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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자 79회


1


만나는 사람 거의 없이 외진 곳에서 살아가다보면 사람들과 싸울 일이 별로 없습니다.
아버지와 의견 충돌로 목소리를 높이는 일이 가끔 있는 게 거의 전부이지요.
그런데 지난 일주일 사이에 두 번이나 핏대를 세우며 목소리를 높이고 말았습니다.


옆밭에서 진행되는 공사 때문에 스트레스가 높이졌는데 어느날 현장소장이 나타났습니다.
소장은 불편을 끼쳐서 미안하다며 굽신거리더니 경계에 담을 쌓는 일을 진행하는 것에 대한 동의를 물었습니다.
그거야 큰일이 아니어서 그러라고 했더니 포크레인으로 돌담을 허물며 밭 주변을 어지럽히고 몇 년간 만들어놓았던 거름도 치워버린 겁니다.
너무 어의가 없고 화가 나서 길길이 날뛰며 원상회복 하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잠시 후 연락을 받고 찾아온 마을이장의 중재로 문제는 원만하게 해결됐지만
돌담을 허물고 어지럽게 널부러진 상태로 주변을 방치해버려서 또 한번 마음을 들끓게 만들더군요.
현장 작업자에게 건의를 해봤지만 소장은 나타나지도 않았습니다.


그렇게 불편한 마음으로 감귤수확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상인과 가격협상을 마치고 사전출하를 위해 감귤을 조금씩 따서 건내고 있었는데
어리숙하게 행동하며 낮은 자세로 접근하던 상인이 자꾸 무게가 모자란다고 하는 겁니다.
처음에는 그러려니 하면서 저울에서 무게를 맞출 때 조금씩 더 넣어줬는데
자꾸 모자란다면서 저를 저울로 장난질치는 사람처럼 대하길래 또 길길이 날뛰어버렸습니다.
아버지의 중재로 서로가 의사소통하는 가운데 오해가 있었다는 식으로 적당히 무마하기는 했지만
상인은 약속한 대금을 제때에 지급하지 않는 등 계속 신경을 끓어대고 있습니다.


건설업자나 상인들을 대하다보면 이런 일들이 많이 일어나겠지만
거래관계로 살아본 경험이 별로 없는 저는 제 자존심을 건드리는 이런 일들을 참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10여 년 동안 외톨이로 살면서 온 신경이 고슴도치처럼 날카로워져 있는데...


인간이 인간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이 얼마나 사람을 피곤하게 만드는지를 실감하고 있습니다.
예전에 노동운동을 하면서도 정파주의로 인한 사람간의 불신이 얼마나 인간을 피폐화시키는지 몸서리치게 느꼈었는데
세상의 외진 곳까지 밀려오는 불신의 물결은 제 마음을 온통 흙탕물로 휘저어버렸습니다.


이런 일을 겪으면 인간에 대해 환멸이 느껴져서 세상에서 더 물러서고 싶어집니다.
그렇게 물러서다보면 저는 더욱 고립되고 날카로워져서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는 괴물이 되어간다는 걸 알기 때문에
명상을 하면서 출렁이는 마음을 애써 가라앉히려고 노력해봅니다.

 

2


최근에 제가 아는 두 분이 암투병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한 분은 10여 년 전에 간암을 이겨냈는데 최근에 대장암이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또 한 분은 전립선암이 전이 된 상태에서 수술 후 항암치료 중이라고 합니다.
대장암인 분은 자신의 치료 과정에 대해 항암일기를 써서 페이스북에 공개하시는데
힘들고 고통스럽지만 그 과정을 담담하게 이겨내려는 노력이 고스란히 느껴집니다.
전립선암인 분은 1년의 시한부선고를 받았다고 하는데
주위에서 안타까운 마음에 정을 모으려는 노력들이 보여서 살며시 마음을 적십니다.


상상하기 힘든 고통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분들의 얘기는 이런저런 것들을 생각하게 합니다.
주위에서 전해지는 안타까운 소식에 작은 마음을 보태려는 이들의 모습을 보며 세상을 살아가는 자세에 대해 새삼스럽게 생각해 보기도 합니다.
특히 항암일기를 읽으면서는 자신의 고통에 짖눌리지 않고 의연하게 대하려는 모습에 경건함을 느끼게까지 합니다.
그 글을 읽으면서 느끼는 건 ‘평상시 삶의 태도가 어떻느냐에 따라 극단적 상황에서 삶을 대하는 자세가 달라진다’는 점입니다.


페이스북에서 항암일기를 보고나서 ‘좋아요’를 누르고
모금을 제안하는 글을 보고 얼마의 돈을 송금하고 나서
제 마음을 들여다 봅니다.


한 분은 제가 삶의 구렁텅이에 빠져서 허우적거릴 때 도움을 요청했는데 몇가지 형식적인 대답만 해주시고는 돌아서버린 분이고
또 한 분은 평소에 저랑 그리 친한 편이 아니라서 제가 10년 동안 발버둥칠 때 저한테 관심이 없었던 분입니다.
그런 분들에게서 이런 소식이 들려오면 솔직히 마음이 복잡미묘해집니다.


그 복잡미묘한 마음을 추스르고 나서
‘좋아요’를 누르고 돈을 송금하는 이유는
제가 괴물이 되지 않기 위함입니다.
나의 절박함을 외면했던 이나 나의 고통에 무관심했던 이들을 세상에서 지워버리면
이 세상에서 내가 만나고 귀를 기울여야 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지난 10년 동안 그런 살벅한 현실을 몸서리치도록 경험하면서 제가 점점 괴물이 되어가는 걸 경험했거든요.
그런데 이제 조금 살만해지니까 나를 외면하고 밀쳐냈던 이들의 고통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오는 겁니다.
그 목소리를 들으며 내가 경험했던 것과 똑같이 대응한다면 저는 다시 괴물로 돌아가는 것이 됩니다.
그 분들을 인간적으로 다시 만나서 웃으며 얘기할 기회는 없을지 모르지만
그들의 고통스러운 얘기를 들으면서 귀와 마음을 닫아버리지는 말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홍상수 감독의 ‘생활의 발견’이라는 영화를 보면
“사람이 되기는 어렵겠지만 괴물은 되지 말자”라는 대사가 나옵니다.
지금 저의 솔직한 심정입니다.
“타인의 고통 앞에서 가슴이 뜨거워지는 사람이 되기는 어렵겠지만 괴물은 되지 말자”

 

3


지금의 저는 아주 자유롭습니다.
가족이나 직장에 얽메여있지 않기 때문에 신경쓸게 별로 없습니다.
학연이나 지연같은 건 떨쳐버린지 오래이기 때문에 쓸데없는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아도 됩니다.
재산도 없고 일궈놓은 명예도 없으니 놓칠세라 노심초사할 것도 없습니다.
세상에서 한발 떨어져 외톨이로 살고 있으니 욕망이나 욕구도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저 불안과 고통에서 벗어나 편안하고 평화롭기를 바랄뿐이지요.


가끔
천형과 같은 외로움을 이기지 못해서든
세상에서 밀려오는 파도를 피하지 못해서든
세상으로 나가게 되는 일이 있습니다.


그렇게 세상사람들을 만나서 어울려보려고 하면
저의 거침없는 자유로움이 불협화음을 만들곤 합니다.
이미 자신의 관계와 자원과 관성이 있는 이들은
낯선 이의 자유로운 언행을 올곧이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습니다.
너무도 자유로운 저 또한 다른 이들의 호흡을 배려할 생각이 별로 없지요.


교과서적인 얘기처럼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배려한다면 그 관계는 시너지를 발휘하겠지만
그렇지 못하고 서로의 위치와 관성을 고집한다면 누군가 튕겨나가겠지요.
지난 10여 년 간은 그렇게 세상에서 점점 밀리고 튕겨나옴의 반복이었습니다.
이제는 그런 것에 워낙 익숙해져서 그걸 자유로움의 확장으로 합리화하기도 합니다.


이번 한 주는 관계의 형성과 개인의 자유로움에 대해 많이 생각해봤습니다.
필요 이상으로 생각이 많다보니 오늘 방송의 얘기가 넘쳐버렸네요.
넘쳐버린 걸 다시 주워담을 수도 없으니 그냥 내버려두겠습니다.
이것도 자유로움의 한 형태로 이해해주실까요? 하하하

 


(잔나비의 ‘HONG K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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