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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몇 달 전에 김종엽 씨의 '남보원 유감'을 읽고 비판글을 쓴 적이 있다.
오늘글은 맥락상 그 글의 2탄쯤 된다.
일관된 문제의식은 '문화현상에 대한 운동권의 도덕적 강박과 엄숙주의 에 대한 비판'이다.
간만에 불질을 자극한 직접적인 원인은 '세시봉 바깥세상'이란 김선주씨 칼럼(2월 6일자 한겨레)이다.
그러니까 그 내용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세시봉을 마냥 즐기기 어려운 시절이었다. 이유인 즉,
엄혹했던 군사독재 시절 마냥 세시봉을 즐길 수만은 없었던 가슴 아픈 역사가 있었다.
그리고 지금 역시도 세시봉을 마냥 즐기기 어렵다.
그 독재자의 딸이 여전히 가장 강력한 대선후보로 맹위를 떨치는 현실이 있기 때문이다.
민주화 운동의 이름으로 함께했던 이들이 세시봉 바깥세상에 노래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다.
이 글을 비판하기가 조금 망설여진다.
망설여지는 이유는 미안함 때문이라기 보다는 안타까움이나 답답함에 가깝다.
너무나 뻔한 언어구조인데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무엇보다 이 언어구조에 어떤 대화 가능성을 발견하기 어렵다.
그래도 쓴다. 여전히 함께 대화할 대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1.
한겨레 신문과 시사인을 정기구독하기 때문에 비슷한 언어로 사회 현상을 분석하는 글을 자주 보게 된다.
최근에 비슷한 느낌을 받은 글은,
'홍대 청소노동자들 집회'에 나타나 학생들 공부에 방해가 되니 '집회를 중단해달라'고 요청한 총학생회장
관련 기사들이다. 한겨레나 시사인의 초점은 한결같이 비정규직으로 계급적 각성 단계 있는 노동자들과
이들을 방해하고 나선 비권 총학생회의 대립에 맞춰져 있다. 너무나 뻔한 선악구도, 철없는 대학생과
척박한 세상을 탓하는 계몽적 시선. 자연스레 뒤따르는 도덕적 엄숙주의, 비관주의.
'너도 그 대학 나와봐야 비정규직밖에 더 되냐?' '대학도 자본주의에 물들어서 맛이 갔다'
따위의 꼰대식 하소연 내지는 충고가 기사에 달린 댓글의 거의 대부분이다.
이 답답한 프레임을 깬 건 당사자인 노동자와 총학생회장인데(대개는 어머니인) 어머니들은 "문제의"
총학생회장에게 날도 추운데 밥이나 먹고 가라고 말한다.(지혜로운 존재들이여...) 총학생회장은 복잡한
감정에 어쩔줄 몰라하며 순간 눈망울이 흔들린다. 삶의 진실성 앞에 선악의 대립구도는 손쉽게 KO당했다.
그리고 이 장면을 놓치지 않고 배우 김여진 씨가 현장의 분위기를 전한다.
계급적 대립구도, 혹은 그 계급적 대립구도에 중간방해꾼으로 개입한 총학생회장의 존재라는 측면은
당연히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진실의 조각들이 존재한다.
흔들리는 총학생회장의 눈망울이 대변하는 인간으로서의 변화 가능성, 그리고 쉽게 보기 힘든
그 상황을 연출해 낸 복잡한 시대적 배경과 관계들. 이 간단한 한 장면 속에도 저마다 다른 관점에서
이야기 할 수 있는 다양한 진실이 존재한다.
그것을 읽어내는 지혜로운 눈이, 또는 읽어내려는 의지가 간절했다.
2.
이런 엄혹한 시대에 시크릿 가든을 보며 마냥 즐길 수 만은 없는 이유는,
이런 엄혹한 시대에 아이돌을 보며 마냥 즐길 수 만은 없는 이유는,
이런 엄혹한 시대에 개콘이나 보며 마냥 즐길 수 만은 없는 이유는,
있다. 그러나, 어떤 사회현상에 대한 분석이 단순한 이분법적 구도에 머무를 때
가장 큰 손해를 보는 것은 변화를 갈망하는 자들이다. 세시봉 안과 세시봉 바깥으로 세상을
양분해서 생각할 때, 그리고 다수가 생각없이 세시봉에 열광한다고 다수의 감성을 혐오하는 순간
자신들이 원하지 않는 대중과 활동가들 사이의 벽(의도와 무관하게 만들어지는)은 더욱 견고해진다.
내가 옳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다만 이제는 좀 이런 도식화된 분석틀을 버리자는 것이다.
세시봉을 둘러싸고 존재하는 여러 가지 맥락만 늘어놓아보자. 내 능력은 여기까지다.
3.
관점 1)
놀러와를 연출하는 신정수 피디는 마봉춘 노조원으로 지난 파업 때 삭발을 했었다.
아는 사람만 아는 얘기지만 신정수 피디는 나름 아웃사이더 기질이 있는데다 조용하고 내성적
성격이다.(주워들은 얘기다.) 기존 버라이어티나 토크쇼와 다르게 놀러와는 철저하게 비주류들을
게스트로 초대해서 깨알같은 소소한 재미로 틈새 시장공략에 성공한 프로다. 그 중 가장 대박이
난 게 세시봉이다. 놀라와의 색깔은 신정수 피디와 무관하지 않아서 묘하게 변방의 이야기로
다수를 감동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다.
관점2)
세시봉 2편 오프닝은 장기하+윤도현+송창식이 함께 부른 담배가게 아가씨였는데,
이 공연은 정말 명불허전이었다. 아이돌 일색의 가요계에 장기하, 윤도현 조합이 갖는 의미.
철저하게 나이 든 가수를 외면하고 오래된 것은 무조건 폐기 대상으로 여기는 한국사회에서 송창식
조합이 갖는 의미. 이들을 섞어서 이렇게 폭발적인 무대를 만든다는 것 자체가 흥미로운 발상인데
실제 공연 자체도 환상적이었다.
그리고 양희은의 아침이슬이 흐를 때 뒷배경을 가득 채운 김민기의 클로즈업된 사진은 묘한
감동과 회한을 불러 일으켰다. 그 무대는 양희은의 노래를 위해 준비된 것이 아닌, 그 시대 함께
고통받았던 사람들에게 보내는 존경의 표시 같았다.
관점3)
서울대생임을 끊임없이 자랑하는, 머리부터 발끌까지 마초 자뻑 조영남
연세대+기독교+모더니즘+세련미 무엇하나 빠지는 구석이 없는 윤형주
자유로운 사고와 풍부한 감성의 소유자 이장희
늘 막내 역할을 즐겁게 받아들이는 온화한 성품의 소유자 김세환
무일푼으로 노숙자처럼 살아 온 기이한 천재 송창식
내가 세시봉을 보며 느낀 캐릭터의 특징을 그냥 써 본 것이다. 거기에는 물론 불편함도 있다.
종교 포비즘이 있는 나로서는 번안곡이나 팝송이 대개 서구적+종교적 감성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
조영남을 통해 여과 없이 드러난 학벌에 대한 우월감, 입만 열면 윤여정을 언급하는 그 무례함 등
불편한 구석도 많았다. 그러나 또 한 편으로
그저 그런 옛날 가수로만 알았던 그들이 한국 최초의 싱어송 라이터 1세대를 형성했다는 점,
(특히 김세환 같은 가수는 그 존재감이나 있었겠나??)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이는데 거부감이 없는 선두주자들이었다는 점,
(1910~20년대 가장 문화적 감수성이 예민한 엘리트들, 흔히 모던보이라 불리우던 이들은 대개 맑스주의자가
되었고 초기에 모더니즘이 서구로부터 이식되는 과정에서는 기독교의 영향력도 상당했다.)
행동이나 삶의 패턴 역시 상당히 아방가르드 한 면모를 보인다는 점
등 새롭게 알게되고 재해석되는 역사에 흥미로운 요소들이 많았다.
세시봉을 구성하는 요소들 자체가 이질적이고 복합적인 것들이 뒤죽박죽 섞여 있듯이
세시봉에 열광했던 사람들 또한 그랬을 것이다. 이들에게는 다양한 감정이 뒤섞여 있다.
최소한 전국노래자랑을 고정적으로 시청하는 사람들보다는 세시봉에 열광하는 이들에게서
소통의 가능성을 단 1%라도 더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4.
아이돌에 열광하는 고딩들이 촛불시위를 주도했다는 사실을 잊었나?
그렇게 '촛불로부터 배우자, 배우자' 그래놓고 왜 맨날 제자리인가?
아니 뭘 배워야 한다는 강박 자체라도 있다면 다행이지, 배우기는 커녕 늘 자신이 조종하고 관리하고
바로잡아주는 선지자라는 병적 계몽주의부터 좀 어떻게 하시지...
어떤 사건이, 현상이라 불릴 만한 영향력을 행사할 때 그 사건으로부터
'내 편에게 유리한가? 저쪽 편에게 유리한가?" 혹은 "그들은 각성된 자들인가? 아닌가?" 따위의
잣대를 들이미는 게 얼마나 고리타분한 일인가?
그 근거없는 도덕적 자신감+우월감은 열등감+피해의식과 동전의 양면이다.
양희은은 무릎팍에 나와서 아침이슬이 시대를 대변하는 노래가 되었는데 당시 느낌은 어땠냐는 질문에
'난 그저 노래랑 포크송이 좋아서 부른거지. 이렇게까지 큰 영향을 미칠거라고는 생각을 못해봤다.
내가 무슨 대단한 일을 한 사람처럼 평가를 받는게 좀 그렇다. 난 그냥 무서웠다. 감히 나설 엄두를 못냈다.'
고 대답했다. 그런 노래가 시대를 대변하는 노래가 되기도 한거다.
세시봉 전반이 불편하고 유일한 감동은 오직 '아침이슬', 오직 '양희은'이라고 말할 때
그 감동 역시도 심하게 단선적으로 왜곡된 것이며, 문화를 걸러내는 감수성은 지나치게 빈곤하다.
좀 그러지 마라. 더 많은 것들을 품어안기는 커녕 휑하니 독만 남게 될지도 모른다.
..
우리는 모두 헛똑똑이들이다. 많은 것을 안다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대부분의 사실들을 알지 못한 채 살아간다.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들 대부분은 '우리 쪽에서' 아는 것들이다. 다른 사람들이 아는 것들을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런 처지인데도 우리가 오래도록 살아 노인이 되어 죽을 수 있다는 건 정말 행운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어리석다는 이유만으로도 당장 죽을 수 있었다. 그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이 삶에 감사해야만 한다. 그건 전적으로 우리가 사랑했던 나날들이 이 세상 어딘가에서 이해되기만을 기다리며 어리석은 우리들을 견디고 오랜 세월을 버티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
김연수, <세계의 끝 여자친구> 중에서
너무 너무 오랜만에 소설을 읽다가, 오랜만에 마음을 건드린 구절이 읽어 옮겨둔다.
[전쟁과 인간, 군국주의 일본의 정신분석]( 마사아키 노다 지음 |서혜영 옮김, 길 출판사)는 수감 중에 읽은 책 가운데 가장 보석 같은 책이다. 정신과 의사이며 비교문화정신의학을 전공한 저자는 전후 일본인의 집단적인 망각 상태를 인터뷰라는 형식을 통해 집요하고 파고 들어간다. 인터뷰 대상은 2차 세계대전 전후에 징집되어 만주지역에서 군생활을 했던 일본인들. 난징대학살과 태평양전쟁은 물론 731부대(흔히들 마루타 부대라 부른다)의 존재까지, 군국주의 일본이 저지른 전쟁범죄들이 개인들의 증언 속에서 되살아난다. 난징대학살의 끔찍했던 밤, 일반인을 대상으로 삼는 생체실험, 초년병의 총검술 연습 대상이 되어 살해당한 무고한 농민. 이 책은 전쟁에 참가했던 사람들이 전쟁과 살육에 무뎌져가는 과정, 전쟁 이후 가해의 역사를 망각하고 자신을 정당화하는 과정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저자는 그 집단적인 망각과정이 군국주의에 대한 반성의 부재로 나타나고, 결국 또 다시 일본사회가 오른쪽으로 기울어가는 원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아직까지 남아있는 죄의식이야말로 우리들(일본사회)의 귀중한 문화이며, 진정으로 상처를 입는 데 익숙해진 사람만이 타인을 이해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남긴다.
2.
2차세계대전 후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독일군인들은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고 말했지만, 유죄선고를 받았다. 국가가 학살과 침략행위에 참가하고 동조할 때 개인은 그것을 적극적으로 거부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박정희, 전두환이 쿠데타를 일으킬 때 이에 저항하는 군인이 있다면? 광주시민을 진압하려는 명령을 거부한 군인이 있다면? 나치에 협력하기를 거부한 군인이 있다면?
훗날 역사는 전쟁을 거부한 이들을 영웅으로 기록할 가능성이 크다. 모든 이들이 올바른 판단이라고 하지는 않지만 많은 이들이 그 선택을 인정할 것이다. 그러나 다수는 침묵하고 따를 뿐이다. 당장 살아야 한다. 저항의 대가는 너무 가혹하고 무엇보다 전쟁이라는 그 큰 문제는 개인이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판사님이라면 어떻게 했을 거 같아요?"라는 말이 모든 걸 압축한다.
어찌보면 자신도 전쟁이라는 수레바퀴에 휩쓸린 피해자일지도 모른다. 다수는 이 선택을 차선이라고 말할 것이다. 자신에게도 살짝 면죄부를 쥐어주면서. 적당히 비겁하게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것이 늘 다수의 선택이며 가장 강력한 침묵의 연대보증이다.
한나로 인해 힘겨운 감정. 솔직함. 성실함.
생활을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었다면 가장 생활력 강하고 듬직한 존재였을 이 사람.
일생을 혼자 힘으로 열심히 살아왔고 남에게 아쉬운 소리 하지 않았고 매순간 최선을 다했던 이 사람.
한나로 인해 불편한 감정. 죄의식의 결여.
출소를 하루 앞두고 몇 십 년 만에 마이클과 재회한 장면에서조차 일관된 그 솔직함과 죄의식의 결여.
한나의 자살은 마이클에게조차 받아들여지지 못한 자신에게 내린 사망선고. 한나에게 가장 중요했던
마이클.
장면 2- 마이클 "요란하게 헤어질까 아니면 조용하게"
글을 쓰려고 인터넷을 검색해봤다. 써먹을 명대사가 있나 검색해봤다. 명대사는 대부분 한나의 것.
그나마 몇 개 안 되는 마이클 대사는 전부 어릴 적 사랑에 빠진 상태에서 날린 대사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영화를 어떻게 바라보는지는 분명하다.
끝내 이루어지지 못한 가슴 아픈 사랑 이야기. 역사는 그 안타까운 사랑을 더욱 절절하게 만들어주는
양념같은 것.
그러나 이 영화는 전혀 다른 생각으로 만들어진 듯 하다. 물론 사랑이 중요하지 않은 건 아니다.
사람들은 성인이 되고 난 후 마이클의 태도를 답답해한다.
끝내 재판정에서 한나가 글을 몰랐다는 사실을 말하지 못했다.
사랑을 원하는 한나에게 끝내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한나의 유언에 따라 돈을 전해주러 갔을 때도 길게 설명하지 않았다.
성인이 되고 난 후 마이클은 심하게 대사가 없다.
늘 울고 있는 그 눈. 그것이 모든 대사다.
마이클은 정말 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대사가 없다.
마이클이 할 말이 없는 이유는 할 말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몇 십 년 만에 다시 만난 한나에게 물었던 것은 지난 시간에 대한 반성이었다.
사랑에 관대한 요즘 사람들이 보기엔 정말 몸서리쳐지는 장면. 완고함. 결벽증.
정말 그렇게까지 해야하냐는...
사랑과 역사적 정의 사이에서 갈등하는 마이클.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에게조차
이분법적 사고를 용인하지 않았던, 끝내 타협을 거부했던, '무조건 사랑하는 사람편'이라는
대다수 사랑 지상주의자들의 가슴을 후벼팠던 그 태도.
마이클은 진심으로 한나를 사랑했다.
녹음테이프를 보내는 장면에서 가슴이 찡했던 것은, 그 사랑이 너무 멋져서가 아니라
지난 시절과 화해하고 오래 동안 가슴 속 깊이 쌓여있는 상처를 스스로 마주하고 치료할 용기를
냈다는 사실.
동시에 마이클은 역사적 책임감을 회피하지 않았다. 그 수 많은 고통을 외면하지 않았다.
적어도 마지막 장면에서 한나가 다른 반응을 보였다면, 그것이 사랑은 아니라 해도
적어도 둘 사이에 화해는 가능했을텐데...새로운 관계를 모색할 가능성.
하지만...답은 이상하게 꼬여버렸다.
그 마저도 마이클은 준비하고 있었던 듯. 계속 관계에 미련을 보였지만 체념의 태도 역시
늘 준비해두고 있었다.
너무나 많은 자의식. 끝도 없는 반성.
이제 그는 그 모든 과거를 어떻게 해석하고,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결국 중요한 것은 지금. 현재 독일인들은 이 영화를 어떻게 봤을까? 일본의 태도는 관심도 없다.
적어도 수 많은 반성을 거듭한 그들은 이 영화를 어떻게 봤을까? 불편했을까?
무엇 때문에? 이제 충분하다고 여길까?
그들에게 한나나 마이클의 태도는 어떻게 보였을까?
그 모든 의문은 딸의 몫인걸까? 그는 최대한 성실한 태도로 많이 이야기를 전해 주었을 것이다.
이제 너의 몫이 생길거란다.......
<더 리더:책읽어 주는 남자>라는 제목만 보고 연애 이야기인줄 알았는데....
영화 마켓팅은 늘 본말 전도. 짜증이야.
영화를 보는 내내 포레스트 검프가 생각났다.
고등학교 때 극장에서 처음 본 영화. 당시엔 감독의 의도를 전혀 모르고 재밌게만 봤는데
나중에 철들고 다시 보니 곳곳에 역사적 장치들이 꽤나 많이 깔려 있더라.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가다를 보기 전에는 그런 비슷한 느낌을 상상했다.
개인의 일대기가 좌~악 펼쳐지고, 숱한 역사적 사건들이 양념으로 들어가고,
그 이야기가 죽음으로 마무리 될 때는 어느 정도 달인의 경지에 이른 군상들의 면면을 볼 수
있을테다. 허탈함, 씁쓸함, 달관과 수용, 넉넉함, 이해와 용서, 축복, 고귀함, 반성...내가 생각하는
최상의 죽음이란 그런 모습이다.
본 사람들 의견은 대체로 지루하다는 평이 많았다. '좋았는데...조금 기~~일더라.' 정도.
나는 지루하다는 느낌은 없었다. (중간에 살짝 졸긴했다.) 이런 류의 영화를 좋아한다. 성장영화 포함.
저 인생이 대체 어디로 흘러갈 것인가? 저 순간에 어떤 판단을 할 것인가? 생각하다보면 지루하지 않다.
포레스트 검프보다는 최대한 감독의 주관적 개입이 자제된 느낌을 받았다. 역시 중심에 사랑 이야기가
있기 때문일까? 주변 이야기들은 절대 전면에 나서지 않는다. 사랑이 전개되는 방식도 조금은 맘에
들었다. 영원이란 없다는 벤자민의 현실적 사고, 그럼에도 한 순간 최선을 다해 사랑하는 모습.
최고의 발레리나로 명성을 얻다가 부상을 당한 후 방황하지만 멋있게 제 삶을 찾아나가는 데이지,
적극적이면서도 성숙한 모습. 무엇보다 그 배우 둘은 왜 그리 멋지고 아름다운지...브레드 피트는
눈가에 주름이 자글자글해도 멋있고...케이트 블란쳇은 매력적이고 우아하다.
먼 길을 돌아 제나와 결합하는 포레스트 검프에서는 미국 보수주의가 취할 수 있는
가장 도덕적이고 올바른 결론에 이르렀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니까 포레스트 검프는 너무 착해서 조금은 정치적이고 유치해 보인다.
(한 시대를 살아낸 사람의 모습은 그 자체로 아름답고 모든 삶이 다 다큐멘터리다. )
반면 '벤자민~~'의 담담한 어조는 극적 재미가 크진 않지만(그래서 지루하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겠지)
나이듦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멋있게 늙는 것은 어떤 것일까? 세월을 대하는 여러 가지 태도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역할은 데이지였다. 아름다운 외모, 절정의 발레리나. 부상으로 발레를 접고
점점 어려지는 벤자민과 대조적으로 주름이 늘어가는 얼굴. 끝내 이별을 받아들이지만 한시도
마음에서 내려놓지 않았던 그 말 '굿나잇 벤자민'....
마지막 순간까지 애 늙은이 벤자민을 보살피는 장면이 조금 지루하긴 했지만.
세월을 대하는 벤자민의 태도도 성숙해보였다. 젊어진다는 사실 자체를 무기로 쓸 수도 있었을텐데...
늘 미래를 대비하며 마음을 가다듬는 행동이 괜찮아보였다. 뭐랄까 가장 기쁜 순간에도 존재하는
숙명적 비관주의 같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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겁나..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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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 책에서 본건데 외국 어느작가는 `현재'에서 `다음'으로 넘어가는 길목에는 항상 `틈'이라는 것이 존재하는데, 그`틈'을 제대로 살피지 않으면 `다음'이라는 것을 제대로 볼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다고 하더군요. 단순하지 않은, 그 풍부한 여지가 참으로 좋았어요.부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