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한때

2008/11/27 14:23 생활감상문

10월에 쓴 [시의 한때] 에서 나의 한때에 관한 글로 늘어났다. (회사 블로그 '이 책하고 인사하실래요'에 포스팅용으로 썼는데, 도판과 캡션은 횬아상이 더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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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버거 作 <자화상>
_ 화가, 사진이론가, 소설가, 다큐멘터리 작가, 사회비평가... 많은 말로 그를 규정할 수 있지만 결국 그 모든 활동은 '잘 봄'에서 나오는 것이겠지요.

올 가을이 제겐 좀 힘들었습니다. 개인적으로 힘든 일들이 있었고, 연일 접하게 되는 죽음의 소식들은 그 힘겨움에 무거운 분위기를 흩뿌렸지요. 매일 커져 가는 삶에 대한 부담감은 저를 짓눌렀고, 한동안 두통과 호흡곤란, 불면증으로 고생했습니다. 그 힘든 와중에 문득 기댈 데가 생각났습니다. ‘그 사람의 책을 읽으면, 그의 글이라면…… 버틸 힘을 줄지도 몰라.’ 그의 글에선 전 늘 삶에 대한 어떤 절박함을 느꼈으니까요. 어찌 되었든 ‘살겠다는 의지’(will to live, 니체가 한 말이라더군요) 말입니다. 그게 뭔지는 딱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것을 얻을 수 있으리라는 막연한 믿음, 동아줄 잡는 심정으로 서둘러 그의 책 한 권을 입수했습니다.

『그리고 사진처럼 덧없는 우리들의 얼굴, 내 가슴』(열화당, 2004)는 본래 존 버거가 1984년에 출간한 에세이집(And Our Faces, My Heart, Brief as Photo)입니다. 존 버거는 자신이 직접 만난 사람들, 풍경의 모습을 치밀한 산문을 통해 마치 사진을 찍듯이 생생하게 그려냅니다. 그러나 그 시선은 대상의 존재를 파악해서 제멋대로 분류해 버리는 폭력을 취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저 성실한 관찰자로서 일차적인 묘사와 설명만을 통해서 이야기 속 장면이 손에 잡힐 듯 보여 줄 뿐입니다. 바로 그 때문에 누구나 자신의 경험을 떠올리면서 그가 만난 사물과 인물들에게 애정과 존경을 느끼고, 나아가 살아 있다는 것 자체에 존경과 감사를 표하게 됩니다(그래서인지 그의 최신작은 『모든 것을 소중히 하라』는 제목을 달았더랍니다).

언젠가 한때 살고 있던 한옥의 쪽마루에 앉아 있던 기억이 있습니다. 저의 첫 번째 기억입니다. 서너 살 무렵의 일이지요. 1분, 아니 10초쯤일까요? 기억의 지속은 그 정도뿐입니다. 날은 맑았고, 햇볕에 따끈하니 데워진 쪽마루엔 저 혼자였습니다. 열려 있던 대문 사이로 우유배달원이 슬며시 들어와 아무 말 없이 피라미드형 폴리백에 담긴 흰 우유를 놔두고는 바로 사라졌습니다. ‘우유가 왔네~. 우유가 왔어!’ 왜인지 기억할 수는 없지만 그냥 기분이 좋았습니다.

바람이 불었던가요? 더웠던가요? 계절은 봄이었던가요? 기억나지 않습니다. 아무런 말도 없고, 특별한 감정이나 인과성도 없이 순수하게 지각된 그 충족성이 그 순간을 유리구슬처럼 단단하게 만들어 기억될 만한 순간으로 보관하고 있습니다. 점쟁이가 크리스털 구슬을 들여다보듯이 저는 그 기억을 봅니다. 눈 끝에 남아 있는 잔상을 긁어내 손끝에 옮기듯 한 자 한 자 글자판을 치는 지금, 쪽마루를 보고, 마루의 결과 옹이와 햇빛에 반짝이던 나무의 색깔을 보고, 그늘진 부분과 볕에 데워진 부분의 온도를 확인하던 제 고사리손을 보고, 그 좁은 시야 안쪽에 등장한 우유를 한참 동안 쳐다보고, 그러면서 지금은 그 실체를 파악할 수 없지만 제가 그 순간 어떤 감정을 느꼈던 것과, 그 감정이 섬세하게 제 목의 근육을 움직이던 그 느낌을 되살리듯 침을 삼킵니다.

어쩌면 이 기억도 조작된 것일지도 모릅니다. 곁에 누군가 있었을지도 모르고, 그저 순수하게 독립적인 사건이 아니라 제가 기억하고 있는 다른 사건의 전후에 이어진 순간이 따로 분리된 것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제가 그것을 보고 있다고 느끼는 한, 그것이 그만큼 강력한 힘을 갖게 됩니다. 거기에는 끝없이 그 ‘봄’을 재생함으로써 제가 느낀 강력한 느낌—어떠한 ‘목적’도 없이 그저 살아 있음만으로도 충만하다는 감각을 재생하려는 저의 무의식적인 의지가 작용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천진난만하게 유리구슬을 들여다보이는 이가 더 들여다보면 무언가 하나라도 더 볼 듯이, 제 마음도 그렇게 어떤 지향성으로 움직임을 갖습니다. 설령 거기에 어떠한 ‘조작’이 있더라도 그것은 세계에 대한 이미지를 구성하면서 세계와 관계맺는 방식으로서의 ‘생성’일 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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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울 클레 作 <눈>
_ 이 작품이 존 버거를 떠올리게 하는 것은 파울 클레의 삶과 세계가 존 버거의 그것과 닮았기 때문입니다. 파울 클레는 음악가이자 화가였고, 또 미술평론가였죠. <눈>은 그의 전시회 '눈으로 마음으로'에 전시된 작품으로, 파울 클레는 마음으로 보는 세계를 그렸답니다.


존 버거는 근대(서양)의 과학적이고 계량적인 시간관이 다른 ‘시간’들을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즉 시간이 진보만을 말할 때 역사는 오히려 퇴행만을 향해 나아갔다고 말합니다. 인간과 시간이 분리되면서 모든 것은 덧없어지고, 교환 가능한 것으로 바뀌었기 때문이지요. 문명과 도시화가 인간의 근원적 ‘공간’인 집을 와해시키자 영원히 떠도는 우리에겐 오직 사랑만이 소중해졌습니다. 뭐 그렇다고 그가 연애를 반대하는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그는 사랑마저도 측량당하는 이 광폭한 시대에 상대를 온전히 느끼고 감각하고 열망하는 ‘낭만적인 사랑’(아마도 이것은 소유하지 않고 향유하는 사랑이 아닐까 합니다)과 ‘시’(언어)로 다시 세워진 집을 대안으로 제시합니다(올 겨울 출간을 목표로 『하이데거의 사이-예술론』이라는 책을 편집 중인 제게 『그리고 사진처럼 덧없는 우리들의 얼굴, 내 가슴』은 또한 하이데거의 현상학과 예술철학의 의미를 맛보는 중요한 친구-텍스트가 되어 주기도 했습니다^ ^).

하지만 그의 글이 세상을 그저 아름답게만 보고, 신비화하는 것이었다면, 제가 얻을 수 있는 것은 다만 얄팍한 위로였을 겝니다. 글의 첫머리에 적었던, 제가 느낀 두려움의 기반은 ‘죽음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혹은 죽음을 어찌 다뤄야 할지 여전히 모르고 있는 저 자신에 대한 난감함이었습니다. 지친(至親)이신 외할머님이 돌아가셨는데, 제대로 울 줄도, 힘들어하시는 어머니를 위로할 줄도, 슬픈 것인지 어떤 것인지 잘 느낄 줄도 모르는 제가 앞으로 어찌 살아갈 것인가 하는 막연한 생각을 한편으로 했지요. 한편으론 덧없는 것이 삶이니까요. “사람 사는 게 다 거기서 거기지”라는 식의 웅성거림 앞에서, ‘얼른 잊어버리고 산 사람은 또 그렇게 살아야지’ 하는 조급함에 빠져서 말입니다. 한 사람의 죽음은 살아 있는 가족들을 통합시키지만, 그 통합은 가끔은 평균적인 삶의 양식에 참여하도록 강제하는 봉합이 되기도 합니다. 그 역시 제게는 큰 두려움이었습니다. 남들처럼 살 것인가, 아니면 원하는 대로 살 것인가. 삶에서 무엇을 원하는지조차 아직 확실하지 않은데……. 뭐 그런 생각들이 저를 힘들게 했습니다. 한 가지 삶의 양식에 저를 맞출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고민 앞에서 저는 이성을 잃고 눈 먼 장님이 된 같았습니다. 앞길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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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벨 게레로 作 <눈과 손>
_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나를 향해 다가왔다. ... 나는 모든 곳에 존재했다. ... 시각은 눈을 의미한다. 눈은 보이는 것과 보는 존재가 만나, 관계를 이루어내는 곳이다.(본문 중에서)


그런데 이 책을 생각해 내고 찾아 읽으면서, 존 버거가 제게 안겨준 ‘존재의 울림’은 언뜻 알아차리기 힘든 미묘한 것이었지만, 꽉 막혀 있던 제 숨구멍을 열어 피가 돌고, 쫓기는 기분에서 벗어나 평정을 되찾게 했습니다. 그에게서 잘 보는 자, 찬찬히 보는 자, ‘봄’으로서 존재와 눈맞추는 자로서 시인의 자질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시는, 비록 해설적인 경우에라도 소설과는 다르다. 소설은 승리와 패배로 끝나는 모든 종류의 싸움에 대한 것이다. 소설 속에서는 모든 것이 결과가 분명하게 드러나게 되는 끝을 향해 진행해 간다. 시는 그런 승리와 패배에는 관심이 없다. 시는 부상당한 이를 돌보면서, 또 승자의 환희와 두려움에 떠는 패자의 낮은 독백에 귀를 기울이면서, 싸움터를 가로질러 간다. 시는 일종의 평화를 가져다준다. 값싼 안심이나 마취에 의해서가 아닌, 일단 한번 경험된 것은 어떤 것이라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사라질 수 없다는 약속과 인식에 따른 평화이다. 그러나 그 약속은 기념비에 대한 약속이 아니다.(여전히 싸움터에 있으면서 누가 기념비를 바랄 수 있겠는가.) 언어야말로, 외치고 요구하는 그 경험들을 받아들이고 깃들이게 하는 안식처라는 사실에 대한 약속인 것이다”

('시의 한때'_본문 29~30쪽)


시공간을 초월하고, 시각과 청각, 후각을 모두 동원하는 그의 글들은 신비롭고도 소박합니다. 거기엔 어떤 단단함과 굳셈이 있습니다. 그것은 한 인간이 자기 자신을, 또한 세계를 있는 그대로 즐기게 하는 감각입니다. 화가로, 미술비평가로, 소설가로, 다큐멘터리 작가로, 사회비평가로, 평화운동가로, 농부로 끊임없이 삶(생명)의 영역을 확장해 온 존 버거의 힘은 잘 봄(현상하는 세계를 제대로 지각함)에서 나오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석가는 “눈 있는 자가 와서 보라”고 했습니다. 진리를 다루는 방법이지요. 거창한 진리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어찌 살지에 대한 앎이 가장 큰 진리가 아닐까요? 저도 보이지 않는 앞길을 너무 열심히 찾지 않기로 했습니다(미래와 사회에 대한 전망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제가 경험한 것들에서 얻은 깨달음이 어떻게 지금을 살아가는 데 힘이 되는가를 또한 잘 보고 느끼면서 끊임없이 세계와 관계를 맺으면서, 그것에서 답을 찾아 가리라고 제 존재를 믿는 것, 그것이 지금 제가 두려움 없이 살 수 있는 가장 가까운 방법임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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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27 14:23 2008/11/27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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