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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겡끼데스까? 와따시와 겡끼데스~!

2006년은 제 삶에서 가장 행복했던 한 해였습니다.

나이 많은 여성 해고자들과 함께하면서

단 한 명이 아쉬운 곳에서 간절한 마음으로 그 한 명이 되는 순간 우주의 중심이 만들어진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욕심 부리지 않고 자유롭게 하고 싶은 것을 만들어 가면

생각 이상으로 많은 것들을 해나갈 수 있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래서 욕심이 생겼나봅니다.

좀 더 많은 것들을 해보고 싶었습니다.

그리면서 너무 많은 생각을 했나봅니다.

이런 저런 고민들이 이어졌습니다.

결국, 내 꿈과 열정을 잃지 않기 위해

익숙해져 있던 것들을 버리기로 했습니다.

2007년 울산을 떠났습니다.


어느 정도의 방황을 각오한 것이었지만

너무 과감하게 사회적 관계들을 단절해버린 결과는

감당하기 어려운 외로움과의 싸움이었습니다.

심한 우울증과 불면증에 시달리면서

술에 의지했고

죽음의 유혹을 견뎌야했습니다.


죽지 않기 위해서 시작한 것이

사람들을 만나러 다니는 것이었습니다.

힘들게 한 사람 한 사람을 만나고, 그들의 얘기를 듣고, 그것들을 일일이 정리하면서

정말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했고

내 자신을 다시 돌아보게 됐습니다.

살아가는 게 뭔지...

운동이라는 게 뭔지...

혁명이라는 게 뭔지...

생생하고 마음 깊이 공부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제 삶에서 가장 행복했던 2006년과 가장 불행했던 2007년을 롤러코스트를 타는 것처럼 보내고 맞이한 2008년은 조금 견딜만한 상태로 시작했습니다.

사람들 얘기를 듣고 정리하는 일도 탄력을 받기 시작했고,

그와 비례해서 의욕이 출렁거리면서 실수들이 크고 작게 일어났고,

그때마다 감정 기복을 조절하는 것이 매우 힘들었습니다.


그때 광화문과 기륭전자 앞에서 촛불을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 즐거움과 힘겨움에 푹 빠져서

얼마 되지 않는 돈도, 남아 있는 열정도, 마지막에는 정치적 생명까지

다 쏟아 부었습니다.

그렇게 100일의 시간을 간절하게 보냈더니

텅 비어있던 내 속에 새로운 것들이 고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새로움들을 갈무리하면서 새로운 활동을 모색하던 2008년 연말

공안기관이 슬그머니 나타나서 출두요구서와 구속영장을 내밀더군요.

잠시 흔들렸지만 저들의 탄압은 정치적 긴장력을 선물로 안겨줬습니다.

그리고 아주 용기를 내서 누군가에게 내 마음을 건넸지만 돌려받았습니다.

잠시 힘들었지만 워낙 익숙한 일이어서 다시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가장 믿었던 사람이 내 인간적 약점을 정확히 겨누고 칼을 꽂았습니다.

정말 아프더군요.


2009년은 그동안의 방황을 짧게 반복하면서 시작했습니다.

술을 먹으면서 죽을 수 있겠다 싶을 정도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나중에는 술도 더 이상 들어가지 않았고

죽을 용기도 나지 않은 상태에서

살아 있는 시체가 돼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내가 상처를 줬던 사람들이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다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2007년과 2008년의 경험들이 너무 강렬해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강한 강박관념 때문에,

나는 너무 강해져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주에 내려왔습니다.


처음에는 복잡한 생각 하지 않고

그냥 편하게 시간을 보냈습니다.

천국이었습니다.


내 자신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습니다.

왜 그리도 부끄러운 기억들이 많은지...

그래서 소설이라는 형식으로 글쓰기를 했습니다.

사람들을 만나서 얘기를 듣는 대신

많은 책들을 읽으면서 그들의 다양한 얘기도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성찰의 도구로서 예술과 종교의 힘을 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봄과 여름을 보내고 가을에 접어들더니

마음이 다시 꿈틀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책도 읽히지 않고

밤에 잠도 오지 않고

마음은 더 심란해지고...

술에 의존하지 않기 위해서

내 자신과 많은 얘기를 했습니다.


“힘들수록 너처럼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생각해봐. 너는 그게 뭔지 알잖아!”

나처럼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생각한다는 것이 내 힘겨움을 덜어주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내 힘겨움에 짓눌려서 자괴감으로 빠지는 퇴로는 막아주었습니다.

“같이 아파한다는 것이 어떤 건지 알지? 그냥 그렇게 마음을 다해서 얘기를 해봐.”

울고 싶어도 눈물이 나오지 않는 시간들을 생각하면서 정말 많이 울었습니다.

나를 위해서, 그리고 나처럼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두 달을 그렇게 보내면서 나와의 대화를 글로 적고 동지들에게 보냈습니다.

그때마다 간절하게

힘들어하는 이들의 아픔을 생각했고,

그들에게 무수한 아픔을 주는 냉혹한 현실을 생각했고,

그를 견디게 하는 꿈과 혁명을 생각했습니다.


오늘 오전에 조카들과 놀다가

낮에 밭에 가서 간단한 일을 하고

집으로 내려오는데

내가 나에게 말을 걸어왔습니다.

“지금 누가 너한테 얘기를 걸고 있어. 들리니?”

잠시 귀를 쫑긋했더니 작은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성민 동지, 지금 많이 힘들지요? 그런 줄 알면서도 도움이 되지 못해서 미안해요. 하지만 내가 이렇게 마음을 다해서 성민 동지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줬으면 해요. 아자! 아자! 화이팅!”

내가 그들에게 했던 얘기를 그들이 다시 나한테 하고 있었습니다.


10월의 마지막 날

라디오에서는 ‘잊혀진 계절’이 쉼 없이 흘러나오겠지만

저는 세상에서 가장 간절한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하늘에서 들려오는 소리도 아니고

마음에서 울려 퍼지는 소리도 아닌

나처럼

가난하고

외롭고

지쳐있는

이 땅에서 가장 비루한 사람들의 소리였습니다.


“인간은 사회적 관계의 총체성이다.”

맑스가 한 얘기입니다.

별 볼이 없는 성민이는

그동안 알아왔고, 지금도 알고 있고, 앞으로 더 알아갈

비루하지만 비굴하지 않은 모든 사람들입니다.


“진심이 불심이고, 중생이 부처이다.”

불교에서 하는 얘기입니다.

내 마음 속에 부처님의 마음이 들어있고

부처님의 대자대비한 마음은 모든 중생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늘 우리와 함께 계시다.”

기독교에서 하는 얘기입니다.

하나님은 하늘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시는 것도 아니고

믿음이 깊은 성자에게만 존재하는 것도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이곳에 나와 나의 동지들과 함께 있습니다.


전태일 열사의 얘기를 다시 가슴에 새깁니다.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 내 이상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 생을 두고 맹세한 내가, 그 많은 시간과 공상 속에서, 내가 돌보지 않으면 아니 될 나약한 생명체들.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조금만 참고 견디어라. 너희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 너희들은 내 마음의 고향이로다.”



2009년 10월 31일

제주에서 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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