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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자도 미국인 … 한국이 나서면 곤란"


[중앙일보 2007-04-19 06:01]


[중앙일보 정용환] "깊은 애도와 조의를 표한다. 조문사절단 구성을 검토하고 있다. 언제쯤 가면 되나."(정부 당국자)

"그럴 필요 없다. 한국계 이민자가 사고 낸 거지 한국이 사고 낸 게 아니다. 모국이 상황에 끼어드는 것은 좋지 않다."(미 국무부 당국자)

18일 새벽 정부 당국자와 미 국무부 담당자 간에 이뤄진 대화다. 청와대와 정부 관련 부처는 버지니아공대 총격 사건의 범인이 한국계로 밝혀진 뒤 정부 차원의 조문사절단을 보내는 방안을 적극 검토했다. 다양한 외교채널로 의사 타진을 했다. 하지만 미국 당국자들은 "미국 문화와 국민 정서상 적절치 않다"는 이유로 조문사절단 파견 제안을 고사했다.


정부 당국자와 미 백악관.국무부 한국 담당자들 간의 대화 내용을 재구성했다.

-한국 정부의 우려가 심각하다.

"미국은 다민족.다인종으로 이뤄진 국가다. 그런데 모국이 나서 책임을 통감한다, 자성한다는 반응을 보이면 미국 정부로선 난감하다."

-왜 그런가.

"각지에서 미국으로 이민을 왔더라도 미국 영토에 뿌리를 내리고 삶의 터전을 닦으면 그들은 모두 미국민이다. 수많은 민족이 미국이라는 용광로에 흘러들어 온다. 그들은 이 용광로에서 녹아 미국인이 된다."

-그래도 정부 차원의 조문이 여론 악화를 막는 길 아닌가.

"각 민족끼리 배타적인 집단을 이루면 사회.국민 통합에 걸림돌이 되는 경우가 있지 않은가. 모국이 나서면 그런 경향이 생긴다. 한국계 이민자가 사고를 친 것이지 한국이 저지른 범죄가 아니다. 이게 핵심이다. 미국 사회의 문제다. 한국 정부가 개입하는 인상이 퍼지면 곤란하다는 게 미국 정부의 입장이다."

정부는 미국 당국자들과의 이런 협의 결과를 토대로 조문사절단을 파견치 않기로 결정했다. 민족적 코드가 강한 한국 정부와 다민족 국가인 미국 정부의 시각 차를 확인하고 내린 결론이다.

정부는 한국계 범인이 저지른 행동에 책임감을 느껴 조문사절단 파견을 제의했다. 그러나 미국은 영주권자가 저지른 국내 문제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이는 미국을 이해할 수 있는 '코드'라는 게 정부 당국자들의 공통된 견해다.

윌리엄 스탠턴 주한 미국 부대사는 이날 열린우리당 유재건.이은영.서혜석 의원과 만나 "양국 관계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라며 "이번 사건은 개인적 사건이지 국가적 문제도, 양국 간 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일도, 인종적 이슈도 아니고 그래서도 안 된다"고 강조했다.

이에 따라 정부는 국가 대 국가 차원에서 다룰 문제가 아니라 가급적이면 조용히 민간 차원에서 후속 대책을 마련해 가기로 가닥을 잡았다.

정부는 정치권 차원의 조문사절단을 보내는 방안에 대해서도 역효과가 있을 것으로 판단해 자제해 줄 것을 요청했다. 외교부는 특히 이태식 주미 대사가 제안한 '32일간 금식' 방안도 "불필요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며 신중히 재검토하라고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노무현 대통령은 이날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에게 위로 전문을 보냈다. 송민순 외교부 장관은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에게 위로 서신을, 윤병세 청와대 안보수석은 미국 측 파트너인 잭 크라우치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부보좌관에게 애도의 뜻을 전했다.

정용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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