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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긴장력이라는 것

한 해가 저물어 갈 때도 연락 한 번 못하고, 새해가 시작되어서도 역시 연락을 못했습니다. 몇몇 동지들은 연말연초에 얼굴들을 보기는 했지만 그러지 못한 동지들이 많습니다. 작년 10월엔가 동지들에게 유치찬란한 연애편지를 쓰면서 식어가는 사랑을 다시 살려야겠다고 얘기했지만 제 스스로의 나태함을 벋어던지지 못하면서 이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다른 때 같은면 술이나 한 잔 하자고 할텐데 오늘은 차 한 잔 하자고 권하고 싶습니다. 다른 이유가 아니라 요즘 몸이 좀 좋지않아서 당분간 술을 자제하기로 했기 때문입니다. 집에 차라고 해봐야 있는 것이 커피뿐이기 때문에 선택의 여지가 없군요. 매일 몇 잔씩 마시는 커피겠지만 이거라도 한 잔 하세요.

차 한 잔 마시자고 차를 권하고 지금 이글을 쓰기까지 한 시간이 흘렀습니다. 무작정 동지들과의 시간을 갖기 위해 시작은 했지만 무슨 얘기를 해야 할지 선뜻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가 98년 연말에 동지들에게 써서 보냈던 '희망'에 대한 장문의 글을 읽었습니다. 그때는 그 글을 쓰기 위해서 한 달이 넘는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래도 그때는 어떤 문제에 대해서 이런 저런 생각들은 하면서 많은 생각들을 하고 제 자신을 점검하고 했었습니다. 그런데 4년이 지난 지금은 차 한 잔을 권하고 무슨 말을 해야할지 생각하는데 한 시간이 걸립니다. 4년 전보다는 여러 가지로 사람들과의 관계가 넓어졌지만, 관계의 깊이랄까, 아니면 관계의 진정성이랄까, 뭐 그런 것이 많이 줄어들었습니다. 특히 요즘은 더욱 그렇습니다. 4년전에 '희망'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우리의 삶에서 작지만 소중한 변화들을 만들어내는 작고 소중한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했었는데, 요즘은 그런 문제의식이 많이 줄어들었습니다. 서른에 접어들었을 때와 이제 30대 중반이 되어버린 이 시점에서 순간 제 자신의 이런 변화를 발견하게 되는 것은 당혹스러움으로 다가옵니다.
이 당혹스러움의 정체는 무엇일까? 제가 변했음을 확인하면서 순간적으로 밀려온 당혹스러움인데 어떤 변화가 있어나를 생각해 보게 됩니다. 가장 쉽게 변명처럼 하는 얘기가 세상이 너무 정신없이 돌아가고 있고 그에 따라서 해야될 일들이 정신어이 밀려오다보니 스스로를 돌아보고 자기반성하면서 주위를 챙길 삶의 여유가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흔히 이런 것을 '삶에 찌들려간다'고 표현하나요? 서른에 막 접어든 시점에서는 '나이 서른에 우린'이라는 노래가사처럼 젊은 날의 부푼 꿈이 부끄럽지 않으려는 긴장력이라도 있었는데, 30대 중반이 되어버린 이 시점에서는 그 긴장력이 사라져버린 것일까요?
그런데 그게 자기 긴장력의 문제일까? 물론 제 자신이 스스로에 대해서 그런 긴장력을 갖고 제 자신을 변화시켜려 노력하는 속에서 주위의 여러 가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변화는 생길 수 있을 것입니다. 요즘 제가 간디 자서전을 읽고 있는데 간디처럼 위대한 사람은 그렇게 살아왔더군요. 또 얼마전에 읽은 성철스님의 글도 그와 비슷했습니다. 제 자신에 대한 그런 삶의 자세는 필요합니다. 그런데 제가 나이 서른에 가졌던 그 삶의 긴장력이 지금에 와서 사라져버린 것이 제 수행이 부족해서 일까라는 문제는 고민이 됩니다. 그리고 지금은 어떠한 긴장력도 없이 살아가는 것일까?
문제를 이렇게 고민하면 저는 흔히 다음과 같이 대답하곤 했습니다.
"그 긴장력이라는 것이 현실의 삶에서 나온 것이기에 문제는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 현실과 내가 이래저래 관계맺고 있는 여러 사회적 관계들이다. 중요한 것은 그 현실을 변화시키는 것이고, 사회적 관계들을 변화시키는 것이고, 그것이 삶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그게 새로운 긴장력이 된다"
문제의 근원을 이렇게 사회적 관계와 현실로 던져버리면 나는 그 현실에 맞서서 치열하게 투쟁하면 되는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와 현실을 대당시키면서 자신과의 투쟁이 아닌 현실과의 투쟁을 강조하는 것은 결국 같은 얘기가 되어 버립니다. 언젠가 한 선배가 저를 비판했던 것처럼 저는 '내 자신'이라는 두터운 갑옷을 입은 투사가 되어버립니다. 결국 나이 서른에 접어들었던 제가 98년 연말이라는 사회적 조건에서 '희망의 단초'로 생각했던 '작지만 소중한 관계'라는 결론을 이끌어낸 그 긴장력은 그 현실에 치열하게 맞서고자 했던 저 자신의 두터운 갑옷이었고, 지금 제가 느끼는 당혹스러움은 그 갑옷이 현실에 의해서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이 때문이었습니다.

얼마전에 몇몇 선배들과 술을 한 잔 하다가 그 선배들의 논쟁이 있었습니다. 모두 몇 년간 노동운동을 같이 하다가 한 사람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운동일선에서 물러나 이런저런 일들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모두 나이 마흔에 접어들었고요. 한 선배가 자신의 삶의 비루함에 대해서 얘기를 했고, 아직도 운동을 하고 있던 선배는 "정말 비루한 삶이 뭔지를 아느냐"면서 영화 '와이키키 브라더스'를 얘기하더군요. 한때 음악을 같이하던 사람들이 모두 떠나가고 혼자 남아서 정말로 어렵게 살아가며 음악을 하는 친구에게 예전의 친구들이 "그래도 너는 아직도 네가 하고 싶은 음악을 하고 있어서 행복하겠다"라고 얘기하니까 그냥 씁쓸한 표정만을 지어보이더라는 얘기였습니다. 그 논쟁 중에 제 옆에 있던 또 다른 선배가 저에게 "너는 지금 이 얘기를 이해할 수 있겠냐?"고 묻길래 저는 "조금은 이해할 것 같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제가 마흔이 되었을 때 살아온 삶의 풍파와 그 현실의 중압감 속에서 그 나마의 갑옷도 너덜해졌을 때 저는 그 '삶의 비루함'이라는 문제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요?

어쩌면 저는 간디와 성철을 잘못 이해했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자기성찰이니 내공이니 하는 것들이 또 다른 형태의 갑옷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순간 동지들과 차 한 잔 하자면서 계속 제 자신의 문제에 천착하는 이 자체가 저는 새로운 갑옷을 만들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아직 이 문제의 결론을 내리지는 못하겠습니다. 그래도 현실과 관계의 문제에는 천착하렵니다. 어떻든 이렇게 살아가는 현실에서 나온 문제이고, 제가 이래저래 만나고 있는 여러 사람들과의 관계속에서 풀어가야 하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이 서른에 '희망'이라는 문제에서 중요하게 생각했던 '서로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라는 문제에 더 매달려야겠습니다. 결국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습니다. 제가 서른 살 때 고민했던 문제를 다시 부여잡아야겠습니다. 제가 이후에 마흔이 되어서 삶의 비루함이라는 문제에 직면하게 되면 다시 지금처럼 서른 살 때의 고민을 부여잡아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때의 문제를 부여잡으면서 사랑하는 사람들이 더없이 소중한 관계로 다가서야겠습니다. 그때는 지금보다도 더 많이 현실이 변했을테고, 관계들도 변했을테고, 제 자신도 변했겠지만......
2000년 연말에 동지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했던 약속이 있습니다. 제 나이가 서른 다섯이 되는 2003년 연말에 다시 동지들에게 연말인사를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제가 마흔에 접어드는 5년후에 다시 연말인사를 하겠다는 약속을 할 것이라고 그랬습니다. 작년 연말에는 동지들에게 연락을 한다는 약속을 못지켰지만 이 약속은 꼭 지켜야겠습니다.
오늘은 평소처럼 술이 아니라 차를 마셔서 그런지 얘기가 많이 재미없었습니다. (항상하는 표현이지만) 토요일 밤에 동지들과 같이 시간을 보낼 수 있어서 정말 행복했습니다. 올해는 정말로 연락을 자주하겠습니다.
다음에 또 만나기로 하고 오늘은 이만 하겠습니다.
항상 열심히 살아가는 동지들의 모습은 저에게 큰 활력입니다.

2002년 1월 19일
울산에서 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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