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살자 113회


1


이사를 했습니다.
마을 외곽에 있는 작고 오래된 집이었습니다.
창호지가 말라져있는 고풍스러운 모습이 정겹더군요.
문을 열었더니 조그만 마루가 나왔습니다.
한평이 될까말까한 크기의 마루에는 낡은 나무바닥이 깔려있었습니다.
고개를 숙여야 들어갈 수 있는 방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한 평이 조금 넘을듯한 크기의 방에는 구석에 조그만 장롱과 이불이 놓여있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제가 누우면 그만인 방이었습니다.
바닥은 누런 비닐장판이 깔려있고 구석은 조금 울퉁불퉁하더군요.
다시 마루로 나와 옆에 있는 나무문 하나를 다시 열었더니 역시 조그만 부엌이 나왔습니다.
겨우 들어가서 간단하게 일을 볼 수 있는 정말 작고 어두운 부엌이었습니다.
마루 뒤쪽으로 또 다른 문 하나가 더 있었습니다.
작지만 올망졸망한 공간들이 많은 집이구나 하는 생각에 그 문을 열었더니 바로 담이 나오더군요.
집과 겨우 30cm 정도 간격이 있을 정도여서 그곳에 들어가서 뭔가를 하는 게 의미가 없어보였습니다.
그래도 야외창고로 쓸려면 쓸수 있는 공간이기는 했습니다.
그나마 좋은 것은 집앞에 다섯 평 정도되는 조그만 마당이 있다는 겁니다.
마당은 맨땅이라서 마음만 먹으면 텃밭으로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정말 작고 낡고 오래된 집이더군요.


순식간에 집구경을 마치고 안방에 들어와서 이불을 깔고 누웠습니다.
가만히 눈을 감고 있으려니 포근함이 몰려오더군요.

 

2


이사를 하고 며칠후 국민학교 동창들이 집들이를 한다고 몰려들었습니다.
좁은 집안에 꾸역꾸역 들어앉아서 밤새도록 먹고 마시고 떠들었습니다.
다음날 일어나서 집안을 봤더니 엉망이더군요.
약속이 있어서 나가야했기에 얼른 친구들을 깨워서 간단히 집안정리를 시작했습니다.
친구들도 도와주겠다며 나섰는데 도와주는게 아니라 더 어지럽히더라고요.
그래서 도와주지 않아도 되니까 가만히만 있으라고 얘기했는데도 웃으면서 더 어지럽혔습니다.
순간 짜증이 확 밀려와서 나가라고 해버렸죠.
그랬더니 친구들이 뻘쭘해져서 하나씩 집을 나가더군요.
친구들이 그렇게 나가는게 조금 미안하기는 했지만 빨리 정리하고 저도 나가야했기에 바삐 움직였죠.
한쪽에 커다란 비닐봉지가 놓여있어서 정리하려고 열어봤더니 양은도시락과 반찬통들이 들어있었습니다.
양은도시락에는 밥이 들어있었고, 턱없이 큰 반찬통들에게는 여러 가지 반찬이 있더군요.
집을 나서는 친구들에게 “이게 뭐냐?”고 물었더니 한 녀석이 “우리 어머니가 너 갖다주래”라고 대답하며 나갔습니다.
순간 뭉클한 마음이 일어났지만 빨리 정리하고 나가야한다는 생각에 고맙다는 말도 못하고 말았습니다.
분주하게 집안을 정리하고 있는데 좀처럼 어지러운게 없어지질 않아서 또 짜증이 밀려올 때 스님 한 분이 들어왔습니다.
이럴 때 찾아오는 사람이 반가울리 없어서 “스님, 지금 제가 바쁘니까 나중에 오세요”라고 퉁명스럽게 얘기했더니 스님은 “000씨가 보내서 왔습니다”라고 하더군요.
친척 형님이 제가 요즘 근심이 많은 걸 알고 마음의 위안을 위해서 스님을 보내신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저는 빨리 집을 정리해서 약속장소로 가야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어서 스님에게 대답도 제대로 못하고 집안 정리에만 몰두했습니다.
정리해도 정리해도 어지러워진 집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은채 스님은 한쪽에 멀뚱히 서있기만 했습니다.

 

3


다시 며칠 후 제 집에서 조촐한 모임이 열렸습니다.
여성활동가 수련회를 한다고 몇분이 오신거지요.
작은 마당에 모여앉아서 얘기를 나누는데 옹기종기 모여앉았더니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아는 얼굴도 몇분 있기는 했지만 자리가 자리인지라 좀 뻘쭘하게 한쪽구석에 앉아있었더니 한분이 제게 다가왔습니다.


여성활동가 A : 성민씨, 오래간만이에요.
성민이 : 그러네, 잘지냈어요?
여성활동가 A : 그럼요. 오늘 자리 마련해줘서 고마워요.
성민이 : 아, 뭐, 별말씀을...
여성활동가 A : 오래간만에 만났는데 부탁하나 해도될까요?
성민이 : 예, 제가 할수 있는 거라면...


그분은 제게 종이 한장을 건네면서 유인물 초안으로 써놓은건데 표현들이 거칠어서 그러니까 문장을 좀 다듬어달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저는 빨간팬을 집어들고 꼼꼼히 읽어가면서 문장들을 다듬어나갔습니다.
그렇게 다듬은 종이를 다시 그분에게 건냈더니 그분이 다듬은 문장을 소리내서 읽더라고요.
그런데 소리내서 읽는 문장을 듣다보니 손발이 오그라드는 표현들이 곳곳에 있더군요.


성민이 : 표현이 좀 오그라드네, 헤헤헤.
여성활동가 A : (제게 살짝 미소만 지어보이면 글을 계속 읽어내려가며) 성민씨는 어쩜 이렇게 글을 쉽게 써요?
성민이 : 에고, 왜 이러실까, 더 오그라들게.
남성활동가 B : 그런데 이건 활동가들에게 쓰기에는 표현이 좀 그렇지 않나요?
여성활동가 C : 아니요, 대중들이 쉽고 편하게 읽힐 수 있는게 중요하죠.
여성활동가 A : 성민씨, 애써주셔서 고마워요.
성민이 : 고맙긴... 나중에 오그라드는 표현들은 고칠께요.


그렇게 얘기를 주고받고 있는데 또 다른 분이 다가오더군요.


여성활동가 D : 안녕하세요?
성민이 : 아, 올만!
여성활동가 D : 지난 번에 도움이 많이 돼서 고마웠어요.
성민이 : 도움이 됐다면 다행이네.
여성활동가 D : (티켓 하나를 건내며) 여성해고자들이 공연을 준비했거든요. 시간되면 보러오세요.
성민이 : 오~ 땡큐! 연말에 공연도 볼수 있게 됐네.


그분은 공연을 준비하는 분이라면서 옆에 있는 분을 소개해주셨습니다.
그렇게 몇분과 인사를 나누면서 점점 그 자리에 스며들어갔습니다.

 

4


오늘 방송은 지난 한주동안 제가 꿨던 꿈들로 채워봤습니다.
꿈을 꾸고 잠에서 깨어났을 때 기억나는 부분들을 최대한 살려서 기록했고
방송으로 꾸미기 위해 아주 약간의 각색을 했습니다.


겨울이라서 활동량이 적은데다가 몸과 마음이 움추러든 상태에서 잠을 자다보니
꿈도 많이 꾸고 중간에 잠이 깨는 일도 많았습니다.
중간에 잠이 깨면 1~2시간은 멀뚱멀뚱하게 있어야 하는 것이 조금 고민이었는데
다음날 꿈을 기록하면서부터 중간에 깨는 일이 없어졌습니다.
심지어는 꿈을 꾸면서도 꿈을 기록해야한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죠.


제가 꾼 꿈을 돌아보니 불편한 구석들이 있기는 하지만 대체적으로 따뜻한 온기가 느껴져서 다행입니다.
꿈이라는 게 의지로 제어되는 것이 아니어서 불편하고 힘든 내용들이 나올 때는 깨고나서도 개운하지 못하기도 하는데 지난 한주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러다보니 밤에 잠을 자려고 누우면 어떤 꿈을 꾸게될까하는 기대가 살짝 들기도 했습니다.


읽는 라디오라는 걸 8년 동안 진행하다보니
이런저런 세상의 소리들을 듣다가
제 내면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가 열리더니
이제는 무의식이 내뱉는 소리까지 듣게 되네요, 하하하


이 방송을 읽는 분들은 제 꿈 얘기가 어떻게 다가올지 모르겠지만
저는 이게 의외로 재미있습니다.
특별한 변화없이 뻔한 일상의 얘기들만 주절거리다가
시간과 공간과 관계들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풀어놓은 이야기가
굳어진 생각과 얼어버린 마음을 조금 녹여놓는 것 같거든요.
앞으로도 이렇게 꿈속에서 지냈던 이야기를 조금씩 풀어놓아볼까합니다.
그러다보면 이 방송이 조금 더 자유롭고 활력이 넘치지 않을까요?

 


(Sergei Trofanov의 ‘Boucles D'Or’)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