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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2/11
    세시봉에 대한 반응을 접하고(1)
    칸나일파

세시봉에 대한 반응을 접하고

0.

몇 달 전에 김종엽 씨의 '남보원 유감'을 읽고 비판글을 쓴 적이 있다.

오늘글은 맥락상 그 글의 2탄쯤 된다.

일관된 문제의식은 '문화현상에 대한 운동권의 도덕적 강박과 엄숙주의 에 대한 비판'이다.

간만에 불질을 자극한 직접적인 원인은 '세시봉 바깥세상'이란 김선주씨 칼럼(2월 6일자 한겨레)이다.

 

 

그러니까 그 내용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세시봉을 마냥 즐기기 어려운 시절이었다. 이유인 즉,

엄혹했던 군사독재 시절 마냥 세시봉을 즐길 수만은 없었던 가슴 아픈 역사가 있었다.

그리고 지금 역시도 세시봉을 마냥 즐기기 어렵다.

그 독재자의 딸이 여전히 가장 강력한 대선후보로 맹위를 떨치는 현실이 있기 때문이다.

민주화 운동의 이름으로 함께했던 이들이 세시봉 바깥세상에 노래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다.

 

 

이 글을 비판하기가 조금 망설여진다.

망설여지는 이유는 미안함 때문이라기 보다는 안타까움이나 답답함에 가깝다. 

너무나 뻔한 언어구조인데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무엇보다 이 언어구조에 어떤 대화 가능성을 발견하기 어렵다.

그래도 쓴다. 여전히 함께 대화할 대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1.

한겨레 신문과 시사인을 정기구독하기 때문에 비슷한 언어로 사회 현상을 분석하는 글을 자주 보게 된다.

최근에 비슷한 느낌을 받은 글은,

 

'홍대 청소노동자들 집회'에 나타나 학생들 공부에 방해가 되니 '집회를 중단해달라'고 요청한 총학생회장

관련 기사들이다. 한겨레나 시사인의 초점은 한결같이 비정규직으로 계급적 각성 단계 있는 노동자들과

이들을 방해하고 나선 비권 총학생회의 대립에 맞춰져 있다. 너무나 뻔한 선악구도, 철없는 대학생과

척박한 세상을 탓하는 계몽적 시선. 자연스레 뒤따르는 도덕적 엄숙주의, 비관주의.

'너도 그 대학 나와봐야 비정규직밖에 더 되냐?' '대학도 자본주의에 물들어서 맛이 갔다'

따위의 꼰대식 하소연 내지는 충고가 기사에 달린 댓글의 거의 대부분이다.

 

이 답답한 프레임을 깬 건 당사자인 노동자와 총학생회장인데(대개는 어머니인) 어머니들은 "문제의"

총학생회장에게 날도 추운데 밥이나 먹고 가라고 말한다.(지혜로운 존재들이여...) 총학생회장은 복잡한

감정에 어쩔줄 몰라하며 순간 눈망울이 흔들린다. 삶의 진실성 앞에 선악의 대립구도는 손쉽게 KO당했다.

그리고 이 장면을 놓치지 않고 배우 김여진 씨가 현장의 분위기를 전한다.

계급적 대립구도, 혹은 그 계급적 대립구도에 중간방해꾼으로 개입한 총학생회장의 존재라는 측면은

당연히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진실의 조각들이 존재한다.

흔들리는 총학생회장의 눈망울이 대변하는 인간으로서의 변화 가능성, 그리고 쉽게 보기 힘든

그  상황을 연출해 낸 복잡한 시대적 배경과 관계들. 이 간단한 한 장면 속에도 저마다 다른 관점에서

이야기 할 수 있는 다양한 진실이 존재한다.

 

그것을 읽어내는 지혜로운 눈이, 또는 읽어내려는 의지가 간절했다.

 

2.

이런 엄혹한 시대에 시크릿 가든을 보며 마냥 즐길 수 만은 없는 이유는,

이런 엄혹한 시대에 아이돌을 보며 마냥 즐길 수 만은 없는 이유는,

이런 엄혹한 시대에 개콘이나 보며 마냥 즐길 수 만은 없는 이유는,

 

있다.  그러나, 어떤 사회현상에 대한 분석이 단순한 이분법적 구도에 머무를 때

가장 큰 손해를 보는 것은 변화를 갈망하는 자들이다. 세시봉 안과 세시봉 바깥으로 세상을

양분해서 생각할 때, 그리고 다수가 생각없이 세시봉에 열광한다고 다수의 감성을 혐오하는 순간

자신들이 원하지 않는 대중과 활동가들 사이의 벽(의도와 무관하게 만들어지는)은  더욱 견고해진다.

 

내가 옳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다만 이제는 좀 이런 도식화된 분석틀을 버리자는 것이다.

 

 

세시봉을 둘러싸고 존재하는 여러 가지 맥락만 늘어놓아보자. 내 능력은 여기까지다.

 

3.

관점 1)

놀러와를 연출하는 신정수 피디는 마봉춘 노조원으로 지난 파업 때 삭발을 했었다.

아는 사람만 아는 얘기지만 신정수 피디는 나름 아웃사이더 기질이 있는데다 조용하고 내성적

성격이다.(주워들은 얘기다.) 기존 버라이어티나 토크쇼와 다르게 놀러와는 철저하게 비주류들을

게스트로 초대해서 깨알같은 소소한 재미로 틈새 시장공략에 성공한 프로다. 그 중 가장 대박이

난 게 세시봉이다. 놀라와의 색깔은 신정수 피디와 무관하지 않아서 묘하게 변방의 이야기로

다수를 감동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다.

 

관점2)

세시봉 2편 오프닝은 장기하+윤도현+송창식이 함께 부른 담배가게 아가씨였는데,

이 공연은 정말 명불허전이었다. 아이돌 일색의 가요계에 장기하, 윤도현 조합이 갖는 의미.

철저하게 나이 든 가수를 외면하고 오래된 것은 무조건 폐기 대상으로 여기는 한국사회에서 송창식

조합이 갖는 의미. 이들을 섞어서 이렇게 폭발적인 무대를 만든다는 것 자체가 흥미로운 발상인데

실제 공연 자체도 환상적이었다.

그리고 양희은의 아침이슬이 흐를 때 뒷배경을 가득 채운 김민기의 클로즈업된 사진은 묘한

감동과 회한을 불러 일으켰다. 그 무대는 양희은의 노래를 위해 준비된 것이 아닌, 그 시대 함께

고통받았던 사람들에게 보내는 존경의 표시 같았다.

 

관점3)

서울대생임을 끊임없이 자랑하는, 머리부터 발끌까지 마초 자뻑 조영남

연세대+기독교+모더니즘+세련미 무엇하나 빠지는 구석이 없는 윤형주

자유로운 사고와 풍부한 감성의 소유자 이장희

늘 막내 역할을 즐겁게 받아들이는 온화한 성품의 소유자 김세환

무일푼으로 노숙자처럼 살아 온 기이한 천재 송창식

내가 세시봉을 보며 느낀 캐릭터의 특징을 그냥 써 본 것이다. 거기에는 물론 불편함도 있다.

 

종교 포비즘이 있는 나로서는 번안곡이나 팝송이 대개 서구적+종교적 감성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

조영남을 통해 여과 없이 드러난 학벌에 대한 우월감, 입만 열면 윤여정을 언급하는 그 무례함 등

불편한 구석도 많았다.  그러나 또 한 편으로

 

그저 그런 옛날 가수로만 알았던 그들이 한국 최초의 싱어송 라이터 1세대를 형성했다는 점,

(특히 김세환 같은 가수는 그 존재감이나 있었겠나??)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이는데 거부감이 없는 선두주자들이었다는 점,

(1910~20년대 가장 문화적 감수성이 예민한 엘리트들, 흔히 모던보이라 불리우던 이들은 대개 맑스주의자가

되었고 초기에 모더니즘이 서구로부터 이식되는 과정에서는 기독교의 영향력도 상당했다.)

행동이나 삶의 패턴 역시 상당히 아방가르드 한 면모를 보인다는 점

등 새롭게 알게되고 재해석되는 역사에 흥미로운 요소들이 많았다.

세시봉을 구성하는 요소들 자체가 이질적이고 복합적인 것들이 뒤죽박죽 섞여 있듯이

세시봉에 열광했던 사람들 또한 그랬을 것이다. 이들에게는 다양한 감정이 뒤섞여 있다.

최소한 전국노래자랑을 고정적으로 시청하는 사람들보다는 세시봉에 열광하는 이들에게서

소통의 가능성을 단 1%라도 더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4.

아이돌에 열광하는 고딩들이 촛불시위를 주도했다는 사실을 잊었나?

그렇게 '촛불로부터 배우자, 배우자' 그래놓고 왜 맨날 제자리인가?

아니 뭘 배워야 한다는 강박 자체라도 있다면 다행이지, 배우기는 커녕 늘 자신이 조종하고 관리하고

바로잡아주는 선지자라는 병적 계몽주의부터 좀 어떻게 하시지...

어떤 사건이, 현상이라 불릴 만한 영향력을 행사할 때 그 사건으로부터

'내 편에게 유리한가? 저쪽 편에게 유리한가?" 혹은 "그들은 각성된 자들인가? 아닌가?" 따위의

잣대를 들이미는 게 얼마나 고리타분한 일인가?

그 근거없는 도덕적 자신감+우월감은 열등감+피해의식과 동전의 양면이다.

 

양희은은 무릎팍에 나와서 아침이슬이 시대를 대변하는 노래가 되었는데 당시 느낌은 어땠냐는 질문에

'난 그저 노래랑 포크송이 좋아서 부른거지. 이렇게까지 큰 영향을 미칠거라고는 생각을 못해봤다.

내가 무슨 대단한 일을 한 사람처럼 평가를 받는게 좀 그렇다. 난 그냥 무서웠다. 감히 나설 엄두를 못냈다.'

고 대답했다. 그런 노래가 시대를 대변하는 노래가 되기도 한거다.

세시봉 전반이 불편하고 유일한 감동은 오직 '아침이슬', 오직 '양희은'이라고 말할 때

그 감동 역시도 심하게 단선적으로 왜곡된 것이며, 문화를 걸러내는 감수성은 지나치게 빈곤하다.

 

좀 그러지 마라. 더 많은 것들을 품어안기는 커녕 휑하니 독만 남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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