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한 겨울날엔 청국장에 파래김

2009/01/18 23:57 생활감상문

계속 바쁘던 와중에... 일들이 조금씩 줄어가고 있지만... 한편으론 또 새로운 일들이 기다리고 있음을 잘 알고 있고... 일이 많다는 것 자체에 부담감을 느끼거나 짜증을 내거나 하는 단계는 지금 만드는 책들이 일단 재미있기 때문에 이미 한참 전에 지나갔지만... 신체적인 힘겨움보다는 신경 체계쯤에 이상이 생겼달까, 한 번 오류가 나면 계속 이상한 문자가 찍힌 종이를 토해 내는 프린터처럼 그렇게 어딘가 계속 오작동이다. 지난 일주일 간은... 하루라도 무언가 놓치지 않고 지나가는 날이 없어서... 잘하고 싶다, 잘해야지... 그렇게 매 순간 다짐하는데도 왜 이 모냥일까... 뭐 그렇게 되어... 오늘 아침엔 혼자 있다가 살짝 히스테리가 와서 쫌 울 뻔했다. 물론 어제 술 마시고 새벽에 좀 힘들어서 잠깐 잠을 설치고 은근한 숙취가 남아 있는 상태에서 일어나자마자... 어제의 실수(업무 메일에 잘못된 파일 부착)를 뒤늦게 발견하니까... 더 짜증이 난 거였지만 말이다.

기분이 확 상해서... 하려던 빨래도 내비두고, 멍하니 인터넷 조금 두드리다가... 겨우겨우... 강쿤과 S군 결혼식 갔다가... 회사 가서 일하고 집에 왔다.엄마가 어깨 인대를 다치셔서 설연휴 전후로 수술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상황이라... 그 와중에 Y양이 수요일에 집에 다녀오면서(난 마감 중이라 목요일에 겨우 저녁 먹으러 들렀다 오고) 가져온 김치 한 포기가 자르지도 않은 채 냉장고에 대기하는 가운데, 그 전 주에 온 쉰김치를 해결해야겠다 싶어서.... 집앞 야채가게에 들러 조생귤 10개에 두부 한 모를 사왔다.

미리 전기밥솥에 앉혀놓은 현미+콩, 취사 버튼 눌러주고... 오랜만에 청국장을 끓였다. 며칠전 냉동실 살짝 정리하다가 [엄마가 작년에 직접 띄워 보내신] 청국장이 뒷구석에 처박혀 있는 걸 보기도 했고, 결혼식장에서 회사 가는 차 안에서 정쿤이 부엌 옆 방을 쓰는 관계로다 청국장 끓인 날이면 이불에서 청국장 냄새가 난다는 소리를 하니까... 그간 쉰김치 처리는 거의 꽁치찌개였는데... 이번엔 청국장이 된 셈이다.

나에게 요리는 명상과 같아서... (한 번에 두세 가지 요리만 하지 않으면) 딱히 어떠한 메뉴얼이 없어도 머릿속에 자연스러운 순서(심지어 해보지 않은 요리까지도)가 정리되면서 기분이 좀 정리되는 경향이 있다. 아주 오랜만에 끓이는 청국장인데도... 할 일은 다 정해져 있다. 일단 냄새 나는 건 싫으니까 현관문부터 열어놨다. 쉰김치 물에 씻어 꼭 짜서 미리 달군 뚝배기에서 현미유에 볶다가 청국장 부숴넣고 멸치가루+다시마가루 반 숟잘 넣고, 김치국물 약간에 찬 물 붇고 보글보글 끓을 때까지 기다려서 김치 간이 좀 우러나왔다 싶을 때 간 봐서 참치액으로 간 맞추고 다진 파, 마늘이랑 두부 넣고... 중간중간 거품 걷어내 주고... 그러면서 옆의 화구에서는 엄마가 보내 주신 파래김 굽고, 떨어진 김가루 닦고, 밥 뜸들기 기다리는 동안 H양이랑 서로 숙취 어떤지 잠시 메신저로 수다 떨다가... 밥 다 되니까 청국장 한 사발에 밥 반 공기, 파래김 약간, 기본반찬 한 가지... 고기가 안 들어간 청국장이라 맛이 개운하다. 100% 현미(+현미찹쌀)밥이라 밥은 까끌까끌하면서도 씹는 탄력이 대단. 파래김은 바다냄새가 나고... 그 와중에 찌개 속 두부는 부들부들. 아~ 겨울엔 이 맛이거든. 아침에 우유 한 잔에 사과 하나, 점심엔 마땅치 않은 결혼식 뷔페... 이제 좀 뭘 먹는 거 같네.

 

그러곤 노곤했는지, 30분 만에 초저녁인 7시 반인데 그냥 쓰러져 죽은 듯 잤다. 10시쯤 깨서는 불 꺼진 방, 오늘따라 사방이 고요. 시간이 저녁인지, 밤인지, 새벽인지도 구분 못할 정도로. 깬 지 두 시간 지났는데 아직도 몽롱하다. 다시 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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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18 23:57 2009/01/18 2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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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염동  2009/01/19 01:1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맛나겠다. 참치액은 근데 어디서 사요?
  2. 강이  2009/01/19 07: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큰 마트에서도 팔고, 지마켓에서도 구할 수 있어요. 참치액 처음 써보신 분들은 생각보다 향이 강해서 좀 놀라는 경우가 있어요. 일단 찌개나 국 끓일 때 소금간 맞추는 것보다 조금 일찍 넣어 향을 좀 날리시는 게 맛내기 비법입니다. 미역국도 참치액으로 간 맞추면 맛이 한층 더 깊어지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