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1/11'에 해당되는 글 3건

  1. [영화] The Fall 2009/01/11
  2. [영화] Man from Earth (2) 2009/01/11
  3. 2009년을 맞이하며 2009/01/11

[영화] The Fall

from 잡기장 2009/01/11 23:22

The Fall, 2006

 

감독 : 타셈 싱(Tarsem Dhandwar Singh, India)

주연 : 카틴카 언타루(Catinca Untaru), 리 페이스(Lee Pace)

 


 

영화에 대한 리뷰는 아래를 참조하는 것이 좋을 듯 하다.

요즘 능력있는 블로거들이 참 많다.

 

더 폴 - 영화에 대한 사랑이 넘치는 타셈 싱의 동화

 

(극중 공주가 입은 옷. 혹시 훗날 결혼을 하게 된다면 부인될 사람에게 입히고 싶은 마음이 드는.. -ㅅ-)

 

감독은 'The Sell'(2000)을 만든 인도인인데, 어릴 때 히말라야 산기슭에서 수학을 한 뒤 미국으로 넘어가 영화를 공부하였다고 한다. 뛰어난 영상으로 호평을 받는 감독이란 평을 볼 때 왠지 그가 히말라야에서 접한 대자연의 웅장함에 매료되어 제작하는 영화마다 영상에 공을 들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감독은 한 작품을 만드는데 최소 5년 이상을 공들이는 특유의 장인정신을 발휘하는 감독이다.

 

이 영화도 제작에 6년 이상 걸렸다는 것과 영화가 끝나고 크레딧이 올라갈 때 알 수 있듯이 전 세계를 돌며 아름다운 자연을 CG없이 담아낸 것은(장소섭외에 무려 17년이 소모되었단다) 감독의 영화에 대한 태도를 알 수 있다. 배우들이 등장하는 만리장성이나 에펠탑 등 이동이 쉽지 않았을 것이 뻔한 장면이 0.1초만에 휙휙 지나가는 것은(어쩌면 제작진들이 의상만 입었을 수도 있지만-_-) '어.. 저래도 돼?' 라고 오히려 걱정이 될 정도로 화통한 감독의 성격을 보여주었다. 파란 마을을 구현하기 위해 CG를 사용하기 보다 마을에 페인트를 나누어 주어 칠하도록 주민들을 설득하였다는 수고로움도 이 감독에겐 당연한 과정일 뿐인듯 하다.

 

재미와 영상, 감동 모두를 느낄 수 있는 영화로 적극추천!!

 

+1. 일요일 저녁, 후배 덕에 뜻하지 않게 아름답고도 감동적인 영화를 보게 되어 흐뭇하다^^ (이대 ECC 안에 생긴 아트하우스모모에서 봤는데 그간 CGV등 대형 체인만 기웃거린 나로서는 놓친 좋은 영화가 많았다는 걸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2. 이 영화의 전반적인 평이 '스토리는 좀 어설프지만 영상이 아름다운 영화'인 듯한데 내 소감은 좀 다르다. 이 영화는 영웅들의 모험이 주 스토리가 아니라 알렉산드라와 로이의 현실 세계에서의 관계가 주라고 봐야 할 것이다. 영웅들의 모험이 허황되고 연관성이 엉망인 것은 로이가 어설프게 지어내었단 걸 표현한 것이지 결코 구성을 대충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영웅들이 모험이 제대로 되었더라면 그저그런 영화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어설픈 모험이 로이의 상황과 아이의 천진난만한 상상력을 더 잘 표현해 주었기에 중간중간 웃음이 뻥 터지는 즐거움을 경험할 수 있었다.

 

+3. 여주인공 꼬마애 너무 귀엽다 ㅎㅎ

(카틴카 언타루, 1997년 생?!)

 

[기억에 남는 대사]

 

로이 : "나는 맹세한 적이 없어. 맹세했을 때 손가락을 꼬았기 때문에 그 맹세는 무효야"

 

진지한 상황에서 터지는 이런 유머는 정말 최고다!^^

 

왜 이 영화가 메이저에 안 걸리는 거지? 걸리면 대박날 거 같은데...

 

 

[검색하다 발견한 참고자료들]

 

영화 '더 폴'의 촬영지, 인도의 블루시티 조드푸르


씨네21 (영화를 보신 분이라면 꼭 읽어보세요!) 

 

타셈 싱 감독의 뮤직비디오 모음

 

더 폴의 촬영지1

 

더 폴의 촬영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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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11 23:22 2009/01/11 2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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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Man from Earth

from 잡기장 2009/01/11 13:07


♪ 'Forever', Chantelle Duncun ♪

 

만사천년을 살아온 크로마뇽이 있다.

 

그는 신기하게도 성인이 된 이후 늙지 않았기에 동료들로부터 때론 추앙받기도 하고, 때론 사탄으로 몰리기도 하였으나 어떤 경우에도 그는 한 곳에 오래 머무를 수가 없었다.

 

빙하기가 지나고 지구가 점차 따뜻해지자 그는 해가 뜨는 동쪽을 향해 길고 긴 여행을 시작하였고, 새로운 부족과 문명을 만나면 한동안 거기에 합류해 살곤 하였다. 그러다 사람들이 유독 그만 늙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릴 즈음이 되면 그는 홀연히 떠나곤 하였다. 그는 질병에 걸려 여러번 죽을 고비에 처했으나 용케 살아남았다.

 

세월이 흘러 도시국가가 형성되면서 이동이 자유롭지 못하게 되었다.

국가 간 경계가 뚜렷하게 되면서 이동에 제약을 받게 되고 새로운 도시에서 그는 이방인으로 배척받거나 심지어 스파이로 오인받기도 하였다. 그는 몇 번이나 적응에 실패하게 되자 결국 도시국가를 떠나 원시부족사회로 돌아갔으나 그곳에서도 그리 오래 생활하지 못하였고, 결국 다시 동쪽으로의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현재 인도라 불리는 곳에 도달한 그는 당시 활동하던 부처의 소식을 듣고 그를 찾아가 가르침을 구하게 된다. 부처의 제자가 되어 크게 깨달은 그는 다시 서쪽으로 발길을 돌려 사람들에게 부처의 가르침을 전파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그는 동양에서 배운 의술을 활용하여 병자들을 고치고 사람들이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가르침을 전파하며 로마의 지배하에 있는 지역에서 활동한다.

 

그를 따르는 추종자들이 점점 늘어나고 명성이 커지자 로마는 그를 국민들을 선동했다는 이유로 박해하기 시작하였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그는 다시 떠나기로 마음 먹고, 동양에서 익힌 운신법을 활용하여 심장박동을 일시적으로 줄여 사람들이 그가 죽었다고 믿게 만들었다. 그러곤 사람들이 잠든 틈을 이용하여 빠져나오려 하였다. 그의 무덤을 지키던 추종자 몇몇은 죽었던 그가 걸어나가는 모습을 보았고, 그는 사람들에 의해 부활한 신의 아들이라 칭해지며 전설이 되었다.

 

그는 그곳을 떠났지만 그의 가르침은 신화와 결합, 종교화 되어 2천년동안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종교로 자리잡게 된다. 그는 자신이 훗날 예수라 칭해지며 자신이 전파하고자 한 가르침은 왜곡되고, 수많은 신화와 이권으로 점철된 조직이 세상을 지배하는 모습을 목도하게 된다.

 

그는 그 후에도 좀 더 세련된 방식으로 새로운 사회에 적응하며, 그가 늙지 않는다는 것을 주위에서 알아차릴 즈음 새로운 곳으로 떠나는 일을 반복하며 살아가고 있다.

 



영화 'Man from Earth(2007)'의 줄거리를 재구성한 것이다.

 

영화는 1시간 반 동안 각계의 전문가들이 이사를 떠나는 한 교수의 집안에 모여 떠드는 내용이 전부이다. 그러면서도 전혀 지루하지 않은 영화로 강추!!

 

원시인이 죽지 않고 살아온 것이 사실인가를 공방하는 내용이 주를 이루지만 단연 하이라이트는 예수에 관한 부분이다. 주인공이 자신을 예수였다고 밝히며, 현재 전파되고 있는 대부분의 신화들은 구라이며 왜곡된 것이라고 말한다. 독실한 신앙심을 가졌던 신학교수는 엄청난 혼란과 분노를 느끼며 그가 예수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부정한다. 최근 어머니께서 열심히 예수를 믿음으로써 행복을 되찾는 것을 봤던지라 종교에 대해 관심이 어느때보다 증가되어 있었던 나는 이 장면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나는 왜 신학교수의 혼란과 부정에 거부감이 들었을까?

 

거의 모든 종교는 믿음에 바탕을 두고 있으나

믿음은 진실과는 별개의 영역이다.

 

믿음은 경전에 기록된 사실에 기반해서 형성되는 듯 하지만 실은 믿음을 위해 기록이 사용되어 진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일단 믿음이 만들어지고 나면 사실이 진실인지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믿음은 없는 것도 만들어 낼 수 있고, 옳고 그름에 상관없이 자신의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해주는 강력한 도구가 된다. 나아가 믿음은 신앙의 시작이 된 토템사회부터 현재의 소위 문명사회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강력한 통치수단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나는 믿음하면 십자군전쟁이 떠오르고, 히틀러와 일본 전체주의가 떠오르고,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 떠오른다. 믿음에 기반하여 보면 모든 폭력은 정당하지 않은 것이 없게 되어버린다. 믿음(정확히는 종교)에 거부감을 가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믿음은 그 위험성 만큼이나 무척 매력적인 존재라는 것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어머니는 믿음을 통해 암치료를 편안한 마음으로 극복하였으며 부정적인 삶이 긍정적으로 바뀌었다. 어머니의 변화를 통해 가정은 화목하게 바뀌었고, 행복함이 넘치게 되었다.

 

나는 어머니를 보면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본질은 결국 자신을 내려놓고, 남을 생각하는, 다시 말해 욕망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이타적 행위를 통해 행복을 공유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런 종교인만 있다면 세상이 어지러울 이유는 없다.

 

결국 믿음이 갖는 강력한 긍적적 효용성을 고려한다면 '어떤 믿음이어야 하는가' 라는 원론적인 문제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나아가 믿음이 행복을 위한 순수한 도구로 사용된다면 행복을 위해 굳이 믿음만이 전부가 아닐 수도 있다.

 

대부분의 종교가 신을 철저히 믿고, 그 신의 말씀에 충실히 따름으로서 행복을 추구한다고 본다면, 불교는 부처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자신의 내면을 변화시킴으로서 행복의 가능성을 발견하는 것이다.

 

행복을 느끼는 행위는 비슷한 모습으로 구현되지만, 그걸 위해 사용되는 엔진은 '믿음'과 '성찰'이라는 아주 커다란 차이가 있는 것이다.

 

나는 믿음에 나를 내던질 준비는 되어 있지 않으므로, 불교를 택하였다.

 

 

믿음은 빠르지만 위험하나

성찰은 느리지만 안전하다.

 

나는 성찰을 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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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11 13:07 2009/01/11 1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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