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미친세상에서 살아가기

몇 달만에 우리 동지들에게 이렇게 연락을 합니다. 가장 최근에 연락을 한게 지난 겨울 끝트머리였던 것 같은데 벌써 봄을 뛰어넘어 여름이 시작되어 버렸습니다.
그동안 우리 동지들에게 연락을 하려고 했는데 잘 안되더군요. 오늘도 모처럼 동지들에게 연락을 하기 위해 마음을 먹고 컴퓨터 앞에 앉아 있지만 지금 여기까지 쓰는데 1시간이 넘고 있습니다. 머리 속에는 우리 동지들과 하고 싶은 얘기가 어렴풋하게 맴돌지만 좀처럼 말문이 열리질 않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할까 생각을 하다가 동지들과 같이 산책을 하기로 했습니다.
사진이 가을 사진이라서 시기에는 맞지 않지만 현재 컴퓨터에 있는 사진 중에는 산책하기에 가장 어울리는 사진입니다. 단풍이 아주 붉게 물든 이 산길을 저와 함께 걸어가실래요? (또 이 편지를 보내면 제정신이 아니다, 드디어 더위 먹고 미쳤다느니 하는 등의 반응이 예상되는군요. ^.^)

자, 산책을 시작하실까요?
오래간만에 이렇게 상쾌한 공기를 마시면서 걸어보니까 참 좋군요.
정신 없이 돌아가는 나날에 몇 십 년만의 가뭄이 이어지더니 요즘은 찌는듯한 더위가 뒤를 이어오고 있습니다. 가뜩이나 더위에 쥐약인 저와 같은 놈은 정말 죽을 맛입니다.
요즘은 '미친 세상'이라는 말을 실감나게 합니다.
속도전에 우리의 삶은 정말 정신을 차리기 어렵습니다. 초고속 인터넷이 아니면 인터넷을 하기도 어려운 세상이고, 헨드폰을 들고 다니면서 수시로 통화하지 않으면 일을 제대로 하기 어려운 세상이고, 새벽같이 일어나서 밤늦게까지 좆빠지게 일하지 않으면 먹고살기 어려운 세상입니다. 한국을 '빨리 빨리'사회라고 하지만 요즈음 '빨리 빨리' 정도가 아니라 '초고속'사회입니다. 정말 숨쉴 틈이 없습니다. 세계화와 경쟁의 시대에 이렇게 살지 않으면 살아가기 어렵습니다. 이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면 뒤쳐지는 것이 아니라 아예 사회에서 낙오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미친 세상'에 개기는 놈들은 무조건 족치는 것이 또 요즘입니다. 구조조정 하는데 개기는 노동자들은 대우자동차 노동자들처럼 백주대낮에 길거리에서 죽을 정도로 두들겨 맞습니다. 이곳 울산의 효성에서는 용역깡패 수 백 명이 쇠파이프는 기본이고, 식칼과 전자봉, 사재총 등으로 무장해서 파업하는 노동자들을 건드리다 안되니까 경찰이 투입되서 길거리로 쫒아냈습니다. 얼마 전 건설운송 노동자들에게는 도끼와 해머를 든 경찰놈들이 차를 까부수어 버렸습니다. 구속이니 수배니 하는 것은 아주 일상이 되어버렸고, 언론들은 무식한 노동자들의 폭력과 불법행위에 본때를 보여줘야 한다고 난립니다. 영화 '친구'의 폭력성이 문제가 있다고 점잖은 척 떠벌리던 놈들은 그 보다 더 폭력적인 현실에 대해서는 세상이 그런 일이 있는지 모르는 것처럼 입에 자물쇠를 채워버립니다. 그래도 세상에는 점잖을 떨면서 비겁한 놈들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용기 있는 놈들도 있어서 쇠파이프를 들고 화염병을 던지는 과격한 운동권의 폭력성에 대해서 침을 뛰기면서 흥분을 합니다.
건강하게 살 권리를 위해 도입된 의료보험 제도는 그 실효성이 별로 없는 가운데 오히려 재정파탄이 생기자 노동자 민중을 교묘하게 이용해 먹기 위해 난리를 치면서 '건강하게 살 권리'고 뭐고는 안중에도 없이 국가의 부담 없이 자본을 살찌우기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인터넷에 실린 누드사진을 마녀사냥식으로 몰아 붙이는가하면, 좆같은 학교를 때려치운 애들이 만든 사이트를 자기들 취향에 맞지 않는다고 폐쇄하고 있습니다. 인터넷이든 어디든 자기네가 통제되지 않는 자유로운 공간을 눈에 흙이 들어가도 인정할 수 없다고 난립니다.
거기서 더 나아가 전자건강카드를 도입해서 컴퓨터 하나로 전국민의 모든 것을 감시하고 통제해야 직성이 풀리겠다고 나오고 있습니다.
이렇게 미쳐 날뛰는 세상에서 숨통이 막히지 않기 위해서는 '친구'처럼 우리가 어려웠던 시절을 생각하면서 지금을 위로하던가, 술이나 처먹고 잠시 숨막힘을 달래보던가, 포르노사이트나 성인방송국에 들어가서 옷 벋고 별짓 다하는 이쁜 여자들을 보면서 헥헥데 보던가, 그게 성이 차지 않으면 단란주점 같은데 가서 같이 춤추고 놀다가 빠구리 한 번 뜨러가면 됩니다.

공기 놓은 곳에서 편안하게 산책하자고 해놓고 짜증나는 얘기를 해버렸군요.
이렇게라도 욕설을 늘어놓지 않으면 정말 숨이 막힐 것 같아서 속이 후련하라고 밀어먹을 세상에 대해서 욕을 잔득 해보았지만 속이 후련하지는 않습니다.
그런 세상에 저항하면서 사는 것 같은 삶을 살아가려고 노력해보지만 쉽지는 않습니다.
이 땅 노동자의 60~70%에 이른다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완전한 무권리 상태에서 그야말로 하루 하루를 근근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 삶에 맞서서 노동조합도 만들고 싸워보지만 현실의 벽은 장난이 아닙니다. 한국통신 계약직 노동조합처럼 수 백 명이 2백일 가까이 싸움을 해보지만 희망은 쉽게 보이지 않습니다. 한강다리에 올라가 고공농성도 해보고, 유난히도 눈이 많이 내리고 추웠던 겨울에 서울 시내 곳곳에서 노숙투쟁에 단식투쟁 등 별짓을 다해보았고, 전화국을 점거하는 투쟁도 해보았지만 군화발에 짖밟히면서 신나게 얻어떠집니다. 정규직 노동조합은 제 코도 석자라고 신경을 쓰지 않거나, 함께 하면 자기네가 더 어렵다고 구사대로 돌변하여 비정규직들을 몰아내는데 앞장을 섭니다.
여기 저기서 비정규직 노동자들만이 아니라 대우자동차와 효성 등 수많은 노동자들이 여기 저기서 얻어터지고 길거리로 내몰린 상태에서 치열한 투쟁을 벌이는 상황에서도 무슨 조건들이 그리도 어려운지 적극적으로 같이 싸우는 사람들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그래도 악으로 깡으로 싸우는 사람들이 있어서 싸움은 끝나지 않고 계속 이어지지만 결코 쉬운 싸움이 아닙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에, 대공장과 중소사업장 사이에, 남성과 여성 사이에 이 보이지 않는 벽이 우리의 투쟁을 참 어렵게 합니다. 그렇다고 정규직을, 대공장 노동자를, 남성을 내부의 적으로 상대해서 싸운다고 이 벽이 허물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정말 쉽지 않지만 자본가들이 만들어놓은 내부의 벽을 스스로의 단결된 힘으로 허물어내고, 크게 단결해서 싸워나가야 합니다.

이런! 무슨 문건을 쓰는 것처럼 되어 버렸군요.
그래서 일까요? 저도 요즘 마음이 편치 않고 어수선합니다.
매일 이런 저런 투쟁들이 계속되고 나름대로 열심히 싸워보지만 싸움을 하면서도 안과 밖의 그런 벽들을 수없이 느낍니다.
개인적인 생활은 점점 여유가 없어져 이렇게 동지들에게 편지 한 통 쓰는 것도 점점 어려워지고, 성질만 급해져서 주위사람들에게 짜증을 내거나 화를 내는 일도 많아집니다. 그러다보니 상황을 적극적으로 돌파하기보다는 상황에 딸려가면서 수동화되어감을 느낍니다. 속도전에 휘말리고, 상황에 떠밀리고, 여러 가지 현실의 벽에 직면하면서 점점 숨이 막혀만 갑니다.
힘들고 답답할수록 처음의 마음가짐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분명히 잘못된 것에 대해서는 맞서 싸워야겠습니다. 이런 미친 세상에서 스스로 미쳐가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가 원하는 그런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라도 잘못된 현실에 저항해야 합니다. 이런 빌어먹을 세상에 맞서 싸우지 않으면 우리들 모두가 미쳐버릴 것 같기 때문입니다. 다수가 집단최면에 걸리는 파시즘은 이런 미친 세상에서 나오곤 합니다.
사회의 낮은 곳을 향하여 눈과 마음을 돌려야겠습니다. 처참한 현실에서 처절하게 싸우고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현실에서, 이중 삼중의 굴레에서 살아가고 있는 여성들의 현실에서 현실의 비참함과 악날함을 바라보면서 싸워나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본가들이 쳐놓은 여러 가지 현실의 벽을 허물어가기가 어려워집니다.
어렵고 힘들더라도 하나의 힘들을 만들어가면서 싸워나가야겠습니다. 혼자 날 났다고, 답답하다고 혼자만 일을 해결하려고 하면 답답함과 힘겨움만이 쌓여갈 뿐입니다. 조건과 상황의 차이들을 인정하면서 그 차이들을 좁히기 위해 긴 호흡으로 만들어가야 합니다. 그 속에서 진정한 동지가 만들어지는 것이 진정한 힘이 나오는 것입니다.
부지런하면서도 여유를 갖고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속도전의 현실을 무시하고 살아갈 수 없다면 스스로 부지런해지면서 속도전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가야 합니다. 하지만 그런 속에서도 삶이 여유를 만들어가지 못한다면 역으로 속도전에 딸려가게 됩니다. '느림의 철학'은 아니지만 심호흡할 때 심호흡하고, 신속하게 해야 할 때 신속하게 하는 삶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무엇보다도 사랑을 해야겠습니다.
요즘 집에 전화 한 통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가뭄 속에 농사는 어떻게 되고 있는지 안부전화 한 번 못했습니다. 집에 혼자 남아서 직장 다니면서 집안 일을 챙기는 동생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결혼한 동생은 잘 살고 있는지, 러시아에 유학가 있는 동생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관심도 가져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작년에는 어버이날에나 가족들 생일에는 전화라도 한 통씩 하곤 했었는데 올해는 그것마저도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 동지들에게는 정말 연락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이메일로 전하곤 했던 소식들도 거의 몇 달만에 전해보고 있고, 전화 통화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주위에 있는 동지들과는 정신 없이 이어지는 투쟁 일정과 사업들 속에서 끝임 없이 부대끼지만 동지들의 상황에 관심을 갖고 고민을 함께 하는 자리들을 만들지 못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바쁘다는 간편한 변명 하나로 처리되고 있습니다.
이제, 다시 주위에 있는 여러 동지들에게 관심을 갖고 사랑을 해야겠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는 그에게 관심을 갖고, 힘들고 어려울 때면 그를 찾게 되는 것처럼 다시 우리 동지들을 자주 찾아야겠습니다.
오늘은 산책을 하자고 시작해놓고 무겁고 재미없는 얘기만 잔뜩 늘어놓고 말았습니다.
다음에 만날 때는 좀더 편한 마음으로 만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이제야 여름이 시작되는데 벌써부터 많이 덥습니다. 이 여름 잘들 이겨냅시다.

2001. 6. 28
울산에서 성민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