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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운영 두번째 소설집 '명랑'

 1. 야생의 여성성이라는 도발적 문제제기


정확히 구분 짓는 것은 위험하지만 대체로 80년대 여성소설이 민중성이라는 시대적 요구에 부합하여 자본주의나 가부장제와 같은 거대담론에 관심을 기울였다면, 90년대 여성소설은 여성억압의 원인을 좀 더 미시적인 권력관계나 다양한 생활문화 영역 속에서 찾으려 노력했다. 동시에 그 동안 수동적이고 나약한 것으로만 받아들여졌던 여성성을 긍정하고 재규정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가 전개되었다. 그 결과 오늘날 여성 고유의 내면심리, 사고방식, 생활방식 전반에 관한 논의가 넘쳐나고 있으며, 이제 여성주의 담론이 당당히 제자리를 찾은 것처럼 여성문학 역시 문학의 주요한 영역으로 그 자리를 굳혔다.

2000년대 들어 연애나 결혼 문제를 쿨한 감수성으로 그려내거나 센스있는 문장과 재기 넘치는 글쓰기로 신세대 독자들을 사로잡은 소설들은 많지만, 진지한 여성성에 대한 고민을 담아내고 있는 소설은 그렇게 많지 않다. 그 가운데 천운영은 가장 도발적으로 새로운 문학적 스타일을 만들어 온 작가라 할 수 있다. 천운영은 한국소설과 여성소설의 계보를 일신하며 여성성의 문학적 의미를 완전히 새롭게 제시하고 있는 작가다. 첫 번째 소설집 ‘바늘’에 이어 두 번째 소설집 ‘명랑’에서도 천운영은 야생의 여성성이라는 새로운 스타일을 더욱 고집스럽게 밀어부쳤다. 그 가운데서도 ‘멍게 뒷맛’이라는 작품을 통해 천운영의 작품세계를 살펴보도록 하자.


천운영의 소설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은 대부분 불우한 성장과정을 겪는다. 등장 인물들은 대부분 정상적인 가정에서 태어나고 자라는 과정이 결여되어 있으며, 성장과정에서 버려지거나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나기 일쑤다. 또 천운영 소설에 등장하는 여성 캐릭터들은 외모의 결함을 갖고 있거나 늙고 병든 노파가 많다. ‘멍게 뒷맛’의 화자이자 주인공인 ‘나’ 역시 폐백용 오징어 꽃을 만들며 혼자 살아가는 여성으로 구체적인 가정환경이나 외모는 전혀 묘사되고 있지 않다. 그러나 경제적으로 넉넉지 않다는 사실, 혼자 산다는 사실, 구김살없이 친절하고 예쁘게 생긴 옆집 여자를 시기한다는 사실, 옆집 여자가 남편에게 매맞는 것을 엿보며 희열을 느낀다는 사실, 옆집 여자가 불행해 지는 데에서 삶의 욕구를 느낀다는 사실 등에서 이 작품의 주인공 역시 위와 같은 설정의 연장선상에 있음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바로 이 같은 설정 때문에 등장인물들은 항상 현실에 쉽사리 적응하지 못하며 도태되어 있거나, 자폐 상태에서 현실의 경계에 가까스로 발을 걸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와 같은 상태가 오히려 등장인물들에게 끊임없이 삶의 욕망을 불어넣어주고 있는데, 세계와의 경험이 부정적일수록 그 욕망은 더욱 강렬해진다. 억눌린 욕망, 결여된 욕망은 삶에 대한 욕망과 상관관계에 놓여 있으며 매우 공격적이고 야성적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어떤 방식으로 억눌린 욕망을 표출하는가? 이것이 천운영 소설을 이해하는 가장 핵심적이 고리 역할을 한다.



2. 육식, 그리고 공격성


여성성을 이야기할 때 음식에 관련된 주제들은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단골 메뉴다. 폭식, 거식, 육식, 채식, 다이어트, 조리욕망 등 음식을 둘러싼 다양한 행동패턴이 여성성을 분석하는 도구로 사용되어 왔다. 그 중에서도 흔히 육식이나 생식은 인간의 공격성과 연결된다. 당연히 육식은 종종 남성성이나 섹스의 공격적 본능에 비유되기도 한다. 과학적 검증을 거치지 않더라도 이 같은 행위들이 동일한 권력관계를 동반한 메커니즘 속에 이루어지고 있다는 설정은 매우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래서 한 동안 우월적인 것으로 인식되어 왔던 남성성을 비판하고 반대로 그 동안 부정되어왔던 여성성을 긍정할 때, 여성의 식물성 내지는 친환경성을 내세우는 경우가 많았다. 기존의 여성성이 어머니와 아내의 역할에 국한되고, 여성의 생명력을 긍정할 때도 출산과 육아와 연관 지어서만 사고했던 일련의 흐름에 균열이 가기 시작한 것이다. 여성의 식물성 생명력, 공격하고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상처를 치유하고 품어 안는 생명력은 근대성을 비판하는 또 하나의 무기가 되기도 했다. 에코토피아를 꿈꾸는 이들에게는 반가운 발견이었다. 90년대 이후 갈 길을 찾지 못하던 비판 이론도 여성주의나 생태주의를 적극 받아들이면서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있다.


이 같은 일련의 경향에 익숙해진 독자라면(나를 포함해) 천운영이 창조해낸 야생의 여성상을 받아들이는 일이 쉽지 않다. 소설을 읽고 난 후에도 이물감이 쉽게 가시질 않는다. 그 야생의 여성상을 더욱 두드러지게 해주는 도구가 육식(생식)이다. 천운영 소설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대부분 육식을 즐긴다. 그것도 최대한 익히지 않은 날 것 그대로를 즐긴다. 즐긴다기보다는 탐닉하며 몰입한다. 육식은 억눌린 생의 욕망을 표출하는 첫 번째 도구다. 다연히 그 과정 또한 매우 세밀하게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가) 멍게를 삼키는 당신의 얼굴에 작은 파랑이 일었다. 멍게 돌기를 오독 오독 씹을 때는 바위에 부딪치는 거친 파도소리가 들려왔다. 당신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내 입 안에는 바다가 들어찼다. 멍게를 한입 넣었다. 새곰한 맛이 콧구멍부터 목젖까지 아련하게 번져왔다.


(나) 열정적인 키스를 건네오는 연인의 혓바닥을 받아들이듯 나는 어느새 보드라운 멍게 살에 빠져들고 있었다.

멍게를 먹으면 살고 싶어져요, 그것도 아주 잘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멍게 뒷맛’에서 옆집 여자는 남편에게 매를 맞고 난 다음에 언제나 ‘나’를 찾아와 함께 멍게를 먹는다. 공격받은 여성은 육식(생식)을 통해 억눌린 욕구를 분출하고 강렬한 생의 욕구를 느낀다. 육식은 배를 채우거나 음식맛을 즐기는 차원을 넘어 삶의 욕구를 되찾기 위한 과정으로 묘사된다. 주인공 역시 멍게를 먹으며 비슷한 욕망에 사로잡힌다. 멍게를 먹는 행위는 두 사람을 이어주는 핵심적인 매개체 역할을 한다. 육식은 공격성과 상관관계를 맺는다. 상대의 철저하게 파괴될수록 생의 의지가 샘솟는 주인공은 옆집 여자가 매맞는 장면을 엿들을 때마다 멍게를 먹고 싶은 강렬한 욕구에 사로잡힌다.



3. 희생제의


육식(생식)이라는 설정이 다소 생소하다해도, 크게 문제될 것은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스트레스를 먹는 것으로 푸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고, 육식이 어느 정도 공격성을 내포하고 있다 해도 누구에게나 내면에 그 정도 공격성은 갖고 있을테니 말이다. 남편에게 매를 맞은 옆집 여자가 ‘멍게를 먹으면 살고 싶어진다’는 독백을 하는 순간, 주인공은 옆집 여자의 등을 쓰다듬어 주고 싶다는 연민에 사로잡힌다. 이제 독자들은 옆집 여자와 주인공이 함께 멍게를 먹으며 생의 의지를 다지고, 여성으로서 자매애를 느끼며 서로를 이해하고 격려해주는 상황을 연상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천운영의 난감함은 계속된다. 그녀는 부두키트에 대고 바늘을 찔러대며 상대의 불행을 비는 주술행위처럼 옆집 여자가 불행해지기만을 빈다.


이 쯤에서 소설 제목이 ‘멍게 뒷맛’인 이유를 살펴보자. 옆집 여자가 죽어버리자 모든 생의 의지가 꺾여버린 주인공이 필사적으로 어둠에서 탈출하기 위해 찾아간 곳은 수산 시장이다. 멍게를 한 박스사서 썰지도 않은 멍게를 통째로 입 안에 쑤셔넣는다. 멍게를 만지는 그녀의 손은 금단 현상을 보이는 사람처럼 부들부들 떨린다. 그러나 멍게는 이전 같은 맛이 나지 않는다. 멍게 뒷맛은 이전처럼 달지 않고 시큼하고 비릿하다. 그렇다면 과연 육식 말고도 무엇이 그녀를 살게 했던 것일까? 옆집 여자가 육식을 통해 삶의 의지를 다졌다면 주인공을 살게 하 힘은 ‘타인의 불행’이었다.

희생제의는 천운영 소설을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소설 속 인물들은 억눌린 욕구를 발산하는 가운데 공격성이 표출되는데, 이들의 공격성이 사회를 향한 무차별적 공격으로 흐르지 않는 이유는 희생자를 찾아 공격을 집중하기 때문이다. ‘멍게 뒷맛’에서 주인공은 옆집 여자의 불행 속에서만 행복을 느낀다.


(다) 당신 얼굴 어디에도 조금 전의 소란은 남아 있지 않았다. 옷매무새나 머리는 헝클어짐 없이 단정했고, 얼굴에는 긁힌 상처 하나 보이지 않았다. 가위를 든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나는 마음의 독기를 조절해야만 했다. 된통 당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몸속에 피가 모조리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당신의 가증스러운 얼굴을 가위로 싹둑싹둑 오려버리고 싶었다. 내 손으로 오리고 구부려서 다른 얼굴의 꽃을 만들고 싶어졌다. 보드랍고 환한 당신의 얼굴을 어려 딱딱하고 냄새나는 오징어 꽃처럼 만들어야 했다. 가위를 주니 손이 부르르 떨려왔다. 당장이라도 당신의 집으로 달려가 불행의 증거를 내 눈으로 확인이라도 하고 싶었다.


(라) 당신의 길고 풍성한 머리 다발이 함부로 뒤엉키고 뽑히는데도 나는 밖으로 나가 남자를 말리지 않았다. 나는 현관문 보안 구멍으로 당신의 매 맞는 모습을 지켜보곤 했다. 오히려 남자를 응원하며 남자의 발길질이 조금 더 거칠어지고 당신의 울음소리가 더 커지길 꿈꾸었다.


(마) 나는 당신이 남자에게서 벗어나 당신의 고향으로 돌아갈까 봐 걱정이 되었다. 당신은 내 곁에 남아 생의 활기를 불어넣어주어야 했다. 이제 나는 당신의 행복한 얼굴을 견딜 수 없었다. 당신의 불행 없이는 어떤 의욕도 생겨나지 않았다. 당신의 불행은 계속되어야만 했다.


심지어 옆집 여자가 난간에서 추락해서 죽고 나자, 여자는 아무런 생의 의지를 느끼지 못하고 시들어간다. 심지어 멍게조차도 생의 의지를 자극하지는 못한다. 옆집 여자가 죽은 지 일 년이 지났지만 상황은 더욱 악화되어 갔다. 그녀는 이제 옆집 여자가 항상 바라보던 그 동백나무 아래, 옆집 여자가 떨어져 죽은 그 동백나무 아래에 누워 옆집 여자의 고통을 기억해내는 일로 삶을 연명하고 있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은 독백으로 작품이 끝난다.

‘나는 죽어가고 있다. 그래 당신 이제 만족한가?’


4. 죽음, 가장 강렬한 생의 욕망


결국 공격적으로 표출되는 생의 욕망은 언제나 죽음으로 마무리 된다. 자살이건 타살이건, 자신이 죽건 남이 죽건 천운영의 소설에서는 항상 누군가가 죽는다. 희생제의를 통한 공격적 본능 표출 속에서 삶의 의지를 찾는 절망적 인물들이 죽음으로 치닫는 것은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결말일지 모른다. 생은 언제나 고통으로 가득차 있고, 동전의 양면처럼 삶이 있는 곳에 언제나 함께하는 죽음의 존재. 삶 위에 덧칠되어 있는 죽음의 그림자. 이것이 천운영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근원적 표정이다. 살면서 죽음을 연기하고, 죽는 순간 가장 강렬한 생의 욕망에 사로잡힌다.


그렇다면 소설은 우리에게 절망적인 결론 외에 아무 것도 말해주고 있지 않은 것일까? 아쉽게도 현재로서는 별다른 대안이 없어 보인다. 얼핏 얼핏 생을 긍정하려는 의지가 엿보이지만 극히 짧은 순간에 불과하고 여성으로서 삶을 긍정할 만한 가능성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물론 끊임없이 강조되는 야생의 여성성은 강인한 생명력과 강력한 생의 의지를 동반한다. 생명이 생명으로 살지 못할 때, 생명의 근원을 찾아 나서려는 몸부림은 더욱 처절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결국 야생의 여성성은 긍정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공격적 본능의 표출구로만 기능하고 있으며, 생명에 대한 긍정은 보듬고 공생하고 어루만지는 방식이 아니라 언제나 죽음에 대한 어두운 그림자를 동반하고 있다. 여성에게서 찾아낸 새로운 발견이란 남성과 다를 바 없는, 근본적으로 바닥에 잠재되어 있는 본능적인 공격성 밖에 없는 것인가? 과연 이 세상을 긍정하지 못하는 자들에게 남은 선택은 무엇이란 말인가? 본능적 생의 의지는 결국 누군가를 공격하고 증오하며 희생시키며 자신도 함께 파멸해가는 고통일 수 밖에 없단 말인가? 아니면 아직도 그녀가 새롭게 쓰고 있는 여성성의 의미파악이 끝나지 않은 것인지 벌써부터 그녀의 행로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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