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김형숙의 세월호 증언 2 – 차라리 남편이 입원해 있는 게 좋았다.


이번 모임에서는 김동수씨가 자해를 하며 매우 심각한 상황으로 치닫는 과정에서 그들 돌봐야했던 가족들의 고통에 대한 얘기가 이어졌습니다. 김형숙씨는 애써 덤덤하게 얘기를 해나가려했지만 당시 일들을 떠올리면서는 감정이 춤을 춰서 눈물을 흘리기도 했습니다.


먼저 김형숙씨는 세월호 사고 이전의 남편이 어떠했는지에 대해 얘기했다.
처음 결혼을 했을 때 김동수는 시댁 어머니에게 최신식 세탁기와 냉장고를 사드렸다고 한다. 당시 자신들의 신혼살림에는 없는 고가의 가전제품이었다. 그런 효성스러운 남편의 모습이 솔직히 힘들기도 했다고 김형숙은 얘기했다.
또 김동수는 지나치게 정직해서 융통성을 찾아볼 수 없었다. 활어장사를 하면서도 10~20g의 차이는 적당히 넘어갈수도 있는데 김동수는 그것까지 꼼꼼하게 계산해서 정확한 가격을 받았다. 그런 남편의 꽉 막힌 모습에 싸우기도 많이 했는데, 세월호 사고 이후에는 그런 성격 때문에 정직하지 못한 세상사람들을 용납하지 못해 더 힘들어지기도 했다.
그리고 김동수는 성격이 무척 급하다. 무슨 일을 하나 하더라도 차분하게 천천히 하지 않고 혼자서 후다닥 처리하려고 한다. 그러다보니 관료사회의 무사안일과 행정적 지연 등을 참지 못해 충돌로 이어지곤 했던 것이다.


2015년 3월 19일 저녁 김형숙은 논술지도수업을 하고 있었다.
수업을 마치면 남편이 차를 몰고 데리러 오기로 했는데 오지 않아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를 않았다. 그래서 집에 있는 큰딸에게 전화를 했는데 “방에 휴대폰 있는데... 엄마 잠깐만...”하고는 기다리는데 전화가 끊겼다. 잠시 후 큰딸이 당황하는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와 “아빠가 화장실에 있는데 피를 많이 흘리고 있어”라는 얘기를 전한다.
가슴이 철렁하고 내려앉은 김형숙은 집까지 1km정도 되는 거리를 걸어오는 발걸음이 얼마나 무거웠는지 모른다. 그렇게 20분 정도 걸어 집으로 왔더니 큰딸은 무서워서 화장실에 들어가지 못한채 엄마를 기디라고 있고, 화장실에는 피를 흘리고 있는 남편이 망연자실한 모습으로 주저앉아있었다.


급하게 119구급차를 타고 병원에 갔더니 병원에는 이미 소방서로부터 연락을 받은 기자들이 몰려와 있었다. 그리고 그날 뉴스에 김동수의 자해소식이 전해지면서 여기저기서 무수한 전화들이 쏟아지며 정신이 없었다.
김형숙은 “사고 직후에 ‘세월호 의인’이니 뭐지 하면서 잠시 관심을 가져주다가 점점 잊혀지기 시작했는데, 자해를 하니까 다시 이렇게 관심이 쏟아지는 상황이 놀라웠다. 이런 극단적 선택을 해야 세상사람들이 관심을 가져주는구나 하고 생각했다”며 당시 심정을 얘기했다. 그래도 다시 사람들이 찾아오기 시작하면서 남편이 조금은 안정이 되는 것처럼 보여서 마음은 편안해졌다.


하지만 남편의 상태는 그후로 점점 악화되어 가기만 했다.
휴대폰을 새로하면서 대리점측과 요금문제로 실랑이가 벌어졌는데 상대측에서 다소 거친 표현을 한 것에 대해 화가 난 김동수는 해당 휴대폰 지점을 찾아갔다. 그곳에서 다시 실랑이를 벌이는 가운데 격분한 김동수가 이마로 탁자 유리를 깨고 유리조각을 손에 들어 자신의 목에 갔다댔다. 돌박적인 상황에 모두가 당황했다. 그 상황이 너무나 무서웠던 김형숙은 “그때 동수씨 이미가 생각 외로 멀쩡했다. 그런데 차라리 피라도 엄청 흘려서 구급차를 불러 그 상황을 끝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심정을 얘기했다.
김형숙 혼자 힘으로 제지가 힘들어 급하게 김동수의 형에게 와달라고 부탁했더니 형이 달려왔다. 평소 나이 차가 많이 나는 형을 어려워했던 김동수는 형의 말류에도 쉽게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그런 김동수의 모습을 보며 형제들도 김동수의 상태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알게됐고, 조심스럽게 정신병원에 강제입원 하는 얘기가 나올 정도였다. 그러나 김형숙은 정신병원 입원에 대해서는 도저히 결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차를 운전하고 가다가도 옆 차량이 양보를 하지 않으면 그 차를 쫓아가서 강하게 항의하는 상황도 자주 일어났다. 그때마다 남편을 달래려고 하면 남편은 그런 부인에게 격한 감정들을 마구 쏟아내기 일쑤였다. 화를 낼 때마다 남편의 눈빛이 달라져서 너무 무서웠다.
그래서 차를 운전할 때면 김형숙이 운전대를 잡았는데, 조수석에 앉은 남편은 이런저런 잔소리들을 너무 많이 해대서 그것 또한 엄청난 스트레스였다.
저녁에 남편이 약을 먹고 잠들면 “내가 뭘 잘못했길래 이런 게 모두 나한테 오는 거지?”라는 생각이 수시로 밀려왔다.


그런 살얼음판 같은 나날이 이어지는 가운데 서울에서 세월호 청문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참석하게 된다. 2015년 12월 14일 청문회 장소에서 김동수는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억누르지 못해 또 한번 자해를 시도한다. (이에 대한 얘기는 시간관계로 다음 모임에서 듣기로 했습니다.)


2016년 4월 세월호 2주기를 앞두고 심란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딸이 있는 포항으로 갔다. 포항에서 우연히 세월호 추모행사에 참가하게 되고, 김동수가 생존자로서 발언도 하게 되면서 조금은 다행스럽게 2주기를 보냈다. 그리고 다음날인 4월 17일은 김형숙의 생일이라서 가족들이 조촐한 자리를 마련했는데, 그날도 남편이 차분해보여서 마음이 놓였다.
그렇게 포항에서의 시간을 보내고 4월 18일 제주로 내려왔다. 남편은 물리치료를 받으러가겠다고 병원으로 향하는데 평소와 달리 아내가 사라지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도 하는 등 약간 찜찜한 구석이 있었다.
그래도 포항에서 차분한 상태로 돌아온 것에 안도하며 일을 하고 있었는데 도청에 있는 조카에게서 남편이 자해를 해서 병원으로 실려갔다는 연락을 받는다. 헐레벌떡 병원으로 달려갔더니 병원에는 도청과 시청 관계자들이 우르르 몰려와 있었고, 남편은 붕대를 두른 모습으로 누워있었다. 그날 그 소식을 듣고 안산에서 내려온 4.16합창단이 김동수를 위한 작은 공연을 열어주기도 하면서 놀란 마음을 위로해주기도 했다.
다음날 다시 차분해진 남편 옆에서 책을 읽어주고 있는데 그 책 내용 중에 세월호 사건과 관련해서 사실과 다른 부분이 나오자 다시 김동수가 심하게 흥분하기 시작했다. 그 책을 찢어버리고 창밖으로 뛰어내리겠다는 남편을 겨우 진정시켰다.


이런 과정들이 계속 이어지면서 너무 힘들어지자 가족들도 지쳐갔다.
아빠를 계속 지켜보던 큰딸이 “아빠가 너무 외로운 것 같다”고 얘기하자 김형숙은 토요일만이라도 남편과 함께 시간을 보내려고 논술지도교사를 그만둔다. 정든 아이들을 정리하는 것도 쉽지 않았고, 집안 생계문제도 고민스러웠지만 남편의 건강이 우선이었다. 그래서 매주 주말은 남편과 함께 시간을 보내게됐는데 그것 역시 만만치 않은 스트레스였다.
나중에는 자신의 감정을 잘 드러내는 않는 큰딸마저 “아빠가 너무 무섭고 힘들어서 감당하지 못하겠다”며 속내를 털어놓기도 했다.
김형숙도 “솔직히 죽지만 않을 정도로 해서 의식이 없는 상태로 입원해줬으면 하는 생각을 많이했다. 차라리 입원해 있을 때가 마음은 편안했다”고 속마음을 털어놨다.


그렇게 고통의 시간이 길어지면서 김형숙은 점점 피폐해져갔다.
“나와 같은 고통을 서로 얘기하고 위로해줄 사람이 주위에 없다는 사실이 너무 힘들었다.”
“주변을 둘러보면 모두가 나보다 행복한 사람들 뿐이었다. 심지어 암환자가 부러웠고, 세월호 유족들이 부러웠다. 그들은 이렇게 들쑥날쑥하는 사람을 옆에 끼고살면서 불안해하지는 않아도 되는거니까.”
“남편이랑 같이 죽어버릴까 하는 생각도 많이 했다.”


마음이 피폐해지면서는 세상사람들에 대한 마음의 문도 닫아버리기 시작했다.
“남편이 입원해 있을 때 병문안 와주는 분들에게 고마워해야 하는데 ‘누구 누구는 왜 오지 않는 거야?’라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항상 옆에서 도와주는 분들을 보면서도 ‘저 사람은 앞에서는 이렇게 얘기하면서 뒤에서는 다른 얘기를 하는 건 아닐까?’하고 의심도 많이 했다.”
“점점 내 자신이 이상해지고 있을 걸 나도 느끼고 있었고, 주위에서도 조심스럽게 얘기하곤 했다.”


너무 힘들어서 잠시라도 도망가고 싶었던 김형숙은 세종시에 가서 정부관계자를 만나고 오겠다는 명목으로 남편을 보호병동에 입원시키게 된다. 남편도 그런 부인의 마음을 이해해서 동의를 했다.
그렇게 남편과 함께 병원을 찾았는데 보호병동에는 이런저런 제약들이 너무 많았서 마음이 좋지 않았다. 괜찮다고 얘기하는 남편을 뒤로 하고 무거운 발걸음을 돌려 차를 타려고 하는데 마침 창문으로 손을 흔들고 있는 남편의 모습을 보게 됐다. 그 모습에 가슴이 울컥하고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독하게 마음을 먹고 돌아섰다. 저녁에 딸과 함께 칼국수를 먹는데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다. 밤에는 잠도 오지 않았다. 평소 술을 잘 먹지 못하는 김형숙은 그날 밤 맥주를 사다 마셔야했다.
다음날 아침에 병원을 찾았더니 남편은 그곳 생활에 적응을 하지 못해서 밥도 먹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미 잡혀진 일정이 있어서 비행기를 타고 세종시로 향했다. 그날 오후 병원측에서 전화가 왔다. “본인이 너무 못견뎌 하는 것 같다”는 얘기를 듣고 퇴원을 결정하게 된다. 아는 분에게 연락을 해서 퇴원수속을 부탁했고, 그날 저녁 집으로 돌아왔을 때 너무 밝은 표정으로 가족을 맞이하는 남편의 모습을 보며 만감이 교차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