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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울진 여행

겨울 여행지 선택이 쉽지 않다. 조용히 사색하는 여행보다 시끌벅적한 관광에 익숙한 탓이다.

 

그리고 날씨가 추워지면 움직이기가 싫다. 그래서 최대한 이동거리를 줄이면서도 다양한 재미를

 

동시에 즐기려고 휴양림 안에 있는 펜션을 숙소로 결정했다.

 

휴양림은 대부분 도,시,군 등에서 직접 운영하기 때문에 펜션 가격이 매우 싸다.

 

내가 선택한 곳은 울진군에 위치한 구수곡 자연휴양림. http://gusugok.uljin.go.kr/

 

요즘은 홈페이지가 잘 되어 있어 직접 예약이 가능하다. 비수기 평일에는 4만원짜리 방도 있다.

 

그런데 주말에는 좀 예약이 밀려 있어 싼 방을 구하기가 어렵다. 부지런해야겠다.

 

비수기 평일에는 방이 많다. 4만원짜리 방에 들어가보니 4명 정도는 충분히 잘 수 있다.

 

무리한다면 그 이상도 가능하다.

 

 

여행 정보는 홈페이지에 잘 나와 있다. 요즘은 블로그만 돌아도 정보가 많아서 여행 계획

 

짜기가 그리 어렵지는 않다.

 

>> 휴양림 입구, 휴양림 관리실은 울진군 건축과에서 나온 공무원들이 돌아가며 근무.

 

 

 

구수곡 휴양림은 9개 계곡이 모야드는 곳이라는 의미라는데...이 곳을 선택한 이유는

 

산림욕, 해수욕, 온천욕이 동시에 가능한 곳이라 좋다는 지인의 추천이 있었기 때문.

 

그런데 직접 가보니 차가 없는 사람은 조금 불편하겠다. 서울에서 고속버스를 타면 강릉

 

거쳐 동해, 삼척 지나 울진으로 들어간다. 말로만 듣던 7번 국도를 따라 달리는 길은

 

오른편에 산을, 왼편을 바다를 끼고 달리기 때문에 경치가 좋다.

 

 

>> 휴양림으로 바로 들어가는 버스가 없어서 중간에 갈아타야 한다. 그나마 비수기라

버스도 1시간 정도 간격으로 한 대 정도. 버스를 기다리며 잠시 바다 구경을 했다. ㅋ~~좋다.

 

 

그나마 갈아탄 버스도 휴양림 앞까지 가지 않고 삼거리에 내려준다. 내려서 20분 정도를

 

걸어들어갔다. 아침 10시 30분 정도에 차를 탔는데 도착해보니 4시가 다 되어 있다.

 

예상을 잘못했다. 이동시간이 오래 걸려서 첫 날 일정은 그냥 펜션에서 뒹굴거리기.

 

그래도 외진 곳에 와 있으니 기분이 좋다. 사방이 고요하다.

 

 

>> 첫째날 아무 것도 못해서 마음이 급해졌다. 둘째날 아침 일찍 산행에 나선다. 휴양림에서

바로 등산로로 이어진다. 등산로 입구에 위치한 장승. 폼으로 세웠다.

 

 

>> 산행 중에 참고하려고 지도를 사진으로 찰칵. 유럽여행 때 배운 팁.

 

 

>> 늦겨울 계곡의 다양한 모습. 산 아래에서부터 정상까지 천천히 봄이 찾아온다.

계곡 입구에는 어느새 봄이 성큼 와 있다.

 

 

고도가 올라가지 점점 눈이 많이 쌓여 있다. 등산 장비 없이는 더 올라가는 게 무리일 거

같아서 중간에 내려왔다. 그래도 겨울산이라 속도가 더딘 탓에 시간이 많이 지났다. 운동화도

젖었다.  지친 몸을 달래기 위해 오후에는 온천욕을 준비했지...

 

휴양림에서 온천장까지 거리는 3km정도 밖에 안되는데 문제는 대중교통 수단이 없다.

콜택시를 부르면 왕복 3만원은 들거란다. 이런 낭패가-.-;; ㅋㅋㅋ 그러나...

유럽 자전거 여행 때 배운 거. 작정하고 달려들면 답이 나온다.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었더니

관리실에서 공짜로 데려다준다. 내가 고맙다고 홈페이지에 후기 올려준다고 하자,

절대로 차 태워줬다는 말은 말란다. 공무원 차량이라 불법(T.T;;)이란다. ㅋㅋㅋ 왕재수

 

난생 처음 스파장에 가봤는데 재밌더라. 이제 물놀이가 안 무섭다.

 

 

>> 마지막 날은 예정대로 바다로. 남쪽으로 내려올수록 물빛이 녹색빛을 더한다. 바람 불어

파도까지 제대로 쳐주시니 감솨~~ 멋져~~

 

 

올라오는 시간을 고려해서 마지막 날도 조금 일찍 일어났다. 휴양림에서 20분 걸어서

삼거리로 나갔다. 거기서 1시간마다 한 대씩 있는 버스 타고 시내로 나갔다. 거기서

죽변항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내리자마자 바다 구경 먼저. 그리고 울진군에서 발행한

관광 안내 팜플렛에 나온 드라마 <폭풍 속으로> 세트장을 찾았다. 별 기대를 안했는데

의외로 멋졌다.

 

 

>> 물빛이 살짝 이국적이다. 진짜 저런 집에서 살면 짱이겠다. 근데 좀 심심하긴 하겠다.

 

드라마 셋트장 보고 나니 얼추 12시. 그 유명하다는 대게를 3마리 사서 쪄먹고(1마리에

1만5천원 받더라.) 매운탕 주길래 돈 더 받는 줄 알고 화들짝 놀랐는데 그건 대게에

딸려 나오는 서비스였다.

 

그리고 서울로 돌아왔다. 나름 2박 3일 여행치고는 빡빡하게 잘 놀았다.  해수욕은 못했지만

산, 바다, 온천, 드라마 셋트장까지 뭐 돈도 별로 안 쓰고 .... 괜찮은 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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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MP일기

개와 늑대의 시간

 

 

 

잔혹한 권력의 속성을 잘 보여주는 드라마.  잘 만들었다.

세븐 데이즈도 그렇고 이쪽 장르는 꾸준히 진보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근데 '이쪽'의 의미가 뭘까?)

 

 

"해질녘 모든 사물이 붉게 물들고 저 언덕 너머 다가오는 실루엣이

내가 기르던 개인지 나를 해치러 온 늑대인지 분간할 수 없는 시간

이 때는 선도 악도 모두 붉을 뿐이다..."

 

 

>> 마지막 장면을 캡쳐했는데 정말 붉다...도시에 나타나는 개와 늑대란 무엇 혹은 누구일까?

 

>>아무튼 이준기는 변신 성공한 듯...닛폰 스타일

 

>>마지막 설정이 과장되기 했지만 드라마 역시 진보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 개와 늑대의 시간

 

 

공각기동대2 : 이노센스(극장판)

 

 

일본 애니메이션이 보여주는 디스토피아는 토나올 정도로 정교하다.

기계로 만들어진 양심이 인간보다 따뜻한,  <블레이드 러너> 못지 않게 우울한 미래상.

 

최근 연재 중인 우라사와 나오키의 만화 <플루토>와 최근 개봉한 일본 애니

<파프리카>에 이어 일본 만화 <이키가미> 정도까지 읽어주면 세상이 온통 회색빛으로

보일지 모르니...반드시 유토피아를 연상시키는 따뜻한 작품을 후식으로 준비해둘 것.

 

컴퓨터 그래픽이 가미된 일본 애니의 현란함과 정교함은

조그만 PMP화면으로 봐도 탄성이 절로 나온다.

 

그나저나 일본 만화나 애니가 보여주는 우울한 미래를 보고 있자면 일본 사회도 어지간히

속으로 곪아들어가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뭔지 모르지만 심하게 억눌리고 사방히 꽉 막혀

출구가 보이지 않는 답답한 느낌.

 

 

>>홍채로 리플리컨트를 찾아내던 <블레이드 러너>를 연상시킨다.

 

>> 거리축제 묘사한 장면...우와....탄성이 절로 나왔다.

 

 

삼거리극장

 

올해 거둔 최고의 수확. 꽤나 의외인.

살짝 지루한 초반만 잘 넘기면 시종일관 즐겁다.

재치 넘치는 유령들의 신나는 난리굿판. 사라진 것에 대한 향수.

인정받지 못한 존재에 대한 예의. 케케묵은 상처를 치유하는 마지막 광란의 축제.

 

개인과 역사를 잇는 이야기의 힘. 거대한 이야기 저편에 가려진 수많은 에피소드가

사람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  잊혀진 필름처럼.

특히 미노수 이야기가 압권이다.

촌스럽고 우스꽝스런 설정이 더 맘에 든다.

한국 영화가 다방면으로 끼를 발산하고 있다는 느낌.

 

>> 1인 2역을 소화해내는 배우들 모두 쵝오~~

 

>> 잊혀진 존재들이 유령으로 부활한다.

 

 

>> ㅋㅋㅋ..米怒獸(미노수) 캡이야~~

 

>> 뮤지컬 영화의 맛을 살리는 편집

 

>> 유령들이 노래 중이다

 

>>4인 4색

 

 

열세살 수아

 

역시 의외로 괜찮은 영화.

열세살 수아의 성장기록.

엄마와 딸의 이야기엔 항상 애틋한 무엇이 있다. 단지 부모와 자식간의 사랑으로 보기 어려운.

 

>> 수아는 무지 내성적이고 독특한 환타지를 간직한 소녀다.

 

>> 가수 김윤아가 엄마라고 생각하는 수아. 환타지는 상처로부터 비롯되었다. 현실도피~~

 

>> 수아 엄마 추상미. 그녀 역시 아름답다.

 

>> 수아는 작은 에피소드를 겪고 상처를 극복한다.

 

>> 작지만 강력한 영화. 조용하고 차분하게 상처를 어루만지고 소박한 사람들의 미래를 긍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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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풀 '그대를 사랑합니다.'

이런 식의 사랑 이야기는 공감 50%와 비호감 50%를 뒤범벅시킨 감정을 불러 일으킨다.

 

현실성을 떠나서 그래도 내내 고개를 돌릴 수 없고,

 

시종일관 눈물이 주룩주룩 흐른 이유는 자꾸만 엄마, 아빠가 떠올라서 그랬다.

 

만화책을 선물해볼까? 이런 생각이 들 정도다.

 

 

 

그렇지만 저런 인생. 역시 어렵다.

 

 

 

 

 

 

 

 

그나저나, 이명박을 지지했다는 연예인들

 

김건모, 김민종, 김보성, 김선아, 김원희, 김유미, 김응석, 김재원, 박상규, 박선영, 배한성, 변우민, 성현아, 소유진, 신동엽, 안재욱, 안지환, 에릭, 유진, 윤다훈, 이경규, 이덕화, 이순재, 이지훈, 이창훈, 이훈, 이휘재, 전혜빈, 정선경, 정준호, 차태현, 최불암, 최수종, 한재석, 이경호(예술인복지회 이사장) 등

 

그냥 다 비호감이다. 갑자기. 그렇게 참 어이없는 발견을 또 한다. 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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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김연수를 초기부터 좋아했다. 김연수 소설은 다 사서 읽었다.

처음 읽은 책이 [굿빠이, 이상]이었다. 역사책에 등장하지도 않는, 일개 에피소드를 하나의

장편 소설로 엮어가는 그 힘과, 그 소설에서 느껴지는 흥미진진함은,

김연수가 늘 의도했듯이, 이제 너무 무거운 질문이 되어서, 김연수를 계속 읽을까 말까

고민하게 만든다.

그렇게 박민규도 버렸고, 성석제도 버렸고....좋아하는 작가들은 죄다 언제부턴가

부담스런 존재다. 왠지 김연수도 안 읽게 될 거 같다.

엄청나게 몰입해서 이 소설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우고

심난한 마음에 잠자리가 뒤숭숭한 어제밤. 그런 느낌이 들었다.

OUT!!

뭘까? 에셔의 그림처럼 왼쪽과 오른쪽에서 혹은 일정한 방향에서 반대방향으로

무한 반복되는 그림이 시작도 끝도 없이 돌고, 돌고, 돈다.

그리고는 혼자 지쳐서, 그래도 나는 먹고 싸고 잠자고 섹스하고 싶어서, 본능적으로만

존재한다고 한마티 툭~~

그런 기분이 들 때마다 즐거웠던 일들을 떠올려본다.

첫 눈에 대한 기억도 떠올려 본다. 수능을 끝마친 고3 아이들처럼 재잘거리며, 다소간 불안한

모습으로 미지의 세계를 그려보는 상상도 한다. 

축제를 끝마친 고등학생, 수능시험이 끝난 고3 수험생, 총학생회 선거를 끝마친 대학생....

11월은 언제나 파장이란 단어와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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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원, PMP, 드라마와 영화

1.

 

활동을 한다고 보기 어려운 시간.

 

하루 중 거의 대부분을 학원에서 보내는 요즘,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PMP를 샀다.

 

돈을 벌고 있으면 마음이 편할 때가 있다. 하지만 역시 돈벌이는 새로운 영감을 주지 않는다.

 

가끔씩 블로그에 뭘 쓰려고 해도 기운이 나지 않았다. 하나 마나한 소리들.

 

그러다 얼마 전 친구를 만났는데 요즘은 왜 글을 안 쓰냐고 하더라. 내가 쓴 서평이랑 잡글이

 

재밌다고 계속 글을 쓰라는 친구의 말에 간만에 글을 쓴다.

 

 

2.

 

PMP를 끼고 사니까 동생이 안 놀아준다고 투덜댄다. 나더러 오따꾸란다. 그러면서 내심

 

지겨워지면  PMP 자기한테 넘기란다.

 

습관적으로 영화와 드라마를 다운받고, 보고, 지우기를 반복한다.

 

쉽게 감동받고, 쉽게 울고, 쉽게 잊는다.

 

아쉬운 마음에 캡쳐 기능을 자주 사용한다. 스냅샷을 남겨서 글을 쓸 때 써먹으려고 계획했다.

 

 

3.

 

처음 스냅샷을 남긴 드라마는 <미안하다 사랑한다>

 

그 전에 <다모>도 봤는데 스냅샷을 안남겼다. 사진을 남기기 위해 다시 다운받아 보자니 귀찮다.

 

기억에 남는 대사가 많은데 아쉽지만....한 번 지겨워지면 대책없다.

 

그래서 첫 번째 스냅샷은 '미사'가 되었다.

('다모'나 '미사'는 모두 예전 수감 중일 때 떴던 드라마라 못봤던 것들)

 

 

임수정을 좋아한다. 예전부터 조숙해보였고 나이드니 성장이 멈춰버린 듯한 이미지가 좋다.

 

<사이보그지만 괜찮아>에서 가수 '비'가 가짜로 수술을 해주는 척 하려고 임수정 등에

 

싸인펜으로 수술 부위를 그려주는 장면이 나온다. 그때 보았던 앙상하고 깡마른 등.

 

그 등이 너무 좋았고, 애처로웠다. 그 등은 이내 저 눈빛을 연상시킨다. 동그랗고 크고

 

그러면서도 조금 피곤해보이는 4차원 세계의 눈빛.

 

그래서 미사는 참 보기 힘들었다. 신파인줄 알아도, 온갖 삼류 드라마 소재거리를 다 가져와도

 

슬픈 건 슬픈거다. 인상깊은 드라마는 늘 인상깊은 눈빛으로부터 나온다.

 

다친 짐승의 눈을 하고 있는 소지섭. 건드리면 부서질 듯 해맑고 복잡한 임수정의 눈.

 

프리즌 브레이크를 볼 때 한 동안 석호필의 눈빛을 닮아가더니 '미사'를 볼 때는 한 동안

 

소지섭의 눈빛을 닮아가는 듯. 소지섭 몸 너무 좋더라. 부담스럽게스리....

 

마지막에 임수정이 죽지 말기를 진심으로 빌었다. 설마 설마 했는데...무지 슬펐다.

 

그런데 요즘 드라마는 너무 과하게 럭셔리한 냄새가 난다.

 

스토리는 달동네고 주인공은 찢어지게 가난한데 뉴욕, 파리, 도쿄...하다 못해 압구정동 냄새가 

 

나는 건 무슨 넌센스인고...요즘 드라마 죄 그렇다. <커피 프린스>에 윤은혜는 또 뭐냐.

 

엄마가 인형 눈알 붙이기를 하는데 2층집에 셋이 산다. 아무리 전세라도 이게 무슨 개씨부리는

 

설정이냐? 서른 될까말까한 잡것들이 혼자 살면서 죄 2층 집에 정원을 갖고 있지 않나....

 

이선균네 집은 청와대 뒷동네 엄청난 부자 동네다. 이게 이쁜 그림도 좋지만 좀 너무 한다 싶다.

 

이런 드라마 많이 보고 자란 애들의 환타지가 겁난다.

 

4.

 

그 다음 본 드라마는 <고맙습니다>

 

 

<화산고>하나로 영원히 골수마초 개썩소 이미지를 간직할 것 같았던 장혁을 다시 보게 만들었다.

 

세월의 무게가 더해지면 이렇게 멋있게 변하는 사람도 더러 있다.

 

공효진은 늘 호감이 가는 배우다. <네 멋대로 해라> 때 워낙 좋은 인상이 남기도 했지만

 

늘 오버하지 않으면서도 감정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배우다. <가족의 탄생>에서도 그랬고...

 

차가운 듯 정이 많고 보면 볼수록 이쁘게 생겼다. 웃는 모습이....

 

 

고맙습니다는 말 참 식상하다.

 

고맙습니다. 미안합니다. 사랑합니다.  이런 식상한 말들이 가슴 깊이 와 닿을 때가 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루 하루를 살아가라는 고리타분한 말씀이 정말 간절히 와 닿을 때가 있다.

 

드라마를 볼 때 만큼은 참 주인공들처럼 고마워하는 마음으로 살아야겠군. 생각했다.

 

장혁 혀가 좀 짧은 게....

 

과하게 로맨스와 삼각관계로 흐르지 않았던, 마무리가 괜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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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모메식당

우연히 지인과 함께 종로 스폰지 하우스에서 <까모메 식당>이란 영화를 봤다. 일본 독립영화 페스티벌이 진행 중인데 진정한 의미의 '독립'영화는 아니고 그냥 일본영화 페스티벌이다. 오다기로 죠 스페셜도 있던데 관심 있는 사람들은 눈여겨 보면 좋을 듯.

 

 

 

1. 까모메(갈매기) 식당

가족 없이 혼자 사는 여성(굳이 여성을 강조하는 이유는 영화가 여성영화에 가까워 보이기 때문이다.) 사치에는 핀란드 헬싱키 길모퉁이에 식당을 연다. 식당은 썰렁하다. 한 달 째 윤이 나게 접시만 닦고 있다. 어느 날 일본 문화에 흠뻑젖은 핀란드 청년 톤미가 찾아 온다. 첫손님에게 공짜 커피를 제공하는 사치에. 매일 같이 공짜 커피만 마시는 톤미는 사치에에게 '독수리 오형제' 주제가 가사를 물어본다. 서점에서 우연히 일본인 여성 미도리를 발견한 사치에는 독수리 오형제 가사를 알려준 게 인연이 되어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미도리는 사치에 집에 함께 머물면서 식당일까지 거들게 된다. (손님은 여전히 톤미 혼자) 여기에 정체불명의 여성 마사코까지 식당일에 가세하게 되는데... 줄거리는 이쯤. 더 얘기하면 완전 스포일러 될 거 같아.

 

2. 키워드1 - 식탁

시작부터 감잡았지만 이 영화는 여성영화다. 혼자 사는 여성들, 상처를 입은 여성들이 꾸역 꾸역 까모메 식당으로 모여든다. 여기에 핀란드 여성까지 가세하며 국적을 초월한 여성들의 소통과 상처치유가 시작된다. 그 방식은 식탁을 둘러싼 대화와 위로. 함께 만들고 먹고 수다를 떠는 식탁공동체는 외로운 인생의 대안이 될 수 있을까? 여전히 언제 떠날지 알 수 없는 사람들. 인생은 우연의 연속이다. 진지하게 대안적인 삶의 방식을 말하지도 않는다. '각자 갈 길이 있다'고, '언제 떠날 지 알 수 없다'고 말하는 사치에는 사람을 만나고 떠나보나는데 익숙해 보인다. 식탁공동체를 지향하는 소설이 몇 편이 생각났는데 정확한 제목을 모르겠다.

 

3. 키워드2 - 여유

일본 음식에 익숙치 않은 핀란드에서 까모메 식당은 고전을 면치 못한다. 그런데도 식당 주인 사치에는 전혀 조급해 하지 않는다.(물려받은 돈이 많나보다 생각이 들었지만 그런 얘기는 하나도 안나온다. 흑흑 부러버T.T;;) 전쟁을 경험한 적 없는 복지천국 북유럽 국가들. 한국인들이 지내기에는 따분할 정도로 사람들은 조용하고 여유가 흘러 넘친다. 사치에는 그런 곳을 찾아서 산다. 어떤 연유로 일본을 떠나온 여성들은 모두 조급한 삶, 서로 상처주고 상처받는 번잡한 삶으로부터 탈출하려고 무작정 핀란드를 찾았다. 그리고 그들은 이런 저런 핑계로 식당을 떠나지 않고 모여든다.

핀란드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이렇게 여유가 있냐고 묻는 마사코에게 톤미가 답한다. '숲'

 

3. 키워드 3 - 여성

영화에는 상처받은 남자들도 나온다. 그러나 역시 영화의 중심은 여성이다. 남편이 말없이 떠나버려 우울증을 앓고 있는 알콜중독 핀란드 여성을 치유하는 과정은 여성의 소통과 치유 능력을 잘 보여준다. 오랜 간병 생활 끝에 어머니와 아버지를 잃은 중년 여성 마사코. 그녀는 핀란드 여성의 말을 전혀 알아 듣지 못하지만 느낌으로 다 알아듣는다. 열심히 들어주며 호응해주고 마음을 감싸준다.

 

 

간만에 가슴 따뜻한 영화를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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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 당신?

                                        

 

1.

소설을 읽다가 '앗, 이거 내 얘기다.' 싶은 소설을 만나면 몰입하든지 도망치든지.

 

2.

지나치게 짧고 건조한 문장들. 인과관계 없이 계속 나열한 사건들.

너무나 많은 상처가 일상이 되어버린 탓에 슬픔은 언제나 속으로만 배어들고

아파도 아프다고 말하지 않고, 외로워도 외롭다고 말하지 않고,

더 좋아질 거라고 말하지도 않고, 더 좋아질 거라고 기대도 하지 않고,

그리워도 그립다 말하지 않고

그냥 하루하루를 견디며 살아가는 사람들.

 

마음을 열 듯 열지 않고, 마음을 닫을 듯 사람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못하고....

답답해/답답해/답답해/답답해/미칠 것처럼 답답해

그런데 공감이 가는 걸 어떡해?

 

3.

희망이 없다 말하는 거 같지는 않다.

위로받을 수 없다 말하는 거 같지는 않다.

누구랑도 소통할 수 없고,

이해하는 것도 이해받는 것도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거 같지는 않다.

죽을 때까지 사람은 혼자라고 말하는 거 같지는 않다.

 

그런데,

 

희망이 없다 말하는 거 같다.

위로받을 수 없다 말하는 거 같다.

누구랑도 소통할 수 없고,

이해하는 것도 이해받는 것도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거 같다.

죽을 때까지 사람은 혼자라고 말하는 거 같다.

 

그래도 유일한 희망은

같이 밥먹고 떠들고 안아줄 수 있는 사람들에게 있다고 말하는 거 같다.

 

그렇다면 희망 쪽으로 무게를 실어주자.

왜냐면,

나 역시

아직도

희망을 믿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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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유령작가입니다

 김연수 <나는 유령작가입니다>

 

 

                              

 

 

1. 나도 소설을 왜 읽는 지 많이 궁금했다


입학 당시 가입했던 문학 동아리는 이미 균열의 조짐이 드러나고 있었다. 세미나에서 다루는 소설과 평상시 즐겨 읽는 소설의 간극은, 딱 그 만큼 현실에서 욕구 차이를 드러냈다. 여전히 몇몇은 운동에 관심을 보였지만 대개는 그렇지 않았다. 끝끝내 지키려는 사람은 갈수록 소수였고 그나마도 소설을 매개로한 건 아니었다. 소설이 진실을 알리고, 역사를 가르치고, 현실을 비판하고, 그래서 더 좋은 세상을 만드는 데 밀알 한 톨 만큼이라도 기여할 것이라는 믿음은 신앙 같은 것이었다. 그래야만 한다는.

그래서 그랬나. 그 때는 왜 그렇게 후일담 소설들이 많이 나왔는지 이해도 못하니까, 비관이 난무해도 그렇게 와닿지 않았다. <상실의 시대>를 읽으면서 뭔가 잃었다고 말해야 하는데 난 잃어버린 게 별로 없는 기분이었다. 한참 정신없이 살 때는 그런 생각이 들 틈도 없었다. 소설이 좋았고, 그래서 문학동아리를 찾았고, 그런데 재미가 없었다. 중고등학교 때처럼 이해도 못하는 어려운 고전 억지로 읽어야 하는 것도 아닌데. 차라리 사회과학책을 읽는 게 나았다. 그게 내게 필요한 답을 빨리 줬다. 그래서 한 몇 년 간 소설을 읽지 않았다.


‘80년대는 무엇이었나?’

분석하고, 위로하고, 극복하기 위해, 또 더러는 욕하고 비난하며 끝장내기 위해 들인 노력을 다 모아본다면 특정 시기를 ‘XX시대’로 규정하는 데는 그 만한 이유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말 많던 시대가 지나가고 나니 당연히 다치기도 많이 하고 허무하기도 하고 그게 아니었나 싶기도 하고 또 그래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고 위로하기도 한다.

개그콘서트 봉숭아 학당에서, 운동권 캐릭터가 뜨는 시절은 운동권이 몰락한 시대다. 그나마 희화화되는 데도 다 까닭이 있다. 희화화조차 안 되는 존재는 완전 마이너리티다.

그런데 이제와 새삼스레 접어두었던 이야기들에 공감하기 시작하는 이유? 아마도 내가 비슷한 기분에 휩쌓였기 때문에. 위로와 자학, 인정과 비판이 동시에 필요하기 때문에. 첫 시간부터 ‘왜 소설을 읽는 지 내가 혼란에 빠졌다’는 선생님의 이야기에, 전혀 뜬금없다는 느낌 없이 공감할 수 있었던 이유. 아무튼 나는 소설을 다시 읽기 시작했고 언제부턴가 주로 소설만 읽는다. 그리고 나는 자문한다.

'90년대는 무엇이었나?'

사회과학책은 거짓말 같아서 접어버린 지 오래인데 이것도 분명 일시적인 ‘막대구부리기’가 분명하다. 의도적인 회피, 의도적인 냉소. 역사서에 쓰여 있는 이야기에는 ‘개인’이 없다. 사회과학서적에는 ‘우연’이 없다. 그래서 나는 소설을 읽는다. 살아숨쉬는 인간들의 고뇌를, 우연으로 가득찬 인생의 혼란을 조금이라도 더 즐기기 위해. 그러다 어쩌다 희망의 한 조각이라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해서.


소설은 대놓고 거짓말인데 그래서 더 진실처럼 느껴진다.


2.  역사 속의 개인, 개인 속의 역사


역사란 지나고 나서 보면 항상 딜레마에 처해 있다. 시험처럼 합격, 불합격 혹은 몇 점 이렇게 분명하게 결과가 나오는 것이 아니니까 그 결과에 대해서 평가를 해야 한다. 더불어 과정까지 도마 위에 오른다. 최선을 다했어도 정말 최선을 다한 건지, 참 잘했다고 생각하고 싶어도 정말 잘한 건지 알 수가 없다. 모두에게 최선인 역사가 없으니 최선인 선택도 없을지 모른다. 그래서 역사는 항상 재해석의 여지를 남긴다. 그리고 그 해석을 따라 개인도 출렁출렁 댄다. 하물며 지난 시대가 총체적으로 의심받는 시대라면.

소설은 어떤 식으로든 역사를 반영한다. 그 역사는 개인을 통해 구체화되고 생동감을 얻는 역사다. 역사서에 오른, 개인이 생략된 역사가 아니다. 90년대 이후 거대담론에 대한 알레르기 반응을 거쳐 역사 속의 개인, 개인 속의 역사를 들춰내려는 소설들은 그래서 일단 재밌다. 구체적 현실을 대하는 개인의 결단과 행동은 언제나 긴장으로 가득차 있다. 그 긴장을 통해 소설은 더 강고한 리얼리티를 얻는다.1)

소설 속에서 개인과 역사는 대립항이 아니라 효과적으로 서로를 보완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교훈을 얻어내기 위해 경직된 글읽기를 할 필요도 없고, 역사가 거세된 소설을 읽으며 ‘이게 무슨 말도 안되는 비현실적인 이야기냐’고 야유할 필요도 없다. 위인전을 읽을 때처럼 묵직한 느낌이나, <논스톱>같은 씨트콤을 보며 느껴야 하는 씁쓸함을 모두 극복해내는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 소설이라면, 적어도 소설의 존재 이유 한 가지는 분명히 찾은 셈이다. 현대 소설이 변화하는 양상 가운데 긍정할 수 있는 것 한 가지는 찾은 셈이다.2)

그런데 문제는 이와 같은 태도를 취하게 되면 판단의 문제가 남게 된다는 것이다. 첫째가 역사 해석 일반의 문제. 어떤 역사가 옳고 그런 것이었는지를 판단할 기준이 애매모호해 질 수 있다. 역사적 사실이 왜곡될 가능성도 있다. 구체적 판단의 근거가 사라질 수도 있다. 모든 역사는 동등한 무게를 갖는 다거나, 또는 똑같이 중요하지 않다는 결론에 이를 수도 있다. 역사는 모두 후세에 의해 조작된 것이라거나 의도적으로 선택 또는 탈락된 것이라는 태도도 있을 수 있다. 따라서 당연히 제기되는 두 번째 문제는 역사해석을 둘러싼 주체의 문제. 개인의 선택이 어떤 경우든 역사적으로 불가피했다거나, 그래서 그 나름대로 타당하다는 결론에 이를 수 있다. 역사해석을 둘러싼 회의적 태도로 인해 역사를 해석하는 주체가 허무주의에 빠질 수도 있다. 역사해석을 보완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해석을 해체시키는 것이다. 탈근대 역사학 역시 이와 같은 맥락에서 비판받고 있다. 집단적 주체를 제거한 역사학이 국가, 민족, 계급 같은 거대 담론에 가려져 있던 정치적 소수자들을 살려내고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두는 데 멈추지 않고, 결국 역사적 가치판단과 집단적 저항의 가능성 자체를 해체시킨다는 것이다.

여기서 질문이 바뀐다.

'나는 90년대가 무엇이기를 바라는가?'


3. 역사에 대한 지적 회의주의, 그 가능성


이 같은 맥락에서 주목해 볼 만한 첫 번째 작품은 김연수의 소설집 [나는 유령작가입니다]이다.

문학의 위기에 대한 질문에 “체력이 약해졌다고 에베레스트산의 고도(高度)를 낮출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3)라고 답했던 소설가 김연수. 그는 1993년 소설 데뷔작 <가면을 가리키며 걷기>에서부터 시종일관 역사해석의 문제, 역사적 공동체와 개인의 관계, 그리고 현대인의 정체성 문제를 제기해왔다. 성장 소설 성격이 강한 <스무살>,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이나 로드무비처럼 길 위에서 펼쳐지는 <7번 국도>4) 역시 개인의 정체성을 찾아나가는 과정으로 볼 때 김연수 소설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일관된 문제의식 속에서 전개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번 소설집 [나는 유령작가입니다]는 소설집 제목부터 그런 작가의 문제의식을 여지없이 드러내고 있다. 대놓고 자신의 존재가 유령이라 말하는 작가, 대놓고 자기 이야기가 거짓이라고 말하는 작가.


“전쟁에는 진실이 있지만, 전쟁 이야기에는 조금의 진실도 없으니까. .. 삶은 살아가는 것이지, 이야기하는 게 아니거든”

<‘뿌넝숴’·不能說>


대체로 소설집에 담긴 작품에는 일관된 문제의식이 있기 마련이지만 이렇게 강력하게 한목소리를 내는 소설집도 오랜 만이다. 그는 시종일관 묻는 것이다. 과연 역사적 진실은 존재하는가? 역사가 주체마다 다르게 인식되는 것이라면 진실과 거짓의 경계는 어디인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심지어 <남원고사에 관한 세 개의 이야기와 한 개의 주석>에서는 이미 상식으로 정립된 이야기를 재구성해서5) 비틀고, <이등박문을, 쏘지 못하다>에서는 확고한 역사적 사실에까지 회의적 시선을 보내고 있다. 자신은 정체성이 불분명한 유령작가라는 명제에 충실한 셈이다. 기존에 정립된 모든 정체성을 해체시키고 있으니 말이다.


“그가 내게 들려준 이야기는 분명 작위적이고 그릇된 것이었다. 사건이 일어난 뒤 듣게 되는 이야기들이 모두 그렇듯이 말이다. 누군가의 입을 통해 이야기됨으로써 사건들과 낱낱의 내용, 하찮은 사실들이 사건 당시에는 갖이 않았던 움숙하고도 중요한 양상을 어쩔 수 없이 띠게 되기 때문이다.”

<그건 새였을까, 네즈미>


그런데 그가 걸어온 길을 돌아본다면 소설집 제목 자체가 가장 강력한 역설이다. 그는 글쓰기를 통해 정체성을 찾아나가려는 의지가 가장 강력한 작가다. 일관된 역사적 회의주의 그 밑바닥에는 역사적 진실과 대안적 글쓰기 그리고 인간의 과거, 현재, 미래를 설명하고자 하는 강렬한 지적 욕구가 깔려 있다. 그 끝은 결국 자신의 정체성 찾기다.


“여기인가? 아니, 저기. 조금 더. 어디? 저기. 바로 저기. 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 바로 저기. 문장이 끝나는 곳에서 나타나는 모든 꿈들의 케른, 더 이상 이해하지 못할 바가 없는 수정의 니르바다, 이로써 모든 여행이 끝나는 세계의 끝.”

<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


역사에 대한 지적 회의주의. 김연수에게 역사적 진실의 경계가 허물어진 것은 91년으로부터 시작된다. 소련의 해체와 맞물리면서 진보적 운동도 조금씩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80년대 지식인들처럼 그는 거대한 시대적 난관에 봉착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과거를 위무하는데서 위안을 얻거나, 현실을 합리화 시키는 데 급급했던 반면 그는 묻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는 현실에 순응하는 것 말고 어쩔 도리가 없다6)고 말하지 않는다. 그는 끊임없이 재해석한다. 이것이 역사에 대한 지적 회의주의가 갖는 강력한 힘이다. 역사 속에서 개인의 존재를 찾아내는 힘 역시 여기서 나온다.


“오랜 시간이 흐르고 하면 지금의 우연한 일들도 모두 필연이 된다는 뜻인가? ... 우리가 만난 것도, 헤어진 것도, 그날 길 잃은 아이들처럼 골몰길을 한없이 걸어다녔던 일들도 필연이 된다는 뜻인가? ... 결코 질문을 멈추지 않을 작정이었다.”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농담>


앞서 말한 바 있듯이, 이와 같은 글쓰기는 개인과 역사를 분리해서 사고하지 않고 통합적으로 사고함으로써 더욱 생생한 극적 리얼리티를 얻는다. 김연수의 소설이 자칫 해체적으로 흐르기 쉬운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고, 실제 내용구성에서도 종래의 역사해석에 대한 해체가 빈번히 이루어지고 있음에도 그 리얼리티나 진정성이 무너지지 않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철저한 회의주의가 단순한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개인의 실존적 문제와 맞물리면서 빚어내는 긴장과 떨림. 우연성과 필연성에 관한 의심은 개인의 역사에서도 언제나 중요한 물음이다.

김연수 소설에는 새로운 역사적 진실찾기의 가능성 또한 잠재되어 있다.


“어떤 점에서 귀하의 미합중국과 제 미합중국이 절대로 하나일 수 없는 상상의 소산에 불과하듯, 은자의 나라에서 찾은 제 진실한 사랑 역시 사라져버린 그 하루 같은 것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래서 어쩌란 말입니까? ... 이 세계는 상상하는 대로 구성된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거짓된 마음의 역사>


이와 같이 ‘타자의 눈으로 역사 바라보기’는 이 소설집을 관통하는 또 하나의 문제의식이다. 소설이 구한말 초강대국 미국/인의 눈으로 조선사회를 바라보고, 중공군의 입장에서 한국전쟁을 바라보듯 새로운 시선은 전혀 새로운  역사 해석을 낳는다.7)

4. 재구성인가 해체인가?


김연수의 비관적 지성을 접하다 보면 소설을 읽다 가슴이 턱턱 막히곤 한다. 이렇게까지 철저한 성찰은 사람을 힘겹게 만든다. 자신을 비판하고, 자신을 가감없이 드러내는 일이 가장 힘겨운 일이듯. 그 한계까지 밀어부쳐 보려는 김연수의 지적 비관주의. 이는 역시 그에게나 독자에게나 양날의 칼이 될 수 밖에 없다.

김연수 소설은 재구성인가 해체인가? 김연수 소설을 읽다보면 저절로 드는 의구심이다. 이렇게까지 해체하면 과연 말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과연 진실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있을까? 극단적 회의주의를 조장하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결국엔 새로운 힘을 얻는 게 아니라 완전연소해 버리는 건 아닐까? 김연수의 문제의식에 어느 정도 공감하는 사람조차도 힘겨울 때가 있다.

분명한 것은 그가 나에게 소설읽기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공했다는 사실이다. 이미 의문이 시작된 사람에게 보수(保收)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전통적 글쓰기를 고수하는듯 하면서도 ‘사실주의’적 기법과 전혀 다른 김연수 소설이 어떤 결론에 이를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실험이 매우 유효하며, 의미 있는 작업인 것은 분명하다. 21세기에도 소설이 계속 존재해야 하느냐고 물어보면 김연수 같은 작가가 있기 때문에 ‘그렇다’고 답할 것이다.

지금 여기 두 발로 발딛고 서려고 유령같은 기억, 불안, 망설임, 의심과 싸운다. 내 삶은 유령의 삶이 아니다.

 

 

1) 역사소설 중에 국가 이데올로기를 가장 강력하게 드러내는 영웅소설조차 상황이 바뀌었다. 김훈의 <칼의 노래>를 읽을 때 가장 주목했던 부분은 이순신이라는 인물의 실존적 고뇌와 긴장이었다. 역사적 선택 앞에서 사람은 누구나 혼자일 수 밖에 없다는 냉혹한 진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조두진의 <도모유키>는 일본군 입장에서 임진왜란을 다루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2) 이런 변화들이 역사학에도 반영되어 요즘은 미시적인 세계를 통해 역사를 새롭게 규명하고자 하는 노력들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으며 탈근대 역사학도 나름대로 자기 영역을 구축해 나가고 있다.

 

3) 2006년 7월 23일자 경향신문 [한국을 이끌 60인] 인터뷰 기사 中에서

 

 

4) 자전거 전국여행을 꿈꾸는 나에게도 로망처럼 남아 있다. 시종일관 한 편에 바다를 끼고, 그 반대편에 절벽과 산을 끼고 달리는 상상을 한다. 그 코스는 자전거 여행 경험자의 말에 의하면 매우 위험하다고 한다.

 

5) 이와 같은 탈근대적 글쓰기에 대해서 김영하의 장편소설 [아랑은, 왜]도 참고할 만한다.

 

6) 최근 출간된 김영하의 <빛의 제국>을 읽으면 가슴이 답답하다. 거대한 시대의 변화 앞에서 상처받은 자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을 정녕 이것 뿐인가?

 

7) 예컨대 그가 보기에 친일문학 작품의 문학사적 성취를 찾기란 어렵다. 당시 일본의 관점에서만 쓰여졌으므로 지금 이곳에서 읽으면 “웃기는 것”이다. ‘한국문학=남한문학’ 이란 등식도 통일 후 우스워 보일 만한 게 수두룩하다. 동아시아문학 또는 세계문학의 지평에서 다시 읽으면 ‘웃기는 것’투성이이리라. 경계를 넘지 못한 문학은 시공에 갇히는 한계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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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농담

...이혼할 만큼 우리에게 큰 문제가 있었나? 하지만 결국 나는 그 대답은 알아내지 못하고 다만 지극히 하찮은 우연들의 연쇄과정에다 대고 왜 그래야만 했느냐는 무거운 질문을 던지는 일이 무의미하다는 사실만을 알아냈을 뿐이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는 일들은 대부분 스캔들에 휩싸인 영화배우가 서둘러 차에 올라타면서 진실은 무엇이냐고 묻는 기자들을 향해 내젓는 단호한 손짓 이상의 의미를 띠지 못한다. 그렇다면 지나간 일들을 다시 떠올릴 때 늘 만나게 되는, 서로 연결될 수 없음에도 그어지는 그 많은 선들은 다 무슨 의미일까? 역사의 인과관계가, 혹은 지나간 일들의 진실이 도중의 사소하고 우연적이고 꾸불꾸불한 과정을 과감하게 생략하고 단숨에 긋는, 그런 선과 같은 것이라면, 우리가 그날 걸어간 복잡하고 우연에 가까운 행로의 의미는 무엇일까?

 

기억을 쫓아가면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혼자서 옛일들을 생가하며 자문자답할 때면 특히 그렇다. 지나간 일들은 실험실에서 알코올램프와 플라스크로 증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단 일어난 일들은 그 자체가 사실로 증명되는 것이다. 다른 식으로 검증할 방법이 없다.

 

....그녀나 나나 이제는 삶의 행로가 하나의 거대한 농담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처지가 됐다. 하지만 여전히 그런 농담은 하나도 재미가 없으며 마음이 아프기만 하다. 우리는 그런 것도 농담이냐고 쏘아붙이기도 하고 이게 웃긴 얘기가 아니냐고 항변하기도 한다. 삶을 이해하기는 서른네살이라는 나이는 아직도 부족하다. 나는 우산을 뒤로 젖히고 고개를 들어 떨어지는 빗방울을 맞으며 선 백송나무를 올려다봤다. 하나의 가지는 북한산이 있는 북쪽을 향해, 또 하나의 가지는 한강이 있는 남쪽을 향해 서로 갈라져 서 있는 나무 한그루가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차가운 장맛비가 내 얼굴로 들이닥치는 동안, 여전히 푸른 우듬지가 흐리마리 빗물에 지워졌다. 나는 고개를 숙여 오른손으로 눈두덩을 한번 닦은 뒤, 다시 얼굴을 들어 백송을 올려다봤다. 둥치에서부터 나누어진 두 개의 가지는 저마다 아픈 사람들처럼 철제 버팀기둥에 기대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부족했는지 두 가지 사이로는 가느다란 쇠줄이 연결돼 있었다. 그 통에 서로가 서로를 끌어주면서 버티는 꼴이 돼버렸다. 쇠줄을 자르고 버팀기둥을 없애버리면 금방이라도 두 개의 가지는 땅으로 쓰러질 것 같았다. 얼굴로 떨어지는 비를 고스란히 맞으며 서서 나는 혼자 중얼거렸다. 왜 쓰러지도록 내버려두지 않는 것인가? 나는 울타리를 넘어 잔디를 밟으며 백송을 향해 몇걸음 더 걸어갔다. 천연기념물 제8호 재동 백송이 내 머리 위로 그 젖은 잎을 드리웠다. 비가 쏟아지는데도 여전히 나는 고개를 치켜들고 계속 따져묻기로 했다. 왜 그냥 쓰러지도록 내버려두지 않는가? 철제 버팀기둥과 쇠줄로 지탱되는 육백살이라니? 다른 나무들은 다 죽어버렸는데, 오래 살아남기만 하면 천연기념물이 된다니 그것도 일종의 농담인가? 백송이여, 그런 것도 농담인가? 오랜 시간이 흐르고 하면 지금의 우연한 일들도 모두 필연이 된다는 뜻인가? 어린 백송도 천연기념물이 될 수 있다는 뜻인가? 우리가 만난 것도, 헤어진 것도, 그날 길 잃은 아이들처럼 골목길을 한없이 걸어다녔던 일들도 필연이 된다는 뜻인가? 백송 사이를 지나온 빗물이 내 얼굴로 떨어졌지만, 그래서 부릅뜬 눈이 아파오기 시작했지만, 나는 결코 고개를 숙이지 않을 작정이었다. 결코 질문을 멈추지 않을 작정이었다. 나도 어디 버틸 수 있을 때까지 한번 버텨보기로 했으니까. 육백살이 넘은 천연기념물과 이제 고작 서른네살이 된 따분한 인간, 둘 중 누구의 농담이 더 웃긴가 따져보기로 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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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석제<내 인생의 마지막 4.5초>

 

성석제 <내 인생의 마지막 4.5초>



1. 작가 소개


성석제(成碩濟) : 1960년 경북 상주에서 태어나 연세대 법학과를 졸업했다. 1986년 [문학사상] 시 부문 신인상을 수상하며 문단에 나왔다. 1994년 짧은 소설 모음집 <그곳에는 어처구니들이 산다>를 내면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1995년 [문학동네]에 단편소설 <내 인생의 마지막 4.5초>를 발표했으며, 1997년 단편 <유랑>으로 제30회 한국일보문학상을, 2000년 소설집 <홀림>으로 제13회 동서문학상을, 2001년 단편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로 제2회 이효석문학상을, 2002년 소설집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로 제33회 동인문학상을 수상했다.

소설집으로 <그곳에는 어처구니들이 산다><새가 되었네><재미나는 인생><아빠 아빠 오, 불쌍한 우리 아빠><호랑이를 봤다><홀림><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번쩍하는 황홀한 순간>, 장편소설로 <왕을 찾아서><궁전의 새><순정><아름다운 날들><인간의 힘> 등이 있다.


2. 줄거리


사내가 탄 차는 다리 난간을 들이받고 떨어지는 중. 지상 100미터 높이에서 떨어지는 자동차가 바닥에 닿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대략 4.5초. 사내는 그 시간 동안 지난 자신의 일생을 돌아본다.

여섯 살 때 이웃집 아이의 장화를 빼앗는 것을 시작으로 전형적인 불량학생의 길을 밟아나간다. 동네 깡패 마사오를 동경하며 탈선을 일삼다가 퇴학당하자, 집을 나와 친구 둘과 함께 ‘ㄷ'시로 향한다. ’ㄷ'시에서 건달 밑으로 들어가 심부름꾼을 하며 차츰 조직 세계에 발을 들여 놓는다. 그러다 육년만에 어머니의 죽음 때문에 귀향하게 되고 육년 전 마을을 함께 떠났던 두 청년과 재회한다.

피도 눈물도 없이 칼을 주로 사용해 점차 자신의 입지를 굳혀나가던 사내는 동네에 술집을 낸다. 일취월장하며 사업을 확대하고 조직을 불려나가던 사내는 동네 건달들이 우상으로 떠받들던 마사오를 계략에 빠뜨려 무찌르고 명실공히 지역의 실력자로 부상한다. 그러나, 조직이 절정에 달하던 때 왼팔 노릇을 하던 청카바가 배신을 하게 되고 마사오를 처치한 배경이 소문날까 노심초사하며 청카바를 찾아 나선다. 청카바를 찾아나섰다 돌아오는 길에 마사오와 마주친 그는 심리적 공포감에 시달린다. 과속을 하다 다리에서 미끄러져 추락, “엄마, 무서워”란 말을 남기고 생을 마감한다.


3. 성석제 소설의 특징


성석제 소설의 기본은 ‘재미’다. 성석제 소설은 코메디 한 편을 감상하는 것처럼 시종일관 즐겁고 유쾌하다. 성석제 소설이 ‘재미’있는 이유는 단연 성석제 소설의 새로운 형식에 있다. 성석제 소설의 가장 강력한 힘은 ‘문체’로부터 나온다. 애초에 시인으로 등단해서 글을 쓰기 시작했기 때문일까? 성석제 소설은 마치 한 편의 긴 시를 읽는 것처럼, 혹은 래퍼의 노래를 들으며 라임과 비트에 맞춰 얼깨를 들썩거리게 되는 것처럼 리듬감 넘치는 문장들로 가득차 있다. 성석제는 언어의 감수성을 통해 독자들이 잊고 지내던 감각의 세계를 환기시킨다.


‘그 과정에서 이웃집 아이의 코피가 터졌다. 그 일로 이웃집 아이의 아버지와 그의 아버지가 싸워 그의 아버지의 코피가 터졌다. 또 그의 아버지에게 코를 얻어맞고 그의 어머니의 코피가 터졌으며 그 역시 어머니에게 맞아 코피를 터뜨렸다.’


‘냇물이 깊었다면 풍덩풍덩 소리를 냈을 것이고 더 깊었다면 빠져죽었겠지만, 수영을 못했으니까, 하여간 그런 소리를 내며 도망갔다. 아이들이 곧 그를 따라왔다. 벙첨벙첨벙첨벙첨벙첨.’


성석제 소설이 단지 새로운 ‘문체’를 선보이는 데에 그쳤다면 그 ‘재미’는 그다지 크지 않았을 것이다. 성석제 소설의 백미는 단연 ‘이야기’ 형식에 있다. 성석제의 형식은 ‘이야기’를 통해 그 구성이 더욱 흥미진진해진다. 성석제 소설은 마치 한 바탕 판소리나 마당극을 보는 것처럼, 시종일관 유쾌한 놀이로 읽힌다. 성석제는 주절주절 ‘이야기’를 풀어낸다. 독자는 잃어버린 구전소설의 20세기식 부활을 목도한다. 성석제 소설은 서사라기보다 이야기에 가깝다. 꽉 짜여진 구성을 통해 교훈적 결말을 이끌어내던 종래 소설의 관습은 철저하게 무시된다. 이야기는 술에 술탄듯, 물에 물탄듯 구성진 가락처럼 듣기 좋게 흘러가고 귀신에게 홀린듯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이야기는 끝이 난다. 이와 같은 형식은 독자들을 이야기 속으로 빨아들이기 위해 잡다하고 과장된 잡지식들을 주워삼키는데, 흡사 판소리 기법 중 하나인 ‘주워섬기기’를 연상시킨다. 처음 판소리가 등장했을 때는 대개 완창이 아니라 며칠에 걸쳐 이야기를 토막토막 공연했었다. 소리꾼의 입장에서는 지속적으로 사람들을 끌어모으기 위해서 무엇보다 ‘재미’를 선서해야만 한다. 그 결과 판소리는 각 장면이 ‘부분의 독자성’을 갖게 되고 소리꾼은 장면을 극대화하기 위해 ‘주워섬기기’를 일삼는다. 어떤 상황이나 장면을 묘사하는데 온갖 이야기거리를 다 동원해서 과장함으로써 재미를 극대화하는 것이다.


‘그러면 지상 100미터 높이에서 심장마비를 일으켜 아래로 떨어지는 대머리독수리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독수리가 땅에 떨어지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100=1/2*9.0*t^2, 고로 t=4.5175394이다.’

‘일념 : 불교에서의 시간 단위. 1주야(24시간)는 30수유다. 수유는 모호율다이기도 한데 30달찰나의 길이이고 달찰나는 납박이다. 납박은 일념의 120배나 되는 기나긴 시간이다. 일념이란 말 그대로 생각 한 번 할 시간이 아닐까.’


‘위산의 분비는 공포의 소산이다. 정면 출돌 사고를 당한 운전자의 대부분은 갑작스런 위산의 분비를 경험한다고 한다. 한꺼번에 쏟아져 나온 위산은 위벽을 녹일 정도로 강력해서 평소에 궤양 등이 있는 경우에 그 자체로써 위천공을 유발할 수 있다.’


이와 같은 형식은 당연히 내용적 측면과 밀접한 연관을 맺는다. 성석제 소설에서는 누구도 그 끝이 어디에 가 닿을 지 예측하지 못한다. 그래서 ‘옛날 옛적에~’로 시작하는 이야기 한토막을 들은 것처럼 소설을 다 읽고 나도 이야기는 실체가 없는 연기처럼 사라진다. 작가는 ‘이야기’를 전달하는 만큼, 독자 역시 매일 들어도 가물가물한 할머니의 ‘이야기’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듣고 나면 쉽게 내용을 잊어버린다. 결국 ‘이야기’로 구성된 소설은 형식의 변형을 통해 의미의 변형을 이끌어낸다. 더 이상 소설은 완결적인 답을 내지 않고, 심지어는 이것이 단지 이야기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고 짐짓 딴청을 피운다. 모든 이야기는 마치 풍문처럼 한 귀로 들어왔다 한 쪽 귀로 사라진다. 성석제 소설은 항상 애매함을 동반한다. 분분한 해석을 낳지만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는 정확치 않다. 어쩌면 작가는 처음부터 아무 말도 전하지 않으려 했는지도 모른다. 성석제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촌스런 건달이나 착한 바보는 이런 의도를 더욱 강력하게 뒷받침한다. <내 인생의 마지막 4.5초>에는 끝내 주인공 이름조차 등장하지 않는다. 구체적인 공간적, 시대적 배경 역시 제시되지 않는다. 그 주인공은 매번 다르게 불리워도 상관없을 지 모른다. 그래서 끝내 이야기가 끝나도 의미가 쉽게 전달되지 않는다. 인생 막장의 아웃사이더의 등장은 한 편으로 묘한 삶의 ‘비의(非議)’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성석제의 소설은 늘상 묘한 서글픔을 수반하며 이야기 속에 뭔가 진지한 삶의 비의를 담고 있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 ‘과연 인생이란 무엇인가’하는 근본적 질문을 던지는 건 아닌가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그러나 끝내 풀 수 없는 알레고리처럼 성석제의 소설은 늘상 결국 이건 그져 이야기일 뿐이라고 심각한 몸짓을 거두어 들이는 것으로 마무리되고 만다. <내 인생의 마지막 4.5초>에서 주인공은, 그래서 마지막 죽음의 순간에 “엄마, 무서워.”를 외치는 것인가?


4. 풍자 소설의 계보와 변형, 그 속에 성석제의 위치


‘풍자’에서 ‘풍(諷)’은 노래를 의미한다. 이는 웃음과 재미를 뜻한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성석제 소설만큼 ‘풍(諷)’의 의미에 충실한 소설이 또 있을까? 성석제는 시종일관 노래하고 떠들면서 웃긴다. 그러나 ‘자(刺)’의 의미가 찌른다, 즉 비판하고 공격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할 때 성석제식 풍자는 노래하며 웃고 즐기되 비판은 사라진, 90년대식 이야기라 할 수 있다. 그는 풍자소설의 특징인 풍부한 이야기와 능청스런 입담, 그리고 노래같은 리듬감으로 무장했지만 무엇을 비판하고 공격해야할 지는 분명히 찾지 못한 모양이다. 아니 더 정확히는 ‘이야기’의 전통을 빌려오되 처음부터 그는 ‘재미’를 추구했을 뿐, 무언가를 비판할 생각이 처음부터 없었는 지도 모른다.

시대적 맥락을 따져보자. 많은 사람들이 80년대의 진지함에 지쳐 뭔가 새로운 것을 원할 때 성석제는 만담가 내지 구연가로서 90년대 문단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며 등장했다. 90년대 들어 내용적인 측면에서 하루끼식 허무주의와 탈정치적 경향이 새로운 소설의 흐름으로 제시되었다면, 형식적인 측면에서 성석제는 본격적인 시와 노래의 언어, 이야기와 만담의 화법을 들고 새로운 글쓰기를 시도했다. <내 인생의 마지막 4.5초>는 이런 성석제 소설의 출발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이와 같은 작풍은 80년대까지 소설의 상식으로 통했던 내용과 의미 중심의 서술방식, 그러니까 근대적 서사의 완결성, 총체성을 완전히 무시한 새로운 것이었다. 물론 이는 수많은 시도 중에 하나의 흐름일 뿐이다.

분명한 것은 성석제식 글쓰기가 중요한 하나의 영역을 개척했다는 것이고, 그렇지만 여전히 그 의미가 모호하다는 것이다. 80년대 소설이 추구하던 계몽적이고 총체적인 내용구성보다는 이야기가 주는 재미와 애매함에 더 매료된 것은 과거에 대한 반작용 때문인지 아니면 그가 추구하는 어떤 또 다른 세계가 있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최근 발표된 <어머님이 들려주시던 노래>에서 소설가가 자꾸만 무슨 의미를 전달하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면, ‘이것이 인생인가? 그런 걸까?’로 마무리되는 작가의 말이 그렇게 가볍게 넘겨지지는 않는다. 그는 변하고 있는걸까? 그렇다면 왜, 어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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