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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하 [퀴즈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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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시봉에 대한 반응을 접하고

0.

몇 달 전에 김종엽 씨의 '남보원 유감'을 읽고 비판글을 쓴 적이 있다.

오늘글은 맥락상 그 글의 2탄쯤 된다.

일관된 문제의식은 '문화현상에 대한 운동권의 도덕적 강박과 엄숙주의 에 대한 비판'이다.

간만에 불질을 자극한 직접적인 원인은 '세시봉 바깥세상'이란 김선주씨 칼럼(2월 6일자 한겨레)이다.

 

 

그러니까 그 내용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세시봉을 마냥 즐기기 어려운 시절이었다. 이유인 즉,

엄혹했던 군사독재 시절 마냥 세시봉을 즐길 수만은 없었던 가슴 아픈 역사가 있었다.

그리고 지금 역시도 세시봉을 마냥 즐기기 어렵다.

그 독재자의 딸이 여전히 가장 강력한 대선후보로 맹위를 떨치는 현실이 있기 때문이다.

민주화 운동의 이름으로 함께했던 이들이 세시봉 바깥세상에 노래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다.

 

 

이 글을 비판하기가 조금 망설여진다.

망설여지는 이유는 미안함 때문이라기 보다는 안타까움이나 답답함에 가깝다. 

너무나 뻔한 언어구조인데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무엇보다 이 언어구조에 어떤 대화 가능성을 발견하기 어렵다.

그래도 쓴다. 여전히 함께 대화할 대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1.

한겨레 신문과 시사인을 정기구독하기 때문에 비슷한 언어로 사회 현상을 분석하는 글을 자주 보게 된다.

최근에 비슷한 느낌을 받은 글은,

 

'홍대 청소노동자들 집회'에 나타나 학생들 공부에 방해가 되니 '집회를 중단해달라'고 요청한 총학생회장

관련 기사들이다. 한겨레나 시사인의 초점은 한결같이 비정규직으로 계급적 각성 단계 있는 노동자들과

이들을 방해하고 나선 비권 총학생회의 대립에 맞춰져 있다. 너무나 뻔한 선악구도, 철없는 대학생과

척박한 세상을 탓하는 계몽적 시선. 자연스레 뒤따르는 도덕적 엄숙주의, 비관주의.

'너도 그 대학 나와봐야 비정규직밖에 더 되냐?' '대학도 자본주의에 물들어서 맛이 갔다'

따위의 꼰대식 하소연 내지는 충고가 기사에 달린 댓글의 거의 대부분이다.

 

이 답답한 프레임을 깬 건 당사자인 노동자와 총학생회장인데(대개는 어머니인) 어머니들은 "문제의"

총학생회장에게 날도 추운데 밥이나 먹고 가라고 말한다.(지혜로운 존재들이여...) 총학생회장은 복잡한

감정에 어쩔줄 몰라하며 순간 눈망울이 흔들린다. 삶의 진실성 앞에 선악의 대립구도는 손쉽게 KO당했다.

그리고 이 장면을 놓치지 않고 배우 김여진 씨가 현장의 분위기를 전한다.

계급적 대립구도, 혹은 그 계급적 대립구도에 중간방해꾼으로 개입한 총학생회장의 존재라는 측면은

당연히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진실의 조각들이 존재한다.

흔들리는 총학생회장의 눈망울이 대변하는 인간으로서의 변화 가능성, 그리고 쉽게 보기 힘든

그  상황을 연출해 낸 복잡한 시대적 배경과 관계들. 이 간단한 한 장면 속에도 저마다 다른 관점에서

이야기 할 수 있는 다양한 진실이 존재한다.

 

그것을 읽어내는 지혜로운 눈이, 또는 읽어내려는 의지가 간절했다.

 

2.

이런 엄혹한 시대에 시크릿 가든을 보며 마냥 즐길 수 만은 없는 이유는,

이런 엄혹한 시대에 아이돌을 보며 마냥 즐길 수 만은 없는 이유는,

이런 엄혹한 시대에 개콘이나 보며 마냥 즐길 수 만은 없는 이유는,

 

있다.  그러나, 어떤 사회현상에 대한 분석이 단순한 이분법적 구도에 머무를 때

가장 큰 손해를 보는 것은 변화를 갈망하는 자들이다. 세시봉 안과 세시봉 바깥으로 세상을

양분해서 생각할 때, 그리고 다수가 생각없이 세시봉에 열광한다고 다수의 감성을 혐오하는 순간

자신들이 원하지 않는 대중과 활동가들 사이의 벽(의도와 무관하게 만들어지는)은  더욱 견고해진다.

 

내가 옳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다만 이제는 좀 이런 도식화된 분석틀을 버리자는 것이다.

 

 

세시봉을 둘러싸고 존재하는 여러 가지 맥락만 늘어놓아보자. 내 능력은 여기까지다.

 

3.

관점 1)

놀러와를 연출하는 신정수 피디는 마봉춘 노조원으로 지난 파업 때 삭발을 했었다.

아는 사람만 아는 얘기지만 신정수 피디는 나름 아웃사이더 기질이 있는데다 조용하고 내성적

성격이다.(주워들은 얘기다.) 기존 버라이어티나 토크쇼와 다르게 놀러와는 철저하게 비주류들을

게스트로 초대해서 깨알같은 소소한 재미로 틈새 시장공략에 성공한 프로다. 그 중 가장 대박이

난 게 세시봉이다. 놀라와의 색깔은 신정수 피디와 무관하지 않아서 묘하게 변방의 이야기로

다수를 감동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다.

 

관점2)

세시봉 2편 오프닝은 장기하+윤도현+송창식이 함께 부른 담배가게 아가씨였는데,

이 공연은 정말 명불허전이었다. 아이돌 일색의 가요계에 장기하, 윤도현 조합이 갖는 의미.

철저하게 나이 든 가수를 외면하고 오래된 것은 무조건 폐기 대상으로 여기는 한국사회에서 송창식

조합이 갖는 의미. 이들을 섞어서 이렇게 폭발적인 무대를 만든다는 것 자체가 흥미로운 발상인데

실제 공연 자체도 환상적이었다.

그리고 양희은의 아침이슬이 흐를 때 뒷배경을 가득 채운 김민기의 클로즈업된 사진은 묘한

감동과 회한을 불러 일으켰다. 그 무대는 양희은의 노래를 위해 준비된 것이 아닌, 그 시대 함께

고통받았던 사람들에게 보내는 존경의 표시 같았다.

 

관점3)

서울대생임을 끊임없이 자랑하는, 머리부터 발끌까지 마초 자뻑 조영남

연세대+기독교+모더니즘+세련미 무엇하나 빠지는 구석이 없는 윤형주

자유로운 사고와 풍부한 감성의 소유자 이장희

늘 막내 역할을 즐겁게 받아들이는 온화한 성품의 소유자 김세환

무일푼으로 노숙자처럼 살아 온 기이한 천재 송창식

내가 세시봉을 보며 느낀 캐릭터의 특징을 그냥 써 본 것이다. 거기에는 물론 불편함도 있다.

 

종교 포비즘이 있는 나로서는 번안곡이나 팝송이 대개 서구적+종교적 감성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

조영남을 통해 여과 없이 드러난 학벌에 대한 우월감, 입만 열면 윤여정을 언급하는 그 무례함 등

불편한 구석도 많았다.  그러나 또 한 편으로

 

그저 그런 옛날 가수로만 알았던 그들이 한국 최초의 싱어송 라이터 1세대를 형성했다는 점,

(특히 김세환 같은 가수는 그 존재감이나 있었겠나??)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이는데 거부감이 없는 선두주자들이었다는 점,

(1910~20년대 가장 문화적 감수성이 예민한 엘리트들, 흔히 모던보이라 불리우던 이들은 대개 맑스주의자가

되었고 초기에 모더니즘이 서구로부터 이식되는 과정에서는 기독교의 영향력도 상당했다.)

행동이나 삶의 패턴 역시 상당히 아방가르드 한 면모를 보인다는 점

등 새롭게 알게되고 재해석되는 역사에 흥미로운 요소들이 많았다.

세시봉을 구성하는 요소들 자체가 이질적이고 복합적인 것들이 뒤죽박죽 섞여 있듯이

세시봉에 열광했던 사람들 또한 그랬을 것이다. 이들에게는 다양한 감정이 뒤섞여 있다.

최소한 전국노래자랑을 고정적으로 시청하는 사람들보다는 세시봉에 열광하는 이들에게서

소통의 가능성을 단 1%라도 더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4.

아이돌에 열광하는 고딩들이 촛불시위를 주도했다는 사실을 잊었나?

그렇게 '촛불로부터 배우자, 배우자' 그래놓고 왜 맨날 제자리인가?

아니 뭘 배워야 한다는 강박 자체라도 있다면 다행이지, 배우기는 커녕 늘 자신이 조종하고 관리하고

바로잡아주는 선지자라는 병적 계몽주의부터 좀 어떻게 하시지...

어떤 사건이, 현상이라 불릴 만한 영향력을 행사할 때 그 사건으로부터

'내 편에게 유리한가? 저쪽 편에게 유리한가?" 혹은 "그들은 각성된 자들인가? 아닌가?" 따위의

잣대를 들이미는 게 얼마나 고리타분한 일인가?

그 근거없는 도덕적 자신감+우월감은 열등감+피해의식과 동전의 양면이다.

 

양희은은 무릎팍에 나와서 아침이슬이 시대를 대변하는 노래가 되었는데 당시 느낌은 어땠냐는 질문에

'난 그저 노래랑 포크송이 좋아서 부른거지. 이렇게까지 큰 영향을 미칠거라고는 생각을 못해봤다.

내가 무슨 대단한 일을 한 사람처럼 평가를 받는게 좀 그렇다. 난 그냥 무서웠다. 감히 나설 엄두를 못냈다.'

고 대답했다. 그런 노래가 시대를 대변하는 노래가 되기도 한거다.

세시봉 전반이 불편하고 유일한 감동은 오직 '아침이슬', 오직 '양희은'이라고 말할 때

그 감동 역시도 심하게 단선적으로 왜곡된 것이며, 문화를 걸러내는 감수성은 지나치게 빈곤하다.

 

좀 그러지 마라. 더 많은 것들을 품어안기는 커녕 휑하니 독만 남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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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끝 여자친구

..

우리는 모두 헛똑똑이들이다. 많은 것을 안다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대부분의 사실들을 알지 못한 채 살아간다.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들 대부분은 '우리 쪽에서' 아는 것들이다. 다른 사람들이 아는 것들을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런 처지인데도 우리가 오래도록 살아 노인이 되어 죽을 수 있다는 건 정말 행운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어리석다는 이유만으로도 당장 죽을 수 있었다. 그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이 삶에 감사해야만 한다. 그건 전적으로 우리가 사랑했던 나날들이 이 세상 어딘가에서 이해되기만을 기다리며 어리석은 우리들을 견디고 오랜 세월을 버티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

 

김연수, <세계의 끝 여자친구> 중에서

 

 

너무 너무 오랜만에 소설을 읽다가, 오랜만에 마음을 건드린 구절이 읽어 옮겨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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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리더:책 읽어 주는 남자

영화가 끝났다. 한 번 북받쳐 오른 감정이 쉽게 가라앉지 않고 수 많은 잡념과 말들이 질서를 찾지 못한다.
영화를 보고 일어서는 사람들이 수근거린다. "뭔가 심오한 거 같은데 못 알아 듣겠다.", "영화 지루하고
재미없다." 졸다 일어난 여자, 그 여자를 안아주며 미안한 표정을 짓는 남자. 근사한 러브스토리를 기대
했다가 투덜대며 나가는 연인들.





장면 1- 한나 "내가 무엇을 느끼건 간에 그들이 죽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


과거를 대하는 첫번째 태도.과거는 그저 과거일 뿐.

한나의 태도는 전쟁을 대하는 다수의 정신상태를 대변. 자신은 그저 힘없는 공무원에 불과하다는.
한나는 홀로코스트 감시원에 지원했다. 먹고 살려고 그랬다. 매달 10명씩 가스실로 보내는 사람을
선별했다. 그것은 그저 공무였다. 마치 동사무소에 앉아 기초생활수급대상자를 분류하는 9급 공무원의
작업같은. 그 작업 과정 어디에도 감정은 없다.  분류기준이 있다, 규정이 있다, 새로운 사람이
들어오려면 오래된 사람이 나가야 한다, 자리가 비좁았다. 분류하고, 보내고, 새로 들어오고,
일상은 반복된다.

그리고 한참 시간이 지났다. 그 때의 기억은 다른 일상과 마찬가지로 별 다른 특별한 의미를 지니지
못한 채 조금씩 희미해져간다.

여기서 잠시 논리적인 설명을 위해 부가설명.


1.

[전쟁과 인간, 군국주의 일본의 정신분석]( 마사아키 노다 지음 |서혜영 옮김, 길 출판사)는 수감 중에 읽은 책 가운데 가장 보석 같은 책이다. 정신과 의사이며 비교문화정신의학을 전공한 저자는 전후 일본인의 집단적인 망각 상태를 인터뷰라는 형식을 통해 집요하고 파고 들어간다. 인터뷰 대상은 2차 세계대전 전후에 징집되어 만주지역에서 군생활을 했던 일본인들. 난징대학살과 태평양전쟁은 물론 731부대(흔히들 마루타 부대라 부른다)의 존재까지, 군국주의 일본이 저지른 전쟁범죄들이 개인들의 증언 속에서 되살아난다. 난징대학살의 끔찍했던 밤, 일반인을 대상으로 삼는 생체실험, 초년병의 총검술 연습 대상이 되어 살해당한 무고한 농민. 이 책은 전쟁에 참가했던 사람들이 전쟁과 살육에 무뎌져가는 과정, 전쟁 이후 가해의 역사를 망각하고 자신을 정당화하는 과정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저자는 그 집단적인 망각과정이 군국주의에 대한 반성의 부재로 나타나고, 결국 또 다시 일본사회가 오른쪽으로 기울어가는 원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아직까지 남아있는 죄의식이야말로 우리들(일본사회)의 귀중한 문화이며, 진정으로 상처를 입는 데 익숙해진 사람만이 타인을 이해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남긴다.


2.

2차세계대전 후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독일군인들은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고 말했지만, 유죄선고를 받았다. 국가가 학살과 침략행위에 참가하고 동조할 때 개인은 그것을 적극적으로 거부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박정희, 전두환이 쿠데타를 일으킬 때 이에 저항하는 군인이 있다면? 광주시민을 진압하려는 명령을 거부한 군인이 있다면? 나치에 협력하기를 거부한 군인이 있다면?



훗날 역사는 전쟁을 거부한 이들을 영웅으로 기록할 가능성이 크다. 모든 이들이 올바른 판단이라고 하지는 않지만 많은 이들이 그 선택을 인정할 것이다. 그러나 다수는 침묵하고 따를 뿐이다. 당장 살아야 한다. 저항의 대가는 너무 가혹하고 무엇보다 전쟁이라는 그 큰 문제는 개인이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판사님이라면 어떻게 했을 거 같아요?"라는 말이 모든 걸 압축한다.


어찌보면 자신도 전쟁이라는 수레바퀴에 휩쓸린 피해자일지도 모른다. 다수는 이 선택을 차선이라고 말할 것이다. 자신에게도 살짝 면죄부를 쥐어주면서. 적당히 비겁하게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것이 늘 다수의 선택이며 가장 강력한 침묵의 연대보증이다.

 


한나로 인해 힘겨운 감정. 솔직함. 성실함.

생활을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었다면 가장 생활력 강하고 듬직한 존재였을 이 사람. 

일생을 혼자 힘으로 열심히 살아왔고 남에게 아쉬운 소리 하지 않았고 매순간 최선을 다했던 이 사람.

한나로 인해 불편한 감정. 죄의식의 결여.

출소를 하루 앞두고 몇 십 년 만에 마이클과 재회한 장면에서조차 일관된 그 솔직함과 죄의식의 결여.

 

한나의 자살은 마이클에게조차 받아들여지지 못한 자신에게 내린 사망선고. 한나에게 가장 중요했던

마이클. 

 

 

 

 


장면 2- 마이클 "요란하게 헤어질까 아니면 조용하게"


글을 쓰려고 인터넷을 검색해봤다. 써먹을 명대사가 있나 검색해봤다. 명대사는 대부분 한나의 것.

그나마 몇 개 안 되는 마이클 대사는 전부 어릴 적 사랑에 빠진 상태에서 날린 대사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영화를 어떻게 바라보는지는 분명하다.

끝내 이루어지지 못한 가슴 아픈 사랑 이야기. 역사는 그 안타까운 사랑을 더욱 절절하게 만들어주는

양념같은 것.

 

그러나 이 영화는 전혀 다른 생각으로 만들어진 듯 하다. 물론 사랑이 중요하지 않은 건 아니다.

사람들은 성인이 되고 난 후 마이클의 태도를 답답해한다.

 

끝내 재판정에서 한나가 글을 몰랐다는 사실을 말하지 못했다.

사랑을 원하는 한나에게 끝내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한나의 유언에 따라 돈을 전해주러 갔을 때도 길게 설명하지 않았다.

 

 

성인이 되고 난 후 마이클은 심하게 대사가 없다.

늘 울고 있는 그 눈. 그것이 모든 대사다.

마이클은 정말 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대사가 없다.

마이클이 할 말이 없는 이유는 할 말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몇 십 년 만에 다시 만난 한나에게 물었던 것은 지난 시간에 대한 반성이었다. 

사랑에 관대한 요즘 사람들이 보기엔 정말 몸서리쳐지는 장면. 완고함. 결벽증.

정말 그렇게까지 해야하냐는...

사랑과 역사적 정의 사이에서 갈등하는 마이클.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에게조차

이분법적 사고를 용인하지 않았던, 끝내 타협을 거부했던, '무조건 사랑하는 사람편'이라는

대다수 사랑 지상주의자들의 가슴을 후벼팠던 그 태도.



마이클은 진심으로 한나를 사랑했다. 

녹음테이프를 보내는 장면에서 가슴이 찡했던 것은, 그 사랑이 너무 멋져서가 아니라

지난 시절과 화해하고 오래 동안 가슴 속 깊이 쌓여있는 상처를 스스로 마주하고 치료할 용기를

냈다는 사실.

동시에 마이클은 역사적 책임감을 회피하지 않았다. 그 수 많은 고통을 외면하지 않았다. 

적어도 마지막 장면에서 한나가 다른 반응을 보였다면, 그것이 사랑은 아니라 해도

적어도 둘 사이에 화해는 가능했을텐데...새로운 관계를 모색할 가능성.

하지만...답은 이상하게 꼬여버렸다. 

그 마저도 마이클은 준비하고 있었던 듯. 계속 관계에 미련을 보였지만 체념의 태도 역시

늘 준비해두고 있었다.


 

너무나 많은 자의식. 끝도 없는 반성. 

이제 그는 그 모든 과거를 어떻게 해석하고,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결국 중요한 것은 지금. 현재 독일인들은 이 영화를 어떻게 봤을까? 일본의 태도는 관심도 없다.

적어도 수 많은 반성을 거듭한 그들은 이 영화를 어떻게 봤을까? 불편했을까?

무엇 때문에? 이제 충분하다고 여길까?

그들에게 한나나 마이클의 태도는 어떻게 보였을까?

그  모든 의문은 딸의 몫인걸까? 그는 최대한 성실한 태도로 많이 이야기를 전해 주었을 것이다.

이제 너의 몫이 생길거란다.......


<더 리더:책읽어 주는 남자>라는 제목만 보고 연애 이야기인줄 알았는데....

영화 마켓팅은 늘 본말 전도. 짜증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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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소나타, 워낭소리

>> 도쿄 소나타


카가와 테루유키는 <유레루>부터 시작해서 너무 찌질한 역만 나오는 듯.

막판으로 갈수록 심하게 지루했음. 상상력 부재=대안부재.

꼭 무슨 대안을 바란 것은 아니지만 애써 긍정하려는 것도 조금 억지스러운 듯.

그렇게 절망적인 어조로 일관하다가 해결은 결국 피아노라니...
(그래도 피아노치는 장면은 아름답다.)

특히 이상한 남자의 등장 이후로는 괜히 웃음만 피식 피식 나왔음. 영화가 조금 우스워져서.

권력의 중심에 선 아버지와 가족만 바라보는 어머니의 자리로 되돌아가는 마지막 장면을

해피엔딩으로 그렸다....고작, 그거 할라고.



>> 워낭소리


눈물도 났다.

근데 아무리 좋게 해석해도 나는

1. 소가 불쌍하다.

2. 할머니는 더 불쌍하다.

3. 할아버지가 제일 덜 불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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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 토리노

얼마 전 씨네21에서 <그랜 토리노>에 대한 영화평을 보고 이 번 만큼은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를

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에서 최근 <체인즐링>까지 그와 그의 영화에 대한

이야기가 심심치않게 들려왔다. 남이 평가하면 덩달아 평가하고 싶어지는 심리에도 불구하고 그의

영화를 끝내 안봤던 것은 클린트 이스트우드로 표상되는 미국식 정의와 착한 마초에 대한 거부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휴머니즘과 정의감으로 무장한 보수라해도 강자와 약자의 논리를 버릴 수 없는 한

그게 그거다. 개화한 마초와 여성의 관계 역시.



그런데 이 영화를 보고 많이 힘들었다. 씨네21에서 보았던 영화평 때문에 처음부터 마음이 무거웠다.

미국 보수주의가 지난 단점까지도 모두 떠안고 가려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유언장을 미리 보는 것

같다는. 그 영화평 때문일까 나는 그를 평가할 수 없었고 그냥 한없이 서글퍼졌다.

왜일까? 경계심과 불만으로 가득한 눈, 이죽거리는 입, 세월에 무릎꿇은 수많은 주름, 과장되게 거친

말투, 지독한 도덕적 강박증, 모든 권위에 대한 반감, 일상처럼 달고 사는 외로움과 술, 그리고 영원히

지우지 못하는 전쟁의 상처.



그 모든 것 때문에...

아무 것도 아닌 평범한 장면에서, 아주 영화 극초반부터 나는 울기 시작했다. 옆집 사는 수가 말을

걸어올 때부터. 타오가 일을 거들기 시작할 때부터. 몽족 아줌마들이 쉴새없이 음식과 꽃을 날라줄

때부터. 자식들보다 망할 동양인들이 자기 마음을 훨씬 잘 안다고 투덜댈 때부터. 대사와 장면 하나

하나, 관계를 맺어가는 사람들의 표정 하나 하나 그게 너무 시리고 아름다웠다.



그러나 결론이 아름답지 않으리란 건 미리부터 짐작할 수 있었다.

자기가 원해서 강해진 것이 아니라 부서지지 않으려고 악으로 버티며 강해진 그 남자가

이유없는 폭력과 맞섰을 때 결론은 비겁하거나 비참하거나.

비참하지 않기를 바랬다. 비겁은 더더욱 아니기를 바랬다. 그러나 힘으로 이길 수 없으리란 것도

알았다. 그러나 힘을 선택할 것이라 생각했다.

남성이 여성을 보호하고, 어른이 아이를 보호하고, 강함이 약함을 이기고...

폭력의 고통과 상처는 치유되지 않은 상태로 악순환하고....

그걸 포기한 마지막 장면은 너무 큰 고통과 아픔이었다.

그 순간,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는 더 이상 영화 속 질문이 아니었다. 



왜 세상은 아무런 악의없이 살아가는 자들에게 이토록 가혹한 것일까?

외면할 수도 부딪칠 수도 없는 것 같은 세상에서  그가 끝내 멋진 복수를 선택했다면, 그냥 계속 꼰대로

남았다면, 인종주의자로 남았다면, 그래서 유산만 탐내는 가족들 틈에 둘러싸여 비참하게 죽었다면

조금은 동정할 수 있고 그 동정 못지 않은 냉소를 퍼부어줄 수 있었을텐데.



세상에 대한 단선적인 분석, 사람에 대한 이분법적 편가르기, 옳고 그름에 대한

분명한 판단. 이런 것들에 자신이 없고 그 만큼 이 영화가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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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펫, 비몽

1.

만화 [너는 펫]을 봤다.

일본 소설, 일본 드라마, 일본 만화, 일본 영화 등등....


일본 작품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는

심리묘사가 섬세하다, 소소한 일상을 재미있게 엮어낸다, 남자 캐릭터들이 여성화되어 있다 등등....

일본 작품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는

밍밍하고 지루하다, 탈정치적이다, 쪼잔하다, 너무 가볍다 등등....



일본 드라마는 못 보겠고,

일본 영화는 어쩌다 가끔 보고,(대개 비주류 영화)

일본 소설은 한 때 유행이었던 거 같고,

일본 만화는 일상이다.


일본 만화의 우울함, 세기말적 자학, 인간 심리의 극단 뭐 이런 것들이 묘하게 끌린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림이나 스토리가 기본 탄탄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그러다 어느 때부턴가 조금씩 순정만화(로 분류되는)에 손이 가기 시작했다.

스물 다섯 이전까지는

과정되게 큰 눈, 작은 컷들에 비해 지나치게 많은 글자, 과도한 환타지, 사랑이야기에 대한 거부감,

무엇보다 남자라는 자의식...이런 것들 때문에 순정만화를 안 봤다.


그러나 세월은 흘러... 요즘은 꽤나 재밌게 본다. 오히려 치고 받고 주먹질에 강호의 달인들과

거리의 복서만이 넘쳐흐르는 코믹스의 세계에 이별을 고한지 오래.

꽃보다 남자는 너무 짜증나서 다 못 읽겠고, 너는 펫 정도면 무난하다.

일본 여행을 다녀와서 그런지 만화 속에 담긴 말의 의미가 이전과는 달리 구체성을 획득한다.



너무 너무 재밌게 봤지만 가장 불편한 것은 주인공 스미레의 관계맺기에 대한 과도한

두려움이다. 지나치게 남의 시선을 의식하는 말과 행동이야 연애관계에서 어차피 도드라질 수 밖에

없는 대목이고 여성에게 강요되는 품성이란 것이 더더욱 불편한 것이지만....

엘리트에 능력 있고 이쁘고 성깔도 있는 스미레가 유독 연애 문제에 있어서는 급소심증과 눈치보기로

일관할 때는 조금 답답하고 짜증이 났다.

가장 식겁했던 대사는 하스미에게 작별을 고하는 스미레가 했던 말

"부탁입니다. 헤어져주세요."

이건 참....완전 난감이다. 자신의 결심으로 헤어지는데 헤어져달라는 건 뭔가?

과도하게 남에게 선택을 미루는 일본식 어법을 감안하더라도 고개를 90도 숙이며 저런 말을 내뱉는

장면에서는 조금 자존심이 상하더라. 한 편으로는 짜증도 나더라. 헤어지는 것 마저도 남이 해줘야 하나?

남을 지나치게 배려하는 또는 지나치게 의식하는 어법을 여성이 사용하니까 굉장히 불편하다.


...그리고 홧김에 직장 여성에게 거칠게 화풀이하는 하스미는 결국 남자. 시종일관 중성 매력을

남발하다 막판에 스미레의 든든한 정신적 지주가 되어주는 다케시도 남자. 그 남자들을 대할 때마다

급격히 여성화되는 스미레는 사랑을 위해

직장을 그만둘까 말까 고민하고... 진정 사랑한다면 사랑을 찾아 떠나는 것이 자아발견이라는 식의 결말은

어쩐지 헛헛하다.





2.

비몽을 봤다. 오다기리 죠 말고는 전혀 남는 것이 없는 느낌.

에휴. 몽환적 분위기도 좋지만 이렇게 비유만 난무하고 당췌 의미를 파악하기 힘든 설정도 이젠 지겹다.

해석의 여지를 남기는 것도 좋지만 왜 늘 김기덕 감독의 영화는 충분히 쉬운 해결책을 두고도 극단적인

결말로만 가는 것일까? 그걸 멋지게 포장하는 것도 이젠 짜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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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영화를 보는 내내 포레스트 검프가 생각났다.

 

고등학교 때 극장에서 처음 본 영화. 당시엔 감독의 의도를 전혀 모르고 재밌게만 봤는데

 

나중에 철들고 다시 보니 곳곳에 역사적 장치들이 꽤나 많이 깔려 있더라.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가다를 보기 전에는 그런 비슷한 느낌을 상상했다.

 

개인의 일대기가 좌~악 펼쳐지고, 숱한 역사적 사건들이 양념으로 들어가고,

 

그 이야기가 죽음으로 마무리 될 때는 어느 정도 달인의 경지에 이른 군상들의 면면을 볼 수

 

있을테다. 허탈함, 씁쓸함, 달관과 수용, 넉넉함, 이해와 용서, 축복, 고귀함, 반성...내가 생각하는

 

최상의 죽음이란 그런 모습이다.

 

 

본 사람들 의견은 대체로 지루하다는 평이 많았다. '좋았는데...조금 기~~일더라.' 정도.

 

나는 지루하다는 느낌은 없었다. (중간에 살짝 졸긴했다.) 이런 류의 영화를 좋아한다. 성장영화 포함.

 

저 인생이 대체 어디로 흘러갈 것인가? 저 순간에 어떤 판단을 할 것인가? 생각하다보면 지루하지 않다.

 

 

포레스트 검프보다는 최대한 감독의 주관적 개입이 자제된 느낌을 받았다. 역시 중심에 사랑 이야기가

 

있기 때문일까? 주변 이야기들은 절대 전면에 나서지 않는다. 사랑이 전개되는 방식도 조금은 맘에

 

들었다. 영원이란 없다는 벤자민의 현실적 사고, 그럼에도 한 순간 최선을 다해 사랑하는 모습.

 

최고의 발레리나로 명성을 얻다가 부상을 당한 후 방황하지만 멋있게 제 삶을 찾아나가는 데이지,

 

적극적이면서도 성숙한 모습. 무엇보다 그 배우 둘은 왜 그리 멋지고 아름다운지...브레드 피트는

 

눈가에 주름이 자글자글해도 멋있고...케이트 블란쳇은 매력적이고 우아하다.

 

 

 

먼 길을 돌아 제나와 결합하는 포레스트 검프에서는 미국 보수주의가 취할 수 있는

 

가장 도덕적이고 올바른 결론에 이르렀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니까 포레스트 검프는 너무 착해서 조금은 정치적이고 유치해 보인다.

(한 시대를 살아낸 사람의 모습은 그 자체로 아름답고 모든 삶이 다 다큐멘터리다. )

 

반면 '벤자민~~'의 담담한 어조는 극적 재미가 크진 않지만(그래서 지루하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겠지)

 

나이듦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멋있게 늙는 것은 어떤 것일까? 세월을 대하는 여러 가지 태도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역할은 데이지였다. 아름다운 외모, 절정의 발레리나. 부상으로 발레를 접고

 

점점 어려지는 벤자민과 대조적으로 주름이 늘어가는 얼굴. 끝내 이별을 받아들이지만 한시도

 

마음에서 내려놓지 않았던 그 말 '굿나잇 벤자민'....

 

마지막 순간까지 애 늙은이 벤자민을 보살피는 장면이 조금 지루하긴 했지만.

 

세월을 대하는 벤자민의 태도도 성숙해보였다. 젊어진다는 사실 자체를 무기로 쓸 수도 있었을텐데...

 

늘 미래를 대비하며 마음을 가다듬는 행동이 괜찮아보였다. 뭐랄까 가장 기쁜 순간에도 존재하는

 

숙명적 비관주의 같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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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란 [혀]

1.

신인 소설가 주이란이 조경란의 [혀]가 자신의 작품을 베꼈다가 주장하면서 한 동안 화제가 되었던 작품.

표절 논란이 없었다고 해도 이 소설, 즉 조경란의 [혀]를 읽었을 것이다.

자극적인 소재에다, 그 소재를 둘러싸고 벌어질 사태의 전개가 자못 궁금하기도 했고
(난 추리적인 요소가 강한 소설, 즉 분석해야 하고 예측해야 하기 때문에 상상력을 자극하는
작품을 좋아한다.)

음식을 소재로 인간의 심리를 어떻게 분석할지 작가의 관점이 궁금하기도 했다.

그렇게 한참을 읽어야 할 책 목록에만 저장해 두었다가 조경란과 주이란의 [혀]를 동시에 사서 읽었다.



2.

미식가라면 이 소설을 읽으면서 시시로 침이 고일 것이며, 때로는 식탐을 참지 못해

음식을 먹으면서 이 책을 읽을지도 모르겠다. 더러는 레시피를 따라 새로운 요리에 도전할 수도 있겠고.

그러나 난 미식가가 아니다. 식탐은 있지만 불규칙적이다. 정서가 불안할 때마다 포만감을 느끼려고

폭식을 더러 하는 스타일이기 때문에 음식의 질을 따지지는 않는다. 그냥 배가 부르면 된다. 그럼 생각이

조금 단순해진다. 먹고, 싸고, 자고, 뒹굴고...기본적인 욕구에 충실해진다.

그게 조금 아쉽다. 이 책은 레시피에 상당한 공을 들인데다 그 요리의 맛을 묘사하는 과정은

가히 감각의 만찬이라 불릴만해서 요리에 관심이 없는 나로선 작품의 느낌을 100% 흡수할 수가 없었다.


몇 페이지에 걸쳐 요리 과정을 설명하고 그 맛을 묘사하는 대목에서는 오감에 정신분석까지 곁들인다.

한 편으로 이 소설은 요리에 관한 문화인류학적 고찰이라는 재미까지 더하고 있는데 이런 부분이

나올 때마다 거의 스치듯 훑고 지나갔기 때문에 아쉬움도 남는다. 소설은 엄청 빨리

읽었지만 작품의 맛을 온전히 느끼지 못한 기분.



3.

그럼에도 엄청 재밌게 읽었다.

남자 친구가 바람난다. 요리사인 여자는 그 남자를 잊지 못한다.

더  이상 함께 요리를 즐길 수 없다. 모든 꿈이 사라졌다. 폐인 모드로 돌입한다. 여기까지만 줄거리를

들었다면 그냥 보통 사랑 이야기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정도 수준에서도 재밌다. 절망모드와 생존모드를 오고가는 여자의 심리상태 묘사가 뛰어나다.

극도로 불안정한 심리 상태에서, 감정의 극과 극을 수시로 오가는 상태를 키친과 주방이라는 공간을 통해

오밀조밀하게 묘사해내는 솜씨가 뛰어나다. 그리고 그 감정이 누적되면 상태에 따라 다양한

요리가 결과물로 나오고

그 요리를 만드는 사람, 즐기는 사람, 평가하는 사람을 둘러싼 갖가지 에피소드가 오물조물 잘 버무려져

있다. 따라서 제목이 [혀]인 첫번째 이유. 혀로 맛을 보기 때문이다. 음식을 둘러싼 이야기인 만큼 혀에

대한 묘사는 모자람이 없다. 어떤 때는 몸뚱이 전체가 거대한 혀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헤어진 남차친구는 물론이고 주인공인 맺는 모든 인간관계에는 음식이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가장 절친한 친구로 등장하는 문주는 폭식증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신뢰를 쌓았고,

요리사로서 완벽주의자에 가까운 주방장은 경쟁자인 동시에 종종 버팀목 역할을 수행하는

존재로 등장한다. 알콜중독자인 삼촌은 유일한 가족으로 나오는데, 삼촌의 아내는 거식증에 시달리다

자살했다.



4.

혀는 먹는 행위를 넘어서 자는 행위의 중심. 즉 성기로 묘사된다.

(여성이기에 더 그럴 것이라 생각한건데) 생김새가 비슷할 뿐만 아니라

먹는 행위와 성관계는 가장 기본적인 욕구의 하나라는 점에서 여러 가지 비교가 가능하다.

작가는 이 점을 충분히 살리고 있다. 상처받은 주인공의 방어심리와 공격성은 두 개의 입을

통해 다양한 방식으로 표출된다. 어쩌면 사랑이란, 크게 이 두가지

태도 사이를 오고 가는 것이 아닐까? 적어도 두 개의 입을 함께 포갤수 있을 만큼 친밀한

관계가 되기 까지는. 라고 말하는 것처럼.

두 개의 입은 관계를 맺는 과정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한다. 절정의 관계를 나누고 있을 때 두 개의

입은 사랑을 더욱 빛나게 한다. 당연히 사랑이 깨진 후 두 개의 입을 매개로 공유했던 숱한 경험들은

지극한 고통을 수반한다. 모든 추억은 고통으로 다가온다. 감각기관은 절망과 희망을 한데

모아놓은 모순의 집결지다. 따라서 그 두 개의 입이 때로는 지독한 방어 도구로, 때로는 극단적인

공격 도구로 사용되는 것이 당연하다. 제목이 [혀]인 두번째 이유.



5.

제목이 [혀]인 마지막 이유.

가장 자학적인 방식으로 자신을 파멸시키고 또 그럼으로써 재생을 꿈꾸고,

재생을 위한 의식을 치루는 과정에서 [혀]를 선택하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는 예상한 결론에도 불구하고 결말을 보고 싶은 마음은 점점 간절해지고

심장은 빨라지고 끝내는 허탈한 기운을 남기고 끝난다. 아주 섬세하게 묘사된 그와의 마지막

식사 장면은 음식의 맛을 모르는 나로서도 숨막히게 흥분됐다.

폭풍소요 고요. 정적 속의 살의. 가장 조용하고 폭력적인 복수.


그 극단적인 결말에 이르러 제목의 상징적 의미가 도처에서 폭주한다.

마치 이 결말 하나만으로 보려고 달려왔던 듯. 전혀 새로운 종류의 추리소설을 읽고 난 기분이다.
 



p.s 1 주이란의 [혀]는 단편이라 아주 금새 읽었다. 혀를 매개로 모순적인 인간 행위와 심리를 집요하게

파고든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래서 어느 정도는 불편하고 그 불편함 이상으로 매혹적이란 점에서

두 소설은 비슷해 보이기도 하지만 구체적인 내용으로 들어가면 상황이 많이 다르다. 표절이라 보기는

어려울 거 같고, 모티브 자체를 따왔다면 그도 표절이라 해야할지..쩝...아무튼 조경란의 [혀]가 훨씬

섬세하고 세련되었다는 느낌을 받는다. 주이란의 [혀]는 단편이라 압축적이고 직설적인 표현이 많아서

더 그렇게 느껴지는지 모르겠지만  아직은 묘사방식이 조금은 거칠고 덜 다듬어진 느낌이다.



p.s 2 '음식은 작품이고 미식가나 요리사는 예술가다. 입술은 최초의 에로스 기관이다. '

조경란의 작품을 온전히 이해하기엔...쩝...내공이 조금 딸리는 듯. 혹은 된장이 되어야 하는 건가?

소설 배경마자도 죄다 청담동, 압구정동이 되는 건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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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욤 뮈소 <구해줘>

- 기욤 뮈소 <구해줘>

유희열의 라디오 천국에 사연을 보낸 게 당첨되었고 5만원 상당의 문화상품권과 이 책을 선물받았다.

그런데 정작 내가 올린 사연은 기억나질 않는다. 심지어 올렸는지 조차도...

아무튼 공짜인데 이 정도면 쏠쏠하다 싶어 다른 프로그램에도 사연을 올렸으나, 몇 번 소개는 됐는데

선물은 없었다.



기욤 뮈소의 <구해줘>

내 스타일은 아니라고 생각해서 한 동안 책장에서도 손이 닿지 않는 구석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래도 선물받은거 같아서 버리기는 뭐하고...책을 읽으면 남을 주는 스타일상  책장이 엄청 비좁은 관계로

슬슬 새책에 자리를 내줘야할텐데...

그렇게 밀려둔 숙제처럼 읽었다. 처음 1/3은 평범한 연애소설 같아서 읽히지 않다가 중반 이후로

스토리가 급반전. 영화 <슬라이딩 도어즈>처럼 한 순간에 어긋난 인연이 어디에 가 닿을지

독자에게 상상을 강요하는 듯한 소설 같기도 하고, 가끔은 <식스 센스>처름 죽은자가 나타나고

또 그 죽은자를 볼 줄 아는 사람이 나타나서 미해결의 난제를 해결하는 소설 같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총격신과 자동차 격추신으로 뒤범벅된 헐리웃 영화같은 느낌도 든다.



후반부는 지루하지 않게 후다닥 읽었다. (성격상 추리를 많이 요구하는 작품을 좋아한다. 언제나)

역시나 장정일이 [독서일기]에서 말한대로 후다닥 읽히는 소설이 좋은 소설이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2/3만큼 괜찮은 소설이라 해두자.

영화화될 가능성이 높다는 역자후기를 보고 검색해봤으나 영화화되지는 않았다.

'긴장감과 속도감 넘치는 영화 한 편을 본 기분'이라는 평이 대부분인 것에 비추어 대충 누가읽어도

비슷한 느낌을 받을 그런 소설.

재밌고, 잘 쓰고, 그런 만큼 딱 그 만큼인.

노래를 잘 부르는 가수보다 색깔있는 목소리를 가진 말랑말랑한 가수들이 뜨는 것처럼.

소설도 그렇다. 그렇다고 그런 소설이 싫다는 건 아니고 분명 그 가운데도 본좌는 나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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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하 [퀴즈쇼]



내가 좋아하는 중견 작가하면 단연 김영하와 김연수다. 이 두 작가는 일단 무지 유명하고 나름 앞날이 유망해서 내놓는 작품마다 늘 주목을 받는다. =이 둘이 인기가 많은 이유는 서로 다르다. 그 두 가지 이유는 내가 세상을 대하는 대표적인 두 가지 방식이기도 하다.

김연수는 끊임없이 90년대를 이야기한다. 김연수는 언제나 '역사적 진실이란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당연히 이 질문 안에는 90년대 운동의 패배의식이 짙게 드리워있다. 그는 하필 소련이 망한 91년에 대학에 입학했고 그 해에 수많은 열사투쟁 속에서 민주화 운동의 열기가 식어가는 것을 온 몸으로 경험한 사람이다. 과거를 재해석하고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을 수정하려는 노력은 삶의 의지가 발동한 것이겠지만 작품 전반에 짙게 드리운 회의적인 시선과 어두운 그림자는 희망의 언어를 압도해버린다. 당연히도 이것이 그의 소설을 읽는 이유인데, 또 당연히도 슬슬 그의 작품이 부담스러워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감정이 동화되는 소설만큼 매력있는 소설은 없다. 그러나 그 감정이 너무 과하면 힘겹다.

김영하 소설은 신선하고 재밌다. 초기 소설들은 소재 자체가 특이해서 흥미롭고  [아랑은, 왜]같은 소설은 형식이 파격적이다. 적어도 당시에는 그랬다. 문장은 짧고 간결해서 쉽고 빠르게 읽힌다. 비유는 유쾌하고 문체는 영화처럼 감각적이다. 그렇다고 요즘 유행하는 일본 소설과 비슷한 것도 아니다. 나름 등장인물들이 처절하고 너절한 모습을 보이는데다  [검은꽃]이나 [빛의 제국]처럼 역사를 소재로 한 이야기도 써왔기 때문이다. 또 소설 속에 20-30대 마이너리티 골방 백수들의 이야기가 자주 나오기 때문에 공감 가는 측면도 있다.

그런 김영하가 내놓은 신작 소설 [퀴즈쇼]. 20대를 위한, 인터넷 세대를 위한 소설을 쓰고 싶었다는 그의 말처럼 소설은 비루한 20대 청년의 삶을 이야기한다. 소설은 여전히 재밌고 흐름은 경쾌하다.  문장이 이전보다 가벼워져서  일본 소설을 읽는 느낌이다. 후반부가 조금 지루한 느낌이고 결말은 허탈하지만 성장소설은 늘 흥미롭다. 소설을 읽으면서 여러 가지 소설과 영화 제목이 스쳐 지나간다. 수많은 장면과 함께 20대 삶의 궤적을 돌아보게 된다.

[접속] : 97년 개봉작. 대학교 2학년 때 소개팅했던 애랑 같이 본 작품. PC통신 나우누리에서 채팅으로 나날을 보내던 때라 꽤나 공감했던 작품. 채팅으로 멋진 상대를 만날 수 있다는 환타지가 자취생들의 밤을 가득 채우던 나날.

[88만원 세대] : 88만원 세대라는 신조어를 유행시켰던 책. 비참한 20대의 삶을 구조적으로 분석하려는 시도만으로도 훌륭한 책. 386세대가 자신들의 경제적 기반을 잃지 않으려고 20대를 착취하고 있다는 분석이 매우 신선하면서도 충격적으로 다가왔던 책.

[파이트 클럽] : 오...이 영화는 정말 신선하고 충격적이었다. 별 볼일 없는 노동자들이 은폐된 공간에 모여 주먹질을 해대며 열광하는 그 모습. 인간심리의 이중성을 날카롭게 파고든 영화. 에드워드 노튼의 진정한 매력이 마구 뿜어져 나오는 영화.

[우연의 음악] :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넘나들며 인간 내면 심리의 변화를 매우 섬세하게 묘사하는 폴 오스터의 소설. 갇혀 있는 세계와 열린 세계. 두 세계의 차이와 유사성. 자발적인 구속과 복종. 많은 것을 고민하게 만드는 소설.


결국 밀폐된 공간에서 퀴즈쇼를 벌이며 주인공이 깨달은 것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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