었다.

 

과도한 자기학대 성향이 아마 이런 생각을 하는 데 작용하고 있을 것이다. 아마 꼭 (이런 문헌들을 읽는) 노력을 들인 것이 의미가 있고, 의미가 있는 것이 그런 종류들을 읽는 노력을 읽어야만 한다는 것은 아니라는 걸 인정하는 정도로 이야기를 갈무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차분히 생각해 보면 이게 맞는 거 같다. 그런데 쿨하게 그러지 못하겠는 게 이런 필연성이 없다는 것, 그러니까 해도 상관없고 안 해도 상관없는 일을 해왔고 또 그걸 자랑스럽게 생각했다는 게 부끄럽다. 화가 난다. 그리고 이 다음에 뭘 할지 생각하니, 그토록 확신을 가졌던 행위 일반에 대해 의심을 하니 딱히 뭘 할지 모르겠다. 그래서 주로 하는 게 과거를 욕하는 거다. 이게 그나마 내 정체성을 어느정도 보장해 주는 최소한의 행위다.

 

그리고 이런 정체성 보장 욕구는 과거의 자신에 대한 것만이 아니라, 내 또래 비슷한 인물들에 대한 것이기도 한다. 내 근처에는 가까이는 아니지만 항상 나보다 많이 읽는 사람이 있고, 나보다 많이 쓰는 사람이 있다. 나는 언제나 마음 속에서는 그들을 비웃지만 생각해보면 그들보다 내가 낫다는 걸 객관적으로 증명해줄 게 없다. 그래서 그들이 읽지 않는 책을 찾아 읽고, 쓰지 않을 것 같은 글을 쓰다 여기에 온 게 아닐까 싶다. 그렇게 생각해 보면 나는 그렇게 애늙은이로 지내고 싶어했건만 영락없는 20대다. 자기자신에 대한 고집 없이 주변과의 경쟁에 전전긍긍하는 모습, 거기에다가 당당하지도 못하고 게을러서 대놓고 경쟁에 나서지도 않는다.

 

 

이런 말들을 하는 게 마냥 좋지만은 않다. 이렇게 내 주장의 개인적인 맥락을 고백하는 것은 내 주장의 표면적 비논리성을 나라는 인간의 생애과정 안에서 좀더 구체적으로 이해해주길 바라며 하는 짓이다. 그러나 은근슬쩍 그라운드를 홈으로 옮기려는 것 같아서 치사한 것 같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들어와 준다고 해도 나라는 인간의 정신병리에 초점을 맞춤으로서 내가 내 주장에 대해 가지고 있는 믿음을 설득시키기 보다는 약화시키는 것 같아서 속상하다.

 

하지만 어쩌랴. 내가 사실 이리저리 말하는 논점들은 이런 요약성 포스트로는 입증이 안 되는 것들이다. 구체적으로 글 하나하나를 뜯어보고 반박하고 그런 시간을 들이는 과정을 거쳐야 나에게도 좋고 상대에게도 유익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그럼에도 내가 이런 포스트를 쓰는 것은 말그대로 귀찮아서, 귀찮아서이다. 시간을 들이는 것도 감정에 휩싸이는 것도 귀찮다. 그러면서 은근슬쩍 이해해달라고, 상대로 하여금 귀찮음을 극복해 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보니 요즘 가장 자주 많이 하는 말이 "엉망이다" "뭐가 뭔지 모르겠다" 대중 이런 것들이더라. 나름 이렇게 과거와 타인에 대한 안티테제로 떠오른 아이디어들을 구체화시켜보려 뉴스도 읽어보고 그렇지만 잘 되지가 않는다. 내가 취하는 변화란 구매하는 책들의 종류를 바꾸는 정도이다. 읽는 책의 종류를 바꾸는 것은 아니다. 그냥 사는 책들의 목록을 바꾼다. 국내 저자의 시사적이거나, 철학보다는 사회과학적인 종류의 책을 산다. 사고 읽지는 않는다. 알라딘 구매리스트와 책장이 나로 하여금 내 변화를 돌아보게 해주는, "나는 어느 정도 변했고 나아지고 있는 것 같다"라는 입증을 어느정도 해주는 물질적 증거들이다. 독서노트를 꾸준히 작성했다면 이것들이 좀더 확실한 증거들이 되어줬겠지만 원래 그런 것들은 쓰지를 않았다.

 

사실 오늘도 조앤 스콧(여성 페미니즘 역사학자, 지금까지 읽어왔던 남성 정치철학자와 왠지 대비되는)과 송태경의 책을 사서 위안을 좀 얻을 예정이었다. 그런데 위안이 생각만큼 잘 안 될 것 같다. 결국 과거와 단절하기 위해 한다는 게 활자와 관련된 일, 그것도 사는 책을 바꾸는 정도라니. 그래서 요즘은 운동이나 댄스나 활자와 관련되지 않은 취미를 가져볼까 싶기도 하다.

 

그래도 나같은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쓰는 것 같다. 쓰면서 생각을 정리해야 한다. 차곡차곡 정리를 하지 않으면 계속 맴돌게만 되는 사람이다. 적어도 지금 어쨌든 써놓으면 지금처럼 과거에 마냥 부끄러워 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과거를 폄하하려는 순간 활자들이 과거의 나를 대변해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고 대신 주장해 줄 것이니까. 그래서 못하나 다시 박으면 될 일을 다시 집을 시공하는 그런 일을 하게 하지는 않을 테니까. 내 삶이 쌓여가는 그런 기분을 느끼게 해줄 게 필요하다. 비록 매우 어린 나이지만 활자와 떨어지기는 이미 어느 정도는 늦었다 싶다.

 

현대정치철학에 대해서 실컷 욕을 했건만 랑시에르의 말 한 구절이 생각난다.

 

"정치는...자기 일 외에는 다른 것을 살필 '시간이 없는' 사람들이 분노하고 고통받는 동물이 아니라 공동체에 참여하면서 말하는 존재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자기들에게 없는 시간을 가질 때에야 비로소 시작된다" -자크 랑시에르, [문학의 정치]

 

어제 내가 이 구절을 이야기하자 지금까지 했던 말과 모순되지 않느냐고 했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 구절은 '치안'과 '정치'라는 그런 개념을 창안한 랑시에르가 아닌, 그런 개념들이 도출된 구체적 상황들에 집중하는 랑시에르를 보여주고 있다. 내가 거리를 두고 싶은 건 "읽고 쓰는 것" 일반이라기보다는 자신들의 삶이나 상황에서 관련된 문제에서 시작하지 않는 그런 읽기와 쓰기다(충분하게 설명하지 못해 죄송하다). 랑시에르의 이 아이디어는 그런 입장들과 거리를 두면서도 다시 글과 말이 삶을 얻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생각을 해보게 해준다.

 

또 말에 대한 믿음이 활자덕후로서의 대한 애호만이 아닌 다른 사회적 근거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해 보게 해준 다른 저자는 한윤형이다. 안운사에 대한 단상(http://blog.jinbo.net/bideologue/101 ) 2절에 그런 생각들을 끄적여 보았었다.

 

주절대다 보니 어쨌든 작은 결론은 나온 것 같다. 어쨌든 활자랑 아직은 좀더 친하게 지내야겠다는 것. 연애로 치면 아직 1년도 못 넘은 시기 같다. 남들의 연애담을 들으며 이런저런 상상을 해보지만 아직은 모든 게 다 설익은 떄 같다.

 

그런데 나는 1년 이상 연애를 해본 적이 없잖아. 이러니 안 될거야 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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