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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자 106회


1


읽는 라디오 살자 백여섯번째 방송을 시작하겠습니다.
반갑습니다, 성민입니다.
지난 한주 동안 많이 불편하게 보냈습니다.
그래서 오늘 방송은 내용이 좀 시니컬하고 무겁습니다.
이런 내용 싫어하시는 분은 읽지 마시고, 이런 내용도 괜찮다고 하시는 분도 너무 깊게 담아두지는 마십시오.
살아가는 얘기를 하다보면 이런저런 얘기들을 할 수 있는거여서 여과없이 그냥 늘어놓아보겠습니다.


암환자가 흔한 시대라고 하지만 정작 내 가족이 암환자라는 사실 앞에서는 당혹스러웠습니다.
돈도 없고, 지식도 없고, 사람도 없고, 애정도 많지않은 저는 죽음의 문턱에 있는 아버지를 위해 할수 있는게 별로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죽어가고 있는 아버지를 그냥 바라보고만 있을수도 없었죠.
단순한 뭐라도 할 수 있는 걸 찾아야했습니다.
그래서 주위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메일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메일을 보냈고, 페이스북에도 글을 올렸습니다.
아버지가 죽어가고 있으니까 도와달라고...


하지만
메일은 완벽하게 씹혀버렸고
페이스북에는 4개의 댓글이 달렸을 뿐입니다.
그나마 도움이되는 정보를 알려준 사람은 두 명뿐이었죠.
이 참담한 현실을 마주하면서 마음이 꽁꽁 얼어버렸습니다.


세상은 항상 그랬습니다.
제가 뭔가를 나눠주겠다고 그러면 예상 외로 호응이 좋았지만
나눠줄게 없으면 아무도 저를 찾지 않았고
힘든 일이 생겨서 도와달라고 손을 내밀면 찬바람만 붑니다.
10년 전에도 그랬고
8년 전에도 그랬고
5년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다시 한번 차가운 현실을 마주하면서
페이스북의 친구를 모두 끊어버렸고
메일 주소를 모두 지워버렸습니다.
다시 혼자가 됐습니다.
그렇다고 크게 달라지는 건 없습니다.
어차피 찾아오는 사람도 별로 없이 사랑이랑 둘이 살아가는 삶이었으니까요.
다만 세상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접어버렸다는 거죠.


그렇다고 예전처럼 세상에 대한 복수심으로 불타오르지는 않을겁니다.
그건 제가 다시 괴물로 변해가는 길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모든 걸 다 버려버리고 다시 리셋하는 겁니다.
어떤 식으로 리셋을 해야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다시 천천히 제 자신을 다독이면서 세상을 바라볼겁니다.
이제 점점 기온은 떨어지고 겨울이 다가오겠죠.

 

2


새벽 일찍 일어나서 간단히 스트레칭을 한후 제 마음 속을 들여다봤습니다.
성민이를 만나기 위해 조심스럽게 들어갔지요.
그런데 그곳에서 낯익은 이와 마주쳤습니다.


그 녀석 : 오래간만이네.
나 : 어, 그래.
그 녀석 : 잘지냈어?
나 : 응.
그 녀석 : 얼굴색이 환한걸 보니 요즘 사는게 좋은가봐?
나 : 뭐, 그렇지.
그 녀석 : 여긴 왠일로?
나 : 어... 성민이 좀 볼까싶어서.
그 녀석 : 성민인 저 안에 있긴한데, 지금 누굴 만날 기분일지 모르겠네.
나 : 야, 니가 대변인이나 관리인은 아니잖아. 내가 성민이 만나는데 니 허락받아야하는 것도 아니고.
그 녀석 : 물론 그렇지, 내가 대변인이나 관리인은 아니니까. 들어가봐.


그 녀석은 저를 향해 묘한 미소를 지으며 옆으로 비켜섰습니다.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더니 성민이가 가만히 앉아서 책을 보고 있더군요.
제가 인기척을 냈는데도 성민이는 고개를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성민이 곁에 앉아서 가만히 벽을 바라봤습니다.
10여분 정도 그렇게 아무말 없이 있었더니 성민이가 입을 열더군요.


성민이 : 설교하려 온거야?
나 : 아니.
성민이 : ......
나 : 내가 있는게 불편해?
성민이 : 그건 아니야.
나 : 기분 좀 가라앉았어?
성민이 : 그럴려고 노력하는데 잘 안돼.
나 : 그렇지. 그게 쉽게되면 이런 파도가 일어나지도 않았을테니까.
성민이 : 오래간만에 파도가 몰려오니까 시원해서 좋기는하네.
나 : 그러냐?
성민이 : ......
나 : 밖에 그 녀석있더라.
성민이 : 어, 알아.
나 : 괜찮아?
성민이 : 아니, 조금 무서워.
나 : 뭐, 하긴, 나도 그 녀석 볼때마다 마음이 서늘해지는데.
성민이 : ......
나 : 그 녀석이랑 마주칠때면 도망가야하는데 말야.
성민이 : 어디로 도망가지?
나 : 그러게... 야, 그냥 마음 편히 먹고 착하게 살아보자. 그래야 그 녀석이 얼씬거리지않지.
성민이 : 마음 편하게 먹고 착하게 살려고한 결과가 지금 이거야.
나 : 어, 그렇지.
성민이 : ......
나 : 야, 그렇다고 다시 그 녀석이랑 어울릴수는 없잖아. 거기서 빠져나오는데 얼마나 오래 걸렸는데...
성민이 : 그럼 어떻해야돼?
나 : 음... 뾰족한 방법이야 없지. 그냥 툴툴 털어버리고 다시 마음 편하게 먹고...


그때 뒤에서 그 녀석이 한마디를 툭 던지더군요.


그 녀석 : 야, 대화를 할려면 좀 솔직해져라. 성민이 너, 솔직히 말해서, 지금 아버지 때문에 그렇게 힘든거 아니잖아. 너도 니 입으로 아버지 병에 대해서는 담담하다고 그랬잖아. 그러다가 아버지 병을 핑계로 주위 사람들에게 손 좀 내밀었다가 차이니까 지금 그러는거아냐? 아버지 병보다는 너의 자존심이 상한게 더 중요한거잖아. 결국 너도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건 마찬가지야. 그런데 누가 누굴 욕하고 비난할수 있어? 세상이 원래 그런거야. 너도 이런 세상에서 살아가려면 그런 현실을 인정하고 그냥 모질고 독하게 자기만 생각하면서 살아가야하는 거야. 너도 잘알잖아, 그치?


그 녀석이 지껄이는 동안 저나 성민이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3


밭에 식구가 하나 늘었습니다.
얼마전부터 고양이 한 마리가 이곳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보기에 조금 어려보이는 녀석이더군요.
주변에 온통 밭들뿐이어서 어떻게 이곳까지 오게됐는지 모르겠습니다.
가족도 없이 혼자서 말입니다.


밖에서 가끔 마주칠 때면
“야옹아, 괜찮아. 우리 앞으로 친하게 지내자”라고 다정한 목소리로 말을 걸어보지만
고양이는 자리를 피하면서 제 눈치를 살핍니다.
제가 위협적인 행동을 하지 않아서인지 겁을 먹고 도망가는 것은 아닌 것 같았습니다.
예전에 유기견인 우정이랑은 이렇게하면서 조금씩 친해졌는데
고양이랑은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우정이 때와는 달리 사랑이가 고양이를 보면 달려들려고하는게 조금 걱정이기는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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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리는 창고 안에서 해결하는 것 같은데
먹을 건 어떻게 해결하는지 걱정이 되더군요.
이 주변에는 고양이가 먹을만한게 딱히 없을텐데...
그래서 며칠전부터 창고 안에 사랑이 사료를 조금씩 놓아두기 시작했습니다.
개사료를 고양이에게 주는 게 조금 미안하기도하고
쥐들이 먼저 먹어버리지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다음날 보면 사료는 말끔히 치워져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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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고양이를 위해 조심스럽게 먹이를 챙겨주고 있었는데
사랑이 사료봉지가 넘어져있었고 한쪽 귀퉁이가 날까롭게 찢겨있는 걸 발견했습니다.
고양이짓임에 분명했습니다.
그 작은 고양이가 그랬는지 아니면 또다른 고양이가 찾아와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그냥 괘심한 생각들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고양이 먹어주는 걸 중단하고 사료를 다른 곳으로 옮겨버렸습니다.

 


(김사월의 ‘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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