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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석제<내 인생의 마지막 4.5초>

 

성석제 <내 인생의 마지막 4.5초>



1. 작가 소개


성석제(成碩濟) : 1960년 경북 상주에서 태어나 연세대 법학과를 졸업했다. 1986년 [문학사상] 시 부문 신인상을 수상하며 문단에 나왔다. 1994년 짧은 소설 모음집 <그곳에는 어처구니들이 산다>를 내면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1995년 [문학동네]에 단편소설 <내 인생의 마지막 4.5초>를 발표했으며, 1997년 단편 <유랑>으로 제30회 한국일보문학상을, 2000년 소설집 <홀림>으로 제13회 동서문학상을, 2001년 단편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로 제2회 이효석문학상을, 2002년 소설집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로 제33회 동인문학상을 수상했다.

소설집으로 <그곳에는 어처구니들이 산다><새가 되었네><재미나는 인생><아빠 아빠 오, 불쌍한 우리 아빠><호랑이를 봤다><홀림><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번쩍하는 황홀한 순간>, 장편소설로 <왕을 찾아서><궁전의 새><순정><아름다운 날들><인간의 힘> 등이 있다.


2. 줄거리


사내가 탄 차는 다리 난간을 들이받고 떨어지는 중. 지상 100미터 높이에서 떨어지는 자동차가 바닥에 닿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대략 4.5초. 사내는 그 시간 동안 지난 자신의 일생을 돌아본다.

여섯 살 때 이웃집 아이의 장화를 빼앗는 것을 시작으로 전형적인 불량학생의 길을 밟아나간다. 동네 깡패 마사오를 동경하며 탈선을 일삼다가 퇴학당하자, 집을 나와 친구 둘과 함께 ‘ㄷ'시로 향한다. ’ㄷ'시에서 건달 밑으로 들어가 심부름꾼을 하며 차츰 조직 세계에 발을 들여 놓는다. 그러다 육년만에 어머니의 죽음 때문에 귀향하게 되고 육년 전 마을을 함께 떠났던 두 청년과 재회한다.

피도 눈물도 없이 칼을 주로 사용해 점차 자신의 입지를 굳혀나가던 사내는 동네에 술집을 낸다. 일취월장하며 사업을 확대하고 조직을 불려나가던 사내는 동네 건달들이 우상으로 떠받들던 마사오를 계략에 빠뜨려 무찌르고 명실공히 지역의 실력자로 부상한다. 그러나, 조직이 절정에 달하던 때 왼팔 노릇을 하던 청카바가 배신을 하게 되고 마사오를 처치한 배경이 소문날까 노심초사하며 청카바를 찾아 나선다. 청카바를 찾아나섰다 돌아오는 길에 마사오와 마주친 그는 심리적 공포감에 시달린다. 과속을 하다 다리에서 미끄러져 추락, “엄마, 무서워”란 말을 남기고 생을 마감한다.


3. 성석제 소설의 특징


성석제 소설의 기본은 ‘재미’다. 성석제 소설은 코메디 한 편을 감상하는 것처럼 시종일관 즐겁고 유쾌하다. 성석제 소설이 ‘재미’있는 이유는 단연 성석제 소설의 새로운 형식에 있다. 성석제 소설의 가장 강력한 힘은 ‘문체’로부터 나온다. 애초에 시인으로 등단해서 글을 쓰기 시작했기 때문일까? 성석제 소설은 마치 한 편의 긴 시를 읽는 것처럼, 혹은 래퍼의 노래를 들으며 라임과 비트에 맞춰 얼깨를 들썩거리게 되는 것처럼 리듬감 넘치는 문장들로 가득차 있다. 성석제는 언어의 감수성을 통해 독자들이 잊고 지내던 감각의 세계를 환기시킨다.


‘그 과정에서 이웃집 아이의 코피가 터졌다. 그 일로 이웃집 아이의 아버지와 그의 아버지가 싸워 그의 아버지의 코피가 터졌다. 또 그의 아버지에게 코를 얻어맞고 그의 어머니의 코피가 터졌으며 그 역시 어머니에게 맞아 코피를 터뜨렸다.’


‘냇물이 깊었다면 풍덩풍덩 소리를 냈을 것이고 더 깊었다면 빠져죽었겠지만, 수영을 못했으니까, 하여간 그런 소리를 내며 도망갔다. 아이들이 곧 그를 따라왔다. 벙첨벙첨벙첨벙첨벙첨.’


성석제 소설이 단지 새로운 ‘문체’를 선보이는 데에 그쳤다면 그 ‘재미’는 그다지 크지 않았을 것이다. 성석제 소설의 백미는 단연 ‘이야기’ 형식에 있다. 성석제의 형식은 ‘이야기’를 통해 그 구성이 더욱 흥미진진해진다. 성석제 소설은 마치 한 바탕 판소리나 마당극을 보는 것처럼, 시종일관 유쾌한 놀이로 읽힌다. 성석제는 주절주절 ‘이야기’를 풀어낸다. 독자는 잃어버린 구전소설의 20세기식 부활을 목도한다. 성석제 소설은 서사라기보다 이야기에 가깝다. 꽉 짜여진 구성을 통해 교훈적 결말을 이끌어내던 종래 소설의 관습은 철저하게 무시된다. 이야기는 술에 술탄듯, 물에 물탄듯 구성진 가락처럼 듣기 좋게 흘러가고 귀신에게 홀린듯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이야기는 끝이 난다. 이와 같은 형식은 독자들을 이야기 속으로 빨아들이기 위해 잡다하고 과장된 잡지식들을 주워삼키는데, 흡사 판소리 기법 중 하나인 ‘주워섬기기’를 연상시킨다. 처음 판소리가 등장했을 때는 대개 완창이 아니라 며칠에 걸쳐 이야기를 토막토막 공연했었다. 소리꾼의 입장에서는 지속적으로 사람들을 끌어모으기 위해서 무엇보다 ‘재미’를 선서해야만 한다. 그 결과 판소리는 각 장면이 ‘부분의 독자성’을 갖게 되고 소리꾼은 장면을 극대화하기 위해 ‘주워섬기기’를 일삼는다. 어떤 상황이나 장면을 묘사하는데 온갖 이야기거리를 다 동원해서 과장함으로써 재미를 극대화하는 것이다.


‘그러면 지상 100미터 높이에서 심장마비를 일으켜 아래로 떨어지는 대머리독수리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독수리가 땅에 떨어지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100=1/2*9.0*t^2, 고로 t=4.5175394이다.’

‘일념 : 불교에서의 시간 단위. 1주야(24시간)는 30수유다. 수유는 모호율다이기도 한데 30달찰나의 길이이고 달찰나는 납박이다. 납박은 일념의 120배나 되는 기나긴 시간이다. 일념이란 말 그대로 생각 한 번 할 시간이 아닐까.’


‘위산의 분비는 공포의 소산이다. 정면 출돌 사고를 당한 운전자의 대부분은 갑작스런 위산의 분비를 경험한다고 한다. 한꺼번에 쏟아져 나온 위산은 위벽을 녹일 정도로 강력해서 평소에 궤양 등이 있는 경우에 그 자체로써 위천공을 유발할 수 있다.’


이와 같은 형식은 당연히 내용적 측면과 밀접한 연관을 맺는다. 성석제 소설에서는 누구도 그 끝이 어디에 가 닿을 지 예측하지 못한다. 그래서 ‘옛날 옛적에~’로 시작하는 이야기 한토막을 들은 것처럼 소설을 다 읽고 나도 이야기는 실체가 없는 연기처럼 사라진다. 작가는 ‘이야기’를 전달하는 만큼, 독자 역시 매일 들어도 가물가물한 할머니의 ‘이야기’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듣고 나면 쉽게 내용을 잊어버린다. 결국 ‘이야기’로 구성된 소설은 형식의 변형을 통해 의미의 변형을 이끌어낸다. 더 이상 소설은 완결적인 답을 내지 않고, 심지어는 이것이 단지 이야기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고 짐짓 딴청을 피운다. 모든 이야기는 마치 풍문처럼 한 귀로 들어왔다 한 쪽 귀로 사라진다. 성석제 소설은 항상 애매함을 동반한다. 분분한 해석을 낳지만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는 정확치 않다. 어쩌면 작가는 처음부터 아무 말도 전하지 않으려 했는지도 모른다. 성석제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촌스런 건달이나 착한 바보는 이런 의도를 더욱 강력하게 뒷받침한다. <내 인생의 마지막 4.5초>에는 끝내 주인공 이름조차 등장하지 않는다. 구체적인 공간적, 시대적 배경 역시 제시되지 않는다. 그 주인공은 매번 다르게 불리워도 상관없을 지 모른다. 그래서 끝내 이야기가 끝나도 의미가 쉽게 전달되지 않는다. 인생 막장의 아웃사이더의 등장은 한 편으로 묘한 삶의 ‘비의(非議)’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성석제의 소설은 늘상 묘한 서글픔을 수반하며 이야기 속에 뭔가 진지한 삶의 비의를 담고 있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 ‘과연 인생이란 무엇인가’하는 근본적 질문을 던지는 건 아닌가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그러나 끝내 풀 수 없는 알레고리처럼 성석제의 소설은 늘상 결국 이건 그져 이야기일 뿐이라고 심각한 몸짓을 거두어 들이는 것으로 마무리되고 만다. <내 인생의 마지막 4.5초>에서 주인공은, 그래서 마지막 죽음의 순간에 “엄마, 무서워.”를 외치는 것인가?


4. 풍자 소설의 계보와 변형, 그 속에 성석제의 위치


‘풍자’에서 ‘풍(諷)’은 노래를 의미한다. 이는 웃음과 재미를 뜻한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성석제 소설만큼 ‘풍(諷)’의 의미에 충실한 소설이 또 있을까? 성석제는 시종일관 노래하고 떠들면서 웃긴다. 그러나 ‘자(刺)’의 의미가 찌른다, 즉 비판하고 공격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할 때 성석제식 풍자는 노래하며 웃고 즐기되 비판은 사라진, 90년대식 이야기라 할 수 있다. 그는 풍자소설의 특징인 풍부한 이야기와 능청스런 입담, 그리고 노래같은 리듬감으로 무장했지만 무엇을 비판하고 공격해야할 지는 분명히 찾지 못한 모양이다. 아니 더 정확히는 ‘이야기’의 전통을 빌려오되 처음부터 그는 ‘재미’를 추구했을 뿐, 무언가를 비판할 생각이 처음부터 없었는 지도 모른다.

시대적 맥락을 따져보자. 많은 사람들이 80년대의 진지함에 지쳐 뭔가 새로운 것을 원할 때 성석제는 만담가 내지 구연가로서 90년대 문단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며 등장했다. 90년대 들어 내용적인 측면에서 하루끼식 허무주의와 탈정치적 경향이 새로운 소설의 흐름으로 제시되었다면, 형식적인 측면에서 성석제는 본격적인 시와 노래의 언어, 이야기와 만담의 화법을 들고 새로운 글쓰기를 시도했다. <내 인생의 마지막 4.5초>는 이런 성석제 소설의 출발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이와 같은 작풍은 80년대까지 소설의 상식으로 통했던 내용과 의미 중심의 서술방식, 그러니까 근대적 서사의 완결성, 총체성을 완전히 무시한 새로운 것이었다. 물론 이는 수많은 시도 중에 하나의 흐름일 뿐이다.

분명한 것은 성석제식 글쓰기가 중요한 하나의 영역을 개척했다는 것이고, 그렇지만 여전히 그 의미가 모호하다는 것이다. 80년대 소설이 추구하던 계몽적이고 총체적인 내용구성보다는 이야기가 주는 재미와 애매함에 더 매료된 것은 과거에 대한 반작용 때문인지 아니면 그가 추구하는 어떤 또 다른 세계가 있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최근 발표된 <어머님이 들려주시던 노래>에서 소설가가 자꾸만 무슨 의미를 전달하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면, ‘이것이 인생인가? 그런 걸까?’로 마무리되는 작가의 말이 그렇게 가볍게 넘겨지지는 않는다. 그는 변하고 있는걸까? 그렇다면 왜, 어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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