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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례문 단상, 절망 타령 이제 그만.

숭례문은 역사의 굴곡과 함께 회한이 서린 상징물.

화제로 누각만 무너진것, 기능적 형태 아직도 건제해, 복구에 아무 문제 없어.



숭례문이 화재로 소실된 것을 놓고, 언론은 "크게 훼손됐다", "완전 전소됐다." , "숭례문 전소와 함께 우리의 문화적 자존심도 함께 무너져내렸다."고 한다.

 2일 10일 오후 8시 40분쯤 숭례문 현판 좌측 부분에 방화로 추정되는 불길로 시작된 숭례문 누각 화재는 진화된 듯 보였지만, 재 발화돼 오후 11시경 불길은 더욱 거세지다 새벽 2시경, 화재발생 5시간여만에 숭례문 누각은 완전 전소.붕괴되었다.

당시 숭례문에는 사설 경비 시스템이 되어 있던 상태였는데, 그 사설 시스템이 허술하기 짝이 없었고, 중요 문화재라면 사복경비 몇 명쯤은 배치해 두었어야 했는데, 이마저도 갖추어지지 않았다.
또한 업친데덥친격으로 화재 진압 당시 1차 진압시 진화된 걸로 소방원도 안심하다 누각 구조상 재발화 가능성이 있었던바, 그 안심이 방심이 될 줄이야 누가 알았을까마는.. 홀연히 더 큰 재발화로 이어지는 등 소방원들도 속수무책으로 당한것이던 것이었다.

숭례문 사건에 대해 숭례문 개방은 바람직했으나, 너무 경비가 되어있지 않아 이런 일이 발생했으니 사후 이런 일이 없도록 잘 복원 후 안전.재방지 시스템을 갖추어야할것이다.

또한 숭례문 사건을 통해 숭례문을 재조명해보고 국보 1호라는 숭례문에 관해 허와실이 있다면 과연 무엇인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겠다.

왠 허와실인가 할지모르나, 나쁜 뜻의 허가 아닌 예전부터 어떤 허실이 존재해왔으니 좀 되짚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숭례문, 역사의 굴곡과 함께 민초의 눈물과 회한이 서린 상징물

숭례문은 국보1호의 가치만큼 역사가 가장 오래된 사대문중의 하나이고 아주 오래된 건축문중의 하나이며, 그 누각 건축물 형식 또한 뛰어 난다고 한다.

그럼, 그리 오래 보존되도록 거져 지어졌으며, 그 건축물이 거져 뛰어나게 지었졌는지, 당시 역사 기록물.야사 등을 더듬어보면 결코 그렇지 않았다.

강제노역 동원이라는 백성들의 고혈과 땀이 어린 건축물이었다.

즉 숭례문 건축은 1396년(태조 5)에 창건되어, 반세기 뒤 세종 29년(1447)에 영문도 모른 채 강제동원된 전라도 완주의 목수와 석수 등 인부 6천8백 명에 의해 10개월에 걸쳐 더 크게 새로 지었졌다.  이후 성종 10년(1479)과 고종 때도 백성들이 강제동원 되어 크게 보수 공사됐다.

당시 백성들에게 부역비라도 제대로 주고 공사에 참여케 하면 좋겠는데, 그것이 아니고 하여 "누각 복원.확장 공사하는것 하고 숭례문 길 지나다니기만 하는 백성과 무슨 상관 있습니까? 누각 복원.확장 공사하시려거든 참여하는 백성에게 부역비 좀 제대로 주시소!"하고 유생들도 밀어부치기식 숭례문 재공사에 불만을 표시했다고 한다.

 

한편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숭례문은 한일 양군의 첫 전장이라는 아픔을 격는다. 1907년 8월 조선 군대가 강제해산 당하자 조선 군인들은 무기를 탈취해 일본군을 공격했다. 그러자 일본군은 숭례문 벽 위에 기관총 2문을 설치하여 조선군을 사살했고, 두 달 뒤 일본은 황태자의 서울 방문을 빌미로 철거를 시도했지만, 조선의 민중들이 크게 들고 일어나 이를 막아냈다.

 

그 후 어느덧 숭례문은 친일 색채 형식의 건축물로 둘러 쌓이기 시작했다. 일례로 숭례문의 보호석축은 안쪽으로 완만한 곡선인 일본식으로, 지면과 수직으로 쌓아 올리는 우리의 전통 석축법과는 달리하고 있다.

이번 화재가 아니어도 숭례문은 일제의 수탈과 6.25 전쟁 등으로 이미 옛 것의 아름다움을 잃어버린 지 오래 돼 버린 것이다.

이렇듯 숭례문은 560년 넘게 웅장한 모습을 지탱해온 한국인의 자존심일뿐아니라, 우리 역사의 굴곡과 함께 우리 백성의 눈물과 회한이 서린 상징물이다.

어찌됐든 숭례문 복원에 있어 정통성 문양과 경건성을 한층 고려해야 할 부분이라 하겠다.



숭례문, 누각만 완전 전소된 것이고 기능적 형태 아직도 건제하다.

숭례문이 화재로 소실된 것을 놓고, 언론은 "크게 훼손됐다", "완전 전소됐다." 고 하지만, 필자는 이에 부분 동감할 뿐 전적으로 동감하기 어렵다.

미루어 짐작할 수 있듯이, 누각이 크게 훼손됐고, 누각이 완전 전소된 것이지, 숭례문 중앙 통로가 어찌어찌된것은 아니고 숭례문 통로와 외각은 건제하기 때문이다.

단 통로 기능성은 재구실을 하지만 디자인성이 결여된 격이 되었기에 인데, 현제는 관광 수입을 위해 디자인을 필연적으로 더욱 중요시 되게 되어 언론도 저들 난리법석인것이리라.

 

 

숭례문, 복원에 대한 당부에 이어, 회의와 불신 정부가 나서 일소해야 한다.

숭례문 복원에 있어 수백억의 예산이 소요될 거라고 한다.

숭례문, 복원에 대해 대부분 동의하는 민심인 듯 하나 아니 그러한 측면도 있다.

예로 그 주위를 자주 지나는 어떤 생업형 운전자의 경우, 그 숭례문은 도로 교통에 유독 장애가 될 뿐 생활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으니, 차리리 그 숭례문 교통 번잡하지 않는 곳으로 확 이전했으며 좋겠다고 하는 다른 생각의 사람들도 있다.

참 그런 분들의 바램에 문뜻 생각나는게 있는데, 이번 당선된 이명박 차기정부는 유류세 인하케 하겠다고 약속했는데, 그 약속 빨리 지켜주었으면 좋겠다.

 그 주위를 지나는 생계형 운전자들 그 숭례문으로 인해 운전거리가 족히 수백미터 이상 증가 된 체로 여태 다녔을 터인데, 그 주위를 몇 번 이상 왕복하게 되면 벌써 1킬로미터가 증가한 셈이고 월 25일 기준으로 1년을 따지면 300킬로미터 정도를 더 달린 셈이다.

여지껏 그런 수고를 감뇌함은 국보 문화재이고 관광상품인지라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그리 협조해준것이리라. 그러나 세상일은 아무리 나랏님의 일이라도 꽁짜가 없는 것이다.

또한 운전자들이 이런 수고를 감수하고 다니던 곳이 이곳뿐이던가? 교통 선진시스템이라는 명목으로 일방통행 활성화로 바로 백미터이면 될 것을 5백미터 이상 돌아서 와야 하는 경우나, 문화재 보호가 아닌 자연보호라는 명목으로 돌아다녀야 하는 청성산 주위도로 등 찾아보면 종종 있다. 이렇게 계산해보면 더러는 운전거리의 몇 퍼센트 이상에 포함되는 사례도 있을지경이다. 이렇듯 유류세 인하에 있어 국민들이 거저 인하해 달라는 예기가 아닌 것이다.

또한 숭례문 화재의 이유중 하나가 정부가 숭례문 보존에 있어 돈이 되지 않는듯해 방치한 결과의 한 산물이 아닌지 하여, 차라리 복원 사업 짚어치우라는 여론이다.

 

이거 어떻게 보면 국민의 혈세인데, 회의감이 들기는 하나 복원이나 잘하길 바란다는 여론에는, 국민들 대다수가 그 혈세를 투입한 만큼 제대로 지어내 보존해주길 바라는 충고어린 당부가 석여있듯이 잘 사태가 마무리 되었으면 좋겠다.

 

또한 국민들은 앞으로 숭례문을 관광할 때 히히낙락하는 모습보다 경건한 마음으로 관광에 임해야 한다는 생각이 된다.

 

 

(memo : 본 기고문은 공공노조 이정호님의 칼럼을 일부 참조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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