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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일, 타인의 고통을 대하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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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뒤숭숭한 일들이 연달아 생겨서 마음이 좀 불편했다.
그런 마음을 달래볼겸해서 영화를 보러갔다.
최근에 잘 만들어진 영화들이 몇 개 있다고 해서 뭘 볼까 고민을 하다가
‘생일’을 선택했다.
이유는 단 하나, 오래간만에 영화를 보며 울고 싶었다.


줄거리야 뻔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역시나 뻔했다.
아들을 잃고 버티듯이 그럭저럭 살아가는 부모는
다른 유가족들과도 거리를 두며 슬픔을 속으로 삼키며 살아간다.
그러다가 조금씩 유가족들과 어울리게 되고
그런 가운데 아들의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사람들이 모이고
그 과정에서 갈등이 생겼다가 생일잔치에서 그 모든 것이 용해되는 이야기였다.


익히 예상할 수 있었던 너무나 단순한 이야기여서
신파로 흐르지 않을까 걱정스러울 정도였다.
그런데 감독은 그 단순한 이야기를 너무도 조심스럽게 다루고 있었다.
배우들의 감정이 넘치지 않도록 절제하면서도
그들의 슬픔과 고통을 에둘러 표현하지 않고 그대로 보여준다.
이게 말이 쉽지 정말 어려운 일이다.
숨이 막힐 것 같은 그 고통을 그대로 드러내는데
얼마나 조심스러운지 관객들이 더 조심스러워진다.
차라리 신파로 흘러버렸으면 덜 힘들었을 것을
꾹꾹 참으면서 견뎌내는 감독의 노력이 눈물겨웠다.
충분히 울고싶은 마음의 준비를 하고 영화를 보고있는데
그리고 중간중간 자동으로 눈물이 글썽거려지는데
덤덤하게 그들의 얘기를 지켜보면서 점점 그들의 마음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렇게 극중 인물과 배우와 감독과 관객이 그 고통을 같이 호흡할 수 있었다.


그들의 고통을 같이 느끼면서 드디어 맞이한 생일잔치
예상했던대로 눈물바다가 됐다.
참아왔던 눈물이 홍수처럼 터져나오기도 하고
계속 훌쩍거렸던 눈물이 강물이 되어 줄줄 흘러내리기도 하고
가슴 속 응어리가 눈물과 함께 빠져나가 감정이 요동치기도 했다.
세상의 모든 고통을 다 뒤집어 쓴 것 같은 엄마 아빠만 그런게 아니고
자신과 같은 고통을 겪고 있기에 남일이 아닌 유가족만 그런게 아니고
살아남은 죄 때문에 자신의 고통을 제대로 얘기하지도 못하는 생존자만 그런게 아니고
너무 힘들어하는 어른들 앞에서 힘들다고 감히 말을 꺼내지 못하는 친구들만 그런게 아니고
옆에서 지켜보는 것 말고는 할수 있는게 별로 없어서 안타까움만 보듬는 이웃들만 그런게 아니고
어쩌면 제3자일수 있기에 모든 게 조심스러울 수 밖에 없는 자원봉사자들만 그런게 아니고
극중인물도, 배우도, 감독도, 관객도 모두가 같이 펑펑 울고 말았다.
주인공에 감정이입이 돼서 눈물을 흘리는 게 아니라
내가 그 생일잔치에 함께 자리하고 있기에 공감하면서 흘리는 눈물이었다.
나중에는 내 스스로 감정이 복받쳐올라서 꺼억꺼억거릴뻔 한 걸 애써 참아야했다.


화려하지 않은 두 시간짜리 영화가 금새 끝나버리고 앤딩크레딧이 올라가는데
사람들이 쉽게 자리를 뜨지 못했다.
모두가 나처럼 앤딩크레딧을 보면서 감정을 추스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들려오는 목소리는 하필 윤선애였다.
윤선애의 노래를 들으면서 또 울컥해지는 걸 진정시켰다.
앤딩크레딧이 다 끝나고 극장을 나서야 하는데도 감정이 정리되지 못해서
잠시 자리에 앉은 채 심호흡을 하고 나서야 자리에서 일어나 극장을 나섰다.
그리고 화장실로 가서 코를 풀고 세수를 하고 나서 밖으로 나왔다.


전도연은 ‘밀양’에서도 아들을 잃고 몸부림치는 엄마 역할을 했었다.
‘밀양’에서는 너무도 처절하게 몸부림치는 전도연의 모습이 아주 강렬했다.
그런데 ‘생일’에서는 그런 강렬한 에너지가 뿜어나오지 않았다.
연기가 부족했다거나 연출에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생일’은 ‘밀양’과 달리 자식 잃은 부모에 초점을 맞춘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부모를 중심으로 그 주위에 있는 여러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초점이 있었다.
당사자들만이 아니라 가족들, 이웃들, 유가족들, 아들 친구들, 봉사자들 모두의 고통을 담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속에서 그들도 서로 갈등하고 있었지만 서로가 서로를 살며시 보듬어주고 있었다.
아주 조심스럽게 다가섰다가 물러서기를 반복하면서 적당한 위치에서 서로를 위로하고 있었다.


감독이 이 영화를 만들며 얼마나 힘들었을지를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유가족과 생존자와 그 주변의 사람들의 얘기를 꼼꼼히 들으면서 힘들었을테고
그 모든 얘기를 하나로 엮어내면서 힘들었을테고
그렇게 엮어낸 것을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으면서 균형을 잡아가는 것이 힘들었을테고
그 과정에서 이런저런 요구와 우려들이 쏫아졌을텐데 그걸 오롯이 견뎌내는 것이 힘들었을테고
그 모든 걸 풀어가는 과정에서 자신의 욕심과도 싸워야 하는 것이 힘들었을텐데
그 힘겨움들을 이겨내면서 이렇게 좋은 영화를 만들어낸 것에 감격의 박수를 보낸다.


이 영화가 담아내지 못한 부분도 많을 것이다.
세월호 생존자의 얘기를 생생하게 들었던 나는 이 세상이 어떻게 그들에게 상처를 주고 있는지 알게 됐다.
그뿐 아니라 유가족들에 의해 상처받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도 알고 있다.
또한 생존자들이 또 다른 이들에게 상처를 주는 모습도 보아왔다.
그 모든 것들이 고통의 연쇄효과라면
이 영화는 타인의 고통을 어떻게 대해야하는 지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조심하고 또 조심스럽게
그러면서 내가 견뎌내야할 것은 견뎌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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