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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

벌써 연말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여러 가지로 힘겨운 한 해가 이렇게 끝을 향하고 있습니다. 서서히 연말을 준비하면서 한 해를 정리해보아야 할 시점이라고 생각은 들지만, 무엇을 어떻게 정리해야 될지 막막합니다. 그래서 제가 올 한 해 동안 화두로 삼았던 '희망'이라는 문제에 대해서 정리해보기로 했습니다. 물론, 어떤 정리된 생각을 얘기한다기 보다는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서 얘기해본다는 것이 정확합니다.

왜 '희망'이라는 것을 저의 화두로 잡았는지부터 생각해 볼까 합니다.
제 나이가 서른입니다. 나이 서른이면 여러 가지 일에 책임을 갖고 임해야 하는 사회적 주체가 되는 시점입니다. 물론 각자의 조건과 처지에 따라 약간의 편차는 있겠지만, 삼십대라는 것은 하나의 독립된 가정을 이루고, 사회생활 속에서도 주체적인 판단과 행동을 요구하는 시기입니다. 다소 의존적인 동시에 다소는 자유로운 조건 속에서 도전도 해보고, 시행착오와 방황도 하면서 사회에 자신의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는 이십대와는 다른 나이입니다. 물론 도전과 시행착오와 방황이 없어질 수는 없지만, 그에 따르는 책임과 삶의 무게라는 것이 무시하기 어려울 정도로 크고 무겁게 다가오는 나이인 것입니다. 특히나 결혼을 해서 가정을 이루어서 살아간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현실적이고 사회적인 차이를 가져오는 전환점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저는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상황이고, 당장은 이 문제를 현실적인 문제로 생각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조금은 자유로운 처지에 있기는 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평균 연령이 어떻게 되는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임의로 육십 이상은 산다고 생각해 봅니다. 스무 살까지는 가족이나 학교 등을 통해서 사회화 과정이 이루어지는 기간입니다. 그리고 스무 살부터는 성인으로 의미부여 되면서 사회적 주체로 서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그때까지와는 다른 조건들 속에서 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사회의 주체로 서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삼십대로 접어들면서부터는 완전한 주체로서 생활을 해쳐나가야 합니다. 사십대가 되면서 사회적 주체라는 것은 더 이상 자기 혼자만의 문제가 아닌 사회적으로 관계된 사람들과 함께 더욱 무거운 책임을 부여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십대가 되면서 자신이 그동안 살아오면서 해왔던 것들에 대해 사후적 책임을 져나가야 하는 나이에 접어든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이상으로 나이가 들어가면서 그러한 모든 책임들 앞에서 미래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매우 거칠게 사회적 존재(또는 사회적 주체)라는 점과 그에 따르는 사회적 책임이라는 점에서 삶을 10년 단위로 의미부여 해보았습니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나이 서른은 삶의 중간지점에 서 있는 것이 되고, 사회적 책임을 지며 살아가는 사회적 주체로서 매우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 때입니다. 제 나이 서른에 이런 의미부여를 하다보니 '산다는 것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가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제가 이십대 초반일 때도 똑같은 문제를 나름대로 생각해 보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때는 '산다는 것' 자체에 대한 자기질문이었습니다. '산다는 것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에서 나아가지 못했었습니다. 물론 그러한 고민들 속에서 삶의 목표라는 문제에 대해서도 고민이 이어지기는 했지만 현실적 목표로 와 닿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이십대를 보내면서 삶 자체에 대한 자기질문을 하면서 그 삶의 목표에 대해서 조금씩 현실적인 초석을 쌓아가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이제 삼십대로 접어들면서 삶이라는 것과 삶의 목표라는 것이 구체적인 현실의 문제로 다가서기 시작합니다(물론 아직도 현실 속에서 더욱 구체화시켜 나가야 하기는 합니다). 그러면서 '삶의 희망'이라는 것이 저의 화두로 자연스럽게 설정된 것 같습니다. ('같습니다'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이러한 저의 문제의식의 과정을 정리하는 것이 사후적 의미부여이기 때문입니다.)
10년 후에 사십대 초반이 되어도 다시 이 문제를 저의 화두로 삼을지 모르겠지만, 그때가 되면 역시 또 다른 무게로 다가올 것입니다. 이렇게 제 나이 서른에 '살아간다는 것'과 '희망'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것은 앞으로 어떻게 저의 삼십대를 살아갈 것인가, 그리고 삶의 중요한 전환점에서 삶의 목표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인 것입니다.

제가 '희망'을 화두로 잡은 또 하나의 이유는 청년기의 특성에서 기인한다고 생각됩니다. 굳이 모택동의 청년세대론을 들지 않는다 하더라도 청년기의 진취성은 긍정적인 의미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삶과 세상에 대한 이상을 갖고 열정적으로 그 이상을 추구하는 것은 매우 소중한 자산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그러한 희망을 갖는 것 자체를 원천봉쇄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본 영화 중에 '메이드 인 홍콩'이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홍콩의 빈민가에서 살아가는 청소년들에게 현실이라는 것이 어떻게 그들의 희망을 억누르고 있는가를 진지하고 밝게 얘기한 영화로 저는 해석합니다. 결국 아주 소박하지만 진지한 삶의 희망을 갈구했던 두 명의 주인공은 병사(病死)와 자살로 삶을 마무리합니다. 그러면서 마지막에 모택동의 청년에 대한 희망적인 경구가 나레이션으로 나오면서 영화가 끝납니다. 청년세대의 진취성에 매우 긍정적이고 혁명적인 의미를 부여하였던 마오의 경구가 조롱당하는 현실을 얘기하려고 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메이드 인 홍콩'만이 아니라 '메이드 인 한국', '메이드 인 지구'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의 시대를 살아가는 지구상의 그 어떤 나라에서든 '꿈과 희망을 갖고 살아가야 할 미래의 자산'이라는 청년들에게 있어서 '꿈과 희망을 갖는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어렵습니까?
지금의 10대, 20대, 나아가 저와 같이 청년이기를 강변하는 30대 초반에게까지 현실이 이렇게 무참히 '희망' 자체를 원천봉쇄 한다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앞으로 최소한 30년 이상은 희망을 갖고 살아가기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장 정렬적으로 희망을 갈구하면서 살아가야 할 이 시기에 갖지 못한 희망이 40대, 50대가 되어서 제대로 살아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나이가 되어서 다시 그 다음 세대의 청년들에게 희망의 터전을 만들어 줄 수도 없을 것입니다. 청년들은 아직도 '꿈과 희망을 갖고 살아가야 할 미래의 자산'이어야 합니다. 현실이 그것을 거부한다면, 그러한 현실을 거부해야 할 것이고요. 그것이 '꿈과 희망을 갖고 살아가야 할 미래의 자산'으로서 청년들의 임무와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이 서른에 '미래의 자산'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이제는 '현재의 자산'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말장난 같지만 미래와 현실을 이어가는 청년기가 30대 초반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미래의 자산'이기에는 너무도 분명히 현실의 주체로 서 있어야 하고, '현재의 자산'이기에는 아직 뿌리가 갚지 못합니다. 청년에서 장년으로 넘어가는 시기에 있다고 얘기할 수 있을까요? 이러한 때일수록 청년기적 진취성을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더더욱이나 진취성이 극도로 빈약한 저의 경우는 특히 중요합니다. 앞으로 살아가면서 무수히 닥쳐올 삶의 힘겨운 앞에서 쓰러지지 않고, 쓰러진다고 하더라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미래이자 현재의 자산'은 바로 '희망을 잃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희망을 원천적으로 부정하는 현실에 맞서 끝까지 희망을 만들어 가는 삶 자체가 지금의 나이에 매우 중요한 자산이라고 생각합니다.

세 번째 이유는 요즘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과 관련된 것입니다.
이른바 IMF국면이 시작되면서 짧은 시기에 감당하기 어려운 일들이 너무나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실직, 자살, 노숙자, 이혼 생활고 등의 단어들을 매일같이 들으면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단어들이 이 사회의 어두운 곳을 살아가는 일부의 얘기들이 아니라 너무도 많은 이들의 현실이고, 우리들 자신에게도 현실적인 위협으로 다가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비관론자가 아니라 하더라도 너무도 우리를 숨막히게 하는 현실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면서 여기저기에서 많은 사람들이 '희망'에 대해서들 얘기하고 있습니다. 각자가 얘기하는 희망의 의미가 다르기는 하지만, 우리의 현실이 아주 절박하게 희망을 갈구하게 한다는 것에 대한 반증입니다.
과거 60~70년대에는 '우리도 한 번 잘살아 보세'라는 박정희 정권의 관변이데올로기가 대변하는 것처럼 먹고 사는 문제 자체가 극도로 힘겨운 현실에서 '잘 살아 보는 것'이 희망이었습니다. 80년대 들어와서는 아이러니하게도 '정의사회 구현'이라는 군사정권의 통치구호가 대변하듯이 불의와 억압이 없는 정의롭고 사람 사는 것 같은 세상이 희망이었습니다. 그런데 90년대 들어서 이제 21세기를 앞두고 있는 시점에서 우리는 '희망'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우리도 이제는 잘 살게 되고, 정의로운 세상이 되어서 희망이 필요없어진 것이 아닙니다. 다시 먹고 사는 기본적인 문제에 심각하게 직면해야 하고, 진실로 정의롭고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갈망해야 하는 세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잘 살아보는 것, 정의로운 세상, 사람답게 살아보는 것 등의 희망이 더욱 절박한 시점에서 그러한 희망 자체가 없어져 버린 것입니다. 그냥 살아가는 것, 또는 살아남는 것이 절대절명의 과제가 되어 버렸습니다. 70년대에는 부정과 불의에 대한 고발이 배부른 사치였고, 80년대에는 정의로운 사회에 대한 의미와 방향을 얘기하는 것이 공허하게 들렸다면, 90년대에는 희망을 얘기하는 것이 몽롱하거나 귀찮게 들리는 것은 아닌가 하는 비관적인 생각도 들게 합니다.
우리의 현실이 이렇게 철저하게 희망을 무너뜨린다면, 그러한 현실에서 살아가기 위해 (또는 살아남기 위해) 더욱 철저하게 희망이라는 화두를 부여잡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는다면 살아갈 수도, 살아남을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 희망이 질식당하는 만큼 절실히 요구되는 현실을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제가 자주 접하게 되는 사회과학 서적이나 문건에서 정리되는 개념화된 현실이 아니라 바로 지금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바로 그 삶을 정면으로 대면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미지의 파랑새를 찾아 온갖 고생을 하며 헤매다가 결국 가장 소중한 것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다라는 동화가 생각납니다. 희망이라는 문제도 역시 어떤 심오하고 박식한 철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추구한다고 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철학적 문제의식은 필요하겠지만, 그 철학적 문제의식이라는 것도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의 문제와 동떨어진 공허한 지적유희라면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희망이라는 문제는 바로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현실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현실이 희망을 강렬하게 요구하면 할수록 희망은 더욱더 현실에서 출발되어야 합니다. 결코 '미지의 어떤 것' 또는 '유토피아'가 우리의 희망일 수는 없을 것입니다.
또 희망은 어느 곳에서 찾아지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어느 곳엔가 희망이 존재하는데 우리가 그것을 희망으로 생각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고, 자기 마음속에 이미 희망이 있는데 우리 스스로가 그것을 들추어내지 못하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우리가 살아가는 어느 곳엔가 희망은 존재하고, 우리 마음속에 역시 희망은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가 어떤 것을 희망이라고 생각한다고 해서 희망이 살아 움직이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아무리 희망을 간직하면서 살아가려고 해도 우리의 현실이 그것을 용납하지 않는다면 그 희망을 지탱한다는 것 자체가 매우 어려운 것이 바로 우리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희망을 찾는다'라는 표현보다는 '희망을 만들어간다'라는 표현을 쓰고 싶습니다. 희망의 근거는 현실에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들이 살아가는 현실에서 그 근거를 찾아야 하겠지요. 그리고 그 희망의 근거를 가슴속에 간직해야 합니다. 그러나 현실에 존재하는 희망의 근거도, 희망의 근거를 가슴속에 간직하면서 살아가는 것도 철저하게 현실과 대면하여 스스로가 만들어가고 키워가지 않는다면 무기력한 희망일 뿐입니다. 차라리 희망이라기 보다는 갈망에 가까울 것입니다.
이런! 얘기가 철학세미나 하는 것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아무튼 이제부터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과 씨름하면서 희망의 근거를 만들어 보렵니다.

동지들의 삶은 모두가 어떻습니까?
고등학교 졸업하고 직장 다니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조건에 만족하면서 살아가려는 동지, 직장 다니다가 결혼해서 달콤한 신혼생활을 즐기고 있는 동지, 만족스러운 직장은 아니지만 결혼하고 애도 생겨서 열심히 살아가려고 하는 동지, 어린 아이들 둘을 키우느라 부부가 맞벌이하면서 아등바등 살아가는 동지, 노조위원장하면서 파업투쟁까지 했다가 회사가 문을 닫는 바람에 어렵게 살아가다가 멀리 군산으로 가족이 모두 옮겨간 동지, 저처럼 노동운동 하겠다고 울산에 내려와서 어려운 조건에서도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동지, 대학원 졸업하고 유학과 결혼문제를 같이 고민해야 하는 동지, 대학졸업하고 몇 년 동안 직장을 구하지 못해 백수생활을 하고 있는 동지... 제 수첩 첫 장에 쓰여 있는 몇몇 동지들의 이름을 보면서 그 동지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나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살아가는 조건과 방식들이 모두 다양하기는 하지만 모두 비슷한 나이 또래인데다가 아직은 그렇게 크게 차이나는 삶들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나이가 나이인지라 대부분 직장생활을 하고 있고, 결혼하여 애들이 있는 동지들도 많습니다. 그러다보니 만나서 얘기하다보면 살아가는 것이 학교 다닐 때 만나서 얘기할 때와는 많이 다릅니다. 사는게 장난이 아니라는 것을 실감하는 때입니다. 저도 하는 일이나 살아가는 조건이 일반적인 상황과 다소 다르기는 하지만 사는게 장난이 아니라는 것을 실감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당장 먹고사는 문제에서부터 장난이 아닙니다. 학생일 때는 학생이라고 집에서 돈을 타고 썼지만 이제는 그럴 수도 없습니다. 내가 선택한 일이니 만큼 당연히 제가 제 앞가림은 하고 살아야 합니다. 물론 집에 손을 벌릴 형편도 아니고요. 그렇다고 제가 하는 일이라는 것이 월급이 나오는 것도 아니어서 생계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또 다른 방면으로 알아보아야 합니다. 운동을 하면서 가장 어려운 문제중의 하나가 재정문제라는 것은 저만의 문제는 아입니다. 그러다보니 대부분 아르바이트를 해야 합니다. 그래도 저는 운이 좋아서 2년쯤 전부터 지금하고 있는 일을 구해서 조금은 숨통이 트입니다. 울교협에서는 제가 제일 갑부입니다.
하루 여섯 시간 일해서 월급 50만원(60만원이었는데 올 초에 10만원 삭감되어서 지금은 50만원입니다) 받으면 방값 11만원, 각종 세금이나 공과금으로 2~3만원, 교통비 5~6만원, 식비 5~6만원하면 기본적으로 나가는 것이 25만원 선입니다. 최근에는 적으면 5만원에서 많으면 10만원까지 저금을 할 수 있는 여유도 생겼습니다. 그러면 10만원에서 15만원 정도 쓸 수 있는 돈이 남습니다 처음에는 이 정도면 그런대로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택도 없습니다. 담배값에 술이라도 한 두 번 먹게 되고, 중간에 신발이나 옷도 사고, 책도 사고 하다보면 그마저도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립니다. 결국 월말이 되면 3~4만원씩 돈을 꿔야 됩니다. 어쩌다가 제주도나 서울이라도 갖다오면 두 달 동안은 완전 꼼짝마라 하고 초긴축을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서 2년을 아르바이트하면서도 통장에 있는 돈은 백 만원을 조금 넘을 뿐입니다. 이러다가 실직이라도 되면 6개월 정도 겨우 버틸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래도 저는 아직 혼자 살고 주위에 제가 당장 걱정해야 하는 사람이 없어서 월 50만원으로 빠듯하지만 살아갈만 합니다. 그런데 결혼하고 가정을 이루어 살거나, 주위에 생계를 지원해야 할 조건이라면 상황은 더욱 어려워집니다. 요즘 제가 받는 월급정도면 저임금이기는 하지만 극도의 저임금은 아닙니다. 하청업체에서 하루 종일 일하고도 저보다 조금 많은 70~80만원선을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중소기업 노동자들은 여성노동자들의 경우 저와 비슷하게 받거나 아주 많이 받아도 100만원을 넘기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현대자동차와 같은 대공장 노동자들의 경우 매일 두시간씩 잔업하고, 한 달의 반은 야간노동을 하면서 받는 월급이 100만원에서 150만원 사이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동지들도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경우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대부분 이 정도 선들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월급 50만원 받는 입장에서 100만원을 받는 사람을 보면 나보다 두 배는 받으니까 살만하겠다고 생각이 들 수는 있을 것입니다. 총각일 때야 어느 정도 살만하겠지만, 결혼해서 애라도 있으면 50만원이나 100만원이나 큰 차이가 없더군요. 나중에 애가 둘 정도 되고 그 애들이 크면서 학원도 보내고 학교도 보내고 하다보면 최소 150만원은 받아야 아껴 쓰면서 겨우 살아갈 수 있다고 합니다. 50만원이나 100만원이나 150만원이나 50보 100보입니다. 요즘 맞벌이들도 많이 한다고 하지만 부부가 맞벌이해 봐야 둘이 버는 것이 150만원에서 200만원 선입니다. 하지만 맞벌이하다보면 애들 맞겨야 하는 문제 때문에 돈은 더 들어가게 됩니다. 결국 깝깝해서 맞벌이까지 해보지만 생활은 특별히 나아지는 것이 없습니다.
먹고살려고 아등바등거린다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실감을 하는 샘이지요. 이렇게 먹고살려고 허리띠 졸라매고 살아도 모아둔 돈이 많지도 않은데 요즘처럼 실직이라도 당하면 정말 캄캄합니다. 노숙자, 버려지는 아이들, 굶는 것, 자살, 돈을 벌기 위해서는 몸이라도 팔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이런 우리의 현실에서 나옵니다. 현대자동차에서 정리해고나 무급휴직을 당한 사람들은 요즘 살아가는게 말이 아닙니다. 울산을 떠나는 사람들도 많고, 포장마차나 노가다를 다니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리고 섣불리 장사에 뛰어들었다가 수백에서 수천을 날렸다는 얘기도 심심치 않게 들립니다. 그나마 최근에는 현대정공에서 갤로퍼 물량이 밀렸다고 두 달 동안 한시적으로 임시직을 구한다고 해서 현대자동차 다닐 때와 같은 일을 하면서 그때의 반 정도의 임금을 받으면서도 일하겠다는 사람들이 줄을 섰습니다. 울산은 그래도 아직 조금은 일자리가 있어서 이 정도입니다.

삶의 여유를 가지면서 살아간다는 것은 또 어떻습니까? 우리는 흔히 아침 8시에 출근해서 저녁 5시에 퇴근하고, 나머지는 자기 시간을 나름대로 가지면서 살아가는 것을 정상적인 생활사이클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과연 얼마나 이런 '정상적인 생활사이클'을 갖고 살아가는지는 의문입니다.
웬만한 제조업 노동자들은 8시까지 출근해서 잔업까지 하면 저녁 7~8시에 일이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공장과 주거공간이 가까운 거리에 있으면 몰라도 멀리 떨어져 있을 경우에는 빠르면 6시나 늦어도 7시에는 일어나서 아침을 대강 차려먹고 출근을 합니다. 그리고 저녁 7~8시에 일을 마쳐서 그대로 집에 들어온다고 해도 밤 9~10시가 되어버려 저녁 먹고 나서 잠시 TV 보다가 잠자리에 들게 됩니다. 제조업만이 아닙니다. 은행 같은 금융업, 배달업무를 하는 유통업, 백화점이나 일반 상가 등의 개인 서비스업, 일반적인 사무직 등 대부분이 빠르면 저녁 7시나 늦으면 자정까지 일을 하고 마칩니다. 일을 마치고 나서 개인적인 취미생활을 한다거나 나름대로의 자기시간을 갖는다는 것이 실제로 상당히 어렵습니다. 결혼하기 전에는 그렇다 치더라도 결혼하고 나서는 여러 가지로 집안 일들이 많이 생겨서 더더욱 자기시간을 갖는다는 것이 어려워집니다.
그래도 이런 경우는 그나마 나은 경우입니다. 버스나 택시 운전사, 병원 간호사, 2교대나 3교대로 일하는 제조업 노동자, 파트타임 노동자 등 근무시간이 불규칙한 경우는 '정상적인 생활 사이클'을 갖는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 합니다. 특히 교대제와 같은 경우 야간노동이 많이 이루어지는데 야간노동이 얼마만큼 사람을 육체적·정신적으로 피로하게 만드는지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정도입니다. 주야 2교대인 경우는 일년의 반은 정상적인 생활을 갖기 어렵고, 3교대제인 경우는 매우 불규칙적인 근무형태 변경으로 계획적인 생활을 하기가 상당히 어렵습니다. 특히 3교대제의 경우 대부분이 특별한 휴일이 없이 교대제가 이어지기 때문에 일 자체가 힘겨운 것보다 교대제 자체가 상당한 힘겨움으로 다가옵니다.
일하면서 살아가는 조건들 자체가 이런데 TV에 나오는 것처럼 퇴근하고 나서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자상한 아버지, 나름대로 교양도 쌓고 취미도 즐기면서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가는 멋있는 인생이라는 것이 얼마만큼이나 가능할는지 의문입니다.
여자들의 경우는 더욱 어렵습니다. 요즘 맞벌이를 많이 하는데 새벽 일찍 일어나서 자신은 물론이고 남편과 애들 출근과 등교 준비하고, 저녁까지 일하고 나서 집에 들어오면 다시 밀린 집안 일들을 처리해야 합니다. 조그마한 가게라도 한다쳐도 늦은 시간까지 가게 일을 보고 나서 집안 일에 매달려야 하는 것은 마찬가지이고요. 그나마 전업주부로 있는다고 해도 집안 일이라는 것이 만만한 것이 아닐뿐더러 빡빡한 살림을 꾸려갈려면 간단한 부업꺼리라도 찾지 않을 수 없는 형편입니다.
어렸을 때 어른들이 "사는게 뭔지"라고 한탄조로 얘기했었던 것들이 이런 현실에서 나오는 얘기들이었습니다. 그나마 젊었을 때는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한다고 회사가 마음에 안들면 쉽게 옮기기도 하고, 일을 찾아 여기저기 돌아다녀도 봅니다. 그러나 결혼하고 가정을 갖게 되면 그런 것은 쉽게 엄두가 안남니다. 힘들고 어려워도 가정을 꾸려가고, 애들 키우기 위해서는 지금 있는 직장을 열심히 다니는 수밖에 별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직장생활을 하는 경우 조그마한 것이라도 자기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들은 굴뚝같지만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조그마하나마 자기 일을 하는 사람들은 먹고살려고 바둥거리다보면 오히려 더 자기시간을 갖는다는 것이 어려워집니다. 요즘처럼 실업자가 넘쳐나는 경우에는 임금이 깎이고 일하는 시간이 더 늘어나도 "그래도 일자리가 있는 것이 어디냐"면서 열심히 다녀야 합니다.

이렇게 먹고살기 위해서 삶에 쫓기면서 살아가다 보면 사람들과의 관계도 알게 모르게 피폐화 됩니다.
회사에서는 각종 실적이나 능률이니 하면서 오죽 쪼아댑니까? 사장이나 관리자는 "틈만 보이면 딴 생각한다"느니, "요즘 하는 일이 왜 이 모양이냐"느니 하면서 쪼아댑니다. 그런 속에서 윗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아부하는 사람, 자기 일만 적당히 하면서 은근슬쩍 책임을 미루는 사람 등을 보면 더 열불이 납니다. 영업직이나 서비스업 등 직접 사람들을 대면하면서 일을 하는 경우는 다양한 사람들과 부딪히면서 오는 스트레스 또한 그에 못지 않게 심합니다.
물론 그 와중에는 정말로 착하고 좋은 사람들도 많습니다. 이렇게 일을 하면서 쌓이는 스트레스가 있으면 그런 마음 맞는 사람들과 술이라도 한 잔 하면서 스트레스를 풀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해도 기본적인 조건 자체가 모두 살기 위해 바둥거려야 하고, 그 와중에 개인주의적이고 이기적인 경향들이 팽배해지면서 서로의 관계들이 자기중심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어디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들과의 관계들만 그렇습니까? 집안식구나 어릴적 친한 친구들도 살다보면 자기 삶에 묶여 연락도 제대로 못하고, 어떠다 명절에나 볼 수 있으면 보는 것이 거의 전부입니다. 요즘은 객지에 나가 사는 경우들이 많아지면서 더더욱 그렇게 됩니다. 그렇게 살다보면 관계라는 것들이 현재의 살아가는 조건들 속에서 점차 협소하게 이루어지고, 지속성을 가지면서 관계에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이 어려워집니다. 심한 경우 자기계산 속에서 관계들에 의미부여가 되는 경우도 솔직히 많습니다. 하다 못해 가족끼리도 돈 잘 버는 형제와는 친하고, 어쩌다 돈문제로 사이가 극도로 나빠지는 경우도 허다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도 우리나라는 '정(情)'이라는 것이 있다고 하지만, 살아가면서 닥쳐오는 현실적인 문제들 앞에서 정(情)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이 많지는 않습니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현실을 경제적인 문제, 삶의 여유, 사람들과 관계라는 점에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런 문제들이 우리들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가장 직접적이고 현실적인 문제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런 현실이 결코 비관적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냉철한 우리들의 현실 그 자체라고 생각합니다. 이게 지금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세상이고, 현실인 것이지요. 물론 세상은 이것만이 전부는 아닙니다. 이것만이 전부인 세상은 살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라, 살아가야 할 의미를 가질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점들이 지금 우리들의 삶을 규정하는 주요한 지점이라는 것을 애써 무시해서도 안될 것입니다. 살아가는 것이 장난이 아닌만큼 냉철하게 우리의 현실을 바라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먹고 사는 문제'가 우리들의 삶을 주요하게 규정하고 있습니다 흔한 말로 돈 없고 빽 없는 집안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몸뚱이 하나라도 성하게 간직하면서 열심히 일해야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일부 돈 많은 집 사람들과 (그 보다 더 일부인) 졸지에 돈벼락을 맞은 사람들, 악착같이 해서 성공한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히려 제가 얘기한 대체적인 경우에도 못미치는 극빈층의 사람들은 '먹고 사는 문제'에 허덕이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사활을 걸거나, 거의 반은 포기해야 하는 것이 현실이기도 합니다. 문제는 그처럼 극도로 열약한 조건에서 살아가는 사람들도 무수히 많다는 것이고, 더욱 심각한 것은 최근에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진 것은 몸뚱이 하나 뿐이어서 자시의 노동력을 자본가에게 팔아야만 살아갈 수 있는 자본주의 사회입니다.
북한이나 아프리카의 극빈국들은 먹을 것 자체가 부족해서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는데, 이 나라는 오히려 넘쳐나는 것 때문에 죽어가고 있는 현실입니다. 생산능력은 넘쳐나서 생산과잉이 문제라고 다들 얘기하는데, 무수한 사람들이 가장 기본적임 '먹고 사는 문제' 때문에 도둑질을 하고, 자살을 하고, 가출을 하고, 거리를 해메고, 몸을 팔고, 구걸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문제가 되는 과잉생산능력을 만들고 움직여온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과잉시설과 과잉생산물 때문에 생계를 위협받아야 하는 이율배반적인 현실이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입니다. 오히려 거대 재벌이나 고소득자들은 사업이 확장되고, 소득이 높아지고 있다고 합니다. 부익부 빈익빈이 심화되고, 소위 '중산층'이 몰락하고 있다고 난립니다. 현실이 이런데 TV에 나와서 재벌도 고통분담을 하고 있다고 나름대로 진지한 표정으로 얘기하는 유식한 분들을 보면, 고뇌에 찬 그 얼굴에 침이라도 뱆어 주고 싶습니다.
그것이 어디 우리나라 안에서만의 일입니까? 아프리카, 남미, 동유럽, 동남아시아의 많은 나라들에서 수많은 이들이 기아에 허덕이고 (세계적으로 못먹어서 영양실조에 걸리거나 그야말로 굶어 죽는 인구가 5억이 넘는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돈으로 하루 1300원 내외의 돈 밖에 벌지 못하는 인구가 8억이 넘는다고 합니다), 소위 선진국이라는 나라들에서 대규모 실업자와 홈리스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감히 상상하기도 어려운 막대한 자금을 움직이면서 세계를 무법자처럼 돌아다니고 있는 초국적 자본이라는 것들은 순간에 웬만한 나라는 주무를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한 위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엄청나게 발달한 기술과 생산능력이 전세계적으로 과잉경쟁과 생산과잉을 불러와서 이제 세계대공황으로 나아가고 있는 시점입니다. 현재 전세계적 생산능력의 70~80%로도 전세계 사람들은 충분히 살아갈 수 있을 정도가 되었는데도 수 억의 사람들이 기아와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고, 실업이 전세계적인 문제로 나타나고 있는데 반해, 초국적 자본들은 투자할 곳을 찾지 못해 난립니다. 요즘 신문지상에 나오는 표현으로 '20대 80의 사회'입니다. 그러나 '20대 80의 사회'라는 것은 신문에서 얘기하는 것처럼 80을 위해 20이 희생해야 살아갈 수 있는 사회가 아니라(자본과 언론은 정리해고를 합리화시키기 위해 이런 식의 표현을 사용하였습니다), 20을 살리기 위해서 80이 희생되어야 하는 사회입니다(최근에 많이 읽혀진 '세계화의 덫'이라는 책에서는 이런 의미로 이 표현을 사용하면서 세계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그 구체적인 사례들을 자세히 얘기하고 있습니다).

다시 우리가 살아가는 구체적인 현실로 내려와서 이런 현실 속에서 우리들은 희망의 근거를 어떻게 만들어가야 할지 생각해 봐야겠습니다.
동지들은 스트레스가 쌓이거나 살아가는 것이 힘들어지면 어떻게 합니까? 저는 주로 술을 마십니다. 우리 사회에서 가장 흔하게 스트레스를 풀거나, 일시적으로나마 삶의 힘겨움을 잊을 수 있는 방법이 술을 마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술을 마시는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열 번을 마시면 반은 공식적으로든 개인적으로든 사람들과 어울리기 위해서 마시고, 2~3번은 일과 생활에서 쌓인 피곤과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서 마시고, 1~2번은 반가운 이와 함께 즐거운 시간을 위해 마시고, 가끔은 사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마시기도 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물론 술을 마시지 못하거나 별로 즐기지 않는 동지들은 다르겠지만, 대체적으로 사회생활 속에서 술을 마시게 되는 경우를 따진다면 이렇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어떤 때는 술을 마시는 것이 스트레스가 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기분을 풀거나 힘겨움을 잊기 위해서 술을 마십니다.
우리나라는 음주문화, 특히 폭음문화가 상당히 발달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만큼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쌓이는 피로와 어려움을 풀고 달랠 수 있는 방법이 음주문화를 중심으로 한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음주문화와 연결되는 것이 이른바 향락문화라고 불리는 나이트클럽, 노래방이나 단란주점 등 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향락문화는 다시 여성접대부로 이어지면서 이른바 섹스산업을 발전시킵니다. 결국 힘들게 일하고 사는게 어려우면 술 한 잔 마시면서 춤 추고 노래 부르다가 여유가 있으면 여자 하나 사서 하루밤 놀면서 풀어보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는 지극히 남성중심적인 사회에서 남성들에게 주로 열려 있는 방법이기는 합니다.)
그래서 일까요? 이른바 IMF체제로 들어서고 나서 술과 담배의 소비량이 늘어났고, 향략산업은 할만하다고 합니다. 덩달아 그에 기생하는 조직폭력배들도 다시 설쳐댄다고 합니다. 있는 놈들이야 IMF체제와 상관이 없어서 (오히려 이득을 보고 있기에) 더 좋은 술 마시면서 여자들 끼고 놀겠지만, 우리 같은 노동자들은 한 번 마실 때 씀씀이는 대폭 줄어듭니다. 그래도 술은 자주 마시게 됩니다. (어릴 적 제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실직이 되면 깡소주라도 마셔야지 그렇지 못하면 터질 것 같아서 살아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 사회는 '술 권하는 세상'인가 봅니다.
그런데 우리가 술을 자주 마시게 되는 것은 스트레스를 풀고, 취해서 잠시라도 힘겨운 것들을 잊고 싶은 것만은 아닙니다. 우리는 술을 마실 때 혼자 마시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공식적인 회식이나 사업적인 술자리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몇몇씩 어울려서 술을 마십니다. 그러면서 세상 돌아가는 얘기, 살아가는 얘기, 시덥잖은 농담 등을 합니다. 술기운을 빌어 평소에 하기 어려웠던 얘기도 하고, 자기 하소연도 해보고, 열띤 토론도 하곤 합니다. 그러다가 가끔 너무 지나쳐서 싸움으로 번지기도 합니다. 직장 동료나 친구들과 어울려서 함께 하는 술자리에서 우리는 잠시 직장이나 일상에서의 긴장에서 벋어나 삶에 찌들린 서로를 확인하고 위안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단순히 술을 마시기 위해서보다는 그렇게 서로 어울리는 술자리가 좋아서 자주 술을 마시곤 합니다. 어울려 술을 마시다보면 일과 삶 속에서 쌓였던 오해가 풀리기도 하고, 삶의 힘겨움을 하소연으로 풀어보기도 하고, 다를바 없는 서로의 처지를 확인하면서 서로 위안도 해보고, 뭔가 조금은 나아진 새로운 관계를 위해 의기투합도 해 봅니다. 술자리가 주는 가장 큰 위안이 이렇게 일상의 긴장에서 다소 벋어나 서로의 관계를 새롭게 확인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그런 긴장의 이완이 일시적인 것이고, 새롭게 확인된 서로의 관계를 정말 새로운 관계로 만들어 가는 것이 어려운 것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술자리에서 진정으로 위안을 얻고 찾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또 다른 '술 권하는 세상'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동지들은 일을 마치고 나서 잠자리에 들기 이전에 시간을 어떻게들 보내십니까? 대부분 누구 만나서 술을 마시는 일이 없으면 막바로 집에 들어갑니다. (특별히 자신이 개인적으로 즐기는 활동이나 하는 일이 있다면 그를 위해서 일과 이후의 시간을 상당히 할애하기는 하겠지만은 정신 없이 돌아가는 현실에서 그런 여유나 일을 갖는다는 것이 그리 쉬운 것이 아닙니다.) 집에 들어가면 저녁을 먹고 나서 간단히 집안 일을 처리하고는 대부분이 TV를 켭니다. 보통 그럴 시간이 밤 9시 이후가 되기 때문에 뉴스를 보면서 세상 돌아가는 것을 지켜보다가 10시대에 이어지는 드라마를 보고 나서 다음 날 출근을 위해 잠자리에 들어갈 것입니다. 주말이나 휴일에도 점점 어디 나가거나 무슨 일을 하는 것이 귀찮아져서 TV나 비디오와 함께 보내는 경우가 많아집니다.
편하게 누워서 TV 앞에 있으면 이런 저런 복잡하고 짜증나는 생각들을 하지 않아서 좋습니다. 그냥 TV에서 나오는 얘기들을 듣고 있다보면 아주 편안하게 TV에 빠져들게 됩니다. 아주 잘생긴 배우들이 나와서 우리들이 살아보지 못한 새로운 세상으로 우리들을 이끌어 들이면서 우리들의 힘겨운 현실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게 해주건, 우리들이 살아보고 싶은 그런 삶들을 보여주면서 대리만족을 시켜주기도 합니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현실같기는 하지만 지금 우리들이 발 딛고 살아가는 현실의 얘기는 아닌 '진짜 같은 거짓말'을 하면서 말입니다. 아예 황당한 '진짜 거짓말'이라면 우리는 "TV니까" "영화니까"하면서 재미있어서 '진짜 거짓말'을 즐깁니다. 살아가는 얘기 같으면서도 우리들의 삶과는 다른 '진짜 같은 거짓말'이라면 "나도 한 번 저렇게 살아 봤으면" "언젠가 나도 한 번쯤은 저와 비슷하게라도 살 수 있겠지"라면서 꿈과 희망을 가져 봅니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것과 아주 비슷한 '정말 진짜 같은 거짓말'이라면 "사는게 왜들 저렇게 힘드냐"하면서 한숨을 내쉬거나, "우리만 힘든게 아니라, 모두들 다 저렇게 힘들게 살아가는구나" "우리보다 더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도 저렇게 많은데"하면서 위안을 얻어봅니다. 그렇게 우리는 TV의 매력에 빠져들면서 '진짜 같은 거짓말'에 즐거움을 얻고, 희망을 가져보고, 위안도 얻습니다.
정말 세상이 험악해지고 살아가는 것이 힘들어지면서 TV를 비롯한 매스미디어의 매력은 더욱 커져만 갑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어설프게 진짜 같은 거짓말'은 잘 보지 않습니다. 아예 "이것이 진짜 거짓말이다"라면서 더욱 황당하고 자극적인 것들을 쏟아내면서 삶의 즐거움을 TV나 영화의 거짓말들 속에서 찾게 하건, "이건 우리들의 삶이다"면서 성(性), 사랑, 일상, 사회문제 등을 진지하거나 비뜰어서 얘기하면서 삶의 고민들을 TV나 영화 속에서 풀도록 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현실의 문제를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재미있는 영화나 보고 잊어라"거나, "나는 그 영화를 보면서 우리 문제를 다시 생각하게 됐어"라고 얘기합니다. 비약을 하면, 우리는 TV나 영화의 매력에 사로잡히면서 힘겨운 현실을 외면하기 위해서 TV나 영화에 빠져들게 되고, 우리들이 살아가는 현실에서가 아니라 TV나 영화 속 속의 현실을 통해 현실을 생각하고 고민하게 되어가고 있습니다.
'진짜 거짓말'들이 흥행에도 성공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몰고 다니지만, 그래도 우리들의 기억 속에는 자기들의 얘기를 담은 '정말 진짜 같은 거짓말'들이 오래 기억됩니다. 그리고 그런 영화나 드라마 얘기들을 나누면서 우리들은 새삼스럽게 자신과 서로들의 처지를 확인합니다. '진짜 거짓말'은 그저 농담거리나 가십거리 정도 이상이 될 수는 없지만, '정말 진짜 같은 거짓말'은 우리를 확인하게 하면서 서로에게 동료의식을 갖게 하기도 합니다 (제가 어릴 적에 보았던 '달동네 사람들'이나 '한지붕 세가족' 같은 드라마들이 대표적인 것이겠지요).

생각을 정리하면서 써 내려가다보니 점점 장난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편하게 '희망'이 올해 저의 화두였던 만큼 생각을 정리해보자는 정도로 시작을 했는데, 막상 일을 벌려 놓으니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저 개인의 문제에서 우리들 일반의 문제, 살아가는 구체적인 문제들에서 총체적인 사회나 구조의 문제들을 전체적으로 생각해보면서 정리한다는 것이 이렇게 힘듭니다. 하긴 산다는 것이 만만하지 않은데 그 문제에 대해서 어설프게라도 정리해본다는 것이 만만하겠습니까? 좀 벅차긴 하지만 일단 칼을 빼어든 이상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마무리는 지어야겠습니다. 어설프게라도 이렇게 한 번 생각을 정리해 보는 것도 의미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벌써 12월이 코앞으로 다가왔는데 연말이 되기 전에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연말인사와 함께 동지들과 함께 나누고 싶은 저의 화두와 고민을 쓸데없이 장황한 이 글에 담아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잠시 옆으로 셌는데 생각을 계속 이어가야겠습니다.

술자리와 TV말고도 스트레스를 풀고 삶의 힘겨움을 달랠 수 있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저는 제 개인적인 조건들을 중심으로 하면서도 대체적으로 사람들이 쉽게 찾게되는 방법이 술자리와 TV라고 생각을 해서 그를 중심으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악착같이 돈을 버는 것 그 자체에 커다란 삶의 의미를 가지면서 한 번 돈을 쓰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푸는 삶도 있을 것이고, 운동이나 여행 등으로 푸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그 외의 자신만의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풀어 가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방법으로 스트레스를 풀고, 삶의 위안을 삼든 삶의 힘겨움에 대한 근본적인 치유가 되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그렇게 한 번씩 스트레스를 풀면서 다시 '먹고 살기 위해서' 바둥거려야 합니다.

생각을 여기까지 정리하면서 저는 나름대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단초 하나를 발견하였습니다. 우리들의 삶을 무겁게 짖누르는 공통적인 어려움과 고통의 유사성, 그 속에서 확인되는 서로간의 관계의 근접성, 그리고 그 속에서 나오는 동질감. 결국, 나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이렇게들 어렵고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고, 그렇게들 똑같이 살아가고 있기에 서로를 연민하면서 쉽게 융화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들의 삶을 규정하는 근본적인 문제들로 인해 이러한 동질감들이 쉽게 이완되고 변질되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삶의 근본적인 동질성에서 나오는 이러한 것은 이해관계의 동질성에서 출발하는 집단이기주의와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왜곡된 동질성이 다시 우리 삶에 질곡으로 다가오면서도 끝임없이 이런 삶의 동질성을 확인하면서 그에 의지하거나 진정한 동질성의 실현을 추구합니다. 얘기가 다소 개념적으로 흐르는 감이 있기는 하지만, 우리는 서로가 같은 처지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면서 상대를 동료나 이웃, 또는 친구로 인정하게 되고, 그러한 인정은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것으로 자연스럽게 나아갑니다. 이러한 동질성의 확인은 동시에 우리와는 다른 이질적인 사람(또는 집단)에 대한 확인을 동시에 수반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이질성이 적대적인 것으로 확인이 되는 순간 적대적인 이질성이 되는 것입니다.
개념적인 얘기에서 빠져 나옵시다.
'삶의 동질성', 또는 '동질성에 대한 확인' 바로 여기에서부터 저는 희망의 근거를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이 미칩니다. 살아간다는 것이 사람들과 부대끼면서 즐거워도 하고, 힘겨워도 하는 것이라면 바로 이러한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힘겨움을 치유하고, 좀더 나은 살을 향한 희망의 근거는 만들어지는 것이지요. 결국, 처음에 '희망'을 저의 화두로 삼은 이유를 생각하면서 얘기했던 사회적 관계(또는 사회적 존재)라는 문제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정확히 얘기하면, 처음부터 사회적 관계라는 문제설정을 기본으로 하여 얘기를 풀어간 것이기에 '희망의 기본적인 단초로서 사회적 관계'라는 지점까지 이른 것이지요.
이제 이 지점에서부터 희망의 근거를 찾고, 희망을 어떻게 만들어갈 것인가를 생각해 보렵니다.

어른들이 흔히 살아가는 것이 어렵고 힘들어도 자식들 키우기 위해 야무지게 마음먹고 살아간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저는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아서 현실로 느끼지는 못하지만) 가정을 이루어 자식을 낳고 살다보면 그에 따르는 무거운 현실적 책임이 질곡으로 작용하기는 하겠지만, 그 속에서도 중요하게 살아가야 할 이유가 생깁니다. 바로, 사랑하는 부인(또는 남편)과 자식입니다. 가정이라는 것도 삶의 안식처가 아니라 사회적 관계의 일부이고, 그 속에서 오는 삶의 질곡으로 어렵고 힘든 것이 더 많기는 하지만, 그래도 가장 기본적으로 삶을 살아가는 단위이고, 그 어느 집단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유대감이 높은 단위이기에 가장 강하게 애착을 갖게 됩니다 물론, 나중에 가족들이 분가하여 새로운 단위를 만들어 살아가면서 유대감이나 삶의 동질성이 벌어지면서 새로운 질곡으로 다가오는 경우도 많기는 하지만, 가족에 대한 높은 유대감이 살아 있는 한 우리는 매우 크게 그 가족에 집착을 하게 됩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렵더라도 우리 자식들 잘 키우고, 사랑하는 우리 부인(남편)을 생각하면서 참고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삶의 원천이 됩니다.
사회생활하면서는 이러한 유대감이 상당히 멀어지고, 직접적으로 사회적 관계에서 오는 힘겨움들을 몸으로 감내해야 하기 때문에 더욱 힘들어집니다. 그래도 먹고 살기 위해 아니꼽고 힘들어도 참고 다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많은 사람들 속에서 치이면서 힘들어합니다. 하지만 그런 속에서도 서로 어울려 술 한 잔 하면서 얘기하다보면 모두들 비슷한 이유로 서로가 힘들어하고, 서로에게 상처가 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서 동료로서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물론, 그러한 동료관계라는 것도 사회생활이나 직장생활에서 오는 여러 가지 질곡으로 인해 높은 동질성을 갖는 관계로 나아가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정말 마음에 맞고, 좋은 사람을 사귀게 되면 많이 의지하게 되고 힘이 됩니다. 직장생활이 어렵고 힘들면 자연스럽게 그렇게 마음 맞는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서로를 달래면서 힘을 주기도 합니다.
좋은 친구, 좋은 이웃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일이 있으면 좋아서 만나고 싶고, 힘겨운 일이 있으면 힘겨워서 만나고 싶은 그런 사람들은 우리들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정말 중요한 자산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이렇게 좋은 사람들과 아름답게 살아갈 수 있는 그런 낭만적인 현실이 아닙니다. 먹고 살기 위해 바둥거리다 보면 가족과 얘기도 제대로 못하면서 살아가는가 하면, 생활고로 가정이 파탄 나는 경우를 숱하게 봅니다. 사회생활에서 만나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여러 가지 이해관계가 얽히고 섞이면서 더욱 삭막해져만 갑니다. 그렇지 않고 작지만 소중한 관계들을 유지해간다 하더라도 삶의 힘겨움 앞에서 그러한 관계들이 위안을 주고 힘이 되기는 하지만 거대한 현실의 벽은 너무 높기만 합니다. 최근처럼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힘겨움으로 다가오는 냉혹한 현실 속에서는 작지만 소중한 이러한 관계들이 더욱 절실한데도 그러한 관계들을 만들어 가는 것이 어느 만큼 어렵고, 그나마의 관계들을 유지한다는 것이 어느 만큼 힘겨운 것인가를 실감하게 됩니다. 미래를 예측하지 못하면서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전쟁인 상황에서 "작지만 소중한 관계들을 만들면서 인간답게 살아가자"라는 것은 성인군자의 얘기일 뿐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이 '작지만 소중한 관계들'을 소중한 삶의 자산으로 간직해야 합니다. 현실의 그것을 부정하면 할수록 더욱 그러한 관계들은 소중해지고, "작지만 소중한 관계들을 만들면서 인간답게 살아가자"는 성인군자의 얘기를 간직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나마 우리가 어렵게 찾은 희망의 단초마저 없어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힘겨운 세상에서 사랑하는 가족, 따뜻한 동료, 정겨운 친구, 좋은 이웃이 없다면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최소한의 희망의 단초마저 상실해버린 극단적인 예가 최근에 급증하는 노숙자들이 아닐까 합니다. 감당하기 어려운 삶의 광풍 앞에서 가족도, 동료도, 친구도, 이웃도 모두 상실해 버린 이들에게는 결국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저 목숨부지하면서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전부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들에게 그 소중한 모든 것은 다 팽개쳐 버렸다고, 거리의 룸펜이 되어 인생낙오자로 살아간다고 지탄할 수 있을까요? 이들인들 그 소중한 가족과 친구와 이웃들을 버리고 그렇게 살아가고 싶겠습니까? 문제는 그 '작지만 소중한 관계들' 마저 용납하지 않는 냉혹한 현실입니다.
이 '작지만 소중한 관계'를 정말 소중히 유지하면서도, '그마저도 용납하지 않는 무서운 현실' 앞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험난하고 힘겨운 세상을 살아가는 중요한 원동력으로 '사랑'을 흔히 얘기합니다. '사랑'이라는 말은 많은 곳에서 거론되는 만큼 그 의미도 참 다양합니다. 종교에서는 '신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얘기하기도 하고, 소설이나 드라마에서는 '연인이나 가족에 대한 헌신적 사랑'을 얘기하기도 하고, 유명인사들은 '국가와 인류에 대한 사랑'을 얘기하기도 합니다. '사랑'이라는 말이 어떤 의미로 얘기되든지 항상 '믿음' '따뜻함' '헌신' 등의 어감을 동반합니다. 이것은 서로에 대한 믿음이 사라지고, 삶 자체가 더욱 삭막해져가고, 현실적 이해관계 속에서 서로를 자기중심적으로 대하면서 살아가는 현실에 대한 대당개념으로 설정되는 것입니다. 이런 비정한 현실에서 살아가기 위해서, 또는 비정한 세상을 인간다운 세상으로 만들기 위해서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고 얘기합니다.
저 역시 그에 동감합니다. 현실이 아무리 서로를 불신하게 하고, 서로에게 힘겨움으로 다가온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현실을 인정할 수 없다면 서로에 대한 믿음과 사랑은 그런 현실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중요한 동력이 됩니다. 앞에서 얘기했던 '작지만 소중한 관계'도 '서로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근원으로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소중히 유지해야할 '작지만 소중한 관계'가 '서로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바탕으로 한다면 '서로에 대한 믿음과 사랑'은 어디에서 출발하는 것일까 하는 질문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사랑이라는 것이 '믿음과 헌신 그 자체'라고 얘기한다면 동어반복이고, 성인군자의 얘기 이상이 아닐뿐더러 너무 관념적입니다. 힘겹고 비정한 현실을 살아가는데 소중한 것이 사랑이라면, 사랑은 우리들의 현실과는 다른 고차원적인 그 무엇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의 현실 그 자체에서 요구되는 것이고, 또한 현실에 굳건히 뿌리를 내려야하는 가장 현실적인 것이어야 합니다.
결국 '서로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라는 것도 오늘의 현실을 똑같이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 서로의 삶의 동질성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외면적으로 다양한 삶을 살아가면서도 본질적으로는 특별히 가진 것 없이 몸뚱이 하나만으로 먹고 살기 위해 아등바등거리면서 살아가는 서로를 확인하면서 우리는 서로에 대한 동료의식을 갖게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동료의식은 서로에 대한 연민과 함께 믿음을 가게 합니다. 이러한 연민과 믿음이 우리들이 흔히 얘기하는 '정(情)'입니다. 물론, 우리의 현실이 이러한 동질성에서 나오는 연민과 믿음을 끝임 없이 박탈하고 변질시킨다 하여도 삶의 동질성이 유지되는 한 그 근원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삶의 동질성'이 '서로에 대한 믿음과 사랑'의 현실적 근원이라 하더라도 이것은 그대로 등치되거나, 자연발생적으로 발현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면 소라가 비슷하게 바둥거리면서 힘겨운 현실을 살아가는 가운데 이러한 현실을 이겨낼 수 있는 '서로에 대한 믿음과 사랑'은 어떻게 만들어지고 쌓여가는 것인가라는 질문이 이어집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좋아한다거나 친해진다고 했을 때 (그것이 이성적 관계로 한정될 필요는 없습니다) 어떠한 동기가 있을 것입니다.
흔하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이 가족이나 어릴 적 친구들처럼 항상 어울리면서 자연스럽게 친해지는 경우일 것입니다. 이런 경우는 살아가는 조건들과 형식들이 너무도 유사하고, 여러 가지 사회적 이해관계들에 우선하는 그 집단 공동의 이해관계가 있기에 가능한 경우입니다. 어릴 적 동네친구들이나 학교 다니면서 사귀었던 친구들을 생각해보면 거의 대부부분이 살아가는 조건들이 너무도 비슷했습니다. 그리고 이해관계라는 것도 너무도 단순했습니다. 너무 잘난 척 한다거나, 나를 무시하지만 않는다면 아주 쉽게 친해졌습니다. 중·고등학교 때에는 공부와 성적에 내몰려 서로가 스스럼없이 쉽게 어울릴 수 있는 조건들을 박탈당하면서 경쟁에 길들여지지만, 그래도 가장 서로를 잘 이해해줄 수 있는 친구들이 제일 좋았던 때였습니다. 물론, 성적과 경쟁에 내몰리면서 우리는 알게 모르게 성적이 비슷한 친구들과 또래집단을 형성하게 되기도 합니다. 국민학교 때와는 달리 성적이라는 조건이 우리들에게 새롭고 강력한 기준으로 강요되면서 동질성의 범주는 좁아지게 되고, 나중에 고등학교 졸업해서 사회생활을 하거나 대학을 가게되면 여러 가지 새로운 기준과 조건들이 우리들의 삶을 규정하면서 동질성의 범주들을 더욱 좁아지게 됩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지도 10년이 넘어서 아직도 연락하면서 지내는 친구들은 그리 많지는 않습니다. 어릴 적 일기장을 보면서 그 친구들을 다시 한 번 만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은 하지만, 막상 만난다 해도 살아가는 조건들이 너무 많이 변해서 어릴 적 추억만으로는 그때처럼 스스럼없이 얘기하고 만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몇 안되지만 명절 때 고향에 내려가서 아직도 만나는 친구들은 참 편하고 좋습니다. 앞으로 좀더 현실에 부대끼면서 살다보면 관계들이 단절되거나 왜곡될지는 모르겠지만, 아직은 그 친구들을 만나면 마음을 터놓고 이런 저런 얘기들을 할 수 있습니다. 아직도 그렇게 단순하고 좋았던 어릴 적의 공동의 관계에 대한 추억들이 남아있고, 지금에서도 서로의 삶들이 특별히 달라지거나(물론, 변화라는 면에서는 많은 변화가 있기는 하지만) 현실적인 이해관계들을 우선시 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관계들이 유지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직도 그 친구들을 믿고 좋아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직장생활하면서 만나게 되는 사람들과의 관계들에서는 어떨까요?
직장이라는 것 자체가 먹고살아야 한다는 현실적 이해관계가 우선시 되는 곳입니다. 그리고 그 속에는 너무도 다양한 조건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고, 아주 분명한 위계질서와 냉혹한 경쟁이 존재합니다. 그러기에 먹고살아야 한다는 기본적인 문제에서부터, 경쟁에서 이겨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 윗사람의 눈밖에 나면 버티기 힘들어진다는 것 등의 철칙처럼 우리를 몰아갑니다. 이렇게 냉혹한 현실 앞에서 서로가 비슷하게 살아가고 매일 접하면서도 쉽게 친해지거나 믿음을 갖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그런 속에서도 매일같이 일하면서 지내다보면 마음이 맞고 친하게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과는 일을 마치고 술을 한 잔 하면서 쌓인 스트레스도 풀고, 서로를 다독거리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같이 일하는 다른 사람들의 얘기를 듣게되고, 그 속에서 자연스럽게 오해나 감정들도 풀립니다. 그런 자리에서만큼은 경쟁이니 위계질서니 하는 것들보다는 그 속에서 모두가 힘들어하는 같은 동료들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물론, 그래도 먹고 살기 위해서 직장을 계속 다녀야 한다는 점과 직장에서 쫓겨나지 않기 위해서는 경쟁과 위계질서 속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점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술자리에서는 쉽게 친해지면서도 막상 다음날 출근해서 그 질서에 다시 들어가게 되면 그 질서에 순응하게 되어 버립니다. 그러다보면 술자리에서 만나서 얘기를 하는 관계들에 대해서도 처음처럼 그렇게 마음을 터놓기가 점점 어려워집니다. 현실이 점점 서로를 옥죄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 과정 속에서 그리 많지는 않지만 아주 친하게 지내게 되는 사람들과는 정말로 서로를 믿게 됩니다. 그런 관계에서는 경쟁이니 위계질서니 하는 것이 중요한 조건으로 작용하지 않습니다. 서로의 처지를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모두를 힘든 조건에서도 서로를 배려하게 되고, 정말로 절친한 동료나 선후배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관계가 되면 직장생활에서도 조금씩 변화가 생깁니다. 힘들다고 윗사람에게 잘보여서 자기만 편한 일을 찾거나, 경쟁에서 이겨 수당이나 월급을 좀더 타려고 매정해지는 등의 모습으로 쉽게 변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일하는 동료들 사이에서 조금만 이해하고 신경 쓰면 풀 수 있는 문제들에 대해서는 '내 혼자만 피해보지 않으면 된다'는 식으로 피해가는 것이 아니라 얘기를 해서 풀어갈려고 합니다. 그리고 관리자나 상사와의 문제에서도 혼자만 힘들어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위로하면서 공동으로 건의하거나 대응할 수 있는 방법도 모색하게 됩니다. 이렇게 서로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바탕으로한 작지만 소중한 관계는 냉혹한 현실에서 작지만 소중한 변화들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들이 노동조합 등의 형태로 좀더 크게 발전하게 되면 크고 소중한 변화들을 만들어 가는 것이기도 합니다.
물론, 작은 관계들이 모이고 모여서, 또는 조금씩 커져서 커다란 변화를 가져오는 관계로 자연스럽게 발전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이런 작은 변화라도 가져올 수 있는 작지만 소중한 관계들을 만들어간다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생각을 여기까지 밀고 오면서 저는 이제 희망의 아주 작지만 소중한 근거를 확인했습니다.
우리들 대부분이 비슷한 조건들 속에서 별반 다를 바 없이 힘들게 살아가고 있다는 점. 그런 조건들 속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힘겨움이 될 수도 있고, 소중한 관계가 될 수 있다는 점. 서로의 처지를 이해하고, 서로에게 조금이나마 힘이 되어 줄 수 있는 작지만 소중한 관계들이 힘겨운 삶 속에서 작지만 소중한 변화들을 만들어갈 수 있다는 점.
이것이 제가 확인한 '희망의 아주 작지만 소중한 근거'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희망의 작은 근거가 냉혹하고 거대한 현실 앞에서 진정한 희망으로 싹 틔워지고, 희망을 현실로 만들어가기에는 너무 빈약합니다. 제가 초반에 '메이드 인 홍콩'이라는 영화 얘기를 잠시 했던 것처럼, 우리의 현실은 우리들의 이런 '작고 소중한 희망의 근거'를 아주 쉽게 짖밟아 버리기 때문입니다. 이런 아주 소박한 우리의 바램이 현실에서 살아남기에는 현실의 토양이 너무 척박합니다. 또 그게 자본주의라는 것의 아주 현실적이고 기본적인 조건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희망의 작은 근거들이 소중하기는 하지만, 결코 현실을 변화시키지 못할뿐더러 살아남는다는 것도 어렵습니다.
저는 우리들의 이런 소중한 희망의 근거를 만들고 지켜가기 위해서는 좀더 적극적으로 현실에 대항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현실이 거대하고 냉혹한 만큼 우리는 그러한 현실에 대한 대항에서도 그런 현실을 바꿔낼 수 있을 힘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 힘은 뛰어난 몇몇 영웅들이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몸End이 하나만을 갖고 먹고 살기 위해서 바둥거리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삶의 근본적 동질성을 갖고 있는 노동자·민중의 단결된 힘에 있다고 확신합니다.
80년대에 학생들과 재야인사들이 군사정권의 폭압에 맞서 싸워나갈 때 새로운 세상에 대한 희망이 불타올랐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동참은 못해도 지지를 표하면서 박수를 보내고, 목마른 시위대에게 물을 건내 주고, 도망 다니는 학생들을 숨겨주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정의롭고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에 대한 희망을 마음 속에 가졌습니다.
지난 97년 민주노총의 총파업투쟁과 올해 현대자동차 투쟁에서 저는 다시 이런 모습을 확인하였습니다 97년 총파업투쟁도 노동자들은 정리해고제 도입저지라는 목표를 중심으로 그 추운 겨울에 한 달 가까이 싸워왔고, 올 현대자동차에서도 정리해고 철회라는 절박한 요구를 중심으로 한 달이 넘는 장기 농성투쟁을 벌였습니다. 그러면서 노동자들은 어느 지역에 있든, 어떤 업종에 있든, 어느 사업장에 있든 모든 노동자들이 고용불안에 심각하게 위협받으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삶의 근본적 동질성과 하나의 단일한 요구와 목표로 전국의 노동자들이 같이 싸우고 있다는 동료의식을 가졌던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그토록 완강하고 위력적인 투쟁을 벌일 수 있었던 기본적인 조건이었습니다. 시민들은 가두행진 하는 파업대오에 박수를 보내고, 건물 창문에 '민주노총 힘내세요'라는 문구를 내걸면서 지지를 보냈습니다. 현대자동차 투쟁에서는 매일 열리는 저녁집회를 보기 위해 근처 주민들이 육교나 건물위로 몰려가 박수를 보내기도 하고, 전경들에게 화분을 집어던지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노동자들은 생계의 위협 앞에서 투쟁을 통해 희망을 만들어갈 수 있다는 단순한 진리를 확인하였고, 수많은 사람들은 노동자들의 투쟁 속에서 숨막히는 현실의 변화를 기대하면서 희망을 그려 가는 것이었습니다.

날씨가 추워지면서 다시 언론에 가족들의 집단자살, 연탄가스 중독사망, 결식아동들의 문제 등이 보도되기 시작했습니다. 작년 이맘때 IMF국면이 벌어지면서 연일 보도되던 이런 기사들이 지난 봄 이후 잠시 주춤하더니 겨울이 되면서 다시 보게되는 것입니다. 그동안 갑자기 살기가 좋아져서 이런 일들이 벌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보도되지 않은 것은 아닐 것입니다. 신문이나 TV에 이런 보도가 한 번 나온다면 현실에서는 이런 일들이 수 십, 수 백 번 벌어지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유독 요즘 들어 다시 이런 보도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은 날씨가 추워지면서 삶의 힘겨움에 삶을 포기해야되는 사람들이 그만큼 증가하고 있고, 이런 문제들이 매우 심각하게 다가오고 있다는 반증입니다.
현대자동차와 만도기계에서는 정리해고 철회투쟁이 패배로 끝난 이후 금융노동자들이 제대로 된 싸움도 해보지 못하고 정리해고로 직장을 쫓겨났습니다. 그리고 지금 대기업 빅딜이니 구조조정이니 하면서 다시 제 2의 정리해고가 대규모로 준비되고 있습니다. 현장은 어느 사업장을 막론하고 초토화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먹고 살기 위해 제 밥벌이를 알아보러 다니거나, 걱정스러운 눈길로 신문과 TV의 기사 하나하나를 유심히 보면서 어떻게 하면 살아남을 수 있을까하고 움츠러들고 있습니다.
그래도 어렵지만 이렇게 마냥 당하고만은 있을 수 없다면서 여기저기에서 나름대로 투쟁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다시 희망의 불씨는 어떻게든 살아날 것입니다. 그리고 요즘 노동운동진영에서 흔히 하는 말로 '자본의 위기를 노동의 기회로' 만들기 위해 희망을 만들어 갈 것입니다.

처음에 "벌써 연말이 보이기 시작합니다"라면서 이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지금은 연말이 코앞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날씨도 많이 추워졌습니다. 따뜻한 것이 절실히 그리워지는 시기입니다. 그리고 내년에는 조금은 나아지겠지 하는 아주 소박한 기대를 가져보기도 합니다. 이렇게 힘겨웠던 한 해가 끝나가고 있습니다.
제가 '희망'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을 정리하면서 얻게된 결론처럼 동지들과의 '작지만 소중한 관계'를 소중히 간직하면서 '작지만 소중한 변화'를 제 삶 속에서 만들어가야겠습니다. 그리고 '자본의 위기를 노동의 기회'로 만들기 위해서 내년에도 열심히 투쟁해야겠습니다.
제가 생각을 정리하면서 이 글을 써내려 가는 동안 노기연이라는 곳에서 '아빠소리 하지마, 사람들이 듣잖아'라는 책이 나왔습니다. 지금 우리들의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얘기들이 아주 솔직하게 쓰여있는 책입니다. 그리고 제가 고민하고 있던 '희망'이라는 문제와 맞아떨어지는 책입니다. 그래서 큰 마음 먹고 동지들에게 연말선물로 이 글과 함께 동봉합니다. 동지들에게 소중한 자산이 될 수 있는 책이었으면 합니다.
오늘 어떤 자료를 보다가 너무 좋은 글이 있어서 마지막으로 그 글을 옮겨 적습니다. 노신의 '청년과 지도자'라는 글입니다.

근래 청년이란 말이 유행이다. 입만 열면 청년이고, 입을 닫아도 청년이다.
그러나 청년이라하여 일률적으로 얘기할 수는 없다. 깨어 있는 자도 있고, 자고 있는 자도 있으며, 혼수상태에 있는 자도 있고, 누워 있는 자, 놀고 있는 자도 있고, 그밖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물론 전진해 나아가려는 자도 있다.
전진하려는 청년들은 대체로 지도자를 찾고 있다.
그러나 단언하건데 그들은 영원히 지도자를 찾지 못할 것이다. 찾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행운이다. 자기 스스로를 아는 자라면 지도자의 자리를 사양할 것이다.
지도자이길 자임하고 나서는 자가 과연 나아갈 길을 진정으로 알고 있을까? 길을 알고 있다고 나서는 자들은 대개 30대가 넘고, 정신은 회색이고, 육체는 노쇠의 기미가 보이는 자들이고, 자신이 길을 알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을 뿐이다.
정말 길을 알고 있다면 자신은 벌써 자기의 목표를 향해 전진하였을 것이고, 지도자임네 하며 무사태평하게 있을 리가 없다.
불법을 설교하는 스님이건 신선의 약을 파는 도사건 언젠가는 우리와 똑같이 백골로 된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에게 극락으로 가는 길을 묻고 하늘나라에 갈 비결을 구하려한다.
실로 가소로운 일이다.
청년들이 금관판이나 내걸고 있는 지도자를 찾아야 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차라리 벗을 찾아 단결하여, 이것이 바로 생존의 길이라고 생각되는 방향으로 함께 나아가는 것이 나으리라. 그대들에게는 넘치는 활력이 있다. 밀림을 만나면 밀림을 개척하고, 광야를 만나면 광야를 개간하고, 사막을 만나면 우물을 파라. 이미 가시덤불로 막혀 있는 길을 찾아 무엇할 것이며, 너절한 스승을 찾아 무엇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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