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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닝, 이창동 영화가 관념의 세계로 들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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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동 영화에 대한 기대감이 영화가 나올 때마다 떨어지고 있어서
오래간만에 나온 새영화였는데도 크게 관심은 가지 않았다.
그런데도 개봉 첫날 극장을 찾은 이유는
요즘 너무 바빠서 잠시 숨을 돌리고 싶어서였고
볼만한 영화가 이 영화뿐이어서였다.
마침 칸에서 호평이 쏟아졌다는 기사들이 넘쳐나고 있어서
‘그래도 혹시나’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영화제 초반 기사들은 낚시인 경우가 많기에
별다른 기대없이 편안한 마음으로 극장을 찾았는데
주중 낮시간이었는데도 관객은 생각보다 많았다.


글이 시작부터 왜 이리 휑설수설하냐고?
솔직히 말하면
기대를 갖고보면 실망할 것 같아서 마음을 비우려고 했는데
살짝 기대를 갖고 극장으로 향했다는 말이다.
“이창동 영화니까!”


그렇게 영화가 시작됐다.
익숙한 유아인과 처음보는 여배우 전종서가 등장했다.
유아인의 연기력이야 두말할 필요가 없는데 전종서의 연기는 왠지 어색했다.
신인배우라서 그런가보다 생각했다.
오래간만에 만난 중학교 동창이 술을 한잔하는데 둘의 대화는 서로 엉키지 않고 겉돌았다.
이야기를 풀기 위한 감독의 의도적 설정이려니했다.
여자가 뜬금없이 아프리카로 가니까 고양이를 부탁한다고 했고
그래서 자기 자취방에 찾아온 남자와 갑자기 잠자리를 가져버렸다.
좀 당황스러운 설정이었지만 나중에 그 이유가 설명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영화는 어색하고 겉돌고 당황스럽게 출발했다.


그런데 내 기대와 달리 영화는 계속 어색하고 겉돌고 당황스럽게 이어졌다.
아프리카로 갔던 여자가 돌아오면서 새로운 남자가 등장했고
이들 셋의 관계 속에서 이야기가 이어지는데...
삼각관계를 그리는 것도 아니고
가치관의 차이와 충돌을 보여주는 것도 아니고
심리적 밀당과 서스펜스를 드러내는 것도 아니고
운명적 엇갈림이니 하는 식의 통속적인 것도 아니고
도대체가 뭘 얘기하려는 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난해하거나 복잡하지는 않은데 이야기의 줄기를 찾을 수가 없으니
관객은 지루해지기 시작했다.
곳곳에서 휴대폰을 들여다보는 불빛이 보였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고
영화가 중반을 넘어서도 그렇게 이어지자 참지못한 관객 한 명이 극장을 나가버렸다.
당황스러웠다.
“그래도 이창동 영화인데...”


영화는 뚝심있게 끝까지 그렇게 뚜벅뚜벅 걸어갔다.
후반부에 미스터리영화다운 긴장감을 보여주려고는 했지만
단서를 찾아가는 과정이 b급영화처럼 엉성하고
주인공들의 감정선이 움직이는 이유를 설명해주지 않아서 계속 당황스러웠고
뜬금없는 주변 가족들의 등장과 그들의 뜬금없는 행동에 어안이 벙벙했다.
마지막 장면에서 충분히 이유는 알수 있지만 감정적으로 일치하지 못하는
배우와 감독만 격렬한 장면이 보여졌다.
그리고 2시간 30분의 긴 러닝타임을 다 소화하고
갑자기 극장의 불이 켜치더니 엔딩크레딧이 올라갔다.
그런 식으로 영화가 끝나버리는게 허무하다는 생각보다는
드디어 영화가 끝났다는 반가움이 앞섰다.
“이게 이창동 영화라니...”


곰곰이 곱씹으면 배우들의 행동과 감정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바도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그런데 기존 이창동 영화와 달리 나를 당황스럽고 지루하게 만들었던 이유는
인물들이 놓인 사회적 배경과 사회적 관계들의 촘촘함이 너무 풀어져버렸기 때문이다.
그냥 전후맥락으로 추론하라는 식이다.
현실의 긴장력보다는 영화적 화법에 더 집중해버렸다.
사실주의 영화보다는 추상적 작가주의 영화에 더 가까워지는 그런 느낌이었다.


그러고보면 이창동의 이런 변화는 일관성이 있었다.
이창동 영화에 대한 얘기를 할 때마다 반복했던 얘기이기도 한데
‘초록물고기’에서 냉정한 세상에 정면으로 맞섰다가
‘박하사탕’에서 역사와 화해를 하고
‘오아시스’에서 소수자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화해를 하고
노무현 정권에서 신자유주의정책과 화해를 한 그는
이후 현실세계에서 조금씩 추상적 주제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밀양’에서는 종교와 구원에 대한 얘기를 하더니
‘시’에서는 시와 구도에 대한 얘기를 하더니
‘버닝’에서는 소설과 메타포에 대한 얘기를 꺼내들었다.
그러면서 점점 구체에서 추상으로 넘어갔고
그의 영화는 현실에서 벋어나 관념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영화를 보고나서 ‘버닝’이 무슨 뜻인지 궁금해서 검색을 해봤는데
역시나 무슨 말인지 잘 이해되지 않았다.
그리고 영화 대사 중에 ‘메타포’라는 단어가 등장해서
여자 주인공이 “메타포가 무슨 뜻이야?”라고 묻지만 설명해주지 않았다.
그래서 이 단어도 검색해봤는데
“행동, 개념, 물체 등이 지닌 특성을 그것과는 다르거나 상관없는 말로 대체하여, 간접적이며 암시적으로 나타내는 일”이라고 나와있었다.
그러고보니 이 영화는 메타포들의 향연이었나보다.


‘박쥐’를 보고 박찬욱 영화에 대한 기대를 버렸고
‘피에타’를 보고 김기덕 영화에 대한 기대를 버렸듯이
‘버닝’을 보고 이창동 영화에 대한 기대를 버리기로했다.
이제 혼자서 열심히 싸우고 있는 홍상수만 남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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