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시봉, 오독에 기초한 비판 : 과연 누가 편협한가?
0. 작년 9월, MBC <놀러와>에서 <세시봉> 특집이 방영되었다. 조영남, 윤형주, 송창식, 김세환이 나왔고 적잖이 화제가 됐다. 그래서 올해 설 특집으로 <세시봉> 콘서트(2월 1~2일)가 기획돼 방영됐다. 많은 사람들을 TV 앞에 불러모았음은 물론이다. <세시봉>이나 <르네상스> 같은 명동의 음악감상실을 드나들던 50~60대 세대뿐만 아니라 20~30대들에게도 좋은 호응을 받았다.
설특집이 방영된 후, 블로그와 매체 등에서 이야기가 이어진다. <세시봉>을 보고 느낀 소회를 밝힌 글이 한겨레신문 김선주 논설위원의 글이고 한진중공업 크레인 농성중인 김진숙 지도위원은 TV를 보지 못했지만 과거 기억을 떠올리며 그에 대한 소회를 트위터를 통해 밝혔다.
[김선주] ‘세시봉’ 바깥세상 이야기(2011.2.6)
[김진숙] 세시봉 관련 글 (지금은 트위터를 폐쇄해 원문이 실린 다른 블로그를 링크시켰다.)
<세시봉>을 보고 또 김선주 논설위원과 김진숙 지도위원의 글을 읽고서 쓴 글이 몇 개가 있다.
홍성일 문화연대 미디어문화센터 운영위원의 글과 마성은 님의 오마이뉴스 기사가 있다.
또 진보블로그에도 몇 분이 이에 관한 글을 썼다. 박군 님, 새벽길 님의 글과 칸나일파 님의 글이 그것이다.
진보블로그는 아니지만 EM님의 글이 링크되기도 했다.
[홍성일] 쎄시봉과 한진 크레인 위의 김진숙 (2011.2.10)
[마성은] 세시봉 뜨는데 노찾사와 꽃다지는 어디 갔나 (2011.2.14) 여기에도 있다. 쎄시봉과 계급문화
[칸나일파] 세시봉에 대한 반응을 접하고(2011.2.11)
[EM] 나도 ‘세시봉 콘서트’ 후기ㅋ(2011.2.9)
이에 대해 글을 좀 써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는 일단, 불편하고 부당하다는 느낌 때문이기도 하지만, 과연 과거의 기억이란 세대에 있어, 또 계급에 있어 무엇인지 정리를 해보기 위해서이다. 또 여러 블로거들의 반응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건지도 생각해봐야 하기 때문이다. 납득을 위해서다.
일단은 쓸 수 있는 만큼만 써보자.
1. 김선주 : 유신 세대 지식인의 1970년대에 대한 자기완결적 회고
세시봉 세대인 김선주 논설위원은 <놀러와>를 보고 감동과 재미를 못 느꼈다면서 오히려 아물었던 상처가 덧나고 피가 흐르는 듯했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암울한 과거가 생각나기 때문이었는데, 김 논설위원을 암울하게 만든 1970년대 일련의 사건들은 전태일의 분신, 인혁당 관련자 사형, 유신헌법 선포, 동아일보, 조선일보 언론인 대량 해직, 김대중 납치사건, 긴급조치와 같은 것들이다. 세시봉을 보고 김 논설위원은 한국현대사에서 가장 살벌했던 시기인 70년대를 떠올렸고, 그래서 '상처가 덧나고 피가 흐르는 듯' 했다는 거다. 세시봉 이야기 때문에 젊음을 두고 왔다고 생각했던 70년대가 어제일처럼 생생해졌고 그래서 세시봉 바깥세상의 70년대를 기억하라고 말하고 싶다고 하면서 칼럼은 끝난다.
내가 의아한 것 중 하나는, 왜 김선주 논설위원의 글이 그토록 많은 블로거들에게 '불쾌감'을 줬는가 하는 점이다.
박군님은 김선주 논설위원의 글을 읽고, "화려한 무대 밖에서 시대를 앓던 당시의 문화가 있었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것을 부인하려는 것이 아니다"라면서도 바로 이어서 "왜 화려한 무대는 총칼에 맞서는 문화와 공존하면 안 되는가이다. 왜 타인의 취향을 옳고 그름으로 판단해야 하는가"라고 되묻는다.
내가 읽기에는 김선주 논설위원의 글 어디에도 그런 식으로 이해될 만한 부분은 없었다. 원문을 다시 읽어봤으면 좋겠다. 우리가 한국어로 쓴 같은 글을 읽긴 한 것일까? 김선주 논설위원이 유일하게 주문하는 것은 '세시봉 바깥세상의 70년대를 기억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건 '70년대가 현재진행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라고 한다. 예컨대 박근혜 대세론 같은 걸 예로 들면서 말이다. 난 그러한 주문이 70년대 유신 시대에 청년 시절을 거쳐온 지식인이 후속 세대에게 건넬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그 말에서 '타인의 취향에 대한 옳고 그름' 판단 따위는 없다.
(오히려 대중문화와 민중문화를 대당으로 설정했던 건 80년대 학생운동의 문화다. 대중문화 일반에 대한 적대감과 비판은 1980년대 공고했다. 70년대 청년문화는 오히려 대중문화의 일부로서 또 통기타와 청바지로 상징되는 미국문화의 이식 속에서 성장했다. 그 청년문화가 박정희에 대한 강력한 저항선을 구축해 나갔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김선주 논설위원의 글을 그렇게 날선 태도로 받아들일 이유가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70년대의 저항문화는 오히려 짬뽕문화였고, 김선주 논설위원 역시 당시 자신도 음악감상실을 드나들었던 사람이라고 밝히고 있지 않은가.)
더 나아가 (김선주 논설위원의 글 어디에서도 그런 판단은 없었지만) 난 '타인의 취향'을 두고 옳고 그름을 판단해서는 안 되는지 되묻고 싶다. <세시봉> 신드롬은 "나 그거 어제 재밌게 봤어" 정도의 교실에서의 잡담이 아니라 어떤 사회적 현상이다. 따라서 정치, 사회, 역사, 필요하면 문화사적, 성적, 구조적, 경제적...... 으로 그 의미를 따지고 분석할 수 있는 거다.
칸나일파님의 글에서도 박군님의 글과 같은 오독의 흔적을 발견한다. 김선주 논설위원의 글이 칸나일파님의 말처럼 "다수가 생각없이 세시봉에 열광한다고 다수의 감성을 혐오하는" 글인지 다시 읽어봐도 모르겠다. 칸나일파님은 김선주 논설위원의 글에서 한겨레, 시사인 같은 태도를 발견하는 듯하다. 한겨레, 시사인에서 다룬 홍대 노동자 투쟁 관련 기사 등에서 '너무나 뻔한 선악구도', '계몽적 시선', '도덕적 엄숙주의', '비관주의', '꼰대식 하소연'이 느껴진다면서 그것을 김선주 논설위원의 글과 오버랩 시킨다.
난 칸나일파님의 이러한 화려무비한 표현들이 과도할 뿐만 아니라 부당하고, 과격하고 폭력적으로 느껴진다. 김선주 논설위원에 대해서 (그리고 한겨레, 시사인에 대해서 역시도) 부당하게 쏘아대는 걸로 느껴진다. '선지자라는 병적 계몽주의', 도덕적 자신감+우월감', 문화를 걸러내는 지나치게 빈곤한 감수성 등의 표현들이 이 칼럼이나 한겨레, 시사인을 비판하는 말로 걸맞는가? 비판의 대상이 있긴 한 것일까?
칸나일파님은 이렇게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것들과 대립시키면서 드는 예가 있다. 홍익대 노동자들 vs 홍대 총학생회장의 대립선을 무너뜨리는 노동자들이 던진 말, "밥이나 먹고 가라"라는 말을 긍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다양한 진실', '삶의 진실성' 등의 표현을 들어가면서 말이다. 하지만 이런 홍익대 사례를 생생하게 그리고 디테일하게 보도했던 것이 바로 칸나일파님이 비난하는 바로 그런 매체들이 아니었던가?
2. 김진숙 : 유신시대 노동자의 1970년대 포크에 대한 회고
김진숙 지도위원의 글은 길지 않기에 그대로 옮겨도 무방하리라.
세시봉인가가 꽤 감동적이었나보다. 난못봤다. 국민학교땐 남진이었다가 중딩때 송창식 윤형주 김세환 어니언스..그들의 감미로운 노래소리, 막연히 답답하던 공기속에서 그들에게서 미풍처럼 실려나오던 자유의 바람이 나도 참 좋았다. 18살 객지 나와 하루 13시간씩 일하며
타이밍으로 버티던 벌겋게 충혈된 눈에도 그들은 여전히 감미롭고 편안해보였고 나는 그게 서러웠다. 해고되고 경찰서 대공분실 징역을 자리만 바꿔가며 몸과 영혼에 가해지는 학대가 일상이 된 시절에도 그들은 참 편안해보였고 그땐 화가 좀 났던 거 같다. 노래에도 계급이 있다.
지금 아이들이 좋아했던 노래를 세월이 흘러서 들었을때 서럽거나 화가 나는 세상은 아니었음 좋겠다는 마음으로 크렌 침입사건 30일차 아침을 맞는다.
홍성일 운영위원은 김진숙 지도위원의 "노래에도 계급이 있다"라는 말에 충격을 받았다며 70년대 대학문화, 청년문화가 실은 한줌의 유한계급의 문화였으며 쎄시봉은 그 한 줌의 문화를 마치 전체 세대의 문화인 양 호도하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도 해보았다면서 쎄시봉이 귀환한 오늘 이 순간도 노동자 계급의 현실은 달콤한 시대가 아니라는 걸 일깨워준다고 말한다.
그런데 홍성일 운영위원은 여기에 "노래에는 계급도 있다"는 말을 덧붙이면서 쎄시봉의 노래를 듣는 노동자가 해방의 순간을 맛보았을지도 모른다면서 노동자의 노래, 자본가의 노래를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노래 속에서 노동자의 꿈을 발굴해내는 것, 그 꿈을 현실화하는 작업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래서 쎄시봉의 음악은 살아남은 숙련노동자들이 갖는 지적 경험적 가치의 소중함일 수 있고 죄스러운 쾌락으로 버리는 게 아니라 우리의 현실을 바꿀 수 있도록 잠재태로 재구성하는 작업이 보다 생산적일 거라고 주장한다.
김진숙 지도위원의 "노래에도 계급이 있다"는 말을 홍성일 운영위원은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 것일까? "세시봉은 노동자계급의 노래가 아니다"라는 말이 생략된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 듯하다. (그건 뒤의 마성은 님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난 김진숙 지도위원의 말을 그렇게 해석하지 않지만, 일단 그렇게 해석을 하고 더 이어가 보자.
홍성일 님의 표현처럼 1970년대 대학문화, 청년문화가 "한줌의 유한계급 문화였다"고 말하기는 쉽지 않고 또 그렇게 말하는 것이 바람직하지도 않다. 하지만 대중과 유리된, 혹은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과는, 특히 당대의 정치사회적 상황과는 일정 정도 유리되었다고 말하는 건 그리 무리하지 않다. 살이 쩍쩍 달라붙는 한겨울, 철선에 로프 하나 내려 매달린 부산 영도 바닷바람 맞던 여성용접사 김진숙에게 쎄시봉(에 등장한 네 명이 주로 부른) 그 말랑말랑한 노래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한단 말인가? 구청에 혼인신고하고 연탄가스 냄새 풀풀 풍기는 단칸방에 사는 어린 노동자 부부에게 '웨딩 케잌'이란 언감생심 꿈이나 꿀 수 있는 것이었을까? 그래서 난 세시봉의 노래가 '절대 듣지 말아야 할 어떤 것'이라고 말하고 싶은 건 아니다. 다만, 적어도 그것이 대중의 삶과 유리되어 있던 어떤 것임에는 분명해 보인다는 거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대학문화, 청년문화가 반 노동자계급적이어서라기보다는 유신시대라는 한국의 사회정치적 상황, 그리고 한국 포크 문화의 미성숙한 상태, 노동자운동이 본격적으로 발전하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어떤 '반노동자적'이다라고 확언하기보다는 세시봉과 당시의 그런 노래들이 어떤 문화사적 과정 속에 있었는가를 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미국 포크를 단순히 번안하고 모방하는 것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김민기는 지속적으로 현실을 구명하고 시대적 과제를 간취하고 노래 속에 담아내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러한 그의 노력이 87년 이전, <노래 모임 새벽>과 뒤이어 합법 단위로서의 <노래를 찾는 사람들>로 이어졌던 것이 아니었는가. (같은 포크면서 시대와 교호하며 1980년대 이후 자신의 과거 노래와 단절하고 (절대 청중 앞에서 부르지 않고) 현실주의의 길로 나아갔던 정태춘을 떠올려보라.)
김민기 만이 아니라 1970년대 포크 가수들의 일부가 바로 그런 현실주의적 탐구를 하고자 했고, 의지를 가졌다는 사실은 (TV에 등장한 2011년의) 쎄시봉과 마냥 화해해서는 안 된다는 걸 말해준다. 쎄시봉이 바로 그런 현실주의적 문예운동이 등장하는데 있어서 훌륭한 가교 역할을 한 것을 인정할 수 있지만 우리가 "우리의 현실을 바꿀 수 있도록 잠재태로 재구성하는 작업"에 쓰일 소스는 쎄시봉이라기보다는 그 이후 그들을 넘어섰던 흐름들일 것이다. 우리가 만약 70년대의 어떤 것을 정말 "우리의 현실을 바꿀 수 있도록 잠재태로 재구성"하는 "생산적" 관점에 서고 싶다면, 무턱대고 "이분법을 버리자"며 "무관점의 투항"을 할 것이 아니다. 1970년대 그렇게 저항적, 현실주의적 태도를 밀어부치고자 했던 포크 가수들이 아니라 말랑말랑한 노래를 부른 가수들만 공중파TV에 귀환한 것을 두고 "숙련노동자의 귀환" 운운하며 칭송하는 것도 불편하다. 그 말랑말랑한 노래가 우리의 소스가 될 수 있다면, 어떤 점에서 그런지를 밝혀야지 덮어놓고 모든 것이 다 우리 소스가 될 수 있다는 식으로 질러버리면 곤란하다.
김진숙 님의 '노래에도 계급이 있다'는 말과 홍성일 님의 '노래에는 계급도 있다'는 말이 어떤 차이를 가지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홍성일 님은 자신의 말을 '어떤 노래든 노동자계급이 즐겨 부른다면 그것은 이유가 있다' 정도로 해석하는 것 같다. 그건 물론이다. 하지만 그 '이유'가 반드시 긍정적일 거라고 볼 수는 없다. "한 사회의 지배 문화는 그 사회의 지배계급의 문화다"라는 말을 여기에 굳이 덧붙여야 할까. 쎄시봉이 대중들로부터 환대를 받았다면 가장 큰 이유는 그것이 공중파 방송을 통해서 방송되었다는 점을 빼놓을 수는 없다. 물론 그 지배계급의 장치로서의 방송이 일괴암적으로 지배계급의 프로파간다로서만 기능한다고 말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난 공중파 방송과 언론이 절대로 말하지 않는 것, 공중파 방송에 등장할 수 없는 가수들에 대해 기억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대중이 좋아하면 이유가 있을 거고, 그걸 받아들여 우리도 대중 곁에 다가서야 한다'는 식의 논지는 나이브하기 그지없다. 난 차라리 '방송국을 접수하자'는 말이 더 현실적이라고 본다.
마성은 님은 김진숙 지도위원의 '문화에도 계급이 있다'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면서 과거에 그런 시대(근대 이전)가 있었지만 근대에 이르러 문화가 문화상품이 되고 대중문화가 보편화되면서 더 이상 문화에서 계급을 구분하는 것은 매우 어려워졌다고 말한다. (구분하기 어렵다는 것은 '없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면 '동의하지 않는다'고 말할 것이 아니라 '문화에도 계급이 있지만 구분이 어렵다' 이렇게 말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아무튼... 이어가 보자.) 마성은 님은 물론 문화상품 구매능력은 계급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지만 (구매능력보다도) '문화적 취향'에 따르는 '아비투스'에 따라 구매하는 것이고(문장을 이렇게 이해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계급에 따른 문화적 차이라기보다는 (개인의) 취향 차이로 이해해야 한다고 보는 듯하다.
마성은 님은 '아비투스'라는 개념을 썼는데, 그 말을 개념화시킨 부르디외는 마성은 님의 논지와는 완전히 반대로 그 말을 쓰는 것으로 안다. 부르디외는 문화적 취향이란 계급적 취향이며, 문화적 자본은 경제적 자본과 무관하기 보다는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으로 본다. 부르디외에 따르자면 오히려 문화에 계급이 있으며 계급에 따라 형성된 아비투스는 단순히 (개인의) 취향 차이로 이해할 수 없고 오히려 계급적 분석이 필요한 주제가 된다. 또한 그러한 문화가 정치와 구분될 수 없으며 문화에 대한 해석에는 계급, 구조, 정치 등의 장 속에서의 해석이 중요해진다. 그런 맥락에서 마성은 님의 논지는 근거가 박약하다. 이 시대 대중문화 속에서 '개인적인 취향'의 문제로 보이는 것조차도 계급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보는 것이 맞는 게 아니겠는가.
마성은 님은 '문화에도 계급이 있다'고 보기보다는 '계급에도 문화가 있다'고 주장해야 한다면서 한국의 무산계급은 무산계급문화를 형성해내지 못했다고 말한다. 투쟁가나 노동문학이 있긴 했지만 그건 문화라기보다는 도구로 존재했고 그것은 일상세계의 일부로 즐거이 향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고 본다.
홍성일 님과 마찬가지로 마성은님의 이 말의 전도 뒤에는 김진숙 님의 "노래에도 계급이 있다"라는 말을 "세시봉은 노동자계급의 것이 아니다"라는 의미가 숨어 있다고 보는 것 같다. 더 나아가 마성은 님은 아마도 '문화에도 계급이 있다'는 김진숙 지도위원의 태도는 이분법적인 태도로 보는 것 같다. 그러면서 자신의 말, '계급에도 문화가 있다'는 관점이 '원칙적이면서도 유연한 것', '급진적이면서도 대중적인 것'은 유물변증법적 사고이며 따라서 양자택일할 것이 아니라 세시봉과 노찾사/꽃다지 모두를 우리의 것으로 만들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김진숙 지도위원의 말은 트위터 원문 전체의 맥락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본다. 마성은 님은 김진숙 지도위원의 그 말만 떼어내 자기 논지를 전개시킬 뿐이다. 위, 아래 문장과 연관시켜 이해할 때 김진숙 지도위원의 글은 정말이지 자기가 처한 조건, 환경, 위치, 사회적 관계 속에서 어떤 문화를 해석하고 의미화시켜낸 거다. 공장노동의 고통과 해고와 국가의 탄압 가운데서 세시봉의 노래는 편안해보였고 화가 났다고 느낀 게 편협한가? 이분법인가? 현실에 기반해서, 현실에 근거해서 어떤 현상을 해석해내는 것이야 말로 마성은 님이 '우리가 늘' 얘기한다는 바로 그 유물변증법의 관점이 아닌가?
마성은 님은 '계급에도 문화가 있다'면서 한국의 무산계급은 계급문화를 형성해내지 못했다고 말한다. 어느 정도는 맞다. 그러나 더 정확히 말하자면 "한국의 무산계급은 계급문화를 형성해나가고 있는 과정에 있다"고 말해야 한다. 그것이 영국의 노동계급의 문화가 형성되어 간 과정을 1780년대부터 1830년대 초까지의 긴 시간을 두고 분석한 E.P.톰슨의 맥락에서 한 얘기라면 더더욱 그렇다. (사실 영국노동계급의 형성은 몇백 년에 걸쳐 이루어졌다.) 계급문화란 단 시간 내에 형성되는 게 아니다. 기나긴 역사적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이제 겨우 23년 흘렀고, 이제 겨우 정치운동 시작하는 단계에 있는 게 한국의 상황이다. 따라서 '한국의 무산계급은 계급문화를 형성해내지 못했다'는 후진성의 낙인 같은 말로 재단하기보다는 형성해가고 있는 계급문화가 어떤 것으로부터 그 영양분을 취하고 있는지, 어떻게 구성되었는지, 그 내용과 논리는 어떤 것인지를 분석하는 편이 낫다.
마성은 님의 말의 전도 뒤에 있는 더 위험한 점은, 한국의 노동자운동의 부산물이었던 투쟁가나 노동문학을 '도구'로 격하시키면서 그것을 '계급문화' 형성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비인간적인 동원 기제' 정도로 이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부르디외 식으로 말하자면 정말 마성은 님의 아비투스가 작동한 결과일 뿐이다. E.P.톰슨이 <영국노동계급의 형성>에서 밝히듯이 정치이론, 집단경험, 정치사회적 운동뿐만 아니라 종교와 민족적 풍습 따위 등도 폭넓게 노동계급의 문화를 형성시키는 데에 기여했다. 하물며 투쟁가와 노동문학이 그 일부로서, 계급문화의 일부로서 간주되지 않을 이유란 도대체 무엇인가?
어떤 이에게는 '편협한 구호'나 '군가풍 노래'에 지나지 않을 투쟁가와 노동문학이 어떤 이에게는 절절한 자기 얘기로 다가온다는 것은 새삼 말할 필요도 없다. (그리고 사실 군가풍 일색인 투쟁가는 1988~1990 때 얘기다. 그 이후 창작된 투쟁가는 그리 많지 않으며, 오히려 서정적 민중가요가 1990년대 중반을 풍미했고 1990년대 후반에는 rock이 들어왔다. 그리고 지금 연영석이나, 혹은 노동가수라고 말하지 않지만 자유로운 문화생산자로서 노래를 만들고 부르는 사람들(근래 무궁무진해졌다.)을 마성은 님은 모르나보다. 만약 안다면, 투쟁가와 민중가요를 이런 식으로 폭력적으로 폄하할 수는 없을 것이다.)
- 일단 여기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