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머 한 토막

from The Ticklish Subject 2007/02/11 19:56

요즘은 맡은 일이 너무 바빠 일주일에 책 한 권 보기도 쉽지 않다. 공부를 업으로 삼은 사람이 책 보기가 쉽지 않을 정도라면 블로그나 웹서핑을 할 여유가 없는 건 당연지사.(그러고보니 진보네 블로그도 한 달 만에 포스팅이구나!! 아.. 이 게으름뱅이.-.-;)

 

원래 책을 읽고 그 책의 저자와 대화하는 방식으로 생각을 정리해 나가는 걸 가장 좋아하지만, 사실 생각의 끈이 꼭 책을 통해서만 뻗어나가는 건 아니다. 오히려 때때로 예상치 못한 곳에서의 자극이 이런저런 생각들의 실마리를 풀어줄 때가 있다.(특히 요즘처럼 책을 통한 외부자극이 거의 없는 경우는 더더욱 그렇다) 

 

심지어 어제는 지하철에 버려진 스포츠 신문을 하릴없이 뒤적이다 발견한 썰렁한 유머 한 토막이 이런 저런 생각할 꺼리를 던져주기도 했다.

 

유머의 내용은 대충 이렇다.

 

<별자리를 맹신하는 A씨가 있었다.

하루는 A씨의 그런 모습을 어리석다고 생각하는 한 사람이 그에게 나무라듯 물었다.

"그러니까 당신은 별자리 같은 걸 믿는단 말이지요?"

 

그러나 A가 대답했다. "아! 아니에요. 전 별자리 같은 건 잘 믿지 않아요."

그리고 덧붙였다. "원래 염소자리는 의심이 많은 성격이거든요.">

 



이 농담이 현대사회에서 이데올로기가 작동하는 방식, 그리고 그것의 폐쇄성과 순환성, 포괄성을 압축적이고도 유머러스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었다.

 

최근에 꼼꼼히 다시 보고 있는 지젝Slavoj Zizek의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2001, 인간사랑)에서, 지젝은 "이데올로기가 경험에 의해 반박될 수 없다"는 명제를 증명하기 위해 반유대주의를 예로 든다.

만약 "유대인은 모두 나쁘다"는 나치의 선전과는 달리, 우리 주변에 좋은 유대인들이 존재한다면? 만약 그렇다면 반유대주의 이데올로기는 대중들로부터 신뢰를 잃게 될까? 지젝의 대답은 "No"다.

만약 이런 경험을 통해 반유대주의 이데올로기가 반박된다면, 그것은 그 이데올로기의 허약함을 말해줄 뿐이다. 만약 진정으로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주체라면, 착한 유대인을 만났을 때 이렇게 생각하게 된다. "그래, 저런 겉과 속이 다른 모습이야말로, 교활한 유대인들의 전형적인 특징이지."

 

이 책에서 지젝이 예로 들고 있는 반유대주의의 논의도 충분히 재밌지만, 아마도 지젝이 위의 유머를 알았으면 (유머를 좋아하는 지젝의 성격 상) 저 유머를 논거로 삼아 논지를 전개하지 않았을까?

 

아무튼 여기서 논의의 핵심은, 성공적인 이데올로기는 자신과 대립되는 사실/경험/의미마저도 자신의 의미 체계내로 흡수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진정으로 무서운 이데올로기는, 자신에게 적대적인 대상을 내치는 혹은 배제하는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이렇게 자신과 대립되는 경험과 대상마저 포섭하면서 닫혀진 형태로, 순환적인 형태로 작동하는 이데올로기이다.

위의 예로 든 농담에서 별자리를 이데올로기로 대체한다면, A는 완전히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있는 주체이다. 그는 자신이 이데올로기(별자리)를 믿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지만(혹은 그 이데올로기와 거리를 두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결국에는 이러한 거리두기 혹은 불신(不信)을 기존의 이데올로적 틀 속에서 해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래 전에 읽어서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역시 <신화론>(문예출판사, 1996?)에서 비슷한 얘기를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신화는 언제나 자신에 반대되는 저항조차 신화의 틀 속에서 의미화시킬 수 있다"였던가?(지금 책이 옆에 없으므로 정확한 인용은 불가능하다.) 즉, 신화의 완성은 자신의 적을 일방적으로 탄압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적마저도 신화 속에 자리잡을 수 있도록 그의 자리를 마련해줄 때, 비로소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현대 자본주의에서 어떤 사람들은 이제 이데올로기의 세상은 끝났다고 말하고, 어떤 이들은 이데올로기의 종언을 외치는 사람들이야 말로 이데올로기적이라고 말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두 논의에서 지나칠 수 있는 핵심은 "'어떤' 이데올로기인가?"라는 질문이다. 만약 이들이 말하는 "이데올로기"가 자신의 적들을 일방적으로 배제하고 탄압하는 형태의 것이라면(과거 한국 사회에서 "반공 이데올로기"가 작동했던 방식의), 그런 이데올로기는 점차 대중의 신뢰를 잃어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제 '대중적인' 수준의 소양을 갖춘 사람이라면, 반공 이데올로기식의 공격성과 배타성을 질타하고 '똘레랑스'를 외칠 정도의 양식은 갖추고 있다. 그리고 이데올로기에 대한 맹목적 순종과 동조가 불러올 위험성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앞서 말한 바르뜨 식의 '신화'는? 예컨대, '자본주의'라는 우리 공통의 신화는 어떨까? 과거 맹목적 순종을 강요했던 이데올로기가 쇠퇴한 빈 자리는 오늘날 '성숙한' 이데올로기가 대체하고 있다. 과거 반공주의가 공산주의를 없애야할 '적'으로 규정하고 공격했다면, 오늘날 공식적 지식 체계는 "공산주의 덕분에 자본주의의 문제점들이 교정될 수 있었다"면서 과거 자신의 적이 가진 '의미'를 인정하는 형태로 '자본주의'의 신화를 완성한다. '성숙한' 이데올로기가 자신에 대한 저항을 내부로 포섭-의미화시킴으로써 작동한다면, 오늘날 우리 사회는 그야 말로 '성숙한' 이데올로기에 의해 지배당하는 사회가 아닐까? 

 

얘기가 너무 거창해지고 있으니, 좀 더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자. 내가 보기에 오늘날 이데올로기의 전형적인 형태는, "내가 말하는 데로 따라라" 같은 일방적 명령의 형태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운동과 사회 갈등은 사회 발전의 원동력이 될 수 있다."는 사회교과서에서 혹은 "불만을 가진 자가 많은 조직이 성공한다"는 식의 경영서들에서 혹은 "규칙을 깨는 사람이 성공한다"는 식의 자기계발서 속에서 발견된다. 과거 반공규율사회에서 지배 체제가 불만과 갈등 자체를 봉합-배제하려고 했다면, 오늘날 후기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는 이러한 불만과 갈등, 저항에 발전의 원동력이라는 의미를 부여한다. 너희들의 불만-갈등-저항은 우리 사회의 발전의 원동력이 되고, 혁신의 기반이 되고, 경쟁력을 붇독아주고, 민주주의를 발전시키고 등등등...

이러한 후기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적 담론 속에서 '우리 사회'의 의미와 그것의 '발전'이라는 대 전제는 당연히 의심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결국 자신의 적마저 내부에서 의미화시키는 신화가 완성되는 것이다.

 

 

얼마 전, <체 게바라 평전>이 "비지니스맨들이 자기계발을 위해 읽어야 할 책 10선"에 선정되었다는 뉴스를 접했다. 이 아이러니한 모습은 후기자본주의 신화적 성격을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아닐까? 후기자본주의의 신화는 자신에 저항했던 이들에게마저, 신화 속의 한 자리를 마련해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A씨에 관련된 유머와 체 게바라 평전에 관한 뉴스가 자꾸 오버랩되는 이유는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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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2/11 19:56 2007/02/11 19: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