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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자 116회


1


서울에서 치료중인 아버지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내일 가족들이 모여서 저녁을 같이 먹으려고 하니까 오라고 하시더군요.
알았다고 하고는 간단히 통화를 마쳤습니다.


요즘 섬망이 심하셔서 이런 증상이 자주 있다는 얘기를 동생에게서 들었습니다.
수술은 잘 됐다고 하지만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건 여전하고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하다보니 기력이 쇠약해져서 섬망도 심해진다고 합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조만간 예정돼 있던 3차 항암치료도 연기했다고 하더군요.


덤덤하게 상황을 바라보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최근 상황은 덤덤함을 비웃고 있습니다.
그럴다고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없기 때문에
덤덤함이 답답함으로 변하려고 하더군요.
아버지 옆에서 오롯이 상황을 감내해야하는 동생과 어머니에게 미안하고
이럴 때 도움이 되지 못하는 제 자신이 한심해 보이고
가족들의 힘겨움 속에 내면의 평화를 찾으려는 모습이 이기적으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런 부정적 감정들이 한꺼번에 몰려들때면 얼른 도망가야 합니다.
그래서 일부러 하우스에 들어가 일을 찾아나섰습니다.
이런저런 잔일들을 하면서 제 자신에게 주문을 걸었습니다.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던 것에 비하면 지금은 많이 나아진거야.’
‘통화할 때 목소리가 밝았으니까 그나마 다행이네.’
‘수술도 잘 됐다고 하니 좀더 경과를 지켜보고 재활에 신경쓰면 좋아지겠지.’
‘항암치료도 진전이 있다고 하니까 그게 제일 중요한거겠지.’
‘형제들이 서로를 격려하면서 조심스럽게 버텨주고 있어서 고맙네.’


그렇게 주문을 걸며 일을 하고 있는데 사랑이가 제 곁으로 다가오더군요.
하던 일을 멈추고 자세를 낮춰서 사랑이를 불렀습니다.
제 곁으로 다가온 사랑이를 쓰다듬으면서 다정스럽게 얘기를 했습니다.


“사랑아, 내 곁에 있어줘서 정말 고마워.”

 

2


볼일이 있어서 시내에 나갔다가 점심시간이 됐습니다.
조금 참았다가 집에 와서 먹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평소 먹는 것과 다른 음식을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뭘 먹을까’ 하면서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습니다.
오래간만에 고기가 들어간 걸 먹고 싶기도하고
날씨가 쌀쌀하니 얼큰한 국물이 있는 것도 생각났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주변을 돌아다니는데 의외로 원하는 식당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가끔 국밥이나 찌게종류를 파는 집이 보이기는하는데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 식당들이더군요.
그렇게 10여분을 헤매다가 마음에 드는 식당이 보여서 들어가려는데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더군요.
잠시 망설이기는 했지만 날씨가 추운데다가 배가 많이 고파서 포기하고는 다른 식당을 찾아나섰습니다.
얼마 가지 않아서 겉모습이 깔끔해보이는 해장국집을 발견했습니다.
넓은 식당에 비해 손님이 별로 없는 게 조금 꺼림칙하기는 했지만 그냥 들어갔습니다.


메뉴판을 살펴보고는 마음이 가장 끌리는 내장탕을 주문하고 기다렸습니다.
식당 분위기는 정갈해보였고 비교적 젊은 여성분들이 일을 하고 있어서 조금 안신이 됐습니다.
그리 오래지않아 간단한 반찬과 함께 팔팔 끓는 내장탕이 나왔습니다.
양념을 간단히 하고 열기가 가라앉도록 몇 번 휘젖고나서 밥을 먹기 시작했습니다.


내장탕의 진한 국물맛은 느낄수가 없이 각종 양념맛만 나더군요.
고기와 국물은 따로 놀았고 매운맛 때문에 잔기침이 나기까지 했습니다.
밑반찬으로 나온 김치는 겉절이수준으로 형편없었고 깍두기는 짠맛이 났습니다.
그나마 역겨운 수준은 아닌데다가 너무 배가 고파서 꾸역꾸역 집어넣었습니다.
맛도 없고 부실한 밥상이어서 밥 한그릇을 다 비우고도 배가 고팠지만 그냥 일어났습니다.


밥값 구천원을 내고 식당을 나서는데 짜증이 확 밀려오더군요.
조금 걸어갔더니 손님들이 가득한 국밥집이 보여서 짜증은 더 타올랐습니다.
자꾸 맛없는 내장탕 생각을 하다보니 속이 채한것처럼 답답함이 느껴지기도 하더군요.
마음을 토닥거리면서 달래보려했지만 화로 막힌 가슴은 좀처럼 뚫리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다시 식당을 찾기는 그래서 편의점에 들어갔습니다.
답답한 마음을 달래려고 생수 하나랑 아이스크림 하나를 샀습니다.
추운날 길거리를 걸으면서 생수로 속을 달래고 아이스크림으로 답답한 마음을 뚫어야했지요.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다보니 마음은 조금 진정이 됐습니다.
하지만 짜증의 앙금은 쉽게 가라않지 않더군요.
그런 상태에서 집에 들어섰더니 사랑이가 꼬리를 흔들며 반겨줬습니다.
사랑이를 쓰다듬어주며 밥그릇을 봤더니 밥을 거의 먹지 않았더라고요.
내가 없어서 밥을 먹지 않은 사랑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사랑이 몸을 쓰다듬으며 미안하다고 말을 하고 밥그릇을 들이밀었더니 사랑이가 밥을 먹더군요.

 

3


밥을 다 먹은 사랑이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왔습니다.
사랑이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시 한 번 더 사과를 했습니다.
“사랑아 혼자 밖에서 밥을 먹고와서 미안해. 다음부터는 왠만하면 집에 와서 너랑 같이 밥 먹을께.”
사랑이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제 손길만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런 사랑이를 보며 제 마음도 조금 풀려서 사랑이에게 하소연겸 변병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실은 집에 와서 밥을 먹을수도 있었는데...”
쓰다듬던 손을 치우고 제가 주절주절 얘기를 늘어놓기 시작하니 사랑이는 자리에 누워서 제 얘기를 듣더군요.
“그래서 그 식당에 들어갔거든. 겉보기에는 깔끔해보여서...”


 

사용자 삽입 이미지

 

제가 본격적으로 문제의 식당에 대한 얘기를 꺼내들려고 하는데 사랑이가 눈을 비비는 겁니다.
“갑자기 왜 눈을 비벼?”
“응, 밥을 먹고 났더니 눈꺼풀이 자꾸 내려오네.”
“야, 내 얘기가 듣기 싫어?”
“아니, 그건 아니고...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계속 해봐.”
능청을 부리는 사랑이를 바라보면서 저는 다시 주절주절 이야기를 이어갔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런데 이번에는 코를 비비는 겁니다.
“에이씨, 얘기 안해!”
“야, 오해 하지만 갑자기 코가 간지러워서 그런거야.”
“웃기고있네. 내 얘기 귀찮다는 게 얼굴이 선명하게 써져있는데. 야, 나는 그래도 너한테 미안하고 그래서 이렇게 사과도 하고, 어째서 그랬는지 상황도 설명하고 그러는거야. 그래서 니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제 목소리 톤이 조금 높아지고 다시 말이 길어지니까 사랑이가 귀를 막아버리더군요.
그 모습을 보고 저는 입을 닫아야했습니다.
하하하하하

 

4


사랑이랑 산책을 하는데 어느 허름한 집에 조그만 나무간판이 내걸려있었다.
‘내면초상화 그려드립니다’
이건 뭔가 싶은 생각에 그 집을 기웃거려보는데 한 여성분과 눈이 마주쳤다.


여성 : 안녕하세요.
성민이 : 예, 안녕하십니까. 여기 사세요?
여성 : 아 예, 얼마 전에 이사왔어요. 반갑습니다.
성민이 : 예, 반갑습니다. 그런데 내면초상화는 뭔가요?
여성 : 사람들 얘기를 듣고 마음 속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드리는 거예요.
성민이 : 추상화같은 건가요?
여성 : 뭐, 각자 생각하기 나름이죠. 잠시 들어와서 둘러보실래요?


건물 안으로 들어갔더니 가운데 조그만 탁자와 의자가 놓여있고 주변에는 엽서만한 크기의 그림들이 진열되어있었습니다.
색연필로 그려진 그림들은 기하학적 무늬도 있고, 꽃이나 사람이나 짐승들의 모습이 형태로만 간략히 그려져 있기도 하고, 의미를 알수 없는 도형들이 그려져 있기도 했습니다.
전반적으로 밝고 편안한 분위기의 그림들이었습니다.


여성 : 여기 앉으실래요?
성민이 : 예, 이게 전부 내면초상환가요?
여성 : 예, 이 그림들은 각자가 느끼는 마음을 그린거라서 본인이 아니면 이해할 수는 없어요. 하지만 당사자에게는 마음의 거울이 될수도 있고, 위로의 손길이 될수도 있고 그래요.
성민이 : 이걸 하려면 상담을 받고 그래야하는 건가요?
여성 : 아니요, 그렇지 않아요. 그냥 저한테 자신에 대해서 짧게 얘기해주시면 제가 그걸 그림으로 그려드리는 거예요. 서로의 마음이 느껴지는거죠.
성민이 : 아... 저도 한번 해볼 수 있을까요?
여성 : 그럼요. 여기에 자신을 제일 잘 표현할 수 있는 단어 하나를 적어주시겠어요?


그분이 내미는 종이와 펜을 들고 잠시 고민을 하다가 저는 ‘사랑’이라는 단어를 적고 그분에게 내밀었습니다.


여성 : 왜 ‘사랑’이 자신을 제일 잘 표현할 수 있는 단어인지 여쭤봐도 될까요?
성민이 : 음... 저는 이 나이가 되도록 누군가와 가슴 뛰는 사랑을 해본 적이 없어요. 무지무지 해보고 싶었는데, 헤헤헤, 지금은 포기했죠.
그 대신 민중에 대한 뜨거운 사랑은 오랫동안 해봤어요. 마음 졸이면서 무수한 밤을 같이 지새우기도 해봤고, 간절한 마음을 담아 기도도 해봤고, 안타까움에 눈물도 많이 흘려봤고, 내 모든 걸 다 바치겠다며 아주 뜨겁게 타올라보기도 했죠. 그렇게 열정적으로 타오르던 그때는 힘든만큼 즐겁고 행복했어요.
그런데 세상을 살다보니까 거센 파도에 밀리기도 하고 방황하기도 하게 되면서 어느 순간 이렇게 외진 곳으로 밀려와 있더군요. 그 과정에서 세상과 사람들에게 상처도 많이 받았고, 저 또한 상처를 주기도 했죠. 그렇게 무수한 생체기가 이곳저곳에 생기다보니까 남는건 불신뿐이더라고요. 세상에서 떠밀려 10년을 표류하다보니까 이제는 애증도 없어졌어요. 그냥 무덤덤하고 무관심해지는거죠.
그래서 생각해봤어요? 노래 가사처럼 ‘다시 또 누군가를 만나서 사랑을 하게 될수 있을까?’ 하고요. 내 마음 속에서 사랑이라는 감정이 식어버렸다는 건 슬픈 일이잖아요.
저랑 같이 살고 있는 이 개 이름이 ‘사랑이’거든요. 사랑이를 보면서 하루에도 수없이 ‘사랑아, 사랑해’라고 얘기를 하죠. 진심으로요. 그렇게 제 마음 속에 사랑이라는 감정을 이 개가 지켜주고는 있는데, 사람을 향해서도 그 감정을 다시 가질 수 있을지... 그게 고민이라면 고민이죠.


가만히 제 얘기를 듣던 그분은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기더니 색연필로 종이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말없이 그분이 그리는 그림을 지켜봤고요.
그렇게 10분쯤 그림을 그리고나서 그분이 간단히 그림에 대한 설명을 해주시더군요.
그 얘기를 듣다보니 제 마음이 아주 편안해졌습니다.
그분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그림값으로 만원을 드리고 나왔습니다.


집으로 돌아와서 벽에 그림을 붙여놓고 바라보니 다시 기분이 편안해지더군요.
사랑이를 불러서 가만히 쓰다듬어주면 얘기했죠.
“사랑아, 사랑해.”

 


(Keith Jarrett의 ‘Be My 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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