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시봉과 관련한 이야기들이 어떻게 이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진보블로그 운영하시는 분들이 따로 페이지를 만들어 놓았다.
이걸 보고 읽는 것이 좀 더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http://blog.jinbo.net/hotissue/10
0. 쉼표
이야기는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러나 명료해지기보다는 모호해진다는 느낌이 든다.
앞으로 나아가기보다는 제자리에서 뜀박질하는 느낌이다.
이어진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함께 미궁에 빠질 위험이 있다고 생각된다.
하고자 했던 얘기를 이어가는 게 나을 듯하다.
1. 요약
내 원래 글은 세시봉(그리고 세시봉이 출연한 <놀러와> 자체)에 대한 글이 아니다.
내가 쓰고자 했던 건, 세시봉에 관해 쓴 김선주, 김진숙 두 7-80년대와 정면으로 맞서살아온 분들의 글에 대한 반응에 대해 쓰고자 했던 것이다.
따라서 세시봉(과 <놀러와>)에 대한 내 호불호나 느낌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그건 따로 써볼까? 하는 생각도 해보긴 한다.)
세시봉에 관한 김선주 논설위원과 김진숙 지도위원의 글에 대한 블로거들의 반응은 둘로 나뉜다.
첫 번째는, 박군님과 칸나일파님의 글에서 잘 보여지듯 불쾌하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마성은님과 홍성일님의 글에서 잘 보여지듯 세시봉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새벽길님처럼 김선주, 김진숙 님의 글이 마음에 맞았다는 반응도 있지만, 새벽길님의 글은 내가 다루고자 하는 대상은 아니다.)
앞서 썼던 내 글에서 하고자 했던 말은,
불쾌감이든, 우리의 것으로 만들어가야 한다는 결론이든,
그것이 김선주, 김진숙 두 분의 글과는 무관하다는 걸 말하고 싶었던 거다.
두 분의 글, 어디에도 없는 얘기를,
오해, 오독에 비약, 잘못된 이론적 근거, 억지, 논점 일탈을 통해
각자가 하고 싶어하는 말을 했다는 것이다.
내가 앞서 쓴 글을 요약하자면 뭐 이런 정도 되겠다.
2. 대중
난 김선주, 김진숙 님의 글에서 블로거들이 비판하는 점들의 혐의를 찾아낼 수는 없었지만
블로거들의 반응에는 (대중문화를 향유하는) '대중'을 옹호하고자 하는 강한 의지가 느껴진다.
사실, 세시봉을 둘러싸고 이어진 글들의 배경에는 '대중'이 강력하게 놓여져 있다.
이런 식이라고나 할까?
"저들을 두고서 또는 적으로 돌리고서 도대체 뭘 어쩌자는 것이냐?"
"잘난 척 가르치기만 해서 대중이 우리 편이 되냐?"
(거듭 강조하건대, 김선주, 김진숙 님이 그런 태도를 취했다는 근거는
글 어디, 문장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다.
대중에게 말 건네는 게 주된 업무인 언론인 김선주 논설위원과
대중을 조직하는 게 주된 업무인 노동운동가 김진숙 지도위원이
대중에게 '멍청한 것들!!' 했다는 건가?)
그러나 좋게 평가해봐야 이 같은 옹호는 추수주의에 불과하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추수주의로 이르게 되는 경로다.
개인 취향의 절대화.
그 '개인'조차 역사적, 사회적, 정치적인 현실 속에서 놓여져 있는 존재인 한,
그 '취향'이 성, 계급, 인종, 세대, 지역, 연령에 따라 다르게 조직되는데
그걸 몽땅 무시하고 "뭐 좀 즐길수도 있지, 그걸 갖고 뭐라고 그러냐?"는 식으로 옹호한다면
개인은 파편화되어 그야말로 체제 속에서 포획되기 쉬운 자연상태에 방치될 뿐이다.
추수주의의 위험성은 그런 거다.
대중을 옹호하는 듯하지만 대중의 힘이 분쇄되기 쉬운 상태에 있는 걸 방기한다.
세시봉은 귀환하지만, 대중의 귀환은 한없이 저지되고 온 사방을 떠돈다.
3. 간주곡, 70년대 그녀들의 눈은 어디를 향하는가?
김선주 논설위원과 김진숙 지도위원의 글에서 나를 강하게 사로잡았던 부분은 다른 이들과 다른 것 같다. 난 아래와 같은 부분이 좋았다.
김선주 논설위원의 글에서는
암울한 과거를 기억하는 것은 미래엔 그런 일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이고, ‘큰바위얼굴’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것은 큰바위얼굴을 바라보며 살다가 스스로 큰바위얼굴이 될 누군가를 위해서다. 미래를 위해서다. 노래에 얽힌 추억담에서 가슴에 통증을 느끼는 것은 70년대가 현재진행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김진숙 지도위원의 글에서는
지금 아이들이 좋아했던 노래를 세월이 흘러서 들었을 때 서럽거나 화가 나는 세상은 아니었음 좋겠다는 마음으로 크레인 침입사건 30일차 아침을 맞는다.
70년대를 겪어온, 세시봉의 노래를 듣고 젊음을 겪어낸 '그녀'들의 풍부함은 이런 거다.
아이들, 그리고 아이들이 겪을 미래에 대한 생각을 잊지 않는 점이다.
그녀들의 고민이 당당한 건, 그네들이 그 아이들이 겪을 미래를 열어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세대에 따라서 '자신이 가장 좋은 시절이라고 여겼던 때'(첨밀밀이라고 하나)를 표상하는 노래는 있다.
그것이 세시봉일 수도 있고, 어떤 이에게는 조용필일 수도, 또 서태지나 HOT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사람의 시대가 그 사람들을 처절하게 밟을 때
그건 그 노래가 그 사람들을 위무하는 동시에 한없이 서럽고 외롭게 만드는 걸 거다.
그녀들은 자신들이 '세시봉'을 떠올릴 때의 느낌을 아이들이 가지지 않기를 바란다.
새벽길님이 예로 들고 있는 박진영을 떠올리면서 90년대를 겪은 세대가 촛불과 MB를 난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니 그들의 먼 미래에 촛불과 MB를 진정 잊기 위해서는 그 세대와 우리가 함께 이 시대를 넘어서야겠다.
화해로운 시대라면, 어찌 노래가 노래로서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인가.
난 그것이 대중과 이들 70년대를 겪어온 여성들이 공유하고 있는 지반이라고 생각한다.
4. 다시 세시봉, 대중은 왜 세시봉에 열광하는가
세시봉의 귀환에 환호한 사람들은 우선 5~60대이다. <놀러와>에도 나오듯이 화장실 가서 교복을 갈아입고 세시봉에 출입했던 여중생, 어니언스 온다고 난리가 났던 이대생들, 뭐 거기에 라디오에서 그네들의 노래를 들었던 김진숙 씨까지... 그 폭은 넓다. 이들에게 당시 미국 포크음악과 통기타는 전혀 새로운 문화였다. 남진, 나훈아가 마이크를 쥐어짜고 있을 때 그 감미로운 선율과 이국적인 멜로디가 어찌 좋지 않았으랴.
물론 한국적 상황이 있다. 미국의 포크문화 중 베트남전쟁에 대해 반대하는 목소리는 걸러졌다. 또 미국 포크문화는 한국에서 '고급 취향'으로 받아들여지기보다는 '저질 외국문화'로 여겨졌다. 박정희 정권이 한 짓이 참 저열했다. 장발 단속하고 미니스커트 단속하던 그 구질구질한 얘기 말이다. 그리고 일단 노동자들은 이런 노래를 들을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앞선 글에서도 얘기했지만, 당시 한국의 사회정치적 상황과 다소 유리된 요소가 없었던 것도 아니다.
그렇게 걸러진 포크문화였지만, 그리고 번안가요 혹은 미국곡을 그대로 부른 거지만, 걸러지지 않은 감성은 있다. 그건 뭐니뭐니 해도 '고향에 대한 향수'다. 이것이 세월이 지났어도 세시봉의 귀환에 5~60대가 열광한 이유다.
<놀러와>를 본 이들이라면 알겠지만, 이들이 부른 팝송 중 상당수는 이촌향도한 미국의 노동자들의 심금을 달래는 내용이다. 그리고 그것은 미국적이라기보다 근대 자본주의의 산업화 과정에서 겪은 모든 이들의 마음을 달래주는 것이었다. 가사가 영어라서 그렇지, 고향을 떠나 서울로 서울로 몰려들던 한국의 노동자들도 다르지 않았다. 다시 돌아가고 싶은 고향이 미국 노동자들에게 cotton field였다면 남한 노동자들에게는 삼남지방의 드넓은 논밭이 아니었겠는가. 그들에게 고향으로 돌아가 만나고 싶은 이가 Mama와 Papa였다면 남한의 노동자들에게는 어머니였고 아버지였다. 만약 <세시봉>에 계급적인 요소가 있다면 바로 이 '노동자들의 향수'일 것이다.
그건 한국적 포크가 출현해가는 과정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어니언스의 <하얀 손수건>조차 그런 배경을 깔고 있지 않나. 하물며 김민기가 만들고 양희은이 부른 <서울로 가는 길>에서 더 드러난다. 70년대 무수한 노동문학 속에서도 노동자들은 고향을 떠나와 서울에서 얼마나 고통에 찬 노동의 낮밤을 보냈는지 등장한다. 심지어 80년대에도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엔 이촌향도한 노동자들의 감성을 자극하는 요소들이 즐비하며 민중미술 오윤의 작품에서도 도시와 농촌이라는 구도는 확연하다.
서울로 가는 길 - 양희은 노래
(김민기 작사,곡)
우리 부모 병들어 누우신지 삼년에
뒷 산에 약초 뿌리 모두 캐어 드렸지
나 떠나면 누가 할까 병드신 부모 모실까
서울로 가는 길이 왜 이리도 멀으냐
아침이면 찾아와 울고 가던 까치야
나 떠나도 찾아와서 우리 부모 위로하렴
나 떠나면 누가 할까 늙으신 부모 모실까
서울로 가는 길이 왜 이리도 멀으냐
앞서 가는 누렁아 왜 따라 나서는 거냐
돌아가 우리 부모 보살펴 드리렴
나 떠나면 누가 할까 병드신 부모 모실까
서울로 가는 길이 왜 이리도 멀으냐
좋은 약 구하여서 내 다시 올 때까지
집 앞에 느티나무 그 빛을 변치 마라
나 떠나면 누가 할까 늙으신 부모 모실까
서울로 가는 길이 왜 이리도 멀으냐
이러한 점을 지적하지 않은 채, 덮어놓고 <세시봉>도 우리의 자산이 될 수 있다느니 얘기하는 건 곤란하다. 대중의 열광을 분석하지 않고, 대중이 좋아한다고 따라가는 추수주의가 투항과 무엇이 다른가. 물론 세시봉에 계급적 향수를 자극하는 요소가 있다고 해서, 그것이 지금에도 우리의 자산이 될 수 있는지도 좀 더 따져봐야 할 문제다. 저물어가는 세대가 아니라, 새로운 세대가 처한 계급적 상황은 결코 이와 같지 않기 때문이다. 도시에서 (반농반도의 정체성을 가진) 노동자의 자식으로 태어나, 다시 그 자식이 노동자가 되는 시대다. 우리에게 돌아갈 고향은 없다. 우리에게 반겨줄 부모는 없다.
5~60대들이 <놀러와>에 환호하고 세시봉에 열광하며 향수에 젖는 건, 바로 이 변화된 현실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더 이상 고향이 없는 상황에서, 더 이상 우리를 기다리는 부모가 없는 세상에서 추억할 수 있는 옛일이란 얼마나 아련하고 애절한가. 눈물을 흘리고 박장대소하며 그 시절을 추억하는 우리 시대 어머니, 아버지들을 보면서 가슴 아픈 건 그래서이다.
대중 속에서, 대중과 함께 더불어, 그들의 노래 '세시봉'과 심지어 조용필, 남진, 나훈아를 함께 열창하며 그들의 미래를 바꾸어온 사람들이 김진숙 지도위원과 같은 사람들이다. 또 홍익대 여성노동자들과 같은 사람들이다. 젊은 노동자들 역시 마찬가지다. 지역 집회에 등장한 동희오토 젊은 노동자들이 '장기하와 얼굴들'을 립싱크하면서 부르는 것을 따라 울산의 희끗희끗한 노동자들도 '미미시스터즈'를 만들기도 했다. 이렇게 운동은 시대를 건너간다. 민중가요 속에는 그런 열린 문화의 흔적이 있다. 아니, 민중가요는 그 자체로 이미 열려 있던 거였다. 민요, 판소리, 뽕짝이라 불리는 트로트, 군가, 찬송가, 포크 문화, 록, 클래식, 랩 등 여러 장르가 녹아 있고 존재한다.
운동의 노정에서 대중문화의 여러 요소들을 받아들여 운동적 자산으로 역전시켜내는 것은 그야말로 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대중의 창조성과 역동성, 그리고 무엇보다도 개방성을 반증한다. 때로 편협하게 보일 때조차 운동은 그 전체가 편협하다고 말할 수 없으며, 단언컨대 운동 속에 살아 움직이는 대중은 편협하지 않다. 편협한 것은 그 운동을 바라보고 있는 일부의 태도일 뿐. 다시 묻는다. 누가 더 편협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