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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사진 한 장

며칠 전 마음이 싱숭생숭 해서 잠이 오지 않는 밤에 오래된 사진들을 들여다봤습니다.

지금의 조카들보다 어렸던 내 백일사진부터 대학시절 사진까지 많은 사진들이 보관돼 있었습니다.

40년에서 20년 전 사진들을 보면서 그 시절을 생각해보는 시간은 행복했습니다.

그러다 발견한 한 장의 사진에서 오랫동안 잊었던 사람들을 발견하고 마음이 뭉클해졌습니다.


군대생활을 마치고 복학을 기다리던 1992년 제주지역에 있는 장애인복지관에서 자원봉사 활동을 하던 때였습니다.

저는 오전 두 시간 동안 진행됐던 정신지체장애인(요즘은 지적장애인이라고 부릅니다만...) 학습프로그램에 함께 하면서 선생님들의 학습지도를 도운 적이 있었습니다.

그 시절 화창한 봄날, 바닷가로 놀러나가서 같이 찍었던 사진을 발견한 것이었습니다.

오래된 사진 속에서 그들을 다시 만나는 것은 즐거움과 함께 그동안 잊고 살아왔던 미안함을 느끼게 했습니다.


그들과 만났던 첫날의 기억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자원봉사 담당자는 간단한 상담을 하고 수업이 진행되는 교실로 나를 데리고 들어갔습니다.

다섯 명의 학생들과 한 명의 자원봉사자(40대 아주머니였는데, 매우 다정하게 학생들을 도와주셨던 분이었습니다)와 선생님 한 분이 교실에 있었습니다.

자원봉사 담당자는 “오늘부터 같이 하실 분입니다”라고만 저를 소개하고는 교실을 나가셨고, 저는 “안녕하십니까?”라고 깍듯이 인사를 했습니다.

그러자 선생님이 “그래, 반갑다. 이름이 뭐니?”라고 저한테 말을 걸어왔습니다.

당시 23살이었던 저는 저보다 3~4살 정도 밖에 많아 보이지 않는 선생님이 대뜸 반말을 하는 것이 거슬리기는 했지만, “저는 김성민이라고 합니다”라고 공손하게 대답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선생님이 “이름은 쓸 줄 아니?”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뭔가 이상하다 싶기는 했지만, 그 교실이 정신지체장애인들의 학습지도를 하는 교실이라서 분위기가 그런가보다 하고는 그냥 “예”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내 대답을 듣고 선생님은 “여기 칠판에 와서 이름을 써볼래?”라고 했고, 나는 앞으로 걸어가서 칠판에 제 이름을 썼습니다.

제가 생긴 것도 무식하게 생겼지만, 글씨도 워낙 악필이라서 반듯한 글씨는 아니었습니다.

제가 이름을 쓰고 나니까 선생님이 제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면서 “성민이 글씨 잘 쓰네. 저기 뒤에 보면 이름 쓰는 표가 있거든. 제일 밑에 빈 칸에 가서 성민이 이름 써 넣을래?”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내가 자원봉사자이고, 나이가 어리다고 해도 완전 어린애 취급하는 것에 기분이 무척 상했습니다. 하지만 첫날부터 인상을 쓰고 싶지 않아서 아무 말 없이 선생님이 말하는 곳으로 가서 이름을 써 넣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표를 살펴보았더니 자원봉사자 이름을 쓰는 표가 아니라 학습지도를 받는 장애인 학생들의 이름을 쓰는 표였습니다.

그때야 저는 상황 파악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뒤로 돌아서 선생님에게 얘기했습니다.

“선생님.”

“왜?”

“저는 자원봉사자인데요?”

“......”

얼굴이 빨개지신 선생님은 그날 저와 눈을 한 번도 마주치지 못했습니다.


정신지체장애인 학습지도 프로그램은 성인장애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어서 1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까지의 학생 다섯 명이 있었습니다.

주로 기초적인 한글(기초 단어 익히기 같은 것)과 산수(덧샘과 뺄샘 같은 것), 미술, 음악 등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그들과 많은 얘기를 주고받을 수 없고, 그들에 대한 신상정보를 알려고 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그들이 어떤 장애였고, 그때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는 모릅니다.

언어장애와 신체장애를 조금씩 동반하고 있던 그들은 모든 사람에게 존댓말을 썼고, 저를 부를 때는 ‘선생님’ 또는 ‘형’이라는 호칭을 사용했습니다. 물론, 말을 제대로 못하는 이도 있었고요.

그래도 나는 나보다 나이가 많으면 ‘형’ 또는 ‘누나’라고 부르고, 나보다 나이가 어리면 이름을 불렀습니다.

우리는 금방 친해졌습니다.


어느 날 수업을 마치고 복지관 현관에서 통학버스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들과 함께 의자에 앉아서 이런 저런 얘기들을 하고 있었는데 어떤 양복 입은 아저씨가 우리들을 지켜보는 것이었습니다.

그에 상관없이 우리는 나름대로 의사소통을 하면서 얘기를 하고 있었는데, 우리를 가만히 지켜보시던 그 아저씨가 그중에 가장 똑똑해 보이는 저에게 다가오더니 말을 걸었습니다.

“너 숫자 셀 줄 아니?”

“예.”

“한 번 열까지 세어볼래?”

나는 손가락을 꼽아가면서 아주 천천히 일부터 열까지 숫자를 세었습니다.

“더 셀 수 있는데, 더 할까요?”

“아니다. 너 숫자 정말 잘 세는구나.”

그때 통학버스가 왔고, 담당 선생님이 저한테 손짓을 하면서 말을 했습니다.

“자원봉사 선생님, 애들 데리고 오세요.”

저는 그들과 함께 버스를 타러 갔고, 그 양복 입은 아저씨는 멍한 표정으로 저희들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 사진을 보면서 그때의 일들이 떠오르니까 미소가 지어졌고, 이 사회가 갖고 있는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새삼스럽게 느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저는 정상적인 외모와 사고방식을 갖지 못한 장애인(병신, 또라이, 미친놈, 불구자라고도 하지요)이니까요.


그 사진을 보면서 한 사람 한 사람을 떠올렸습니다.

오래된 기억이라서 많은 기억들이 나지는 않았지만, 유독 내 옆에 서 있던 누나에 대한 기억이 많이 떠올랐습니다.

당시 30대 초반이었던 그 누나는 한 시간 가까이 버스를 타고 와야 하는 조금 먼 시골에 살고 있었습니다.

정확한 기억은 아니지만, 부모님이 농사를 짓고 있다는 얘기를 들은 것도 같습니다.

손가락이 약간 부자연스럽고,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던 그 누나는 항상 단정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30대 초반의 여자가 입고 다니기에는 많이 초라해 보이는 옷을 입고 다녔지만, 내 눈에는 아주 단정하고 예쁜 옷차림이었습니다.

다른 이들은, 남자든 여자든, 머리 관리가 가장 편한 짧은 머리를 하고 있었는데, 그 누나는 어깨까지 기른 머리를 하고 있었고, 가끔 머리띠를 하고 오기도 했습니다.

어떤 날은 입술에 연한 루즈를 바르고 오기도 했는데, 누나의 성격상 제대로 펴지지 않는 손으로 직접 발랐을 겁니다.

단정하게 앉아서 수업을 받곤 했던 그 누나는 말을 제대로 하지는 못했지만, 제 얘기를 잘 들어줬고 반응도 그때그때 보여주곤 했습니다.

어느 날에는 이름표를 달아야 했는데, 손이 부자연스러운 누나가 나에게 이름표를 달아달라고 했습니다.

가슴에 달아야 했기에 내가 쑥스러워서 매우 조심스럽게 달아줬더니, 누나는 살며시 웃어주었습니다.


하루에 두 시간씩 3~4개월 정도 그들과 시간을 보내고 나서 나는 복학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잊은 채 20년의 세월이 지난 것이었습니다.

복지관에서 그렇게 즐거워했던 그들이 집으로 돌아가서 어떻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지에 대해서 저는 알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2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가끔 연한 루즈를 바른 입술로 뭔가를 웅얼거리면서 말을 하려고 했고, 나를 보면 살며시 웃어주기도 했던 그 누나는 지금 50대 아주머니가 됐을 겁니다.


“누나, 잘 살고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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