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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할래요?

저와 함께 자전거 산책을 하시렵니까?

한낮의 숨 막히는 더위가 수그러들고 저녁의 바람이 조금은 숨통을 트이게 하는 저녁 6시30분이면 자전거 산책을 하기에 가장 좋습니다. 준비물은 자전거 한 대와 얼려놓은 보리차 한 병이면 됩니다. 그 외에는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돈도 필요 없고, 그 어떤 치장도 필요 없고, 너무 설레는 마음도 필요하지 않고, 긴장된 마음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냥 편안한 마음으로 가볍게 자전거를 타고 산책을 즐기면 됩니다.

코스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 마을에서 동쪽으로 해안도로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이 경우 왕복 1시간 30분 정도의 시간이 소요되는데, 감탄사로 절로 나오게 되는 비경의 해안도로를 따라 달리게 됩니다. 혹시 ‘인어공주’라는 영화를 보신 동지는 그 영화 속의 모습을 상상하면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계속되기 때문에 자전거를 타기에는 땀이 좀 나기는 하지만 운동 겸해서 하면 참 개운합니다.
또 하나는 우리 마을에서 서쪽으로 따라가는 것입니다. 이 경우 왕복 2시간 정도 걸리는데, 동쪽 코스보다 비교적 편안하게 달릴 수 있습니다. 바다를 끼고 있는 해안 산책로, 아주 편안한 마을 옆 도로, 수채화 같이 작고 고즈넉한 해안도로가 이 코스의 특징입니다. 차들도 별로 다니지 않는 길을 편안한 마음으로 휘파람 불면서 달리기에 좋은 길입니다.
마지막 코스는 해안이 아니라 산 쪽으로 가는 것입니다. 중산간 지역으로 나있는 길을 따라 달리는 것인데, 초반 오르막길이 좀 힘들긴 하지만 그 단계만 지나면 중산간 마을의 조용함 속에서 달릴 수 있습니다. 바다를 가까이서 볼 수는 없지만, 가다보면 시야가 탁 트여서 저 멀리 그림 같은 바다와 마을의 풍경이 한 눈에 드러나 보이기도 합니다.
세 가지 코스 중에 어느 코스가 마음에 드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첫 번째 코스로 매일 운동 겸 산책을 나갔는데, 요즘은 두 번째 코스에 푹 빠져있습니다. 그 편안함과 낙조풍경이 정말 환상적이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코스는 아직 자전거로 가보지 않아서 뭐라고 얘기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두 번째 코스로 달려볼까 합니다.

출발할까요?

우리 집에서 출발해서 10여 분을 달려가면 한담이라는 동네가 나옵니다. 거기에 조그마한 해수욕장도 있고, 바다를 바로 옆에 끼고 산책로가 만들어져 있어서 자전거를 타고도 조심스럽게 산책할 수 있습니다.
검은 현무암이 천지에 널려 있는 바다에 파도도 거의 없어서 바다가 참 편안하고 잔잔합니다. 발 옆으로 파도가 와 닿는 길을 산책하고 있으면 지상낙원이 바로 여기입니다. 아주 작고 아담하게 해수욕을 즐길 수 있는 곳이 산책로를 따라 띄엄띄엄 있고, 많은 사람들이 수영도 즐기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라고 해봐야 몇 십 명 정도입니다. 얼마 전에는 비키니를 입고 있는 늘씬한 여성들의 모습을 보고 가슴이 콩당거리기도 하였습니다. 그 옆에 배가 남산만한 서양 아저씨가 있어서 참 대조되었습니다. ^-^
이 산책로는 걸어서는 20~30분 정도 걸리고 자전거로는 10분도 채 안 걸리는데, 자전거로 휙 지나기가 아쉬우면 자전거를 끌면서 천천히 걸어가도 됩니다.
눈을 감고 상상을 해 보십시오. 편안하게!

산책로를 빠져나오면 마을 옆 도로로 이어집니다.
제주의 도로는 보통 편도 2차선 도로들인데, 촌으로 갈수록 달리는 차들이 별로 없어서 정말 편안하게 주행할 수 있습니다. 특히 이곳은 거의 1차선 이상 넓이의 자전거 도로가 별도로 마련되어 있어서 차들 신경 쓰지 않고 자전거를 타기에는 최상의 조건입니다. 요즘 같은 여름 피서철에는 자전거를 타고 제주도를 일주하는 젊은 친구들이 많아서 심심치 않게 자전거를 타고 가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길이라는 게 이렇게 차들의 무한질주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차와 자전거, 사람이 함께 달리고 걸을 수 있는 공간이 되어야 함을 실감하는 곳입니다. 영국에서는 ‘거리를 되찾자’라는 행동주의 단체가 결성되어 차량 중심의 거리를 인간 중심의 거리로 만들기 위한 투쟁들도 벌어진다고 하는데, 이곳에서는 아주 자연스럽게 인간 중심의 도로시스템이 정착되어 있습니다.
바다만 보지 말고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려 보십시오. 한라산이 보입니다.
산이 참 편안하고 넉넉하지 않습니까? 남한에서 가장 높다는 한라산은 그 높이의 위용을 자랑함이 없이 제주도 어느 곳에서나 저렇게 완만하고 편안함을 드러냅니다. 한라산 곳곳에 산재해 있는 저 수만은 오름들을 보십시오. 어미 품속에서 잠들어 있는 새끼들 모습 같지 않습니까?
제주는 이렇게 바다도 산도 그지없이 편안합니다. 각종 매스컴을 통해 이국적 이미지로 채색을 해 놓아서 제주하면 이국적 풍경이 먼저 떠오르지만, 실제의 제주는 참 편안하고 조용한 곳입니다. 물론 그 편안함 속에는 섬이 갖고 있는 특유의 고독함과 제주 민중의 역사적 아픔들도 함께 품고 있습니다.

이곳 도로를 10분쯤 달리다 귀덕이라는 동네에 이르면 마을도로가 해안 쪽으로 나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짧은 이 길이 가장 마음에 듭니다. 특별히 해안도로용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아스팔트 도로가 아닌 시멘트 도로이고, 마을사람들이 드나드는 길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길도 작고, 마을도 특별한 것 없이 조용하게 있습니다. 바다도 역시 조용하게 흐르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자전거를 잠시 세워두고 바다로 내려가서 검은 현무암 위에 앉습니다. 그리고 조용히 바다를 바라봅니다. 저 앞에 솟아있는 바위 위에 갈매기가 앉아 있는 게 보입니다. 바다가 참 맑고 깨끗해서 그 속이 훤히 들여다보입니다. 바다에 들어가지 않은 상태에서 눈높이가 바다와 가까운 곳입니다.
바다의 흐름 하나하나가 다 느껴지고, 내 숨소리가 바다로 전달됩니다. 어머니의 숨소리에 내 숨소리 리듬을 맞추면서 품속에 누워있을 때의 그 편안함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이 마을을 빠져 나와서 조금만 가면 해안도로가 나옵니다.
특별한 관광지가 인근에 있는 것도 아니고 빼어난 절경이 있는 것도 아닌 이곳 해안도로는 차들도 거의 없습니다. 그저 중간 중간 조그마한 마을들이 있고, 편안하고 조용한 바다가 이어지고, 반대편으로 오름을 품고 있는 한라산이 보이는 그런 해안도로입니다.
여기 쯤 오면 7시가 넘어서 서서히 해가 지기 시작합니다. 아무 생각 없이 아주 천천히 이 길을 달리고 있다보면 해가 점점 수평선을 향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점점 붉은 기운이 퍼지기 시작하더니 금세 수평선 위에 해가 위치하고 빠른 속도로 해가 사라집니다.
정말 한 폭의 수채화입니다.
뒤 쪽으로 한라산이 조용히 지켜보고 있고, 고즈넉한 마을 집들은 돌담 속에서 묻혀 있고, 그 옆으로 밭들이 돌담을 경계로 이어져 있고, 차들도 거의 달리지 않는 한 줄의 도로 중간에 자전거 한 대가 세워져 있고, 바다 위에는 배들이 몇 척 띄엄띄엄 나가 있고, 수평선으로 붉은 기운이 아스라이 퍼져있습니다.

이제 서서히 돌아가야 합니다. 여기까지 오는데 1시간 정도 걸렸지만, 돌아갈 때는 부지런히 가면 40분이면 갈 수 있습니다. 특히 해가 졌기 때문에 금방 어두워집니다. 너무 늦은 밤길에 라이트도 없이 자전거로 다니는 것을 좀 위험하기 전에 이제 슬슬 돌아갑시다.

세상에 태어나 생의 먼 길을 쉼 없이 걸어갈 때
인간에게서 한없이 소중한 참된 삶이란 무엇인가
조국에 바친 청춘이던가 나를 위한 안락이던가
동지들이여 생각해보라 참된 삶이란 무엇인가

요즘 자전거로 이 길을 달리면서 자주 흥얼거리는 노래입니다. 왠지 이 노래가 자연스럽게 입 밖으로 나옵니다.
몇일 전에 결핵치료를 완료했다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이제 아픈 것을 핑계로 눌러 있을 수가 없습니다. 8월 초에 중이염 수술을 받고 나면 울산으로 복귀하기 위한 준비를 해야 합니다. 작년 8개월, 그리고 올해 8개월 해서 총 16개월간의 휴지기를 끝내고 다시 일선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사이에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이제 다시 복귀하게 되면 지금까지와는 다른 조건에서 활동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저의 인생도 후반기가 시작됩니다.
솔직히 조금은 부담스럽게, 걱정도 되고, 설레이기도 하고...
세상에 태어나 생의 먼 길을 쉼 없이 걸어서 이제 그 중간쯤 와서 잠시 쉬고 있는 나에게 ‘참된 삶이란 무엇인가’를 되새겨봅니다. 앞으로 내가 살아온 만큼 더 살고 나서 내 생을 마감하는 그 순간, 다큐멘타리 ‘송환’에 나왔던 장기수 어른처럼, “조국과 혁명을 위해 동지들과 함께 하지 못해서 죄송합니다”라는 얘기를 할 수 있을까?

내일 또 저는 이 길로 산책을 할 것입니다. 그러면서 또 ‘참된 삶이란 무엇인가’를 흥얼거릴 것입니다. 그렇게 저는 복귀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2004년 8월 1일
제주에서 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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