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2011/11

2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11/11/20
    [오빠는 필요없다] 독서회 후기
    닉네임
  2. 2011/11/09
    올해 배운 것
    닉네임

[오빠는 필요없다] 독서회 후기

이 책은 90년대 중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진보세력 내부에서의 성차별 문제와 이에 대한 극복 시도들에 대해서 주로 다루고 있다. 부제는 비록 "진보의 가부장제에 도전한 여자들"이지만 여기서 "진보"는 주로 학생운동에 초점이 맞춰져 있으며, "가부장제"는 성소수자보다는 생물학적/사회적 남성/여성 간의 차별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 이러한 주제의 제한성은 인터뷰이의 성격에 기인하기도 하지만 이 책이 던지고자 하는 쟁점, 권위주의와 차별에 대항하는 집단 자신 역시 저항대상의 논리를 나름의 방식으로 체화하고 있음을 드러내려는 목적의식에도 기인한다.

 

우리 독서회는 총 2회에 걸쳐 진행되었다.

 

1회 독서회는 참가자들이 이 책의 경우들과 중복되는 자신의 사례와 경험들을 말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항상 컵을 씻는 여성들, 외모꾸미기에 대한 아니꼬운 시선들, 더 큰 문제틀 뒤에 부차적으로 취급되는 젠더차별, 마치 이야기만 하면 전체 운동/담론의 진행을 방해한다고 여기는 의견들 등등.

 

한 참석자는 요즘은 이런 담론 자체가 일반화되어서 그런지 좀더 가부장제라는 것이 교묘한 형태로 드러나는 것이 아닌가, 그런 이야기들을 접하고 있으면 가끔 자신도 성차별 문제가 정말 중요한 것인지 있는 것인지 헷갈리기도 한다고 했다. 전희경의 말을 빌어보자.

 

"1990년대 중반 이후 '흡수와 포함' 논리가 약화되면서 좀더 세련된 형태로 등장한 '후원자 노릇' 전략으로, '여성, 환경, 장애 등 다양한 적대'라는 수사를 통해 새롭게 부상하는 다른 목소리들의 존재를 '인정'하면서 동시에 '동원'하려는 시도다. (...) 1990년대 중후반에 이르자 학생회 선거에 교육, 환경, 여성, 인권, 장애, 성정치 등의 이슈들이 마치 패키지처럼 단골로 언급되기 시작했고, 이 이슈들 사이의 관계는 '진보운동(좌파운동)'이라는 큰 틀 속에서 '대등한 연대'를 이루자는 슬로건으로 정리됐다."(207쪽)

 

우리는 지금 이 책 이후의 시대를 살고 있다. 이러한 경향성은 아마 더 늘어났으면 몰라도 줄지는 않았을 것이다. 페미니즘이라는 주제는 진지한 문제제기나 고민거리보다는 "응 그래 그래 알았어 우쭈쭈"라는 반응을 이끌어내는 중요한 것 같으면서도 성가시고 무엇보다 '김빠진' 쟁점인 것이다. 이런 점을 고려했을 때 이 책은 과거에 대한 참고가 아니라 현실에 대한 유효한 지적으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얘기를 나누면서도 이 책의 입장과 완전히 동일화하기 힘든 부분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전희경은 운동권 내부 업무의 분업이 성차별적으로 이뤄졌다는 점을 지적한다. 운동권 내 분업은 객관적 능력과 적성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남자는 중요한 일이 어울리고, 여자는 이걸 뒷받침하는 일이 어울려"같은 식의 편견에 기초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나아가 객관적 능력이라는 것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으며 이러한 편견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적 수사로 사용되었다고 그녀는 본다.

 

참석자 중 하나(남성)는 이런 말에 수긍을 하면서도 실제 업무에서 이를 정확히 적용하기는 어려운 점을 있다고 토로했다. 이를테면 어떤 직장에서는 컴퓨터로 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여성은 컴퓨터와 별로 친하지 않은 경향이 있어서 이러한 마무리 작업을 맡기기가 어렵다. 실제로 일이 마무리되어야 하는 시간이 있는데 마냥 기다려 줄 수도 없으며 일의 완성도 역시 격차가 없다고 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이것을 여성 개인의 책임으로 물을 수가 없는 것이 여성이 기계와 친하지 않은 것은 우리 사회가 여성에게 요구하는 젠더상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당장 일을 여성에게 맡기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해법은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국가나 회사 차원의 여성 대상의 컴퓨터 특강?

 

2회 세미나에서는 비슷하지만 또 다른 방향에서 이 책과 동일시하기 어려운 지점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다른 참석자(여성)는 어떤 사태를 '성폭력'으로 규정하고 누군가를 '가해자'라고 부르는 것이 역으로 폭력의 행사일 수 있다고 말하며 이를 '가해자 엄벌주의'라는 프레임으로 불렀다. "우리가 하는 일에 찬성하지 않거나 반대하는 사람은 모두 잠재적/현실적 마초다" "내가 고통받는 것을 모른 척하는 것은 폭력이다"는 식의 논의. 자신의 주관적 고통을 절대화하여 정치적 올바름과 가치평가의 기준으로 제시하고 이에 맞지 않는 사람들을 단죄하는 형태.

 

나는 이런 이야기를 들으며 수긍을 하면서 동시에 수긍하는 데 곤란함을 느꼈다. 왜냐면 남성이기 때문이다. 섣부른 동의는 "그래 역시 너는 말이 통하는 여자야"하는 식으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이런 유혹은 이 책을 처음 읽을 때부터 작거나 큰 형태로 이어져 왔다. 1회 세미나에서 나는 어떤 식으로든 이 책에 대한 동일시와 거리를 두려고 노력했으며(물론 이런 동일시가 외면으로 이어지는 것에 주의하면서 혹은 그렇게 보이기를 연기하면서) 지인의 피해자중심주의 비판을 은밀하게 참고해 왔었다. 이런 과정에서 잊혀지게 되는 것은 내가 실제로 가부장적 편견에 기초해 타인에게 주었던 편견, 그리고 이 사회에서 이뤄지고 있는 그런 종류의 일들이다.

 

이를테면 전희경이 이 책에서 강렬하게 비판하고 있는 "성차별에 대한 문제제기는 운동(이나 좀 더 큰 일)의 전진에 해가 된다"는 논의는 현재의 학생운동 집단에서 앞서 말했듯 좀더 교묘한 형태로, 그리고 주변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나같은 경우에는 내 타임라인 상의 지잡동이라는 집단의 일부 회원들 사태같은 예가 이에 해당했다. 성폭력에 대한 정황이 분명해지고 있음에도 이들은 자신이 부당한 혐의를 받고 있으며 이런 자잘한 문제제기들 때문에 자신들의 "대의"가 무시되고 있다고 분노했다. 한 논평자는 이 사태를 보며 "유능한 활동가"가 매장되고 있다고 개탄하기도 했다.

 

이 때 주목해야 할 것이 이들이 동원했던 프레임이 바로 앞서 말한 '가해자 엄벌주의'와 흡사한 것이었다는 것이다. 피해자의 나르시즘에 기초한 가해자라는 낙인 찍기. 그렇다면 앞서 그 참석자가 말한 맥락은 틀린 얘기일까?

 

여기서 우리는 '결백한 말', 어떤 상황에서 쓰이든 정당한 말을 찾는 것이 문제일 수 있다는 이야기를 나눴다. 피해자의 고통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옳은 상황이 있고, 가해자라는 낙인을 문제시삼아야 되는 상황이 있다. 말의 옳고 그름은 그 내용만이 아니라 그 말이 쓰이는 맥락에 근거한다. 나와 같는 남성이 '가해자 엄벌주의'에 대한 프레임에 공감할 때의 위협 역시 이런 부분에서 등장할 것이다. 말하는 사람의 위치와 듣는 사람의 위치.

 

남성과 여성의 관계가 중립적인 것이 아니라 권력관계를 수반하는 것임을 자각하는 순간부터 둘의 관계에 대해서 말할 때는 고도의 도덕적 긴장이 요구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상대방의 입장을 들으면서도 완전히 공감하거나 동일시하는 것은 어떤 맹목일 수 있음을 이해하기.

 

이런 것들을 [오빠는 필요없다] 독서회에 남성 참석자로서 2회 참여하면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올해 배운 것

거의 매일 다양한 이유로 신세를 비관하다 문득 내가 얼마나 시원하고 사려깊은 사람들과 만나고 있는지를 생각해보게 되었다. 얼마나 똑똑하고 매력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물론 그러한 사람들이지만 이제 그 형용사들은 별 의미가 없다. 이 사람들은 내게 소중한 사람들이다.

 

물론 나는 교활하고 계산적인 사람이니 똑똑하거나 매력있는 사람이 아니면 애초에 안 만났겠지. 내가 요즘 안 만나는 사람들이나 유명해진 친구들에게 실없는 멘션들을 친밀함을 전시한답시고 날리는 것들을 보면 어렵지 않게 추론할 수 있다.

 

언제나 그렇듯이 여기서도 나는 후회할 과거를 발견한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은 후회는 후회의 몫으로 남기고 어찌되었든 맺게 된 인연에 잠깐은 감사해 보고 싶다.

 

항상 내가 나의 자질구레한 행동과 성격에 몰두하고, 그리고 나서 그것을 부끄럽게 또는 자랑스럽게 보여줬을 때 그것들을 무시해버리고 그냥 나와 함께 시간을 보내준 시원함에 감사한다. 또한 항상 내가 나 자신에 관대하기를 거부 혹은 남이 나 자신을 공격하기 전에 미리 선수를 치고 있을 때 그냥 현시점의 나에 머물러 주었던 그 사려깊음에 감사한다.

 

나는 언제나 나를 완벽하게 이해시키고 싶어했지만 결국 내가 위로를 얻은 곳은 어떤 몰이해들, 그런 몰이해들이 조금씩 섞인 이해였다. 이상하게도 나는 이해받지 못했지만 그게 더이상은 아주 중요한 문제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올 한 해가 지나고 있다. 올해 알게 된 건 이것 하나다.  

 

이 편지에 수신자를 별도로 쓰진 않지만 편지가 도착해 읽힐 것을 의심하지 않겠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