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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이는 의외로 빨리 헤엄친다, 평범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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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그만 어항에서 기르는 거북이에게 매일매일 밥을 챙겨주며 그렇고 그런 하루하루를 살아가던 어느 주부가 우연히 ‘스파이 모집’이라는 광고를 발견하게 된다.

그저 단순한 호기심에 그곳에 연락을 하고 뭐가 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얼렁뚱땅 스파이가 된다.

그 스파이라는 것이 어떤 조직이고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도 잘 모르겠지만 그 조직의 최대 과제는 ‘최대한 평범하게 남의 이목을 끌지 않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미 그렇게 살아오고 있었지만 조직원이라는 사람들과 비밀스럽게 접촉하며 그렇게 살아간다는 것은 의외로 어려웠고 그래서 살짝 긴장감이 돌기도 했다.

 

특별히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며 살아가는 중년의 사내, 동네 슈퍼에서 안내방송을 하고 있는 중년 부인, 동네의 평범한 두부가게 사장님, 맛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아주 없는 것도 아닌 어중간한 맛의 라면집 사장님, 공원벤치에서 개미들에게 먹이를 주고 있는 할머니, 이들이 모두 스파이였다.

너무도 평범해서 그들이 존재하는지 조차도 의식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

내일 그곳에서 사라진다고 해도 그 마을에는 별다른 흔적도 남지 않을 사람들

그들이 어마무시한 국제조직의 스파이들이었던 것이다.

그 스파이들은 조직의 명령 때문에 그지없이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지만

사실은 저마다 특별한 재능들을 하나씩 감추고 있었다.

그저 남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 그 재능을 꽁꽁 숨기고 있을 뿐.

 

영화는 이 스파이조직의 일상을 살며시 드러내면서 어딘가로 향하고 있는데

그곳이 어디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리고 공안경찰과 프락치가 스파이들을 찾아내기 위해 마을에 등장하지만

경찰과 스파이의 대립과 투쟁이 드러나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뜻밖의 사건들이 터져서 좌충우돌하면서 이야기가 뛰어가는 것도 아니다.

그냥 정해진 듯 하면서도 정해진 것이 없는 듯 그저 단순하게 스파이들의 일상들이 이어질 뿐이다.

그런데도 지루하지 않고 재미있다.

 

10여 년 전에 봤던 영화를 다시 봤는데도 처음 보는 영화처럼 느껴졌다.

몇몇 장면들과 캐릭터가 기억이 나기는 했지만 기억 속에 남아있는 것이 별로 없어서 새로 보는 기분이었다.

캐릭터들은 식상하지 않고 나름 개성적이지만 강렬함이 없었고

이야기는 뻔한 스토리가 하나도 없이 자유롭게 흘러갔지만 너무 단순했고

만화적 요소로 구성돼 있어서 재미있기는 했지만 눈을 확 잡아끄는 것은 없었다.

그야말로 우중간함의 극치였는데 다 보고나면 마음속에 잔잔한 여운이 남는다.

그 여운은 10여 년 전과 지금이 살짝 다르게 다가오기도 했다.

이 영화를 만든 감독이 실제로 그 조직의 스파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내일 당장 사라져도 이상할 것 없는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세상에서

나의 존재는 그지없이 평범하면서도 특별하다.

그런데 평범함에 짓눌리면 숨 막히고, 특별함을 드러내면 비웃음을 사거나 처단된다.

그래서 내 안의 특별함을 잘 간직한 채 오늘도 평범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사실, 나도 그 조직의 스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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